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원로는 일이 의도한 바대로 풀리지 않거나 가슴이 답답할 적마다 지도를 본다. 지도는 제대로 된 지도책을 펼치고 봐야 제격이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한글보다 지도책 보는 방법을 먼저 터득했다. 그럼에도 한동안 지도책을 보지 않았다. 집에 있던 낡은 사회과부도가 사라진 탓이다.
요새 들어 다시 지도를 열심히 보는 중이다. 청계 이명박 선생이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사회과부도 대용으로 선택한 지도는 전철역이나 지하철 승강장에서 흔히 눈에 띄는 ‘서울-수도권 도시철도 노선도’다. 이것만 유심히 관찰하면 지금의 난국을 돌파할 묘책이 너무도 쉽게 머리에 떠오른다.
아니다. 머리를 굴리기에 앞서 울화부터 치밀어야 정상이다. 되풀이해 강조하겠다. ‘대한민국 전도’가 아니라 ‘서울-수도권 도시철도 노선도’다. 거기에서 강남이 얼마만한 크기를 점유하고 있는지를 계산해보라. 정말로 한 손안에 쏙 들어오는 면적이다. 교실칠판 절반만한 넓이를 차지하는 ‘서울-수도권 도시철도 노선도’에서 말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상황을 뛰어넘었다. 꼬리의 꼬리가 몸통을 이리저리 뒤흔드는 격이다.
죄 없는 국민들 지하실로 끌고 가 물고문하는 것만 독재는 아니리라. 극소수가 절대 다수를 쥐고 흔드는 게 바로 독재정치다. 그런 맥락에서 2008년의 한국은 박정희의 유신체제와 전두환의 5공화국에 못지않은 무지막지한 독재국가다. 아무리 후하게 잡아도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2프로 남짓한 강남사람들을 위해 나머지 국민들 전부가 팔자에 없던 생고생을 감수해야 한다. 강남사람들의 독재정치가 전두환과 박정희를 지나 마침내 일본 제국주의 단계에 이르렀다. 일제를 본받아 제2의 조선어 말살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과의 차이점이라면 일본어가 아닌 영어를 강제한다는 거.
영어몰입교육의 도입목적을 어느 네티즌이 신랄하면서도 정확하게 지적했다. “미국유학을 다녀온 룸펜들의 취직자리 마련!” 한겨레신문의 정남구 논설위원은 이를 약간 세련되게 표현했다. “영어교육 시장을 키우면 영어권에 유학한 이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 기회가 생기기는 할 것이다.”
솔직히 따져보자.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가 소위 실용영어, 생활영어를 배우고 돌아온 강남젊은이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그들 가운데 단 10퍼센트만 미국 현지서 전문직에 종사한다면, 하다못해 오퍼상이라도 운영하고 있다면 국민원로가 SK 와이번스 이만수 수석코치처럼 달랑 팬티 하나만 입고서 광화문 교차로에서 ‘이명박 장군님 만세’를 외치겠다. 대부분은 뉴욕에도, 워싱턴에도, 시카고에도, 로스앤젤레스에도 없다. 청담동의 카페거리에 종일 죽치고 않아 여(남)자들 후릴 궁리나 한다.
영어몰입교육으로 말미암아 2만 3천개의 일자리가 새로 만들어진단다. 청계 이명박 선생은 기업투자가 활발해져 민간부문에서 고용이 창출돼야 경제가 살아난다고 역설해왔다. 영어몰입교육 덕분에 신규로 생겨날 2만 3천개의 일자리는 국민들의 혈세로 조성된 정부의 예산으로 지탱될 가능성이 높다. 청계 선생이 비판했던 기존 공공근로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일제가 우리말 말살정책을 밀어붙인 배후에는 내선일체 이상의 노림수가 존재했다.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면서 일본어 선생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을 테고, 이는 결과적으로 일본 국내의 실직자 감소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으리라. 조선으로 대거 건너온 일본어 교사들의 급료는 당연히 조선민족을 더욱 혹독하게 수탈함으로서 충당되었을 게다. 군국주의 국가들이 오로지 군수산업만으로 자국의 실업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하면 커다란 오산이다. 식민지의 궁극적 쓰임새는 룸펜의 처리다.
강남의 중장년 세대가 보기에 청담동에서 하릴없이 놀고먹고 있는 자기 동네 젊은이들의 꼬락서니가 굉장히 한심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위험이 따르는 식민지 정복에 나서라고 자기 동네 젊은이들을 다그칠 리는 만무하다. 2만 3천 명의 영어전용교사 대열에 합류하겠다며 강남지역 이외의 취업준비생들도 영어공부에 부지런히 매진할 전망이다. 허나 명심하라. 2만 3천 명의 영어전용교사의 선발방식과 전형기준을. 생활영어, 실용영어라잖아. 미국에서 달러 처발라가며 살지 않으면 하늘이 두 쪽 나도 배우지 못할.
이명박 정부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까 매우 고민이 됐었다. 대통령직 인수의원회의 한국어 말살정책은 고민을 시원하게 풀어줬다. 국민들은 참여정부를 ‘NATO 정부’라고 불렀다. No Action, Talk Only의 약자로. 실천은 없고 말만 무성하다는 뜻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보다도 단연 기억하기 편리하게 정리된다. ‘KFC 정부’로.
KFC는 Kangnam Friendly Code의 약자다. 즉 강남친화적 정부란 이야기다. Code 대신 Color를 넣어도 괜찮을 성싶다. 다소 Impact가 떨어지기는 하지만서도. 사실은 Friendly가 아닌 Frantic이 사태를 명확히 설명할 듯하다. 강남에 퍼주지 못해 환장한 정부. KFC! 이명박 정부의 노선과 지향점은 요 한마디로 명쾌하게 압축되고 요약된다.
4조원이란다. 영어몰입교육을 핑계로 나라에서 무려 4조원을 미국으로 유학을 갖다온 다음 압구정동 길거리와 청담동 뒷골목에서 빈둥거리는 강남 젊은이들한테 퍼주는 셈이다. 큰돈을 벌고 싶으신가? 소매인 영어사업 하지 마라. 미국 골드러시 시대에 대박을 터뜨린 진정한 주역은 청바지 장사꾼이라고 하지 않던가? 일단은 4조로 출발하지만 나중에 14조가 될지, 40조가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국가예산의 규모와 용도를 결정하는 고위 경제관료의 거의 모두가 강남에 거주하므로. 게다가 이명박 정부가 어떤 정부인가? KFC, 강남친화적 정부다.
이명박 정부 아래서 가장 호황을 누릴 업종은 영어전용교사로 채용될 강남룸펜들을 상대하는 비즈니스가 될 터. 아는 후배가 청담동에서 개업을 한다는 걸 막은 게 갑자기 후회가 되는구나. 이게 다 KFC 때문이다! 그나저나 대통령 취임식장에서도 ‘라데츠키 행진곡’이 연주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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