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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낡은 좌파적 군중 선동을 멈춰라"

진중권의 그릇된 용산참사 해석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 스스로 낡은 단어인 “좌파”라는, 낡은 개념의 틀 속에서 나온 정의 속에 머물고자 애쓰는 단체들은, 스스로 혹시 낡은 개념의 틀 뿐만이 아닌 자신의 태도마저 역사 속에서 부작용이 심히 방대하고 낡아 폐기처분된 저열한 태도로 움직여 지는 것은 아닌지 신중히 고찰해 봐야 한다.

진교수는 개혁적 지식인 중에서도 스스로 자신은 왼쪽임을 줄곧 주장해온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정치적 스탠스야 어떻든 상관하지 않지만, 만약 좌의 스탠스를 좋아하면서, 이미 낡아빠져 세상 사람들이 매우 조심해 하는, ‘좌’쪽 사람들의 낡은 악습을 그대로 이용한다면, 그 좌쪽 스탠스는 위험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상황에서, 2월10일 진교수가 진보신당 게시판에 올린 글을 보고 안타까움으로 현기증이 일어났다. 바로 그러한 낡은 좌쪽의 구태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알고 그런 것인지,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니면 모르고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논리적 사고가 뛰어난 진교수임을 고려했을 때, 필자의 직감으로는 좋지 않은 쪽에 더 무게가 실리기에, 그와 반대되는 수준을 더욱 인식하면 할수록 비례해서 현기증이 일어났다.

그 글의 면면을 보자. 진교수는 용산 철거민 사망 사건을 “강경진압이 대형 인명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험을 인지하고도 경찰에서 무리한 진압에 나섰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무리한 진압이란 표현은 어차피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표현인데 그 주관적이어서 무리할 수도 무리하지 않을 수도 있을 행동임에도, 어쨌건 죽임이 일어났으니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혹“아무리 작게 잡아도 ‘과실치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사실 무리한 진압인지 아닌지 조차 이 사태의 원인과 결과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무리한 진압이 아닐 수도 있는데, 적절한 근거 제시없이 대형인명피해가 나올 수 있는 상황임을 알고도 그런 것이기에 동시에 그런 인식이 있었고 인명피해가 여럿 났으므로 바로 무리한 진압이라는 것으로 위 문장은 해석된다.

그러나 폭탄을 가지고 경찰이든 무고한 시민이든 용역업체 직원이든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고 또 자신도 자살할 듯이 목숨을 담보잡고 있다면 신속한 진압이 가장 사회적 이익에 부합한 방법이란 판단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더한 경제적 이익을 얻고자 시위하는 사람들인데 자살을 택함으로 더 중요한 생명을 버린다는 것 자체가 일단 모순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법까지 어겨가며 대치하고 있는 감정적인 정신상태에 있는 그들이 그 생명을 위협하는 도구를 무고한 사람을 침해하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직접적 혹 간접적 침해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태도를 방조한다는 것도 무책임한 것이 될 것이고, 더한 무책임한 태도를 다른 곳에서 낳게 할 것이며 그래서 신속한 진압이 가장 책임있고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태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묻고 싶은 것이 모든 신속한 진압이 잘못된 것인가?
일단 신속한 진압이 잘못될 수 밖에 없는 원인을 적시해야 하지만 사람이 죽었다는 이유 외에는 없는 듯 하다.

신속한 진압 중 도구로 위협하던 사람들이 도구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실수로 죽는다 해도, 마땅한 신속한 진압이 갑자기 마땅치 못한 것이 되는가? 인명을 위협하며 인질극을 벌이던 분자가 잘못하여 실수로 폭탄을 터뜨렸다면, 혹은 경찰의 접근을 막으려고 경찰에게 맞으라고 이를 던졌다가 자신들이 죽었다면 이는 경찰의 책임인가?

몰론 신속한 진압 외에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는 가능성 마저 부인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신속한 진압 또한 사용가능한 옵션 중에 하나였고, 죽음이란 것은 생명을 담보잡고 싸우는 상황에선 다른 방법으로도 발생할 수 있었던 것으로, 예를 들어 치명적 새총을 발사하여 무고한 시민이 맞아죽는다면 혹 용역업체 직원이 맞아죽는다면 이는 누가 책임 질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또다른 측면으로 치명적 피해가 발생할 것을 예측하여, 가장 피해가 안 나올 것으로 판단된, 하나의 사용가능한 옵션을 사용한 것을 그 행위자체를 결과를 가지고 욕하는 것은 비겁한 태도라는 것이다. 특히나 직접적 원인이 그들에게 있고 너희들 책임이라며 전후 사정을 고려하지도 않고 몰아붙히는 것은, 사안의 올바른 전후 관계 인식 자체를 막고 왜곡을 유발하기에 더욱 잘못되었고, 또 다른 문제를 수반해 올 위험한 감정적 사고이다.

