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 특유의 저렴한 입놀림을 재개했다. 자신의 행동이 초래할 결과와 파장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서 저 하고 싶은 짓만 하겠다는 무책임한 심보가 또다시 발동한 것이다. 노무현의 장광설은 이명박에게 어부지리를 안길 게 뻔하다. 총선공천을 둘러싸고 박근혜와 샅바싸움을 벌이고 있는 MB에게 박근혜의 자제와 양보를 촉구할 명분을 제공하는 까닭에서다. 좌파세력이 여전히 건재한 마당에 대통령 당선인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져서야 되겠냐고 윽박지르면 박근혜 입장해서는 딱히 항변할 여지가 없다. 그냥 조용히 찌그러져야 한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불화에 가냘픈 재기의 희망을 걸고 있던 대통합민주신당은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점령군 노릇을 할 것은 이미 예견된 바다. 인수위원회가 아닌 ‘접수위원회’라 불러야 마땅하다. 이런 더럽고 치사한 꼬락서니를 보지 않을 방법은 딱 하나뿐이었다. 한나라당이 정권을 탈환하지 못하도록 막는 거였다.
한나라당 정권탈환의 일등공신인 노무현이 인수위원회의 오만과 월권을 비난하는 광경은 방구 뀐 당사자가 되레 성내는 일과 진배없다. 생각해보시라. 경영을 잘못해 기업을 망하게 한 무능한 사장이 차압 들어온 은행직원들한테 집기 살살 다루라고 독촉한다고 하여 부도난 회사가 살아나는가? 인수위원회를 향한 노무현의 분노는 악어의 눈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야당이 집권해도 노무현 정권은 성공한 정권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경상도 노빠들의 호언장담은 파렴치한 거짓말로 드러났다.
어차피 정권은 넘어갔다. 이제는 잃어버린 정권을 어떻게 되찾아올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시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싫든 좋든 한나라당을 벤치마킹할 수밖에 없다.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승리해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을 당시, 대다수 분석가들은 한나라당이나 그 후속정당이 최소한 20년 동안은 야당을 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2002년 대선은 이와 같은 예측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었다. 이회창 대세론에도 불구하고 진보개혁진영이 나름대로 느긋했던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범여권이 ‘한 방’의 추억에 매달린 근본원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나라당이 적어도 20년은 정권을 잡지 못하리란 낙관론이 빚은 오판이었다.
한나라당 20년 야당설의 배경은 바로 1997년의 IMF 사태였다. 국가부도의 위기가 없었더라면 이회창이 대권 3수생의 길을 걷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에도 인정할 건 인정하자. 15대 대선서 한나라당을 패배로 이끈 주범은 김영삼이었음을.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범여권이 대패한 궁극적 책임이 정동영이 아니라 노무현에게 있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한나라당=IMF 정당'의 구도와 분위기가 온존한 이상은 20년 야당생활은 당연히 감수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러자 한나라당은 생살을 도려내는 고통스런 대수술을 감행한다. 수술이 성공할 가능성은 50프로였다. 단, 수술을 하지 않으면 100퍼센트 죽는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엊그제 어느 후배가 사무실로 찾아왔을 때 국민원로는 비슷한 이야기를 해줬다.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람들보다는 암 걸려 죽는 인간들 숫자가 훨씬 많다고. 적은 항상 내부에 있다고.
한나라당이 들어낸 종양덩어리는 김영삼 및 그 수하들이었다. YS와 상도동계를 정치적으로 완벽히 ‘적출’한 것이다. 정치생명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상도동 가신들에게는 김영삼을 잔인하게 밝고 지나갈 것을 요구했다. 지금 한나라당에 남아있는 상도동 출신 정치인들은 닭의 목에 마이크를 달아도 새벽은 오지 않는다고 외친 인물들이라고 봐도 괜찮다. 김영삼을 부인하기를 거부한 인사는 오로지 한 명이었다. 박종웅. 현재 박종웅이 한나라당서 어떠한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직시하기 바란다. 이명박의 당선을 위해 별의별 생쇼를 다했어도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완전 듣보잡 취급이다.
한나라당 구성원들이 내심 제일로 증오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김대중도, 노무현도, 김정일도 아니다. 김영삼을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한 철천지원수로 미워한다. 한나라당 스스로가 YS를 선제적으로 인정사정없이 뭉개버리는 바람에, ‘한나라당=IMF당’으로 등식화해 향후 20년간 국가권력을 독식하려던 진보개혁진영의 원대한 구상은 그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한나라당에게 김영삼의 이미지를 덮어씌우는 득표전술이 쓸모가 없어진 탓이다. 한나라당에 IMF 관리체제의 원죄를 추궁하기가 곤란해진 상황에서 범여권의 수중에 남은 무기는 평화니, 양심이니, 민주니 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들이 전부였다.
한나라당이라고 YS 청산의 후폭풍이 두렵지 않았겠는가? 부산경남 지역의 맹주인데. 허나 PK 민심의 반발이 무서워 한나라당이 ‘타도 김영삼’ 프로젝트를 주저했다면 그들은 분명 20년은 야당으로 지내야 했을 터. 보수세력의 장기집권플랜은 ‘진보=무능’으로 포장하는 작전을 핵심으로 삼는다. 전략의 주춧돌은 노무현과 친노세력이다. 저들은 진보개혁진영과 친노세력이 등가관계라고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호소함으로써 단순한 정권재창출을 넘어 정권재재재재재재재창출의 기반을 닦을 게다.
MBC ‘100분 토론’에 유시민이 패널로 출연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는 한나라당의 30년 집권계획이 순조로운 출발을 했다는 신호다. 선거참패에 아랑곳없이 유시민이 은근슬쩍 등장한 사건은 1997년 대선 직후 열린 TV토론회에 한나라당 대표선수로 김현철이 나타난 격이다. 나는 한나라당 정권탈환의 숨은 주인공은 이회창이라 믿는다. 왜냐? 한나라당 총재로 있으면서 당에서 김영삼의 색깔을 깨끗하게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유명한 공천학살의 진짜 희생양은 김영삼 정권 밑에서 실세로 군림한 범민주계였다. 김윤환이 팽을 당한 건 그가 범민주계의 일원이어서였다.
오마이뉴스 헤드라인에 노무현이 떴다. 만신창이가 되어 뒷방으로 쫓겨난 YS와는 달리 이쪽편의 원투 펀치로 계속 전면에서 설쳐댈 모양이다. 더는 오마이뉴스를 비판하지 않으련다. 다시는 여당지가 될 가능성이 없기에. 오마이뉴스와 함께 통합신당도 영원한 야당이 되리라. 제1야당이 될지, 제2야당이 될지, 이도저도 아닌 군소야당이 될지는 모르겠다. 합리적으로 계산하면 세 번째가 어울리는 자리다. 수준과 실력에 정확히 들어맞으므로. YS를 무지막지하게 패대기친 한나라당도 10년 걸려 정권을 찾아왔다. 노무현 그늘에 숨기 바쁜 한국의 진보개혁진영은 한 100년 정도 후에 정권을 탈환하겠지. 그것도 아주 운이 좋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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