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길의 정계은퇴, 언론개혁진영은 자리 지키기
대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김한길 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정계은퇴 및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범 민주진영에서 처음으로 나온 자기 반성이었다. 특히 0.8%의 득표를 얻는 등 호남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민주당의 박상천 대표 등 지도부가 끝까지 버티는 상황에서 나온 선언이라 더 의미가 있다. 만약 김한길 대표에 이어, 천정배, 신기남 등 열린우리당 창당 주역들의 자기 반성과 이선후퇴 선언이 뒤를 잇는다면, 신당은 새 지도체제 확립과 함께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박상천의 민주당은 총선 때 궤멸에 가까운 파국을 맞게 될 것이다.
이렇게 정치권은 선거에 의해 유권자의 표심을 얻어야 하므로, 자연스럽게 책임있는 세력의 용퇴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정치권 만큼이나 책임을 져야하는 언론과 지식인그룹에서는, 대선 이후 단 한 번의 이선후퇴라던지, 사과나 반성의 글이나 말이 나온 바 없다. 유일하게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의 공개글이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앞으로 무엇을 시정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계에서는 대선 패배 이후 프레스센터 인사가 있었다. 프레스센터는 언론을 지원하는 기관으로, 노무현 정권 당시 언론정책의 최전방에서 역할을 했었다. 프레스센터 신임 이사장에 한국일보에서 노무현을 위해 온갖 어용칼럼을 써댔던 박래부씨가 선임되었다. 또한 오마이뉴스 편집장 출신의 정운현씨도 연구이사로 선임되었다. 더구나 노무현 정권의 잘못된 언론정책을 기쁨조 수준으로 예찬해온 미디어오늘의 현이섭 사장도 비상임 이사로 유임되었다.
이들 셋 모두 노무현 정권의 실패에 직간접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정권 말기의 노정권이 주는 대로 덮썩 받어버린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이른바 언론개혁진영의 현재의 정신상태와 정서가 그대로 드러나는 사건이다. 내부에서 "정말 무엇을 잘못했는지 한번 따져보자"이런 분위기가 있었다면, 과연 이들이 다 끝난 정권의 감투를 받아먹을 생각을 할 수나 있었을까? 그게 아니니까 이런 일이 가능한 게 아닐까?
정연주 지키기 위해 수신료 인상안마저 버리자는 신학림씨
이런 정서를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 있었다. 전 언론노조 위원장 신학림씨의 <신년사를 통해 본 정연주 사장의 오판>이라는 미디어스 칼럼이다. 참고로 신학림씨는 현 방송위원회 최민희 부위원장과 함께, 노무현 정권의 언론정책에 가장 영향을 크게 미친 인물이다. 즉, 신학림씨와 최민희 위원장 둘은, 정권의 정책에 대해 심판을 받는다면, 함께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 신학림씨의 생각이나 정서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는 이번 칼럼에서, 그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단 한 줄의 성찰과 반성도 없이, 오직 정연주라는 코드인사를 지켜내자는 선동과 정략만을 일삼은 칼럼이었다.
신학림씨는 정연주 사장의 신년사에서 수신료 인상과 공영방송 체제의 확립 두 가지 목표를 제시한 것을 지적했다. 현재의 상황이 둘 중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 사장의 언급처럼, 27년 동안 2,500원에 묶여 있는 수신료 인상과 공영방송 체제를 지켜내는 일은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방송의 궁극적인 주인인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공영방송’을 만들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KBS와 정 사장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공영방송을 장악하려는 한나라당의 기도 앞에서 수신료 인상이라는 당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수신료 인상과 공영방송(체제) 사수라는 두 가지 과제 중 어느 것이 더 절체절명의 과제인지는 정 사장이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두 가지 목표를 다 얻으려다 둘 다 잃게 될 것이다.
