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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의 시대착오적 문화 운명주의

구태 지식인들의 요설이 인정받는 한국사회

최근 도올은 중앙일보에 <도올 고함(孤喊)>이라는 칼럼 연재를 시작하였다. 5월 2일자 두바이에서 이명박 대통령한테 썼다는 글을 보면 한국 사회에서의 도올의 위치를 생각하였을 때 한국사회가 감정적인 선동에 동요되기 쉬운지 원인을 알 것도 같다.

우선 첫째로 도올은 스스로 학자이지만 국가의 최고통치자에게 설득하는 논리를 보면 매우 감정적이고 직관(학자로써 피해야하는)을 위주로 말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그리하여 논리적 도약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대저 한 개인의 삶도 직관과 감정적인 사고의 흐름은 더 많은 오류와 그 사람의 삶에 피할 수있는(preventable) 불행을 끌여 들어온 다는 점에서 응당 부단히 피하는 노력을 멈추어선 안되는 것이 인류문명의 진행상 부단한 요구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 최고의 지명도와 영향력을 가진 학자인 도올의 논지 전개의 수준은 그 사회적 위치를 생각컨대 놀랄 지경인 것이다. 이런 말이 행여나 최고지도자의 판단을 흐리게 된다면 그 불행은 더 막대할 것이다.

도올은 두바이같은 방식은 22세기에 또다시 과거 역사와 같이 명멸해버릴 수 있는 문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따를 모델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편지글 둘째 단락에서 두바이의 영화는 사막 위에 신기루와 같이 태동된 것이며 지질 변화로 물 만 끊어지면 순간에 끝날 수 있다라고 하고 있다. 과거에 그랬다고 과거와의 연결고리가 명확하지도 않은 두바이의 현 발전하는 문명이 또다시 신기루같이 사라질 것이라는 논리가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사실 지질변화로 인해 물이 끊겨 22세기에 난리가 날 수 있다고 하는데, 아니 왜 하필 22세기 이고 23세기라고 하면 어떨까? 사실 지금의 국제 경제 발전 방식은 다음세기를 장담하지 못하는 것은 범 지구적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다 지구가 파탄 날 확률은 지난 세기 초반에도 있었고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핵폭탄, 전체주의, 특히 경제 시스템은 30년의 대공황으로 현실화 된 바있고 지금의 발전 방식 또한 부담스러운 에너지 소비를 낳고 있다. 22세기가 어찌될지 몰라 안된다면 당장에 수많은 국가, 미국 포함해서 모두 현실적 근거에 의해서 발전방식의 거대한 도전을 받게 될터인데 자연재해라는 현실적 근거를 결여한 모호한 변수 때문에 안된다는 것은 차라리 하나님의 저주 때문에 결국 불벼락을 맞아 망할것이므로 배타적으로 나오는, 지성 암흑 시기의 관념주의자의 언설을 닮았다. 안된다는 가장 결정적 이유를 물이 끊겨 사막의 신기루와 같이 될것이라는 말이 과연 학자의 입에서 기대할 수있는 이유인가? 평소에 현실에 바탕으로 한 근거를 통해 현실에서 설 수 있는 현실 친화적 지식을 창출해 내는 것이 학자의 의무이자 책임의로 태도화 된 사람이면, 이것이 현대의 학자가 마땅히 습관과도 같이 체화되어야 할 자세라고 보았을 때, 이러한 요설이나 하는 예언가적, 어디 고대 문학작품으로나 분류 될법한 말이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라니 한국 사회가, 지식사회가 정상이 아님은 그 최고의 지위에 있는 사람의 태도에서 그 현실의 일면을 보이고 있다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적인 특성은 문화에 대한 감정적 옹호와 숭배의 수구적 마인드를 보여준다. 태생이 그러하고 여태까지 살아온 환경이 그래서인가 반인간적인 문화와 이를 바탕으로 한 권력에 매우 수구적인 옹호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지역이 두바이와 같은 영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그것으로 좋은가? 사막위의 신기루이기 때문에 원래 그 지역 내의 수많은 현존하고 있는 문제들로 인해 발전하지 못하고 뒤떨어진 시스템과 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은 좋은 것인가? 그렇게 보았을 때 두바이의 성과를 단순히 신기루라고 하는 것은 관념에 빠져서 현실에서 일어나는 성과를 무시하는 관념적 이상주의자, 권력 앞에는 고개를 수그리는 맥아리 없는 비인간적 속물 관념주의자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이러한 추측은 그의 뒤에 이어지는 논지 전개에서 명확히 들어나고 만다.)

