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선거가 '슈퍼 화요일'(2월 5일) 대회전을 하루 앞두고 있는 가운데 뜬금없이 '슈퍼 대의원' 논란이 워싱턴 정가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통상적으로 '슈퍼 화요일'을 통해 '대승'을 거두는 후보가 등장하였고, '슈퍼 대의원'들이 해당후보에게 표를 몰아줌으로써 단숨에 과반수를 넘으며 후보직을 확정짓는 관행이 이어져왔다. 그런데 그와같은 등식이 2008년 대선에서 깨질 공산이 높기 때문이다.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를 종합해보면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뉴욕)은 아리조나(67명), 매사추세츠(121명), 미네소타(88명), 뉴저지(107명), 뉴욕(281명), 오클라호마(47명), 테네시(85명), 아칸소(47명) 등에서 우위를 나타내고 있고,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일리노이)은 조지아(103명), 일리노이(185명), 캔자스(41명), 유타(29명), 아이다호(23명), 노스다코타(21명) 등에서 우위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알라바마(60명), 캘리포니아(441명), 콜로라도(71명), 코네티컷(60명), 미주리(88명) 등에서는 오차범위 내 접전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의 여론 추세가 그대로 이어질 경우 힐러리와 오바마는 공히 1,000명 내외의 대의원을 '슈퍼 화요일'을 통해 확보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지금까지 확보한 대의원 수를 합치면 1,200~1,300명 수준에서 두 후보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여기에 민주당의 깊은 고민이 담겨있다.
최소한 힐러리와 오바마 두 후보 중 한 사람이 '슈퍼 화요일' 대회전 직후 1,600~1,700명 수준의 대의원을 확보할 경우 총 796명에 달하는 '슈퍼 대의원'(상원 및 하원 의원, 주지사, 당 핵심지도부 등) 중 아직까지 후보 지지선언을 하지 않은 517명 중 약 300~400명이 '선두주자'에게 표를 몰아줌으로써 '슈퍼 화요일' 승자를 사실상 후보로 확정지을 수 있는데 현재로서는 그와 같은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러다보니 자칫 당내 유력인사들의 입김으로 이들 '슈퍼 대의원'들의 표가 한쪽 방향으로 쏠릴 경우 '불공정 경선' 논란이 거세게 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슈퍼 대의원'들 입장에서 '힐러리-오바마' 네거티브 전쟁을 팔짱 끼고 지켜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공화당의 존 매케인 상원의원(아리조나)이 플로리다주 예비선거 승리를 통해 사실상 '단독선두'로 부상한 가운데 이번 '슈퍼 화요일'을 통해 과반수 득표에 육박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공화당 후보로 확정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매케인이 당원들의 압도적 지지를 등에 업고 2월부터 본선진출 후보로서의 발빠른 행보를 시작하는 상황에서 민주당 후보지명전이 3월이나 5월도 아닌 7월 전당대회까지 계속될 경우 혹 힐러리-오바마 둘 중 누구 하나가 뒤늦게 확정된다고 하더라도 '상처 투성이'가 된 상황에서 매케인에게 백악관 '무혈입성'을 허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대통령선거와 상원 및 하원 의원선거, 주지사 선거, 시장 선거 등을 동시에 치루는 미국 정치 시스템을 감안할 때 대통령선거전에서의 패배는 다른 선거에도 대단히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다보니 민주당 일각에서 '슈퍼 대의원'들이 앞장서서 조기에 후보를 확정지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그렇게 될 경우 당내기반에 있어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힐러리에게 표가 쏠릴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실제로 현재까지 지지의사를 표명한 '슈퍼 대의원' 279명의 경우 힐러리가 184명, 오바마가 95명으로 거의 2배 가까운 편차를 나타내고 있다. 예비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의원 수에 있어서 오바마가 힐러리에게 63명대 48명으로 앞서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현실이다.
만일 남아있는 '슈퍼 대의원' 517명이 같은 비율로 지지를 표명할 경우 힐러리는 300여명을 확보하는 반면, 오바마는 100여명만 확보하게 된다. 오바마 입장에서는 '불공정 경선'이라는 느낄 수밖에 없는 구도다. 최악의 경우 예비선거 대의원 수에서 오바마가 힐러리에게 앞서고도 '슈퍼 대의원'에서의 열세로 인해 최종결과가 뒤바뀔 가능성까지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슈퍼 화요일'은 없고 '슈퍼 대의원'만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민의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가 민의를 왜곡시키는 제도로 운용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자칫 2000년 부시-고어와 같은 법정 다툼이 민주당 내에서 재연될 수도 있다.
민주당의 입장에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이겠지만 1968년과 1980년 대통령선거가 이와 유사한 논란에 휩싸였었다. 1968년의 경우 일반당원과 유권자의 직접참여가 보장된 프라이머리에서 1위를 달렸던 로버트 케네디가 괴한에게 암살되었고, 2위였던 유진 매커시가 아닌 3위 휴버트 험프리에게 소수 열성 대의원들의 '전략투표'가 집중되어 전당대회에서 결과가 뒤바뀌었다. 그 결과 민주당은 집권당 프리미엄을 안고 있으면서도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또한, 1980년의 경우 현직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일찌감치 후보를 확정짓는 듯하다가 중반전 이후 에드워드 케네디가 무섭게 치고 올라오면서 결국 전당대회에 가서야 겨우 후보로 확정될 수 있었다. 결국, 카터와 케네디가 상호비방전을 벌이는 동안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은 유유히 민심 속으로 파고들며 현직 대통령을 물리치는 '이변'을 연출했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슈퍼 대의원'이라는 것이 신설된 이유가 바로 1980년의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다행스럽게도 이들 '슈퍼 대의원'들 때문에 1992년-1996년의 클린턴, 2000년의 앨 고어, 2004년의 존 케리 등은 일찌감치 후보로 확정되면서 공화당 후보들과 대등한 경쟁을 벌일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와같은 등식이 이번 2008년 미국 대선에서 깨질 위기에 처해있다. 그러다보니 민주당 지도부는 정치적으로 '사면초가'에 놓인 상황에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고, 공화당 지도부는 민주당 쪽의 자충수를 기대하며 대선 전망을 낙관하는 흐름이 갈수록 늘고 있다.
그래서 지금 미국 정치분석가들은 물론, 유권자들까지도 민주당이 '슈퍼 대의원'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지에 대해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사라진 '슈퍼 화요일' 자리에 '슈퍼 대의원'이 남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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