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
기독교적 원죄의식, 안락사 논쟁, 총기소유논란, 선택에 따른 책임, 공포에 처한 인간행동의 양상, 자살, 사이비 광신도의 문제, 종말론, 심판과 구원의 문제, 불가지론, 불확정성의 원리와 구제예정설 등 미국 사회에서 심각하게 논의되는 많은 주제들이 한 영화에 다 녹아 있다면 실로 놀랍지 않은가? 스토리 구성상 너무 동떨어진 낙태문제와 너무 단순하거나 복합적인 요인인 테러문제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들어 있는 셈이다. 스티븐 킹은 역시 구성의 마술사답게 이렇게 다양한 주제들을 한 가지 이야기 줄기에 다 살렸다. 하지만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안개라는 제목에서 의미하듯 수많은 메타포(은유), 모파상의 소설인 ‘목걸이‘ 같은 아이러니, 그리고 부조리와 기막힌 반전이 나타난다. 그래서 영화 미스트는 사실 괴수영화인 듯 하지만 괴수영화라는 외투만 살짝 걸쳤을 뿐 실제로는 매우 심오하고 철학적인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는 영화다. 과연 'T.S. 엘리엇, J.R.R 톨킨, 셰익스피어의 전통을 잇는 위대한 작가-<뉴욕 리뷰 오브 북>'이나 '에드거 앨런 포의 경지를 넘어섰다- <코스모폴리탄紙>'는 수사에 걸맞는 작가가 스티븐 킹이었다. 그의 단편집『스켈레톤 크루』의 대표작인 미스트(The Mist, 1985년)가 이 영화의 원작이다.
프랭크 다라본트
영화감독은 우선 오디오보다는 비쥬얼에, 즉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말하기보다는 그림 그리기에 더 능숙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필자의 생각에 가장 어울리는 감독이 프랭크 다라본트다. 실제로 소설가 출신보다는 화가출신들이 더 뛰어난 영화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과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점을 잘 알 수 있다. 참고로 배용균 감독은 서양화과 교수이지만 이창동 감독은 소설가 출신이다. 이청준의 원작없이 영화만을 놓고 두 작품을 평가하면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창동 감독이 지나치게 스토리에만 치중하는 걸 지양하고, ‘독특한 영상미의 구축’이란 관점에 새삼 눈을 뜨게 된다면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을 선보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영화 <미스트>에서는 원작 소설이 가진 치밀한 구성 못지않게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이 가진 영상화법의 뛰어남이 돋보인다.
영상화법
혹시 스티븐 킹과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첫 결합으로 탄생한 영화, <쇼생크 탈출,1995년>을 본 적이 있는가?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이 기나긴 하수구를 헤쳐 나가 감옥을 탈출한 후, 두 팔을 벌려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폭풍 같은 감동이 밀려온다. 그게 스토리가 아닌 비쥬얼만이 갖는 독특한 힘이다. 이럴 때 “아, 정말 시원하다!” 따위의 대사는 너무나 거추장스럽다. 그건 오로지 감동을 떨어뜨리는 데 기여할 뿐이다. 감독도 이 장면의 강렬함에 흡족했는지 영화 포스터로도 잘 활용했다. 이렇듯 영화감독들은 스토리 이전에 이런 이미지가 갖는 힘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스토리는 작가에게 빌려오면 되지만 그 스토리의 영상화는 오로지 감독의 영역이기에 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영화 ‘미스트‘에서는 광신도들에게 위협을 느낀 몇몇 용기 있는 사람들이 대형마트를 나가 트럭을 몰고 갈 때 일부러 슬로모션으로 잡는다. 그리고 대형마트와 트럭 안을 동시에 한 장면으로 캡쳐한다. 이는 관객에게 특별한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다. “자, 당신이라면 이 경우, 대형마트 안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트럭을 타고 안개 속으로 나갈 것인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리고 또 이 선택의 결과에 따른 운명은 어떨 것이라고 예상하는가?” 이런 절박하고 심오한 질문을 던지면서도 대사는 단 한마디도 사용되지 않았다. 또 극 중간에서 가장 기막힌 서스펜스를 생생하게 전달하는데 성공한 장면에 동원된 것은 무엇인가? 대사 한마디 없이 기껏 기다란 동아줄 하나다. 이건 소설 양식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영화만이 가진 힘이지 않은가?
