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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을 주장하는 사회와 낡은 지식인들

문명의 강한 힘과 자연적 권력 앞에 공포를 가진 야만사회의 신경증적 정서

한국사회는 강력한. 철권통치, 피의 통치를 획책했던 공포의 행정부를 가졌던 비극적 역사를 겪었었기에, 현재의 국민들이 법치와 현 정부에 대해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신경증적 두려움과 거부 반응도 이해가 안가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거의 음영 속에서만 계속 안주하려 하면, 발전과 진화로 나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어두운 정신의 몽매 속의 야만사회도 자신의 인식의 틀 속에 머물고자 하면 밝은 문명으로의 진화발전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문명은 이들과 진정한 소통을 하려하고 손 잡아 주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러한 간극에 지식인들과 언론, 시민 단체들이 들어가서 그 간격에 다리를 놓아주고 그들을 문명적이고 이성적, 합리적 정신의 밝은 빛으로 이끌어 주어야 할 것이나, 한국의 낡은 지식인들은, 그들도 야만적 여성적 문명의 자식들 아니랄까봐, 군중의 비합리적인, 왜곡된 정서 속에 오히려 안주하게 하고, 발전시키도록 하며, 이를 통해 강렬해진 집단 군중, 피해의식의 강렬한 감정, 이 거대한 감정의 힘을 자신의 영향력, 권력을 도모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문명을 거부하며 도망가고, 문명에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야만인들, 그들을 몰살할 것이 아닌 그들이 문명사회로 진입할 수 있도록 눈높이를 맞추고 손잡아 이끌어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두 개의 다른 문명 속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기능을 기르고 그럼으로써 각 진영의 책임감 있는 문명의 건설자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그러나 야만문명의 야만성을 기르고 타 문명에 공격적인 그것을 마치 그 문명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로써 보존받고 길러야할 그것으로 보고 이를 획책 고무 발전해야 한다는 옹호논리를 가지고 온다면 그 지식인이야 말로 야만문명의 사악한 주술가로써, 진중권 교수의 비유로 말하자면 이것이야 말로 ‘배후에 있는 사악한 거대 권력’ 에 해당하는 것이다.

6월 18일 오마이뉴스에 실린 진교수의 기사를 보면 필자가 위에 지적한 그 것을 떠올리게 해 유감이다. 한국인들의 갑작스럽게 맞이하게 된 온갖 신기한 문명적 도구 앞에 발생한,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과거 경험에 입각한 거부감과 공포감이 존재하는 한국사회에서, 지식인으로써의 진교수는 이를 해소하고, 그들이 합리적이고 발전적 태도로 나아옴으로써 책임감 있는 구성원이 되도록 이끄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닌, 기존에 조성된 강렬한 잠재적 태풍과 같은 강렬한 정서적 에너지를 어떻게 키워서, 그 위에 자신이 타볼까 하는 의도를 가진 기존의 낡은 야만문명의 사악한 주술가와 같은, 낡은 한국적 지식인들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먼저 진교수는 이명박 대통령의 정신에 삽 한 자루 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진교수가 정말 세상을 이렇게 보는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혹시 진교수가 지금 앓고있는 불면과 두통이 이러한 세상인식에 기인한 것이라면, 약물치료만으론 한계가 있을 것 같다. 혹시 모르지만 주위에 비슷한 왜곡된 세상인식 구조를 가진 동류끼리 어울리면, 그러한 편협하고 왜곡된 인지에 의한 부정적 정서는 심해졌으면 심해질 뿐이고, 순간의 마약이나 알콜 음료로 잠시 나쁜 감정을 가라앉게 할 순 있어도 깨어나 다시 같은 환경에, 곧 감정의 격랑 파도가 몰아치는 해변가를 떠나지 않으면 다시 그 고통은 용수철 달은 조류처럼 더 급격히 몰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슷한 생각구조 속에 있는 사람과 의견을 나누며 부정적 정서를 해소해 보려 하지 말고,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그 강렬한 정서를 내 보이려고 해 볼 것이다. 물론 이는 어렵다. 한국사회가 이처럼 마음을 열고 인간적으로 잘 들어줄 수 있는 포옹할 수 있는 정신그릇이 도야된 사람이 많지 않다는 어려움도 안다. 그럴 때는 차라리 전문적 상담가 앞에서 자신의 사고를 하나하나 나열하여 속내를 풀어볼 수도 있다. 진교수의 글을 보면 정서적으로 그 고통의 크기가 느껴지기에 더 그렇다. 이는 반드시 상담가로부터 교정, 계도를 받으라는 말이 아니니 노파심에 언급하고 넘어간다. 자신이 하나하나 세세하게 나열함으로 자신이 다시금 회의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거기서 발전, 극복, 늪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길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진교수 정도의 이성의 힘이면 그 길을 발견할 수 있을거라 믿는다.

