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에 ‘열아홉 순정’ 재방송을 시청하고 있는데 다섯 살짜리 조카딸이 와서 하는 말, “삼촌, 그거 할머니들이 보는 거야!”. 할머니들이 좋아하는 연속극이면 어떻고 유치원생이 즐기는 드라마면 또 어떤가? 재미만 있으면 장땡이지. 한데 ‘열아홉 순정’에는 재미를 능가하는 묘미가 있다. 너무나 뻔한 스토리의 통속극이건만 시청자를 빨아들이는 감동코드가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정당이건 기업이건 드라마이건 크게 성공하려면 확실한 원톱이 존재해야 한다. KBS 일일연속극 ‘열아홉 순정’은 귀엽고 야무진 연변처녀 양국화 역할을 연기하는 구혜선이라는 걸출한 스트라이커를 보유하고 있다. MBC 대하드라마 ‘신돈’의 사실상 주역이었던 노국공주 서지혜에 뒤지지 않는 흡인력과 파괴력을 자랑한다.
싱가포르로 출국예정인 사랑하는 남자에게 공중전화를 건 다음 한 마디 말도 못한 채 눈물짓는 모습은 시청자로 하여금 저절로 눈시울을 문지르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다. 휴대전화 놔두고 왜 공중전화냐고? 혹여 남자가 발신자를 확인하고 출국을 포기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나 또한 여느 할머니 시청자들처럼 눈물이 막 솟구치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드라마 보다가 이토록 처연한 감정에 휩싸이기는 예전에 ‘서울의 달’에서 한석규가 깡패들에게 맞아죽는 대목 이후로 처음인 듯싶다.
당연히 남자는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는다. 대신 국화가 살고 있는 옥탑방을 찾아온다. 두 사람이 재회하는 광경에서 나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지면서 하마터면 손뼉을 칠 뻔했다. 남자는 국화에게 저녁을 든든히 얻어먹고 먹고 집으로 향한다. 자기를 양국화와 떼어놓고자 싱가포르 파견근무를 명령한 아버지한테 무릎을 꿇고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서 갈 수 없었다며 용서와 양해를 빈다. 물론 아버지는 여자나 가족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며 아들을 윽박지른다. 가족의 범위에는 남자의 직장이 포함되어 있다. 남자는 단호히 사랑을 택하고 곧이어 닥칠 고난의 행군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드라마는 흔하디흔한 신데렐라 스토리의 범주에 속한다. 대한민국에 혈혈단신 입국한 연변동포 아가씨가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굴지의 대형 정보통신회사 오너의 아들과의 결혼에 골인한다는 다소 맥빠진 줄거리다. 허나 ‘열아홉 순정’은 여느 신데렐라 드라마들과는 작지만 커다란 차별성을 지닌다. 기존의 모든 신데렐라들은 결혼과 동시에 불행 끝 행복시작이었다. 시놉시스대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연변처녀 양국화의 본격적인 종횡무진 활약상은 혼례식을 치른 후부터다. 남편에게 딸려온 부와 명예에 안주하지 않고 시댁의 가풍을 쇄신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돈 밖에 모르고 살던 부잣집 식구들에게 인간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저 양국화, 없이 살아도 도리는 지키면서 살아왔습니다.” 구혜선이 극중에서 수시로 내뱉는 대사다. 도리! 심각한 시사프로그램에서조차 자취를 감춰버린 도리가 신데렐라 드라마의 주인공 입에서 거침없이 발설된다. 없이 사는 까닭에 도리를 지키며 살기가 어렵고, 돈 많은 부류일수록 도리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 한국사회의 세태를 통렬하게 꼬집는 명언이다.
인터넷 얼짱출신답게 구혜선이 미인은 미인이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옆얼굴이다. 오뚝하다고 얘기하기 곤란한 소박한 콧대를 자세히 관찰하면 공산품이 아니라 자연산이라는 사실이 이내 포착된다. 옆얼굴만으로는 우리나라 스타급 여자연예인들의 신원을 구별하기가 불가능한 지경이다. 어느 누리꾼이 심심풀이로 올린 여배우들 콧날각도를 봤던 적이 있다. 어찌 그리 똑같을 수가 있냐? 마치 틀에 넣고 찍어낸 것 같더라. 듣자 하니 원통에 드러눕기만 하면 표준형 구릿빛 피부로 저절로 구워주는 업소도 있다고 하더군.
양국화 구혜선의 진정한 매력은 다른 곳에 자리한다. 바로 그녀의 투명한 연분홍 볼빛이다. 양국화는 청순함의 화신이다. 화장을 하지 않는 캐릭터다.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국화의 안색은 분가루와 편집으로 연출한 인조색채가 아니다. 얼굴에 봉숭아물을 은은하게 들이는 획기적 염색기술을 구혜선의 기획사에서 개발한 건 아닌지 의심이 들만큼 청아하고 그윽한 천연의 색이다. 내가 미술을 공부했더라면 보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형상화하련만 이와 관련된 지식을 전혀 쌓지 않은 터라 더는 묘사에 동원할 단어가 없다. 고화질TV를 구입하고픈 충동이 갑작스럽게 밀려온다.
연변처녀 양국화의 발그레한 볼빛. 아마 누구도 지금껏 방송에서 그렇게 예쁜 색깔을 목격한 기억은 없을 게다. 그건 분명 한반도와 만주와 인근지역을 아우르는, 옛 삼한(고구려, 백제, 신라) 및 그 속국들에 해당하는 지방에 현재 거주하는 주민들의 피부에서만 나옴직한 색조다. 거기서 더욱 하얘지면 창백하고 희멀건 구라파인의 피부색이 되고, 좀더 어두워질 경우 탁하고 음울한 남방계의 낯빛으로 변모한다. 인종주의자라 성토될 위험성을 기꺼이 각오하고 나는 국화의 볼빛을 진짜 살색이라고 감히 부르는 바이다. 우리겨레의 뇌리와 유전자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대대로 각인된 색상.
전통적 미학과 전래의 미감은 새로이 도입된 정치적 올바름-알고 보면 이것 역시 미제 용어다-을 압도해야 마땅하다. 기실 정치적 올바름이란 유복한 강남좌파들의 문란한 성생활과 무책임한 라이프스타일을 비호하는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최근의 저출산-고령화 현상은 인류학적 견지에서 연분홍 볼빛을 가진 생명체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멸종될 날이 가까워졌음을 의미한다. 나는 그래서 한국의 소위 진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해방과 변혁의 논리가 무척이나 불길하고 꺼림칙하다.
민족공동체의 궁극적 소멸과 해체를 지향하는 진보적 프로그램은 거족적 집단자살을 부추기는 변태들의 유서일 뿐이다. 西土의 中共오랑캐가 굳이 동북공정에 매진할 필요 없이 우리는 스스로를 착실하게 인종청소하고 있는 셈이다. 서유럽에서 직수입한 이념의 명품브랜드로 중무장한 얼치기 웰빙좌파들의 문화쿠데타는 친미세력의 무역쿠데타보다 민족의 소중한 얼과 고유한 정체성을 온전히 유지하는 데 훨씬 해롭고 치명적이기 마련임을 깨달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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