그러나 진교수의 글은 사망이 마치 경찰 탓이라는 쪽으로 사태의 핵심을 돌리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히 보인다.

진교수도 이러한 애씀을 사실 인식하고 있는 듯도 보이는게 “발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은 이번 사태에서 부차적 중요성을 갖는 문제일 뿐” 이라고 한다.
어차피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 벼랑 끝 목숨 건 시위에 의해, 죽음을 도구로 이용하며 시위하던 방법이, 그 죽음이라는 콘트롤하기 힘든 도구에 대해 컨트롤 능력을 잃고 그만 사용한 자가 도구에 의해 정복당해 사망하게 된 사안임을 알기 때문이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부차적일 뿐이고 다른 중요한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사건이 검찰 수사까지 가고 수사발표까지 이르게 된 핵심은 바로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죽지 않고 그냥 쫒겨 났다면 이처럼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리도, 두 좌파정당이 그렇게 정권의 정통성마저 없어졌다며 감정적 인식에 호소해 무책임한 저열한 선동을 마구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쨌건 부차적이라는 이상스런 정의 뒤에 바로 다음과 같은 사건에 대한 해석을 내놓는다. “<앞으로 이와 유사한 사태가 벌어질 경우 경찰에서는 동일하게 대응하여 또 다시 대형참사를 일으켜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 라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태가 과연 목숨을 건 시위에 의해 그 위험한 도구를 잘못 이용하여 그 도구에 의해 죽게 된 사건을 이야기 하는지, 아니면 과격 불법시위를 이르는 것인지 일단 알 수 없다. 두 사안이 매우 다른 사안임에도 ‘동일하게 대응’ 이라는 하나의 말로 포괄하고 있다. 그렇다면 불법시위에 대한 모든 진압은 과잉진압인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벼랑 끝 전술을 펴다 시위자가 실수로 벼랑 밑으로 떨어지는 것은, 무고한 사람의 안전까지 위험한 상황에서 진압이 정당하였든 아니든 경찰 탓이고 과잉진압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곧 불법시위에 대한 신속한 진압이 그 정당성과 관계없이, 적절한 근거제시 없이, 갑자기 죽음으로 내몰리게 된 직접적적 원인으로써 연결되고 있고, 그래서 과잉진압이 되는 것이다. 이로써 모든 국가권력의 행사에 대해서 공포와 그에 다른 불신은 조장되게 되며, 이는 참으로 자의적(恣意的)인 편리한 해석이고, 그래서 서로 관계없는 것을 자의적 주관적 해석을 통해 하나의 공통된 것으로 동일화 시키는 것이다.

곧 위에서 보았듯 발화의 직접적 원인은, 진교수도 사실은 인식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경찰의 책임이 아니라 한다면, 과잉진압에 의한 사망은 아닌 것이고 “사망”이 있었기에 그것이 과잉진압이라는 논리도 성립되지 않는다. 진압이 과잉했는지 아닌지는 당시에 일어나고 있는 사실적 근거를 종합해서 판단 내려야지, 미래에 일어날지 안 날지 모르는 것을 가지고 와서 과잉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곧 이는 지난 미네르바 관련 글에서도 논의되었던 것과 비슷하게, 이미 일어난 사실을 고의로 왜곡한 것은 법적인 책임을 저야 할 수 있으나, 예측할 수 없는 미래까지 책임지라는 것이야 말로 공포정치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진교수를 포함한 군중들은 이 대통령의 주가 3천 발언까지 문제를 삼고 나타나는, 군중의 공포정치를 연상시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어차피 과잉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관적인 단어이기 때문에, 더 정교한 대응방법이 개발되어 나온다면 그것에 비추어 과잉했다고 할 수도 있으나 어차피 이러한 시위 케이스 자체가 워낙 드문 것이고, 그래서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무조건 과잉했다는 것은 마치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죄인이라는 말과 같이 공허할 수 있는 것이다. 곧, 인류의 문명이 더 발전한다는 믿음 하에, 미래의 더 발전한 문명의 그것에 비하면 모자라다고 하는 태도와 같이 공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필자같이 현실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의 기준에 의하면 과잉, 곧 지나치면 모자라거나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에 해당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위자들의 과잉대처에 의한 죽음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신나를 뿌리고 화염병을 쓴다는 것은 누가 봐도 가장 존귀한 생명이라는 것이 없어질 수 있는 위험해지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상황인데, 이를 무릅쓰고 그러한 판단을 내렸으며, 그러다 그 생명이 바로 자신들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찰이 법적인 책임을 지는 것은 더욱 말도 안 되고, 그래서 검찰의 사건에 대한 표현은 수긍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진교수 등 정말 생명의 존귀함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면 그 억울하게 죽은 경찰 자신과 그와 관련된 사람이 입은 피해는 누가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 또한 알려주길 바란다. 그래야 누구나 어느 경우에라도 조심하여 진정 누구든 죽는 것은 피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아니면 이렇게 감정적 왜곡된 인식을 조장하고 선동하는데, 사실 거대한 목적을 위해선 타인의 생명은 이용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저열한 윤리의 식상한 낡은 좌파적 선동 논리인가?