‘수신료 현실화’ 쟁취 구호를 ‘공영방송 사수’ 구호 앞에 놓는 안이한 현실 인식으로는 한나라당의 방송장악 기도를 결코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한나라당이 정연주 사장 퇴진을 전제로 수신료 인상안을 통과시킬 것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니까 정연수 사장은 KBS는 물론 언론개혁진영의 20년 숙원이라던 수신료 인상안을 자신의 자리 보존을 위해 철회하고, 끝까지 사장에서 물러나지 않도록 만전의 준비를 다하라는 것이 신학림씨의 주장이었다.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운 칼럼이다. 언론노조를 이끌었던 개혁의 기수라는 사람이 공개적으로 이런 권모술수에 가까운 지령이나 내리는 칼럼을 써도 되는 것일까? 특히 수신료 인상안을 버려서라도 정연주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공영방송 체제 확립이라는 주장, 과연 이들과 정상적인 대화나 가능할지조차 의심케 하는 수준이다. 자기들이 KBS를 통제하지 못하면 수신료 인상안도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자기들과 친한 사람들이 한자리 하는 게 개혁이라고 믿는 그들
박래부, 정운현, 현이섭 등의 사례로 보면 신학림 칼럼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노무현 정권 당시 언론정책을 주도하며, 온갖 위원회 감투를 함께 쓴 언론개혁 진영의 현재의 정서가 이들의 행태와 글에서 그대로 담겨있다. 반성은커녕 어떻게 하면, 그동안 만들어낸 자리를 지켜내며, 권력을 유지할지, 매일 같이 함께 단합대회나 하고 있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이들은 정권 내내 이런 발상들을 해왔다. 어떻게 하면 제도와 시스템적으로 방송 및 언론유관단체를 독립시키느냐는 이들의 목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자기들과 가까운 사람, 자기들과 친한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느냐에만 골몰했으며, 이를 개혁인사로 위장했다.
그러다보니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자신들과 친한 사람들이 더 이상 한 자리를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만약 지난 정권 5년 동안 공정한 인사 시스템을 만들었다면 걱정할 리도 없을 것이다. KBS의 문제가 무엇인가? KBS 사장을 사실 상 대통령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 것이 문제 아닌가? 그리고 사장이 바뀌면, 정권에 아첨하는 내용으로 편성한다는 것 아닌가.
그럼 왜 그간 힘이 있을 때, 이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하지 않았던가? 정연주 사장이 있을 때는 KBS가 독립된 공영방송이었는데, 정연주 사장이 교체되면 다시 어용방송이 된다는 발상은 대체 어떤 방송이론으로 설명할 건가. 그 누가 사장으로 와도, 독립적으로 돌아가는 체제를 만들어놓지 못하고, 오직 자기 사람들만 채워넣었으니, 정권이 바뀌어 문제가 되는 것 아닌가.
비단 한나라당이 정연주 퇴진과 수신료 인상안을 맞바꾸자는 제안을 하지 않아도, 수신료 인상안의 전제는 정연주 퇴진일 될 수밖에 없다. KBS를 보는 시청자 중 절반 이상은 이번 대선에서 한나라당을 찍은 사람들일 텐데, 정권 편파보도의 주범인 정연주 체제가 그대로 존속한 상태에서 수신료 인상안에 동의해주겠는가. KBS 수신료 인상안은 KBS의 정치적 독립과 경영합리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 정치적 독립의 첫 발이 정연주 퇴진이고, 그와 동시에 그 어떤 정권이 들어와도 KBS를 흔들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언론개혁진영은 바로 가장 중요한 후자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필자는 일찌감치 방송위원회 위원 임명시 대통령 임명권을 폐지해서라도, 정치적 균형을 맞추자는 제안을 한 바 있다. 현재 상황이라면, 정연주 사장이 그간 KBS의 노무현 편파보도에 대해 솔직히 사과하고, KBS의 독립을 위한 제도개선안을 제시한 뒤, 사퇴하며 수신료 인상안을 관철시키는 게 가장 합리적인 안이다.
솔직히 정상적인 사고만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작정 정연주만 지켜내자는 신학림씨의 칼럼을 보고, "언론개혁진영이 어떻게 이토록 타락했을까" 이런 공감을 할 수 있으리라 믿어, 더 이상의 부연설명은 하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정치권에서 김한길 같은 사람도 통렬한 반성을 하고 이선후퇴를 하는데, 언론개혁진영에서 노무현 정권 실패의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신학림씨와 최민희씨, 그리고 정연주씨 등은 대체 뭘 하고 있냐는 것이다.
언론계의 책임있는 사람들도 이선후퇴하라
이선후퇴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성하는 태도조차 보여줄 수 없다면, 결과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언론개혁진영 전체가 이들과 함께 완전히 몰락하던지, 아니면 최소한 상식이 통하는 새로운 세대가 나서서 진영 전체에 대한 전면수술을 가해야 한다. 그러나 필자가 알기에 언론개혁진영은 벌써 십여년 이상 형과 아우 하며, 인맥 패거리로 끈끈히 엮여 있어, 인적 쇄신을 통한 개혁이라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그럼 침몰밖에 없다는 말인가.
솔직히, 그들이 침몰하더라도, 한국 언론의 발전에는 하등 영향은 없다는 점이 더욱 더 불행한 일이다. 강준만 교수조차도 "노무현 정권과 선을 긋지 못한 자들은 뒤로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그 동안 많이 해먹었고, 스스로 봐도 책임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김한길을 본받아 물러나 주기를 바란다. / 변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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