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의 삭제씬과 일상(日常)
밀양의 삭제씬을 묘사한 동영상을 보았다. 경남 산청에 있는 저수지에 신애가 뛰어들어 자살로 신에게 복수하려는 장면이다. 4분 4초 짜리인데 이(李)감독과 전도연의 설명을 제외하면. 1분이 채 안되는 장면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건 삭제되지 않았다면 갈등을 더 첨예화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훨씬 좋았다. 단 물에 굴절된 이유인지 대사가 웅웅거려서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어려웠다는 아쉬움은 있었다. 재 촬영을 하든지 아니면 이런 녹음상의 문제는 더빙을 사용해서라도 해결했으면 했다. 이창동 감독의 설명대로 일상을 가능한 그대로 묘사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일상을 묘사한 한다는 것과 '일상처럼 보이게 한다는 점(연출)'은 분명히 다르다. 때로는 연출과 특수효과를 사용해야만 더 일상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창동 감독의 생각은 공연한 고집이나 미망에 불과해 보인다. 나날이 영상 기술이 발전해 가는데 잘못하면 감독의 의도를 벗어나 퇴행에 그칠 수도 있다. 착시현상이나 교통사고 같은 큰 사건을 당했을 때, 인간의 뇌가 슬로 비디오처럼 기억되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현상 등 인간 감각의 한계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때로는 '웰컴투 동막골'처럼 특수효과를 동원한 슬로 비디오 액션이 더 리얼하게 다가서는 법이다.
준과의 행복했던 순간(아들 준의 실종)
'밀양'에서 담기지 못해 아쉬운 점은 저수지에서의 삭제씬보다 더 큰 곳에 있다. 즉 신애의 모든 것이었을 아들 준(June)에 대한 부분이다. 신애란 이름이 믿음(信)과 사랑(愛)이라는 기독교적 이상(理想)에 대한 반어적(反語的) 의미를 가졌다면, 아들 준은 신애에게 그 이름 June(유월)처럼 '햇살 가득한 축복'의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축복'의 의미를 전혀 살려내지 못했다. 2시간 21분이라는 긴 시간 중, 다른 부분을 많이 줄이더라도 이 부분을 꼭 살렸어야 했다. 즉 단 3분 정도라도 할애해서 신애와 아들 준이 활짝 웃으며 행복해 하는 장면을 영화에 담았어야 했다. 예를 들어, 파란 잔디밭에서 준이 햐얀 옷을 입고 뛰놀고 그걸 바라보며 신애가 함박웃음 지으며 즐거워하는 장면이라도 한 두 컷 담았다면 이 영화는 훨씬 많은 감정과 여운과 파문을 담을 수 있었다. 햐얀 비둘기 떼나 노란 풍선 등을 소품으로 쓰고, 이 장면을 롱 숏으로 담은 후, 신애가 환한 햇살처럼 웃는 모습은 줌을 활용해서 클로즈 업 숏을 했다면 그 효과가 훨씬 돋보였을 것이다. 아들 준과 학교 운동장에서 흰 눈을 맞으면서 눈싸움을 하며 행복해 하는 모습 등도 좋다. 이 경우 대사는 없어도 좋다. 영상문법에서의 이미지의 강렬함은 바로 이런 곳에서 십분 활용될 필요가 있다. 세계 명화 중에서 '러브 스토리'나 '닥터 지바고' 같은 경우나 몇 년 전 일본의 '러브 레터' 같은 경우도 눈 덮힌 설원을 잘 활용하고 있다. 관객들에게 아름다운 영상미를 제공하는 건 작품의 주제의식을 떨어뜨리릴 수 있다는 아마추어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서, 애써 영화보러 오는 관객에 대한 최대한의 서비스라는 전향적인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 영화의 경우도, 신애가 아들 준이 하얀 눈 덮힌 강 위에서의 손을 호호 불며 빙어 낚시하는 장면 같은 에피소드로 볼거리를 선사하면서도 충분히 주제의식을 대비시켜 표현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이렇게 되었다면 외국 평론가들에게도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빛과 어둠은 서로를 대비시켜 그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킨다. 어둠으로 빛의 존재를 부각시킬 수 있다면, 빛으로도 칠흑같은 어둠이었을 신애의 절망을 표현하는 배경으로 잘 활용할 수 있다. 신애가 남편과 사별한 후 밀양에 내려와서 아들 준을 통해서 모처럼 찾게 된 행복을 전반부에 잘 그려낼 필요는 이 극적인 대비효과에 있다. 그 행복의 빛이 환하고 강렬할수록 그 후 유괴범에 의해 찢어진 신애의 가슴이 더 극적으로 대비되어서 파고드는 법이다. 아쉽게도 신애와 아들과의 행복했던 시간은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 신애의 아들에 대한 애착을 제대로 느끼려면, 관객들은 자연스러운 감성이 아니라 불편한 이성을 동원해야 한다. 즉 "남편과 사별하고 시골로 내려온 여자에게 하나 남은 아들이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일까?"라는 질문을 관객 스스로 던져가면서 영화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래서 관객들은 마치 제사 집에 초대된 손님들처럼 감정이 비좁고 불편하다. 그 증거로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신애와 종찬 그리고 유괴범을 잘 기억할 지언정, 정작 신애에게는 '찬란한 햇살'이었어야 할 아들 준(June)에 대한 기억은 없다.
