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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의 조건은 바로 '태도'이다

흙 하나도 세심하게 감각하려는 태도를

어떤 분야에서든지 전문가, 장인master가 되기 위해선 태도가 결정적 요인이 된다고 하겠다. 일단 좋은 태도를 가져야 할 터이다. 곧 사업가가 되기 위해선 모든 방면에서 신뢰를 추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고, 학문을 탐구하는 길을 가면 학자로써의 미덕이 되는 자질을 갖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도기공이 되기 위해선 흙 하나도 세심하게 감각하려는 태도를 갖는 것부터 필요하다고 해야겠다. 이렇게 각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써 필요한 미덕을 갖는 태도부터 가져야하고 그 분야에서 “~쟁이” 정도의 전문가가 되려면 그러한 태도가 습관이 되버려야 한다. 그래서 좋은 습관이 그 영역에서 한 사람의 성공을 가져다준다.

1. 빅뉴스에서 진중권 교수의 전문성 등 낡은 한국적 권력형 지식인들의 전문성을 비판한데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곧 필자가 지난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진교수는 이명박 대통령의 머리에는 “삽 한 자루” 들어있는 수준이라고 평가하는데 학문을 업으로 삼는다는 진교수가, 만약 학계에 이명박 대통령의 정신이 어떠한지 결론을 도출하야 발표하는데 “삽 한 자루” 정도의 결론을 도출한다면, 엄청 두들겨 맞을 것임을 진교수 스스로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진실로 “삽 한 자루”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선 그야말로 무수한 비판을 다 극복해내고 “삽 한 자루”라는 결론이 그 어떤 가설보다 더 신빙성 있게 설 그것으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결론으로 가기 위해서 등장할 수많은 도전적 주장을 모두 극복할 수 있느냐, 수많은 “삽 한 자루”가 아니라, 그보다 더 한 무엇이라는 입장을 지지할 자료들을 모두 반박해 낼 수 있겠느냐라는 점에서, 진교수처럼 “삽 한자루”라는 주장은, 그것이 성립되기 위해선 매우 지난한 일일뿐더러, 또 그렇게 극단적 주장이 보다 마일드하고 종합적인 다양한 가능한 논설들을 모두 극복한다는 것이 매우 그럴 성 싶지 않아 보이기에, 학자로써 그러한 표현으로 서술한다는 것은 매우 무모하고 위험한 행위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차라리 학자로써의 태도를 포기하고 싶고 정치적 돌격대처럼 막나가지는 것 아닌가 싶은 것이다. 얼마 전 진교수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진보신당을 탈당한 것으로 안다. 만약 진교수가 교수라는 신분을 벗어버리고, 진보신당 당원의 신분은 계속 유지했다면 진교수의 그와 같은 표현을 이해할 수 있는 여지는 더 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문학적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선동하여 이끌어 가기 위한, 흔하여 일반적일 수도 있을 정치적 행위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러나 문학적 표현이라지만, 그 문학도 마치 반공 문학, 공산주의정권 찬양 문학과 같이 선동 문학으로, 고급의 문학취향을 가진 이들로부터는 ‘그것도 문학이냐, 문학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는 질타를 들을 수준이겠지만 말이다. 그러한 선동 문학, 반공 문학의 폐해는, 본래 정치의 목적과도 배반되는 것이기에, 정치적 태도로도 사실 고급스런 태도는 못된다.

그러한 강렬한 자연적 감성의 상태에서, 세상을 왜곡하여 보게 하고, 그러한 내면 상태가 외부로 파괴적인 모습으로 흐르도록 도모하는 것은 법치, 자유민주주의를 진흥시키고, 또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필수불가결인 개인의 성장이라는 것과 반대로 배치되기에 그렇다. 게다가 사회적으로도 필요 없는, 피할 수 있는 소모적 충돌과 낭비를 발생시키기에 그렇다.

그러나 진교수는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지식인이요 교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표현으로 선동 문학적 기능을 불러일으켜, 선동하려는 행위는, 지식인으로써의 사회적 의무와 가치를 배반하는 행위가 된다.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전문가 행세를 한다면, 당연히 전문성 논쟁이 뒤따르는 것은 자연스런 것일 것이다. 특히 지식인으로써 마땅히 가져야할 태도가 습관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 이러한 지식인으로써 피해야 할 태도가 습관이 되어있으면서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지식인으로 군림하고 있다면 자연스레 전문성 논쟁을 더욱 불러일으킬 것이다.

