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잇=유용욱 주필 | 대한민국 대표 공영방송 KBS는 지금 구조적 위기의 한복판에 서 있다. 시청률은 붕괴됐고, 수신료의 정당성은 더 이상 국민적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며, 젊은 세대에게 KBS는 이미 ‘필수 미디어’의 지위를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BS 내부에서 가장 활발히 작동하는 시스템은 콘텐츠 혁신이나 디지털 전략이 아니라 정치적 내부 갈등이다.

최근 법원이 방통위 2인 체제에서 이뤄진 이사 임명에 대해 무효 판단을 내리면서, 현 경영진의 정당성은 중대한 타격을 입었다. 법적·제도적 해석의 여지는 남아 있지만, 공영방송 경영의 안정성과 조직 신뢰가 훼손됐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 이후다. 이 사안을 계기로 KBS 내부에서는 또다시 경영 정상화나 미래 전략 논의보다 정치적 투쟁이 전면에 등장했다. 법원의 판단은 곧바로 ‘투쟁의 명분’으로 소비됐고, 공영방송의 미래를 묻는 질문은 다시 사라졌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국에서는 공영방송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논의가 비교적 차분하고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영국 정부와 BBC, 통신규제기관 오프콤(Ofcom)은 2030년대 중반을 전후한 지상파 송출 축소·중단 가능성을 공론화하며 ‘디지털 퍼스트(Digital First)’ 전략을 공식화하고 있다.
이는 이미 확정된 정책이라기보다, 미디어 이용 행태 변화와 공공재로서의 주파수 효용을 냉정하게 재검토하는 과정이다. 핵심은 지상파 유지 여부 자체가 아니라, 공영방송의 공공성을 어떤 방식으로 지속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BBC의 전략 전환 역시 단순한 플랫폼 이동이 아니다. 젊은 시청자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고, 글로벌 유통을 전제로 콘텐츠 구조를 재설계하며, 차세대 제작 인력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겠다는 방향성의 선언에 가깝다. 공공성을 더 이상 ‘지상파 송출’이라는 단일 수단에 고정하지 않고, 접근성과 영향력이라는 미디어 본질로 재정의하려는 시도다.
반면, 한국 지상파 방송의 현실은 정반대다. 시청률 하락과 광고시장 축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됐고, 젊은 세대에게 지상파는 ‘부모 세대의 TV’ 혹은 재난·대형 사건 발생 시에만 잠시 찾는 매체로 인식된다. 그럼에도 KBS를 비롯한 지상파 방송사는 콘텐츠, 플랫폼, 조직 구조 혁신보다 내부 정치와 이념 갈등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
특히 공영방송 내부에서 노동조합이 경영 전반을 정치적 투쟁의 장으로 만드는 구조는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렵다.
경영진은 상시적인 투쟁의 대상이 되고, 시청자는 설득의 주체가 아니라 정치적 메시지 전달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 결과 공영방송의 핵심 가치인 신뢰와 보편성은 점점 소진되고 있다. 이는 노조만의 책임도, 경영진만의 책임도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런 구조에서는 어떤 디지털 전략도 작동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영국의 논의 과정에서 특히 주목할 대목은 ‘취약계층을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전제된다는 점이다. 디지털 전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되, 그 과정에서 공공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제도와 기술을 함께 설계한다. 다시 말해 현실 인식과 책임 의식이 동시에 작동한다.
한국 지상파에는 이런 논의 자체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디지털 전환은 구호로만 존재하고, 실제 전략 부재의 책임은 넷플릭스나 유튜브, 혹은 정부 탓으로 전가된다. 변화의 고통을 감내하며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기보다는, 낡은 지상파 체제를 ‘공공성’이라는 말로 방어하는 데 급급하다.
지금 한국 지상파 공영방송에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성명서나 총파업 결의가 아니다. 누가 사장이 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디지털 시대에 공영방송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다. 그 답은 지상파 주파수 유지 자체가 아니라, 플랫폼 중립적 공공서비스 모델, 수신료의 투명한 사용 구조, 디지털 환경에 맞는 콘텐츠 책무 재설정 같은 구체적인 과제 속에서 찾아야 한다.
한국 지상파 방송이 계속해서 현재의 상태로 시간을 보낸다면, 영국이 준비 중인 ‘질서 있는 전환’이 아니라 시장과 시청자로부터의 ‘무질서한 이탈’을 맞이할 가능성이 더 크다. 이제 공영방송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미래를 설계하는 책임 주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갈등 속에서 몰락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할 것인지. 더 이상 시간은 공영방송의 편이 아니다.
□ 유용욱 주필
- 1993년 KBS 공채 19기
- KBS 전략기획실 성과평가부장
- KBS 법무실장
- KBS N 경영본부장
- 현 인싸잇 경기 편집국장 및 공동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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