신애가 받은 고통을 너무 직접적으로 표현하는데 집중하다 보니, 신애가 유괴살인범에 의해 박탈당한 행복의 크기가 얼마나 컸든가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좀 더 극적인 대비를 해주는 역발상을 착안하지 못했음은 너무나 아쉽다. 세익스피어에 버금가는 문호로 추앙받는 존 밀턴(John Milton)이 지옥을 묘사하는 장대한 대서사시의 제목을 직접적으로 지옥(Hell)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잃어버린 천국'이라는 뜻의 실낙원<(失樂園) Paradise Lost>이라고 한 이유를 되새겨 볼만하다. 전도연과 송강호 이외에 신애에게 에덴동산처럼 은총과 축복을 의미하는 준의 역할이 살아나서 그 역을 맡은 아역배우가 전세계 관객들의 뇌리에 아련하게 각인될 정도의 구성을 가질 수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 주제의식도 훨씬 부각되어 작품성도 훨씬 높아짐은 물론, 흥행에서도 더 큰 성공을 거두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이 영화가 진지하게 이성으로 받아들여져서 그 절망감을 인식한 관객들은 많았지만 그 아픔을 감성으로 받아들여져서 울음을 터뜨린 사람이 의외로 적었음은 이 지점에 있다.
전도연과 송강호
흔히 작품성 높은 영화는 배우가 바뀌어도 별 차이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그 만큼 구성이 탄탄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전도연의 명연기가 없었다면 이 정도라도 건지지 못했을 작품이 바로 밀양이다. 필자는 중학생 때부터 영화를 볼 때마다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의 입장에서 보는 연습을 해 왔다. 그런 까닭에 배우는 화가가 쓰는 안료 정도의 비중밖에 차지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 온 점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영화로 정말 대배우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도연과 송강호는 영화의 질을 좌우할 만큼 정말 대단한 배우였다. 물론 이런 명배우를 역할에 맞게 적절히 캐스팅한 이창동 감독의 안목은 높게 평가 받아 마땅하다.
햇살과 카메라--신의 의지와 감독의 의지
영화 '밀양'에서 가장 문제가 된 햇살은 평단의 극찬을 받고 있는 그 마지막 엔딩에서의 햇살이다. 필자의 눈에 들어 온 밀양의 마지막 장면을 냉정하게 평하자면, 시궁창을 비춘 햇살이나 따가운 마당을 비춘 햇살 둘 다 아니었다. 동일한 장소를 두고 시궁창인가 따가운 마당인가 하는 문제는 동일인을 보고 유괴 살인범인가 아니면 '구원받아야 할 신의 어린 양'인가 하는 객체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이 될 수도 있겠다. 영화 밖에서 이런 재미있는 아이러니가 발생했지만 그건 영화의 주제와는 좀 동떨어져 있어 논외다. 오히려 그 객체가 시궁창이건 마당이건 간에, 필자의 냉정한 관심은 그 주체에 있다. 즉 그걸 비춘 건 '햇살'이 아니라 '카메라의 눈'이었을 뿐이다. 대상을 비추는 주체(主體)가 햇살인가 아니면 카메라인가는, 이 영화에서 용서의 주체가 신(God)인가 신애(인간)인가 하는 만큼의 커다란 차이가 있다. 게다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과도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햇살'을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신의 은총이나 섭리 또는 신의 의지를 말한다. 이에 반하여 그 햇살을 응시하여 포착하는 카메라의 눈은 그걸 바라보는 감독의 비판적인 시각이다. 햇살이 어딘가를 비추고 있는 행위를 카메라에 담아 표현하려는 이미지와, 카메라가 그 어딘가에 직접 초점을 맞춰 보여주는 이미지 사이에는 분명 엄청난 간격(間隔)이 존재한다. 이건 신애가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을 카메라에 담는 것과 직접 하늘을 카메라에 담는 것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안다.
