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써오던 신년사를 2008년 올해는 쓰지 않기로 작정했다. 금년은 청계 이명박 선생의 집권 첫해를 맞는 해이다. 이게 무슨 신나는 일이라고 신년사까지 보태가며 거창하게 기념하겠는가. 허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지! 하여, 공식 신년사 대신 이를 갈음하는 글 한 편을 작성하기로 결심했다. 노무현에서 이명박으로의 평화적 정부 이양은 정권이 교체된 것 같기도 하고, 재창출된 같기도 한 뭔가 개운치 않은 뒷맛을 국민에게 안긴다. 사이비 정권교체의 시대조류에 발맞춰 신년사 같기도 하고, 신년사 아닌 것 같기도 한 메시지를 독자 여러분들께 전하는 바이다.
2007년은 우리나라의 진보개혁진영에게 참담한 굴욕을 선사했다. 17대 대선에서 국민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한 탓이다. 개혁을 주장하는 대통합민주신당도, 진보를 부르짖는 민주노동당도 유권자의 엄중한 심판을 받았다. 양당은 선거참패의 후유증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한 채 예정된 진로를 항해하는 중이다. 이들이 도착할 항구는 역사의 쓰레기통이라 일컬어지는 곳이다. 입항하는 선박은 있을지언정 출항하는 배는 눈에 띄지 않는. 일단 들어간 다음에는 다시는 빠져나올 수가 없는 까닭에서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한때 국민의 존경과 지지를 누렸던 진보개혁진영을 역사의 시궁창으로 인정사정없이 몰아가고 있는 걸까? 도대체 누가 조타수와 기관장 역할을 맡고 있기에 전두환과 노태우한테나 어울릴 법한 저주받은 장소로 진보개혁진영의 대부분이 마술사의 마법에 걸린 좀비들처럼 터벅터벅 이동하고 있다는 말인가?
해답의 단서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쥐고 있다. 군부독재자들이 졸속 창당한 친위정당인 민주정의당의 심장에 대한민국 진보개혁진영이 몰락하는 원인이 자리해 있다는 뜻이다. 단 한 방울의 민주와 정의도 포함되지 않았던 민주정의당 안에 과거 민정당과 투쟁했던 인물들이 주도적으로 결성한 정당들의 패망이유가 내장되어 있다니 참으로 희한한 노릇이다.
그렇다. 문제는 민정당이다. 정확히는 민정당 마인드다. 민주정의당이 한국사회에 남겨놓은 가장 큰 상처는 광주학살과 천문학적 액수의 부정부패가 아니다. 바로 민정당 마인드다. 되도록 안전하고 편안한 길만 가려는, 조그마한 위험부담(Risk)조차 감수하기 싫어하는, 도전과 개척이라면 무조건 회피하고 보는, 기존의 작은 성과를 지키려고 애면글면 몸부림치는 이른바 안정희구심리야말로 민정당 마인드의 속살이요 고갱이다.
민정당의 직계 후손들은 우리나라에 분명 존재한다. 조중동의 모습을 띠고서, 강남부자의 얼굴을 하고서, 한나라당 당원증을 품고서, 삼성의 사원증을 달고서, 서울대 졸업장을 지니고서 그들은 한국사회의 주류로 행세한다. 하지만 그들은 비록 민정당의 자손이기는 하되 지난 10년 동안 민정당 마인드와 부단하고 치열하게 싸워왔다. 민정당의 생물학적 핏줄들은 모험과 위험요소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얄팍한 성과물에 안주해 전진을 멈추지 않는다. 안정되고 검증된 길로만 다니려 하지도 않는다. 민정당 마인드를 떨쳐낸 민주정의당의 후예들은 잃어버린 정치권력을 되찾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민주정의당의 혈통이 아니면서도 민정당 마인드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한국사회에서는 하필이면 개혁세력과 진보진영의 주축을 이룬다. 범여권을 지배해온 현상유지 욕구와, 민주노동당에 팽만한 ‘지금 이대로’의 여망은 싸우면서 닮아간다는 교훈적 명제의 효과와 올바름을 뼈저리게 입증하는 사례들이다. 민주정의당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민정당의 심성(Mindset)과 습속(Habit)을 자신들의 몸에 고스란히 체득하고 만 결과다. 개혁세력과 진보진영서 새로운 숙주를 발견한 민정당의 습속과 심성은 노무현 정권 5년간 제2의 번영기를 구가했다.