동시에 지식인은 바로 이러한 자신의 사고를 세세하게 나열해 본 후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는 행위가 잠시도 쉴 수 없는 지식인으로써 생명과 같은 행위인데, 이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국적인 지식인들이 국제경쟁력이 없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국제적으로 어느 정도 이름이 있다는 지식인들의 인식을 분석해 보아도 낮은 수준의 오류까지 범하고 있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래서 국제 지성계에선 더욱 정교한 인식론적 기술이 조명을 받는 것이다. 다음 주부터 서점에 유통될 필자의 <희망을 위한 경제관> 또한 장하준, 우석훈 등 낡은 한국적 지식인들의 인식론 상의 문제를 지적하고 극복한 저서이다.)

바로 이러한 보다 진정한 인식론이란 무엇일까가 조명 되어진 주류에서, 운명적 필연적 필요에 의해서 현대에 글로벌적 화두와 같은 소통이라는 것이 대두된 것이겠기에, 진교수도 화를 가라앉히고 선입관을 배제하고 마음을 열고 들어보기 바란다.

필자가 경험해본 낡은 한국적 지식인들은 바로 이 집단지성이라는 것과 거리가 많음이 전형적 특성이었다. (꼭 한국 뿐만은 아니라 인간이면 범하기 쉬운 취약함이라 하자.) 진교수의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진교수도 집단지성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욱 이 대통령이 국민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 진교수는 이명박 대통령이나 그 밖에 4대강 사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 또한 귀 기울여봐야 할 것이다. (특히 이번에 나온 <희망을 위한 경제관>은 4대강 사업이 보다 긍정적으로 나갈 수 있는 방향에 대해 다룬 부분도 있다.) 그러나 필자도 진교수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지 않았을 거라 보지 않는다. 진교수의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인식이 ‘나라를 위한 다고는 하나 그 방법이 낡았다, 그 이유는 머리에 ’삽 한 자루‘ 정도로 낡고 단순한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로 귀결되었다는 점에서 귀는 기울여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대통령 또한 진교수를 포함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같은 류의 인식을 하고 있을 수 있다. 귀는 기울여 들어보았지만 역시나, ‘정신에 삽 한 자루 들은..’ 정도의 낮은 수준인 것으로 여겨지면 이 대통령도 진교수 같은 태도를 취하거나, 지금 나오는 태도로 봐선,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니 그것이 사용된다는 느낌을 약한 대중들에게 주면 안된다는 윤리의식으로 그냥 못들은 척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반대하는 사람은 이 대통령이 듣지 않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진교수가 4대강 사업이 좋다고 홍보하는 말을 듣지 않는 이유는 받아들일 만한 수준이 되지 못하고 내용도 나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대통령과 그의 정책에 대해 나오는 많은 비판 또한 사실 상대에겐 그 정도 수준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 소통이 되기 위해선 귀 기울여 듣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상대가 받아들이게 되는 자신에게 말하는 태도가 어떠한지에 의해 소통이 될 수도 있을 문이 열리는 것이다. 위에 사용한 비유를 들면 야만인들한테 무식하고 나쁘고 사악하다며 욕하며 계도하고 고쳐주고 안하면 욕하고 벌주고 하는 식으로 나오면 더 도망갈 뿐이다. 그 정당성을 부여한 논리와 이성으로 따지면 마땅한 행위로 나올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그 내용 뿐만 아니라 그 접근 방식과 말하는 태도가 중요한데, 자신의 말들이 상대에게 받아들여지고 관심을 가지고 들어볼 만하게 가공되어 다듬어져 상대의 마음에 앉힐 만한 것이되야 그에 맞는 대접을 할 것이기에 그렇다. 곧 상대에 대한, 상대가 서있는 환경적 토양, 그리고 심리상태, 인식 상태 등, 보다 더 넓은 인식의 토양이 되어 있어야, 보다 질적인 차원에서 높은 인식이 되는 것이다.

특히 나이라는 숫자에 자동적 권위를 부여하는 우상숭배적 정신이 아니라면, 모든 육체적 연령의 성인의 정신 수준이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으란 법이 없다라는 현실적 토양의 인식도 더 넓혀보자. 그래서 만약 이들이 하는 이야기가 어린아이의 땡깡 같은 수준의 말이라면, 그리고 집단으로 그러한 수준으로 떠들고 있다면, 부모와 같은 입장에서라면, 가장 적합한 태도는 그 자연적 들끓는 감정의 회오리 폭풍이 지나가길 그냥 기다릴 것이다. 어린아이가 밥상이 마음에 안든다고 투정하며 밥상을 엎어버린다면, 없는 살림에 말대로 좋은 밥상을 차려 내오는 것이 아닌, 그냥 그대로 놔두는 것 같이 말이다. 한국적 지식인은 바로 교도적 폭력을 생각하겠지만.. 그러한 문명적 토양의 결과가 바로 과거 피의 군사 철권통치였다고 본다.