진교수는 그러한 부정적인 태도를 오랫동안 가지고 오면서도 신기하리만큼 내부에서조차 비판이 잘 나오지 않았고, 승승장구하였기에, 좀 더 까다로운 전문성 검증 작업이 들어간 것으로 필자는 여긴다. 물론 그러한 작업이 주위에서 바라보던 사람들, 특히 그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당황스럽고 공격적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만큼 사회적이 영향력, 권력이 큰 사람은 그만큼의 윤리의식을 가져야 하며, 그래서 까다로운 잣대로 평가받아봐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특히 내부진영에서 영향력이 크고 권세가 있음에도 학자로써 부적합한 태도가 비판받지 않고 여과되지 않고 오랜 기간 나타난다면, 더욱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다.

2. 진교수를 좋아하는 것으로 보이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변희재 대표나 여타 빅뉴스 필진들의 전문성을 걸고 넘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논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정치인들이 청문회 받는 것처럼 모든 국민이 청문회 받아봐야 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당연 그들도 그래야 한다고 보진 않을 것이다.

물론 변희재 대표는 현재 진교수가 폄하한 것처럼 사회적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 아닌, 몇 개의 책임감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그러한 방면의 전문가가 되는데 적합한 태도를 가지고 있어 왔느냐를 검증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의심 살 만한 모습으로 드러나 온 진교수를, 진교수의 특수한 지위를 평가했던 학력과 영향력 있는 저서 등의 잣대로 따지는 것은 부적합하다. 모든 사회적 지위가 학력과 저서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기에 그렇다. 그러나 교수라면 이러한 것은 더 중요시되는 평가 기준일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게 당했다고 누구나 똑같이 당해보라는 식의 태도는, 스스로 강력하고 까다로운 경찰국가 같은 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노예적 정서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왜, 자신도 그렇게 까다로운 잣대로 평가받아보고 싶은가? 당신들도 진교수만큼의 영향력과 지위가 있는가? 그렇게 제도와 기준에 의해 제어 받는 것이 자신들의 자유로운 성장을 싹부터 자르는 것임을, 개인적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적합치 않은 것임을 왜 모르는가? 그러나 그 제도와 법, 평가기준을 손에 쥐고 있는 상위의 권력자들의 이익에 부합할 뿐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가? 그렇게라도 자신의 성장을 미리 싹 날려 버리고 그것을 상부의 소수권력자들의 이익을 산출하는 시스템에 연료로 사용하고 그들이 강하고 거대하게 성장해 가는 것을 보는 것이 당신들의 기쁨인가? 한국의 지식인들은 섬김을 받아야, 이 섬김을 당신들이 수행해내야 당신들 마음이 편한가?

3. 진교수를 좋아하는 것으로 보이는 어떤 박사후 과정 중에 있는 학자가 필자의 전문성을 걸고 넘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일단 놀라운 것은, 그 전문성을 따지는 태도와 수준이 낮기에 박사후 라지만, 진교수가 좋지 않은 요인으로 자신에게 작용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길 바란다. (이는 진교수 탓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그 사람이 자신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도록 자신이 조장하고 있음을 저직하는 것이다.)

먼저 필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여 문제제기를 한다.

“문명을 거부하며 도망가고, 문명에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야만인들, 그들을 몰살할 것이 아닌 그들이 문명사회로 진입할 수 있도록 눈높이를 맞추고 손잡아 이끌어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두 개의 다른 문명 속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기능을 기르고 그럼으로써 각 진영의 책임감 있는 문명의 건설자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그러나 야만문명의 야만성을 기르고 타 문명에 공격적인 그것을 마치 그 문명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로써 보존 받고 길러야할 그것으로 보고 이를 획책 고무 발전해야 한다는 옹호논리를 가지고 온다면 그 지식인이야 말로 야만문명의 사악한 주술가로써, 진중권 교수의 비유로 말하자면 이것이야 말로 ‘배후에 있는 사악한 거대 권력’ 에 해당하는 것이다. ”