그래서 진교수는 그 사망에 이른 직접적 원인인, 치명적 결과를 일으킬 수 있는 도구를 이용하려 휴대하고 있고, 또 직접 사용까지 하였다는, 화재로 인한 죽음을 일으킨 이 직접적 원인은 애써 부차적이라고 정의하며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이 가장 중대한 원인이 ‘부차적’이고 진교수의 글에서 보이듯 무시하고 지워버려도 되는 것이 되는 상황에선, 가장 큰 책임은 곧 유일하게 남은 경찰 쪽으로 넘어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찰의 불법과격시위에 대한 모든 정당한 신속 진압조차도, 모두 ‘대형 인명 참사’리는 공포스런 이미지와 직접적으로 바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이는 그 진압이 정당하던 아니던, 모두 죽음으로 내모는 무책임하고 잔인한 자들과 한통속으로 이미지화 되는 것으로, 이러한 논리를 거대한 감정적 정서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고 체화한 사람들은 모든 무력을 띈 진압을 자신들을 탄압하고 공격하는 것으로 적으로 받아들일 것이고 그래서 더 가열찬 투쟁이 마땅한 것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진교수는 그래서 경찰이 바로 살인면허를 받은 007이 됬다고 간단하게 제목을 달아주며 이미지화 해주고 있다. 그 목적이 제목에서 이미 잘 들어남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위에서 지적한 비약적 인식은 그 아래에 쭉 전개되고, 자신의 글을 볼 진보신당의 어린 학생들을 대신해서 감정적 인식 속에 가능할 사고를 대신해서 손잡고 가이드 해주고 있고 이를 확대, 증폭, 공고화 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적 정신 상태에 있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정당성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어떠한 소통도 불가능한 현재의 좌파정당의 하위에 속한 인들, 젊은 회원들을 낳는 고질병이 아닌가 한다.

그 아래 보면, 진교수는 이 대통령의 이 사건에 대한 발언 중, 일 하다 실수한 것을 처벌할 수는 없다는 발언을 인용하며 이는 곧 정권이 앞으로 과잉진압을 할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라 했다. 곧 모든 진압은 각 사안마다 그 원인과 결과를 차근차근 분석하여 인식하는 것 없이 바로 편리하고 신속하게 과잉진압이 된다는 결론이 여기서도 그대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이 논란의 여지가 많을 과잉진압인지 아닌지에 대해 진교수 또한 가장 결정적인 중요한 원인은 바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다못해 운전수가 사람을 죽여도 실수를 묻는다며, 여기서 또다시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된 발화물질과 여기에 불을 고의든 실수든 붙히게 된 것은 사라지고, 오직 죄 없는 선량한 보행자 혹 승객과 부주의한 혹 무책임한 운전사만이 남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적절치 못한 예시이다. 폭탄을 가지고 죽음과 목숨을 도구화 하여 위협하던 사람이 그 도구를 컨트롤하지 못해 그 도구에 의해 정복당하여, 곧 실수든 뭐든 폭발하게 되어 죽음에 이른 그들의 치기어린 무책임함과 비윤리는 사라지고 없다. 마치 미네르바를 그려내던 그들의 언사와 같이.

그렇지 않고 이 폭탄으로 위협한 것 대신 폭탄과 위협을 제거하면 그 곳엔 선량한 철거민과 물리적으로 이들과 대립하던 힘 센 경찰만이, 그리고 그 뒷 장에는 그 선량한 시위자의 죽음만이 남게 되는, 왜곡된 그림만이 남는다. 그럼으로써 죽음의 직접적 원인을 경찰에게서 찾는, 그래서 경찰의 모든 행위가 곧 죽음의 가장 큰 원인이 될 수 있는 과도한 것이 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삭제되고 왜곡된 도화지로 사태를 보여주고, 이 왜곡된 그림으로 사태를 인식한 군중들이 그 고의적으로 홀로 남겨진 의도된 적에 대해 감정적 적대감을 가지면 바로 낡은 좌파 집단의 오랜 목적은 잘 달성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진교수는 다음과 같이 다시 한번 해석해준다. 곧 '무리한 진압으로 철거민들 죽여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라는 말로 왜곡 해석해 주어 사람들의 부정적인 정신 상태인, 감정적 인식의 소용돌이를 한 번 더 휘져어 주고 있다.