그 아래 단락에서 두바이의 문제점은 바로 자체 교육재원, 대학, 박물관, 예술가의 손 때가 묻은 카페가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러한 관념의 지배 속에 회의의 기능이 지배당해 제 역할을 못하는 관념적 사람에게는 현실이 그에 왜곡되고 가려진 체로 단편적으로 좁게 보이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유학이 다반사가 된 세계의 번영한 지역들은 유학을 택하는 것이, 투입대비 산출이 명확하지 않고 그 시간이 많이 드는 고등 교육과 같은 산업에 주로 투자하지 않는다. 차라리 다른 나라에 아웃소싱과 같이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며 예술이라는 것도 국경이 없이 이동하는 것인데, 그러한 것을 앞선 문명권에서 접한 사람이 그 가치를 알아 들여올 수 있고 시장도 생길 것이다, 두바이 개발의 역사가 얼마나 됬다고, 또 세계화에 전략적으로 동승한 역사가 얼마나 되었다고 문화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단지 한 나라, 한 지역에 목숨을 거는 19세기 초 세계관으로 21세기 현상을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 국가에서 교육 투자는 한 지역에 몰아주고 다른 지역은 특화해서 개발하는 것과 같이 두바이 같은 조건의 지역은 자신의 조건에 맞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차라리 두바이 같은 곳은 누군가 고등교육을 받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면 개인에게 펀딩을 해주는 방향으로 교육 투자를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이슬람 정치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는 교육, 이 종교와 정치 그리고 교육같의 이익의 카르텔을 끊지 못하는 현실이라면(이는 모든 지역의 공통적으로 걸리는 문제이다.) 현대적 지식인은 차라리 외국에서 경쟁력 있는 교육받고 온 사람, 혹 없으면 돈으로 외국인이라도 데리고 오면 되는 것이다. 종교적이지 않다고 표방은 하지만 외국인은 무언가 한국적인 가치를 해할까봐 채용도, 받아들여 기능하지도 못하는 한국 정부보다 오히려 덜 종교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을 정교일체 사회 두바이는 보여준다.

사실 도올과 같은 시각이 더 흘러나가면 지역, 문화 운명주의가 될 것이다. 어떤 특정 지역의 역사적, 환경적 배경이 없다고 다른 지역은 문화적 황무지의, 영혼이 덜 진보한 문명으로 계도받고 수정당하고 파괴도 당하고 인종적으로 아래에, 지배에 놓여야 한다는 반인간적, 반문명적 문화주의 인종주의가 있었음은 도올도 익히 알 것이다. 자신 지역의 특화된 문명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는 듯 하면서 오히려 다른 지역의 문명을 항시 파괴적 지배하고 폄하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모순되는 인식이 스스로의 사고 충돌되고 있지는 않은지..?

이러한 구태적 마인드에 좋은 반면교사가 되는 것은, 미국은 유럽의 전통 문화의 토양이 없다고 문화가 없다며 오만하던 유럽인들이 과연 지금의 미국에 대고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오히려 강력하고 건강한 자본주의와 개방성에 의해 생겨난 어느 지역보다 경쟁력 있는 현대 문화는 미국의 강점이다. 이 현대 문화는 문화가 아닌가? 유럽적 전통문화에 비하면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봐야하나? 그렇다면 그것자체가 문화에 우월을 결정하는 구태적 마인드 아닌가?