만약 소설로서 "신애의 집 시궁창에 햇살이 찬란하게 비추고 있었다"라는 끝맺음을 했다면 나름 훌륭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창동 감독의 의도가 시궁창을 비추는 '햇살(신의 의지)'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었다면, 단지 그곳을 향해 카메라를 돌리는 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그건 감독이 의도하고 있는 '(못)마땅한 신의 의지'를 담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극복되어야 할 '감독의 의식과잉'만 노출시키는 수준에서 머무를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당신들의 눈에는 시궁창이 보이겠지만 저건 시궁창이 아니라 시궁창을 비추는 햇살이야, 햇살! 난 저 시궁창이 못마땅한 게 아니라 저 시궁창을 비추고 있는 햇살이 못마땅하다구, 당신들이 제발 그걸 알아주었으면 해" 하는 식의 엉뚱함이다.
이와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신의 따사로운 은혜와 구원의 햇살은 저 시궁창까지도 비추고 있어, 그러니 제발 희망을 잃지 말고 살길 바래!" 라고 해석되길 원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둘 다 불편하고 미숙한 판토마임으로 관객을 향해 창문을 더듬고 있는 행위에 다름없다. 이 문제 또한 감독의 영화와의 일정한 거리두기의 실패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피해야 할 의식과잉이며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서는 오히려 없느니만 못한 결과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들이나 관객들의 대부분은 "어! 저게 뭐냐?" 라는 정도의 이해밖에 없었을 것 같다. 한국에서 이 장면이 '시궁창을 비추는 햇살'로 많은 사람들이 평하면서 극찬하고 있는 현상은 '영화 자체의 불완전한 이미지에서 소통된 성과물이라기보다는 이 영화를 평한 뒷풀이 과정에서 나온 언어(言語)의 소통에 의한 성과물' 이라고 보는 게 훨씬 사실에 가깝다. 마치 봉준호의 <괴물>처럼 영화 안에서는 정작 아무런 언급도 없다가 영화 밖에서 '양서류와 파충류의 혼합물'이라고 말로 설명한 것과 비슷하다. 차이점은 <밀양>의 경우는 '괴물'보다는 그 실체 자체가 흐릿했기 때문에 더욱 심각했음에 있다.
조명과 특수효과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다 나와 신애가 하늘을 쳐다보는 시선을 카메라에 담는 행위는 그 자체가 구체적인 연기라서 관객에게 전달된다. 하지만 '햇살이 시궁창을 비추는 작위(作爲)'를 카메라에 담는 방식이 이런 식이어서는 매우 곤란하다. 만약 이런 의도가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리라고 판단했다면 그건 감독의 오판이다. 이건 허공에다 카메라를 들이대 보면 안다. 피사체가 되는 허공은 허공 자체일 뿐이지 허공에 비추는 '햇살'이 아닌 것이다. 진실로 햇살을 담고자 했다면 필터처리라든가 모종의 특수효과가 필요했다. 사실 이 엔딩 장면에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소통하고자 고민했다면 좀 더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신애가 짤라낸 머리카락을 부엌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 부엌의 작은 창살로 햇살이 비치는 장면을 특별한 조명 장치라도 활용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부각시켜야 했다고 본다. 이창동 감독의 작품마다 조명의 중요성이 덜 활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일은 비단 나 뿐 만이 아닐 것이다.
굳이 특수조명이 없더라도 사방이 닫혀 그늘진 창고나 시골의 헛간 등에서 창문 틈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공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 입자의 움직임 까지 비쳐 줄 정도로 그 자체가 뚜렷한 음영의 차이를 갖고 있다. 이를 잘 활용하면 그림자처럼 다소 컴컴한 공간에 손전등이 비추는 것 같은 햇살을 담을 수 있다. 이렇게 창 틈으로 은밀하게 스며드는 햇살을 담았다면 영화제목인 '비밀스런 햇살'의 효과를 더 확실하게 살릴 수 있었다. 햇살이 비춘 대상도 처음 이사왔을 때, 시들어 가던 선인장이 있던 화분을 무심코 옮겨 두었는데, 이 창 틈 사이로 비치는 햇살로 아무도 모르게 노란 꽃을 피우고 있는 장면이더라도 좋다.