공포와 인간
「인간은 왜 악에 굴복하는가(What evil means to us)」(찰스 프레드 앨퍼드 著, 이만우 譯, 황금가지)란 인문서는 '악의 근원은 두려움이다'라는 소제목으로 두려움과 악(惡)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데 한 챕터(part 6. 제3장)를 전부 할애하고 있다.
'악의 근원은 억제되지도 구분되지도 않은 두려움의 경험이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인식하는 대신 스스로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되어 그것이 마치 사물인양 타자에게 부여하려고 할 때 사악해진다. 악(惡)과 관련하여 이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악을 줄일 수 있을 것이고 적의와 고통도 함께 줄어들 것이다'( 같은 책, p58).
이 영화의 백미는 극한의 공포에 처한 인간군상의 행동양상을 너무나 리얼하게 그려낸 데 있다. 이 부분은 원작 소설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스티븐 킹의 생각은 필자와 정확히 일치한다. 오랫동안 ‘용기와 비겁’이란 테마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해온 필자의 경우도 사실 악한 사람보다는 ‘선량하지만 겁이 많은 사람들’을 훨씬 무서워하는 편이다. 악한 사람은 피하거나 대항해서 싸우는 선택을 할 수 있지만, 선량하지만 겁이 많은 사람들은 항상 곁에 있으되 결코 회피할 수도 처단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공포나 위기에 처한 경우 매우 공격적으로 돌변하거나 그 행동을 예측할 수 없기에 신뢰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겁이 많은 사람들은 쉽게 불의와 타협하여 남을 희생시키면서 까지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이들에 대해 필자가 파악한 건, 이들이 자신에게 소중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을 위한 최선의 방편이란 그런 극한의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 정도다. 차선으로 위기가 닥친 경우, 용기있는 자가 이들을 위해 대신 나서서 해결하거나 희생을 자임해야 한다.
불완전한 인간성에 대한 통찰
불완전한 인간성에 대한 이런 깊은 통찰이 사회적으로 확장되면 사회안전망이나 시스템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를 리더십 이론으로 확장해서 적용해 보자. 뛰어난 리더란 구성원들이 이런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잘 배려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며, 또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이들에게 안정과 희망과 비전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동양사회에서는 서양보다 이런 점에 대한 연구가 매우 박약하다. 유교적인 학문풍토에서 언제나 스스로 완성된 인간모델로서의 군자(君子)에 대한 연구에만 골몰하다보니, 소인배나 이런 상황에 대한 탐구를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안전망이나 대비책도 허술하다. 실제로 숭례문 방화사건에서 보듯, 안전망이나 대비책은 군자(君子)에 대한 연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이 70이 되어서도 주체 못할 분노를 국보 1호에다가 화풀이하는 사람이 있다는 냉혹한 가정에서 비롯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몇 년 전 필자가 대자보에 ‘신뢰사회로 가기 위한 역설‘이란 제목으로 잘 밝혀 놓았다. 이 영화에서도 용기와 지성을 갖춘 몇몇 사람들에게는 광신자와 패닉에 빠진 이런 이웃 사람들이야말로 밖에 있는 괴수들보다 더 무서운 존재라는 점을 웅변해 준다. 실제로 인류 역사에서 인간에게 가장 위협이 된 것은 인간의 잘못된 신념이나 이데올르기에 의한 전쟁이나 학살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패닉에 빠져있는 대형마트 안의 사람들을 피해서 할 수 없이 덜(?) 위험한 괴수가 있는 안개 속으로 떠난다.