범여권에는 민정당 치하에서 유명세를 탔던 왕년의 민주화 투사들이 즐비하다. 전두환의 거악에 분연히 투쟁했던 왕년의 이름난 민주화 투사들은 노무현의 유치한 실수들과 맞서는 일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소심하고 무기력했다. 노무현 및 친노세력과 단호히 절연해야 할 순간에 직면한 왕년의 민주화 투사들은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투로 현실과 타협했다. 왜 그랬을까? 빌어먹을 놈의 민정당 마인드가 원흉이었다. 그래도 노무현이 대통령인데, 어떻게 잡은 정권인데, 영남에서 표가 나오지 않으면 큰일인데 등의 영혼의 협심증으로 말미암아 왕년의 민주화 투사들은 노정권의 실정과 과오를 묵인 내지 방관하고 말았다. 왕년의 민주화 투사들은 노무현 정권이 제공하는 지위와 혜택을 즐기는 대가로 민심의 기대와 신뢰를 상실했다.
민주노동당은 범여권의 소심함과 무기력을 질타하며 만들어진 정당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역시 범여권 뺨치게 소심하고 무기력했다. 친북 주사파들이 민주노동당을 쉽사리 접수한 근본연유는 진보진영에 침투한 민정당 마인드에 닿아있다. 종북주의자들의 숫자와 결집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듯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정통 진보좌파들의 안전제일주의는 민주노동당을 조선노동당 2중대로 전락시킨 진정한 주범이다.
사민주의자들과 친북주의자들이 갈라서는 사태에 대해 손석춘이 표출한 불안심리는 전형적인 민정당 마인드의 발로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안전하고 검증된 노선만 추구하기를 고집하는 점만 고려한다면 손석춘은 김용갑과 정형근을 능가하는 민정당 마인드의 소유자인 셈이다. 좀 심하게 이야기하면 정형근과 김용갑도 손석춘만큼 강박적으로 안전제일주의를 신봉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진실로 경계하고 혁파해야 할 대상은 민정당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태도다.
민정당 마인드에 푹 젖은 진보개혁진영과 민정당 마인드를 탈피해 모험정신과 진취적 기상으로 무장한 수구기득권세력이 맞붙으면 전자가 100전 100패다. 2004년 4ㆍ15 총선 이후 전개된 선거구도는 민주정의당 마인드의 진보개혁진영 대 민정당 마인드를 털어버린 수구기득권세력의 경쟁으로 요약된다. 이와 같은 대결형태는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궁극의 절정에 도달했다. 통합신당과 민노당이 확보한 표수에다가 창조한국당과 민주당의 표까지 합산해도 한나라당의 득표수에는 훨씬 미달한다. 그나마 이회창이 출마하지 않았다면 진보개혁진영은 더더욱 망신살이 뻗쳤으리라.
2008년 진보개혁진영의 본질적 과제는 차기 총선에서의 권토중래도, 참신한 정책과 비전의 개발도 아닐 게다. 딱 하나만 해내면 된다. 민정당 마인드와의 깨끗한 결별이다. 객관적 전망은 대단히 어둡다. 잔존 노빠들이 이해찬을 중심으로 발족하려는 정치조직의 준비모임에 김근태는 축사를 보냈다. 이 판국에 친노세력마저 떨어져나가면 어떡하느냐는 조바심과 두려움의 반영이라 하겠다. 민주노동당의 간판스타로 알려진 심상정과 노회찬은 어찌됐든 주사파를 안고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주사파의 머릿수만이 진보진영에서 확실하게 공인된 안전판이기 때문이다. 김근태도, 심상정도, 노회찬도 저변에 깔린 논리는 공통적이다. ‘안전빵’
안전빵 지상주의의 결실은 이미 섬뜩하게 나타났다. 530만 표차의 유례없는 대패로. 청계 이명박 선생이 몰고 올 보수반동의 물결을 막고 싶은가? 그럼 당신의 마음 깊은 데에 도사린 민정당 마인드부터 과감히 걷어내라. 진보개혁진영의 활로는 이경숙의 국보위 참여 전력을 비판하는 따위에 있지 않다. 국보위에 부역했던 인간들의 민정당 마인드를 당신들이 물려받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노무현과 친노세력도, 자주파와 김일성주의자들도 결국은 나태하고 안이한 민정당 마인드가 불러온 괴물들이다. 진보개혁진영이 민정계 마인드를 극복하는 즉시 노사모 잔당이건, 주체사상 추종자들이건 전부 깔끔하게 소탕되기 마련이다. / 공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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