이러한 구 문화에 대한 숭배와 우월적 가치를 두는 관념적 마인드가 반인간적이고 편협한, 공격적인 마음 바탕인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대저 관념주의자들이 온갖 비인간적 재앙을 일으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도올은 한국이 두바이 같이 하면 안되고 “..소박한 삶일지언정 지속적 문명의 다원적 입체적 생명원천을 확보해야 한다” 는 말을 한다. 도올이야 엘리트 부유한 집안에서 줄곧 상위층의 지위로 살아와서 수구적일지 모르는데, 소박한 삶 속에서 수구적 지역 문화에 의해 반인간적 억압과 성장하지 못하는 불행 속에 이용당하는 대중의 삶은 인식에 없는 것은 또 다시 우연이 아니다. 이는 한국 또한 해당될 터인데, 소박한 삶에 의해 도올같은 학자가 존경받는 전근대적 한국 학계의 저질 교육 수준에 의해 젊어서 발전의 싹이 꼬실라 지는 거대한 비극은 안중에 없는 것이다. 차라리 개방과 부를 허용함으로써 외부의 경쟁력 있는 교육을 접함으로써 자유와 발전의 기회라는 광명을 허하는 것이 인류 역사가 교훈으로써 부르짖던 바 아닌가? 제대로된 현대적 기독교인이라면 더욱 지역의 수구적 문화에 대해 회의적이고 반성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은 제대로된 기독교인의 태도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보는데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좋아하는 예수에 의해 먼저 심판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 아래 단락에 도올은 한번 이 논의를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잔다. 그러면서 들고 나오는 예가 대통령의 대운하 정책이다. 과연 이것이 나올 만한 적절한, 구체화 할만한 예인가 싶다. 차라리 두바이의 방식과 연관있는 정책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자고 하면 모르는데, 대운하가 그 전 논지를 바탕으로 구체화 한 예로써 온다면 논리적이지 못한 태도이다. 이러한 논리의 도약은, 국민들은 대운하의 과거 패러다임이 아닌 두바이를 넘어선 패러다임을 대통령한테 원한다고 한단다. 두바이는 과거의 패러다임을 과감히 넘은 면이 있기에 거의 전방위적 개방과 과거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그러나 도올의 논지는 이것을 부정하고 문화가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 전의 논지였는데, 두바이처럼 과거의 패러다임을 부정한 점을 부정하면서 대운하를 부정하고 두바이를 뛰어넘으란다. 이것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을 가진 논리전개인가? 여기저기 도약이 너무 심해서, 마치 좋은 명언들을 명언록에서 빼내어와 서로 관련이 없는 명언들을 붙여서 글을 쓴 것과 같지 않겠는가? 이러한 글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까? (있다면 현실은 외면하고 명언이라면 관념적으로 숭배하는 자들에게는 있을 것이다.) 좋다 인내심을 가지고 도올의 말를 따라 계속 사고를 해보자.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두바이를 뛰어넘은 패러다임으로 나갈까? 그 아래를 보자.

아니나 다를까 관념주의자 아니랄까봐 천운이야기가 나오고 만다. 대권을 먹은 천운이 가난한 고교 시절의 야학교사를 하던 당시의 이명박보다 더 위대한 운세를 가져다 주겠느냐다. 대통령의 책임과 수행하는 일의 성질, 야학교사로써의 책임과 수행하는 일의 성질은 근본적으로 달라서 같이 비교할 수없는 것인데, 필자는 잘 모를 운세라는 것이 논의되는 세상에서는 두 개가 서로 비교가능한가 보다. 더 위대한 무언가를 가져다 준다니 말이다.

필자의 이러한 비판이 존경받는 도올에 대한 가혹한 지나친 비판이 아니냐 할지 모르나 그 아래 말을 보면 전형적인 상위계급의 하위계급에 대한 왜곡된 이해, 오류의 해석이 그대로 들어나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곧 한국 국민들은 “오순도순 초가삼간에서 솜이불 덮고 화롯불을 끼고 숙면하는 하룻밤을 더 사랑할 수도 있소. 번쩍이는 이불 덮고 눈을 뜨니 1만5000달러? 글쎄올시다.” 이와 같이 생각할 것이라고 대통령에게 고하고 있는 것이다. 곧 도올에게는 대통령에게 고할 정도로의 확신이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많은 예를 차치하고 비근한 예 하나만 들어서 저번 4월 9일 총선의 결과를 보고도 이러한 한국사회에 대한 이해가 온전히 설 수 있을까? 학자로 보자면 겁 모르는 다섯 살짜리의 방자한 태도같지 않은가?