혈의 누
한국 영화에서도 이런 걸 너무나도 잘 표현한 영화가 있었다. 바로 인문학적 소양이 일천한 진중권으로서는 당연히 혹평할 수 밖에 없었던 영화 ‘혈의 누 (血의 淚: Blood Tears, 2005)’다. 이처럼 영화뿐 아니라 모든 텍스트는 아는 만큼만 보이는 법이다. ’혈의 누‘ 또한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없이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수작이었다. ’혈의 누’와 ‘미스트’는 인간들의 이기심이 얼마나 무서운가와 공포에 처한 인간들이 희생양을 만들고 마는 구조까지 철저하게 일치한다. ‘혈의 누‘에서 범인이 누구이냐가 중요하지 않듯이 ’미스트‘에서 안개 속에 쌓인 괴수가 무엇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두 영화 모두 주술(呪術)과 요한계시록이 비슷하게 공포심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극한의 상황에서 사이비 광신도가 마치 예언자적 역할을 하는 ’미스트’처럼, ‘혈의 누‘에서도 무당(샤먼)이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점도 빼닮았다. ‘혈의 누‘가 ’미스트’보다는 서스펜스적 기법이 좀 딸리는 점이 흠이 있긴 하다. 이건 디워(심형래, 2007년 8월)가 나오기 훨씬 전이기에 CG기술력이 전혀 없었던 시절에 출품된 것과도 관련이 깊다. CG 기술력을 바탕으로 나온 미스트(2008년)의 온갖 괴물들은 이 영화에 서스펜스를 부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영화 '혈의 누'가 섬을 빠져나오면서 마지막 배멀미 장면까지 세심하게 배려한 점은 인간의 불완전성이라는 주제의식을 고려해도 매우 탁월하다. ‘혈의 누‘에 대한 진중권의 이해불능과 혹평은 기본기가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 필연적으로 도달할 수 밖에 없는 토사물일 뿐이다. 능력이 안되는 사람이 이토록 날뛰도록 방치하는 건 우리 사회에 너무나 위험하다.
총기소유논란
안개 속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트럭 차창 밖으로 권총이 보인다. 남자 주인공은 차창 밖으로 팔을 뻗어서 권총을 잡는다. 당연히 착용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시선'과 '동작'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특별히 시간을 들여 '번거롭게' 처리한 감독의 의도는 확실하다. 미국 사회에서 가장 논쟁이 분분하고 골치 덩어리인 총기소유논란을 말하기 위해서다. 일반 사회로 좀 더 확장하면 ‘자유의 확대와 그에 따른 대가 및 책임‘이다. 이 장면은 총기를 소유하는 자유를 누렸지만 그 대가와 책임은 결말 부분에서야 나온다. 이외에 필자가 서두에 언급한 테마들이 어떤 장면에 녹아 있는지 생각하면서 이 영화를 보면 참으로 절묘함을 발견할 것이다. 대형마트를 떠나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트럭의 장면에서 끝내면서 그 결론을 관객에게 영원히 안개처럼 물음표로 던져 놓았어도 무난한 영화다. 다만 이랬다면 '총기소유에 대한 선택과 대가'라는 테마는 안개 속으로 실종되었을 것이다.
트럭을 타고 대형마트를 떠난 백인들은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 간 108인으로 생각해 보면 더욱 의미심장하다. 잘 알다시피 그들은 새로운 땅을 개척하고 미지의 공포에 대항하기 위해서 스스로 총을 소지하는 자유를 선택한 후 그걸 전통으로 확립시켜간 사람들이다. 그래서 미국사회가 더 행복해 졌는가 하는 의문은 연일 일어나는 총기사고와 더불어 이 영화의 결말을 함께 비교해 보면 의미심장하다. 만일 이 영화에서 총만 가지지 않았다면 이들은 전혀 다른 결말을 맞았을 것이라는 건 더욱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총기소지논란이라는 확실하고 구체적인 사회적 이슈가 있는 미국 사회에 훨씬 큰 의미를 던져줄 게 확실하다. 그 외의 나라에서는 이 총기를 ‘과도한 자유‘ 정도로 읽으면 무난하다.