다빈치 코드
영화 '다빈치 코드'에서는 레이(이안 맥켈런)가 그림 최후의 만찬을 설명할 때, 음영과 특수효과를 이용해서 구체성을 확보한다. 로버트 랭든(톰 행커스)박사가 키스톤(keystone)을 열 때도 허공을 수놓는 특수효과가 보는 관객들에게 신비로움을 더해 준다. 물론 소설형식이었다면 '랭던이 키스톤을 열 때, 매우 신비로운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식이면 족하다. 그런데 글을 읽는 독자가 아니기에 이런 느낌을 알 길이 없는 관객들에게는 그 느낌의 형상화가 필요한 법이다. 사실 꿈과 느낌의 형상화가 가능하다는 게 다른 장르와 달리 영화만이 가진 독특한 힘이다. '밀양'의 마지막 씬에서 조명으로 햇살의 구체적인 형상화에 어려움을 느꼈다면, 카메라가 잡은 피사체라도 차라리 좀 더 구체화 시킬 필요가 있었다. 즉 그게 시궁창일지라도 적으나마 물도 좀 흐르고 가장자리에 수풀이나 미나리 몇 포기라도 있는 곳을 담았으면 했다.
모호함
서양 속담에 '침묵은 무능력의 은신처이다'라는 말이 있다. 극적인 대비가 필요한 부분까지도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침묵은 아닐지라도 대개 '모호함'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이창동감독의 영화 대부분에 드러나는 속성이다. 그런데 이(李) 감독은 많은 경우, 이런 애매 모호함을 하나의 수준 높음이나 예술성으로 혼돈 내지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창동 감독의 경우 이 모호함은 예술성이라는 것보다는 대부분 리얼리티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필자의 경우, 리얼리티의 진수를 처음으로 느낀 영화는 1982년 제35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욜(Yol, 1982년, 일마즈 귀니 감독)을 볼 때였다. 독재정권에 의해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여죄수가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를 아이를 낳는 장면이었는데, 탯줄까지 선명했던 그 장면은 마치 산부인과 의사가 태아를 받아내듯 충격적이었다. 낙태 등의 문제가 인권문제에 깊게 닿아 있었던 까닭도 있겠지만 그 한 장면으로도 감옥에서조차 얼마나 많은 인권탄압이 자행되었는지 생생하게 전해왔다. 그 이후 장이모우의 붉은 수수밭이나 홍등 같이 디테일을 묘사한 작품도 제법 보았지만 지금까지도 욜(Yol)의 그 장면만큼 충격적인 장면은 보지 못했다.
준의 시체를 처음 발견하는 장면에 대한 처리도 너무 모호했다. 신애의 슬픔을 묘사하는 부분도 그렇다. 신애가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방에서 아들 준의 사진을 품고 오열하는 장면도 안나왔다. 준과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에 관련된 소품(예를 들어 아들이 엄마에게 준 의미깊은 선물 같은 것)에 대한 신애의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으로 관객을 울리거나 가슴을 찡하게 하는 장면도 한 군데도 없다. 그저 남편도 없는 여자가 아들까지 잃었으니 관객들은 당연히 슬퍼할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었는 듯하다.
작가주의
작가주의 거장으로 칭송받는 장 뤽 고다르가 작가주의란 용어의 남용에 대해 지적하면서 애초부터 <작가>보다는 <주의>가 강조되었어야 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한국에서 신작가주의 감독으로 자리매김할 것 같은 이창동 감독의 경우는 특히 주제의식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때로는 놀라울 정도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이 그 주제를 사이에 두고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 좀 더 낮은 자세로 임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1부 2부에서 말한 영화 속 등장인물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방법이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는 길로 보인다. 작가주의라 하면 완벽주의나 고집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창동 감독의 작품에서는 완벽보다는 고집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르게 되는 건 필자만의 느낌일까? 사실 스토리, 음향, 배경음악, 조명, 촬영기법, 분장, 특수효과 등의 종합예술적인 견지의 기술적 발전이나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기법의 구축 등은 이미 다 나와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주의란 말은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아마추어적인 집착이나 영화 자체의 의의를 떠나 순전히 흥행에 실패한 비상업영화 감독을 지칭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사실 '밀양'의 경우, 신애가 유괴범을 면회하고 나와서 절망하며 쓰러지는 장면 하나만 해도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밀양'이 이 정도로 어설픈 수준에서 신작가주의 작품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다면 그건 한국 영화에 전반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 될 수도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상업영화 뿐만 아니라 작가주의 영화도 많이 발전해야 한다. 영화 '밀양'은 구성이나 기법 모두에서 100점 만점에서 70점을 받아도 과분한 영화다. 어찌 보면 이 30점의 차이만큼 더 발전할 여지가 있기에 이창동 감독은 더욱 행복한 사람일 수 있다. (별 다섯 개 기준으로 세 개 반) (3부작 중 3부 끝) / 김휘영 (문화평론가)
P.S: 아시안필름어워드(Asian Film Awards (AFA))에 출품되어 각 부분별 후보에 오른 '밀양' '디 워' '기담' 등과 전도연/김윤진, 송강호,김혜수,공효진,천호진 등, 님들이 좋은 성과를 거둬서 한국의 문화역량을 빛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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