이처럼 모든 말이라고 해서 다 들을 필요는 없기 때문에, 합당한 수준이 되야 귀 기울여 듣는 것을 넘어 관심을 기울여 주고 마땅한 대접을 베풀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논리로 국민모두가 그러한 정신적 수준이, 인식적 수준이 그래서 윤리적 수준이 돼서, 효율적인 방법으로 말과 태도를 잘 가공해서 한다면 가장 좋을 것이나 그렇지 못한 현실적 토양에 서 있음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도 듣기야 듣겠지만, 그것을 잘 가공해서 자연적 감정에 의해 왜곡된 인지와 감정적 비약적 결론 등등 이러한 것들을 다 판단하여 잘라내버리고 다이아몬드 원석만 추출해 내서 취한다는 것은 그 만큼 시간과 에너지가 더욱 소모되는 일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이러한 형태의 서로 다른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면, 자연 그 중의 하나하나일 개인들은, 더 나아가 보다 큰 부류로써의 집단들은 자신의 말이 더 받아들여지고 반영되어지고 있지 않다고 느껴질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한국의 현실적 토양을 고려할 때 정권 잡은 자와 그 정부가 소통이 안 된다는 말로 욕먹을 일은 피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동시에 중요한 것은 그러한 비판이 있기 전에 또한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그들의 정신, 마음, 심령에 잘 구매(buy)될 수 있을 만치 좋은 상품을 가공하여 만들었는지 또한 동시에 반성해야 하는 부분이다. 말마따나 성질난다고 밥상 엎으며 뭐 달란 식의 말과 태도로 뭔가 이루어지길 기대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소통이라 할 때 단순히 관념적으로 귀 기울이면 된다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기술적인 부분에서 연습도 없고 그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가고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한 인식도 없었기 때문에, 그간 소통을 아무리 떠들고 서로 귀 기울이자고 구호외치고 운동해봐야 소용없는 것이다. 여기 소통은 다시 ‘진정한 인식론’적 문제임이 들어난다.

과거의 강렬한 정신적 충격은 현실에서 트라우마를 낳아 현실인식에 대한 왜곡된 인지를 낳게 된다. 특히 비윤리적이고 자연적 위계질서에 의한 권력을 부여받은 비윤리적이기 딱 좋은 한국의 권력들은 더욱 폭력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임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 살아온 한국인들이 본능적으로 커다란 권력에 대해 신경증적인 공포와 회의적 시각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처받은 정서에 의한 과거의 강렬한 인상이라는 테두리에 갇힌, 갇힌 인식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사람들은 역시나 낡은 야만문명의 사기꾼 같은 주술사라 할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시민 사회단체 등에서 중심적 자리에 있었을 교수들이, 현 정권이 시민 사회단체에 대해 노무현 정부 때 만큼의 정책입안 참여를 못 받게 된 것에 대해, 시절이 참으로 문제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그렇다기 보다, 때로는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이익논리에 빠져있어서 굳이 의사결정의 깊숙한 곳에 참여시키지 않고, 간접적으로 누군가를 시켜서 좋은 부분만 추출 가공하여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점도 모든 국민은 가능성을 열고 생각해봐야 한다. 이는 더욱 예산 낭비를 막고 마땅한 곳에 사용될 수 있기 위한 현 정부의 선의지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사회 속의 복잡 다양할 관계의 모습들을, 단순히 소통이 있다 없다로 이분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보다 소통이 되기 위해 인식론 상에 어떠한 문제가 있고 이 인식 상의 오류와 그 지평의 좁음을 논의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해야 소통을 위해 정확히 현실적으로 어떤 장애가 있는지 알고 이를 해결하여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지 어느 때나 장소에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귀 기울이자 같은 소리나 힘주어 말하는 것이 아닌 말이다. 상대가 자신에게 답답함을 일으킨다면, 우리 모두 자신들의 인식 상에 어떠한 한계가 있었는지 먼저 고찰해봐야 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낡은 한국적 지식인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작업은 지속될 것이다. 먼저 4대강 사업과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의 인식이 얼마나 적실한 것이냐에 대해 다루어 볼까 한다. 진교수는 자신의 글이 그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자각하고, 또 오늘 올라온 글이 필자로 하여금 그 대상으로 삼고 싶은 구미를 당겼다는 점을 주지하기 바란다. 단순히 두통과 불면만 탓하지 말고, 자신의 외부에 대한 글과 태도가 그러한 중상을 북돋는 원인도 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특히 그러한 태도가 습관이 되어버렸다면 더욱 좋지 않은 것으로, 그러한 패턴으로부터 완전 탈피하여 안식년 같은 것이라도 다녀오면 어떤가 한다. 외부에서 주지 않아도 자기자신이 자신에게 스스로 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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