그 아래 단락을 보면 대운하는 이명박이 화끈하게 단기간 안에 뭔가를 보여주려는 강박적 심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그런 강박심리를 버리라고 한다. 이 얘기가 이 전의 얘기와 얼마나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인내하기로 했으니 내성은 생긴듯하다. 그러면서 나오는 이야기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친근한 태도를 보인 것 같이 김정일 위원장에게도 호방한 악수를 청할 수 있는 호방한 여백을 보일 수 있을 때 위대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관념적 인식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관념 숭배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겠기에 호방한 태도가 있다면 위대한 대통령이 된다는 순진한(?)(혹 음모적) 표현을 만들어 쓸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 뒤를 보면 더 가관이다. “실리는 다원적 전략과 추상적 지혜에서 얻어집니다.” 과연 추상적 지혜에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현실의 땅에 두발 딛은 기술적이라기 보다 관념적이다. 그 뒤에

“대미동맹만큼은 한국은 유례없이 충실한 우방의 자세를 견지해 왔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과도하게 미·일 일변도에 매달리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외교 문제는 어느 나라와의 동맹이 대체적으로 어떠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러지 말자라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복잡하고 미묘한 것으로 많은 케이스에 있어서 분석해봐야하고 또 여러 방면으로 나누어서 접근해야 하며, 그래서 때론 어느 부분에 있어선 충실한 우방을 넘어선 더 긴밀한 우방이 되어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복잡 미묘하고 다방면으로 나누어 각기 평가하고 접근해야 할 외교문제를 유례없이 충실한 우방이었기에 좀 덜하자라는 말이 현실 속에서 두 발 딛은 가장 책임이 큰 대통령에게 할 수 있는 성질의 말은 아닌 것이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관념의 독소에 취약한 정신인가? 그 뒤에 “일제 청산도 가치를 바르게 정립하자는 것뿐입니다. 인물을 증오하는 것이 될 수는 없겠죠. 모든 것을 혼동하지 말고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십시오. 할 말은 너무도 많소. ” 물론 관념적으로 현실을 바라볼 때 일제 청산이라는 과제가 인물을 증오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한국사회의 현실 속에선 매우 감정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또 그러한 태도가 방조, 아니 조장되었으며 또 미덕으로까지 여기도록 감정의 광풍에 의해 형성된 지형이 한국 사회의 환경이라고 보았을 때, 이러한 현실적 지형이 도올에게는 안 보일 수도 있다. 그러니 인물을 증오하는 것은 될 수없는 것이다. 이슬람권에 모든 민족적 운동은 남을 미워하자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론 자살 테러를 하는 것이다.

마지막 문단이다.“우리는 문명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이 너무 다르오. 그러나 이 서생의 간언에 한 번이라도 충심의 귀를 기울인다면 당신은 더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되리라고 확신하오. 천국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미 와 있소. 안녕.”

그러곤 위와 같이 다시 문명을 보는 패러다임이 다르다는 생뚱맞은 이야기가 나온다. 또 도올의 간언과 새 패러다임과 우리의 패러다임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맥락 상 천운, 시의를 더 얻게 될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마치 관념의 암흑시대에 이를 이용한 예언자의 모습과 같이. 역시나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을 해주고 있으며 다시 예언자의 말과도 같은 생뚱맞은 좋은 말이 다시 나온다. “천국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미 와 있소” (구태 지식인과 연관된 보다 구체적 한국 현실에 대한 지적은 다음에 또 이루어질 것이다.)
*
정신 분열자의 생뚱맞은 그러나 연관있는 것 같은 말들의 연속은 필연적으로 연속적 도약의 양상을 보여준다. 정신분열자가 자신의 인식구조에 의해 스스로 쓰러져버려 현실 속에서 온전히 두발로 서서 살아나가지 못하듯, 한 사회가 이러한 언사에 의해 정신에 의해 영향을 받는 다면 그 비효율은 실로 막대하다 하겠다. 우리사회의 문명의 가야할 길은 실로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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