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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란의 오빠, 정아의 오빠, 에리카의 오빠

BBK 사건, 금융사기인가, 치정인가


BBK 주가조작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평년작 수준인 모양이다. 평년작 수준이라 함은 피해자의 신원은 확인했지만 가해자, 즉 범인의 정체는 밝히지 못했다는 결론을 뜻한다.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검찰이 여론조사 지지율 1위를 질주하는 후보자에게 불리한 수사결과를 발표하기를 기대하기는 애당초 어려운 노릇이었다. 검찰은 항상 이기는 편 우리 편이다. 진보개혁진영은 검찰조직의 보신주의와 기회주의를 비판하기에 앞서서 스스로가 이기는 편이 되지 못한 사실부터 반성해야 옳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한민국 검찰의 생리는 KBS 대하사극 ‘대조영’에 묘사되는 거란부족의 습성과 유사하다. 거란족 역시 한국검찰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승자 쪽에 줄을 선다. 당나라가 강성하자 여기에 빌붙더니만, 당나라의 세력이 쇠약해지는 징후가 포착되자마자 근거지인 영주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봉기가 실패한 거란은 북방의 신흥 맹주 대조영에게 투항한다.

지난 일요일 밤, 양쪽 채널서 곡소리가 들렸다. MBC를 시청하던 야구팬들은 일본과의 올림픽 지역예선전에서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이 분패하는 광경에 가슴을 쥐어뜯었다. KBS 1TV 시청자들은 대조영의 호위무사 금란이 전사하는 모습을 보고서 눈시울을 붉혔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연모해온 걸사비우(최철호 분)를 살리고자 그의 등에 업히고서는, 당나라군이 쏘아대는 화살을 인간방패가 되어 막았던 것이다. 그녀가 죽은 줄도 모르고 전쟁이 끝나면 동모산에서 혼례를 치르자고 프로포즈하던 걸사비우가 금란이 사망한 걸 뒤늦게 깨닫고서, 싸늘하게 식은 주검을 안은 채 오열하는 장면은 시청자의 심금을 울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대조영’의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드라마가 방송되기 시작된 이래 최대 숫자의 글이 올라왔다고 한다. 금란의 죽음을 애도하는 네티즌들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표시였다. 심지어 금란을 다시 살려내라는 주장마저 넘쳐흘렀다나. ‘대조영’을 누비는 좀비는 설인귀와 대중상만으로 이미 차고도 넘친다. 역사기록에 충실하려면 금란이 아닌 걸사비우가 죽어야 한다.

금란을 열연한 심은진을 칭찬하지 않을 도리가 없겠다. 출연 초기에는 대사조차 없던 금란의 비중이 대폭 늘어났을 정도로 심은진의 연기력에는 장족의 발전이 있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만큼은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심은진이 미모의 소유자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처럼 커다란 찬사와 뜨거운 반향이 뒤따랐을까 하는 의문이다. 예컨대 베이비복스 출신의 심은진이 아니라 개그우먼 신봉선이 금란 역할을 맡았다고 가정해보자. 홍패와 퉁소처럼 코믹 캐릭터가 되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설령 신봉선이 금란으로 기용됐을지라도 그 애절한 순애보는 시청자들의 감동과 연민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으리라.

걸사비우와 금란의 러브스토리가 인터넷에서 누리꾼들의 관심사가 되었을 시각, 다른 한편에서는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의 재판이 열렸다. 이제껏 서로를 예술적 동지라고 우겨왔던 그들의 관계가 실체를 드러냈다. 변전실장과 애인 사이가 맞느냐는 검찰신문에 신전교수가 드디어 “예!”라고 대답했다는 소식이다. 오빠였다고.

오빠! 그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듣고픈 말인가? 예전에 친척이 아닌 경우를 빼고서 오빠라고 호칭할 때에는 열이면 열 상대방이 애인임을 인정하는 거였다. 오빠를 제외한 남자들은 선배 내지 형이라고 일컬어졌다. 최근에는 꼭 연인 사이가 아니어도 오빠라 부르는 추세다. 그러나 같은 오빠일망정 진짜 오빠와 가짜 오빠는 말투와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1천 수 백 년 전의 한반도 북부와 요동지방에서 사용됐던 고구려어의 정확한 형태를 알 길은 없다. 하지만 당시에도 오빠와 비슷한 기능과 뉘앙스를 가진 단어가 실재했다면 걸사비우에게 업힌 금란은 그를 필시 오빠라고 부르며 숨을 거뒀을 게다. “이년이 오빠에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옵니다…."라면서. 어린 시절부터 미모사에 의해 거칠고 냉혹한 살인기계로 키워진 금란일지언정 걸사비우를 향해서만은 순하고 가녀린 평범한 여인이고 싶었을 테니까. 걸사비우는 천문령의 사지를 벗어난 다음부터는 사석에서 금란이 자신을 오빠라고 부를 것이라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었을 터이고.

변양균이 오빠였다는 신정아의 진술은 국민정서의 심판대에서 그 어떤 증거보다도 변양균한테 유리하게 작용할 전망이다. 실제 법정에서의 판결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해도 국민들의 동정표를 구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다. 변양균 전실장은 신전교수와 연애하기 전에는 집과 일밖에는 모르던 그야말로 백면서생의 모범가장이었다. 사악한 권력욕과 물질적 욕망 때문이 아니라 인생의 황혼녘에 불쑥 찾아든 사랑의 열병에 미친 나머지 직권남용을 저질렀다는 정상참작이 가능하다. 사랑은 모든 합리적 판단을 마비시키는 마법을 지녔다.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찢은 것도 결국은 호동왕자와의 로맨스 탓이지 않은가?

신정아는 문제의 진술로 말미암아 더 궁지에 몰릴 확률이 높다. 멀쩡한 유부남 유혹해 패가망신시켰다고. 허나 신정아가 변양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현실적으로 이게 전부다. 금란처럼 화살 대신 맞아주는 거. 사랑하는 오빠를 보호하고자 온몸이 고슴도치가 되는 사태를 각오한 셈이다. 창피한 얘기지만 국민원로는 여자를 사귀어본 경험이 한 번도 없다. 오빠라고 불려본 적도 당연히 없고. 좀 자학적으로 핑계를 대자면 얼굴이 못생긴 이유에서다. 따라서 사랑의 위력과 오빠의 각별한 의미에 남들보다 더더욱 신기해하고 놀랄 수밖에.

대부분의 기자들과 정치평론가들은 BBK 사건의 본질을 금융사기 사건으로 파악한다. 한데 에리카 김이 보여준 그간의 언행은 이와는 궤도를 달리한다. 치정사건으로 몰아가려는 조짐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여자의 자존심'이라는 위험천만한 발언이 왜 나았는지를 설명한 방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걸사비우는 장군이기 이전에 오빠였다. 변양균 또한 청와대 정책실장이기에 앞서 오빠였다. 에리카 김이 여자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응징하려는 대상은 그녀에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현행 선거법의 제약으로 인해 더는 논의를 진행할 수 없는 점이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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