원죄의식
이 영화는 서양인들과 전세계 기독교인들의 무의식에 침잠해 있는 원죄의식을 집요하게 이끌어 낸다. 극 초반에 쓰러진 나무에 깨진 창문을 제 때에 고치지 않았던 남자 주인공은 후반에 트럭을 타고 집 부근을 지나면서 결국 아내가 거미줄에 감겨 죽어 있는 모습을 확인해야 하는 쓰라린 고통을 받는다. '그때 창문만 고쳤더라면' 하는 죄책감이 진하게 울린다. 이는 마트 안에서 아내 아닌 다른 여인과의 미묘한 감정의 교류에 대한 양심적 징벌이라는 측면도 있어 구조적으로 참 치밀한 배치다. 집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주인공이 바라보던 '부서진 창'은 바로 '원죄에서 비롯되는 양심의 창(窓)'이다. 사실 큰 범죄적 행위가 아니라 사소한 게으름이나 어쩔 수 없는 위기 상황에서 비롯된 일들이다. 이에서 비롯한 징계는 영화가 진행 될 수록 더 가혹해진다. 영화 초반 사람들이 마트에 갇혔을 때, 한 여인이 집에 있는 가엾은 애기를 보호하기 위해 도와 달라고 구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모두가 외면한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선뜻 나설 수 없으리라는 점에서 보면 이 또한 인간이 태어나자 마자 -자신의 잘못과는 무관하게- 갖게 되는 기독교적 원죄와 흡사한 구조다. 그래서 그 여인은 혼자 그 무서운 안개 속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들과 관객들에게 잊혀 졌던 그 여인은 나중에 안전한 차에 구조되어 있다. 그녀는 차창으로 그 때 구원 요청을 외면했던 사람들을 마치 추궁이라도 하듯이 강하게 응시한다. 결말을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할 정도의 징벌이다. 이 원죄 의식은 굳이 서양의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지 않더라도 동양의 인과응보 사상으로도 감응하기에 정말 대단한 배치가 아닐 수 없다. 다시 한번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연출력에 감탄하고야 만다.
부조리
과연 인간의 선의지(善意志)가 항상 좋은 결말에 이르는가? 양자역학에 의해 결론된 불확정성의 원리로 이젠 과학적 진리마저 확률적인 진리로 바뀐 지 오래다. 이 영화의 사람들 앞에 뿌옇게 낀 안개 속처럼 알 수 없다. 대형마트 속에 남은 인간들의 운명은? 또 이들이 두려워 괴수가 있는 안개 속으로 나간 사람들의 운명은 어찌 될까? 이 부분은 스포일러성이라 다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필자는 결말이 결코 낙관적이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한가지 장면과 한 개의 이미지에서 판단했다. 첫째가 사이비 교주 역할을 하던 여자를 쏘아 죽이는 장면이었고 두번째는 트럭을 타고 떠나는 구성원들의 피부 색깔이 주는 이미지였다. 필자 생각엔 아무리 사이비 교주라도 그녀를 죽일 권리는 없다.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당분간 격리 시키는 정도가 최대치다. 그녀를 총으로 죽이는 장면을 보는 순간, “어, 저건 아닌데, 도대체 작가나 감독이 뭘 말하려고 하는 거냐?”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또한 트럭이 구원의 매개체로 노아의 방주 정도가 되려면 백인 일색으로 할 것이 아니라 좀 더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했으리라는 점에 있었다. 이 두가지 의문을 생각하면 결론 부분은 어느 정도 예상되었고 구조적인 일관성을 끝까지 획득한다. 그러나 기분은 썩 좋지 않다.
시네마 컨설팅(이 영화의 약점)
매우 심오한 주제들을 매우 뛰어난 구성으로 촘촘히 엮어 내는데 성공한 이 영화가 가진 최고의 약점은 무엇일까? 그건 감동의 부재다. 관객들이 영화의 치밀한 구성에 감탄을 할지언정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은 거의 없다. 이 영화에 감동을 줄 수 있는 구성을 하려면 어떡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가지가 떠오른다. 초반에 대형마트 안에 만삭의 임신부가 한 명 갇히고, 패닉에 빠진 사이비 광신도 일당과 반대편이 대치한 절박한 상황에서 마트 안에서 출산을 하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일단 어린 생명이 병원이 아닌 마트 안에서 태어난다는 사실 자체가 영화의 긴박감을 더욱 돋보이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새 생명에 대한 축복의식을 핑계 삼아 촛불을 켠 케익을 등장 시킬 수 있고 잠시 휴전하면서 평화를 얻는 장면을 충분히 연출할 수 있다.