이는 당시의 경찰의 있었을 수도 있는 선의지를 근거 없이 먹칠을 하는 것이다. 동시에 앞으로 이러한 결과를 통해 더 세밀한 작전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선의지 마저 먹물로 가려버리고, 없다며 근거 없음에도 먹칠하고 왜곡한 이미지를 선전하여 소모적 소요를 촉발하는 것이다. 이야말로 무책임한 일하려는 사람을 근거 없이 비방하는 유치한 애들 같은 훼방이다. 애들이야 하다가 심함을 알면 안할 것을 기대하지만, 구체적 이익의 달려있다고 이해하는 지식을 가진 자들이 낳는 폐해는 더욱 심할 것이다.

과연 경찰이 그들을 죽일 의도가 있었는가? 죽일 의도가 있었으면 왜 소화하고자 물을 뿌리고 또 도중에 신나라는 화학물질에 의한 발화이므로 물을 뿌려선 안 된다는 경찰의 목소리가 나왔을까?

경찰이 자살하려는 사람을 자살을 계속하게끔 할 의도로 죽으라고 마구 들이댄 것인가? 아니면 설마 예측하지 못한 행동을 이들이 취한 것인가? 이 불법과격 시위자들이 그 폭탄을 경찰이나 용역인들에게 사용할지도 모르는, 역시나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 마땅할 수 있는 신속한 진압을 하려한 것이, 무조건 이들이 죽으라고 몰아간 것이라는 유일한 의도로써 해석되어야만 하나. 그렇게 해석되어야만 할 어떠한 움직일 수 없는 근거라도 나온 것이 있는가? 그렇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비약적 결론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인식으로만 초점을 맞추어 논지를 전개하고 대중에 배포하는 것이 되는데, 이 무슨 해괴한 그러나 너무 식상한 태도인가?

진교수 조차 어떤 결정적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기본적 선의지조차 부정하고 있으며, 이렇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인식이라는 공통된 가치의 존중이라는 태도가 없으면 토론 자체가 불가능 해진다. 진교수의 언사가 바로 이러한 상태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또 이러한 인식을 조장하고 미화함으로 그런 약한 정신 상태로 계속 살아가고 행동하는 것을, 이 약한 정신의 저급한 윤리를 오히려 미화하고 있고 그래서 영원히 아이와 같은 정신 수준의 국민으로 남아있길 원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토론이 불가능한 젊은이들로 인해 현기증을 일으키게 되고, 또 더 나이든 사람들, 특히 하부에 위치해 있는 당원들로부터도, 서로 공통적으로 존중되는 가치 위에서 비로소 있을 수 있는 토론이란 것이 일어날 수 없고, 전쟁터와 같은 누가 이기고 지냐, 죽고 사냐, 강자가 살고 약자는 패배하고 죽는 비열한 투쟁의 현장으로 몰고가는 정신으로 셋팅된 사람들이 많은 고질병이 존재하는 곳이 한국의 좌파정당이어 왔다, 이는 한국 좌파 지식권력인들이 남들이 발전시켜 놓은 것을 안좋게 받아들여와 이용하였기에 만들어진 텃밭이어서 그렇기도 한데,(물론 좌우를 떠나 모두가 이를 이용해오고 한국문화자체가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진보신당 게시판에 그렇게 장난치듯, 그런 수준의 글을 올린 것인가?

이러한 지식권력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장난쳐 놓은 정신 수준이 바로 토론이 불가능하고 소모적 투쟁과 소모품으로나 쓰이는 개발되지 못한 노예적 군중들을 낳고,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가 안 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근본원인 중에 하나임을 마땅히 보고, 필자가 인식하기에 민주주의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공통된 가치를 가졌다고 보고 있는 진교수부터, 스스로 돌아보는 것이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특히 좌파 쪽에서 이러한 장난을 악용해 왔는데 스스로 같은 낡은 추한 모습을 내재화 한 것, 이는 부끄러운지 알고도 무슨 대단한 목적이 있기에 이를 위해 알고도 일부러 그런 것인가? 아니면 저열한 유전을 반성 없이 게으르게 유전 받아서 진화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발작된 것인가? 진화되지 못한 낡은 것에의 안주는 도태와 멸종의 심판이 기다리는 것으로 심판이 오기 전에 매일 같이 새로 태어나는 자세로 진화로 나와, 자신이 지닌 지식과, 길러진 정신의 힘을 좋은데 쓰는 역할을 해주길 기원한다. (장하준, 우석훈 등 낡고 식상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그것을 비판해 보일 기회는 다음에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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