절박한 공간, 절박한 상황에서의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촛불 케익을 둘러싸고 새 생명에게 축복을 기도하는 모습은 오랫동안 관객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종교가 가진 참 모습과 순기능을 그릴 수 있는 이상적인 장면이자 누구나 소유하고 있는 참다운 인간애를 표현할 수 있는 연출이기도 하다. 그 이후 사이비 광신도인 여자가 ‘신생아를 준 것은 하나님이 희생양으로 쓰기 위해서다’ 라는 광신 짓으로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 간에 갈등을 더 첨예화 시키는 구도로 가더라도 좋고 아니면 또 다른 괴수들이 공격해오고 싸우는 식의 전혀 다른 상황으로 치달려도 좋다. 참된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린 애에 대한 무조건적인 보호 본능을 가지는 까닭에 '나중에 저 애기가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은 관객의 긴장감을 더해 주었을 것이다. 하여튼 대치하던 두 세력이 싸움을 멈추고서 어둠 속에서 새 생명을 축복하는 작은 촛불 속의 장면은 이 영화의 포스트로 쓰도 좋을 만큼 관객에게 진한 여운과 감동의 파장을 던져 주었을 것이다.
인문학적 소양
아무리 오락영화나 단순한 괴수영화라도 그것이 흥행대박을 터뜨리려면 그 밑바탕에 인문학적 소양이 깔려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건 인간의 감정이 단순한 오락만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않을 만큼 복잡미묘하고 너무나도 사치스럽기 때문이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좋은 음악에 풀코스로 대접받아야만 제대로 된 접대를 받았다고 느끼는 심사와 비슷하다. 2007년 한국 최고의 흥행돌풍을 이끌었던 영화 <디 워>의 경우도 그 성공요인이 단순히 화려한 CG로 말해지는 비쥬얼적 성공에만 있지 않다. 구미호가 인간이 될 수 없었던 것처럼 이무기는 용이 되지 못하는 게 한국의 전설이다. 심감독의 의도가 어떠했던간에 '이무기의 승천(昇天)'이라는 테마 자체가 늘상 승천에 실패하는 ‘전설의 고향’ 수준을 넘어 한국인들의 무의식에 잠재해왔던 오랜 금기를 깨뜨렸다. 이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시대정신에도 맞닿아 있었고 한민족의 집단 무의식에 큰 반향을 울리는 데 성공한 점을 빠뜨릴 수 없다. 물론 대의명분(cause)을 위해서 20세 여성이 희생되는 구조만 피했으면 훨씬 좋았음은 앞서 밝힌 바 있다.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2007년)'에서 해리포터가 시리우스 블랙(게리 올드만 분)을 죽인 마녀(헬레나 본햄 카터 분)를 처치하려다가, 계속 머뭇거리며 결국 놓쳐버리고 마는 것도 그 대상이 여자인 것과 관련이 깊다. 상황이 어떠하든 간에, 선(善)한 주인공인 소년이 여자를 죽이는 구조를 세상이 달갑게 수용할 리 만무하다.
영화 ’미스트‘의 결말 또한 보통 인간이 받아들이기에는 매우 씁쓰레하다. 이 점은 이 소설의 작품성은 높여 놓았지만 영화의 흥행성에서는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 영화를 보는 많은 관객들의 마음은 이미 집단 광기가 지배하는 대형마트를 떠난 트럭 안에 함께 실려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한데 이 영화는 철저하게 관객을 우롱하는 듯이 냉혹한 결말을 선보인다. 인간의 의지와는 관련없이 신의 구원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캘빈의 구제예정설로 읽어도 좋고 인간 이성에 대한 조롱 또는 철저한 부조리로 해석되어도 무방하다/ 김휘영(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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