이 글을 인용하며 필자의 문명비평가로써의 전문성을 따지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고등학교 서양사를 단 한번만 읽어보았어도 이런 말은 하기 어렵다”라고 한다. 필자는 오히려 그 박사후에게 고등학교 때 배운 것을 스스로 극복도 못한 미숙한 수준이기에 그러한 수준의 언사로 비판하는 것 아니냐고 ane고 싶다. 특히나 한국의 교육은 사악한 권력을 지지하기 위해 세워진 그것이어 왔기에, 더욱 조심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은 당연하다. 특히나 교과서는 보수적으로 쓰여지나, 그 교과서조차 몇 년 주기로 자주 바뀐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러나 그 박사후는 비판한다는 수준이 아직도 고등학교 서양사 책을 한 번도 안 읽어 본 것 아니냐고 한다. 필자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 한국의 진보개혁의 어려움과 한계성이 있다고 본다. 기본적으로 이렇게 회의적 사고하는 태도, 인식의 수준을 높이려는 태도, 특히 이 학자로써 생명과도 같은 태도도 이 박사후라는 사람에게서 조차 선명히 드러나지 않으니, 사실 이러한 모습은 책임있는 사람으로부터도 다반사로 보아왔으니 진정 과거의 야만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야만 질서를 창조하여 이익을 보는 자들의 배후의 거대한 이익논리에 결국 휘둘릴 수 밖에 없는 운명의 끈은 잘라내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는 오히려 그가 좋아하는 진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반박해 보고 싶다. 이렇게 문명과 이성, 합리성이라는 것을 비판하는 조류로써 나타난 포스트모던이란 것이 한국사회에서 잘못 받아들여져, 오히려 근대도 잘 못 경험한 한국사회가 포스트모던의 논리를 이용하여 전근대성을 오히려 획책하고, 전근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는 악성의 논리로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사실 진교수의 02년 변대표와의 인터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는 필자 또한 90년대 말, 아직 포스트모던의 조류가 한국에 많이 남아 있던 당시, 이미 소수지만 비판적으로 하고 있던 인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식이 있다면 차마 고등학교 서양사를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는 비판은 쉽게 나올 수 없을 듯하다.

그리고 조금만 회의적 사고와 인식론적 정교한 사고를 중시하는 기본적 태도를 중시한다면, 그의 저 비판에는 이러한 비판이 미리 나왔기에, 아마 나오지 않았을 종류의 비판이 아닌가 한다. 이성, 합리성, 문명 이라는 미명하에 범죄적 잘못이 일어났다고 해서 모든 이성, 합리성, 문명은 그 가치가 없어졌나? 그래서 앞으로도 모든 이가 그 가치를 말하면 안 되나? 기독교도 사랑과 복음을 전파한다며 잘못을 많이 저질렀으므로 앞으로의 기독교의 모든 사랑 전파행위와 복음 전파행위도 그 가치를 잃어버리게 됬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김 박사후는 이성, 합리성, 문명이라는 단어자체를 완전 부정하는, 컬트적 인사인가? 마치 사랑, 자유, 천부적 인권, 평등, 자유민주주의 등의 가치는 존재하지도 않는 관념적 쉰소리일 뿐이라고 생각하나? 이 모든 것들이 과거에 그것들의 미명하에 범죄적 잘못이 저질러오지 않았나? 그래서 이 가치를 기본적으로 인정하는 바탕에서 나오는 모든 주장은 잘못된 것인가? 기독교가 선교 당시 사랑과 복음을 전파한다면서 범죄적 일을 많이 저질렀으니, 이후 모든 이가 앞으로 행하여 질 그 행위에서 조차도 그 가치를 언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사실 이러한 회의적, 이성적 기능이 약함으로 발생하는 황당한 컬트적 인식은, 공교롭게도, 모든 사물에 대해, 과거의 않 좋은 부분에만 포커스를 맞추어 그 음영 속에 머물러 있으려는 감정적 정신이라는데서, 이는 한국사회에 흔하디 흔한 것이라는 점에서 사실 식상하게 다가왔다. 공교롭게 이 지점에 진교수 등 낡은 한국적 지식인들이 이용해 온 텃밭인 것이다. 김박사후도 진교수를 한국적으로 좋아해버려, 다년간의 학업으로 박사후라지만, 그의 수준을 못 넘는 미약한 수준에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아니 고등학교 때 배운 수준은 극복했는지부터 스스로 물어보라.

동시에 국론분열이 있을 때 오히려 문명이 발전했고, 문명자체가 원래 위선적이기 쉽다는 지적을 하며 필자를 반박한다. 이미 위에 지적했기에, 이러한 말은 이미 필자의 주장을 반박하는 말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이 논쟁을 일으킨 사회 현상의 종류인, 선동됨으로 인하여 국론 분열이 일어난 현상들이 모두 문명발전에 기여해왔는지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미 너무 많은 예로 모든 종류의 야만이, (근대의 이름을 한 야만 포함), 문명의 빛을, 삶과 생명과 진화를 파괴해버린 예는 수없이 많다. (이것이야 말로 고교 서양사 한번만 봐도 안다.) 그렇다면 그 근거 없이 정서적으로 현 정부를 반대하는 그 정서가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자연적 거대한 공포와 신경증적 정서인지부터 밝혀야 할 것이나, 그러한 시도는 없고 모든 국론분열이 마치 생산적인 것이라는 일반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한마디 한다. 국론이 나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이 사회진화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 말 한마디에 김박사후의 비판은 설 땅을 잃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의 전문성을 검증한다며 사용하는 방법은 바로 필자의 이전 저서의 일부만 떼어와 그 글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묻고 있다. 이렇게 되묻고 싶다. 김박사후는 모든 공식을 일부만 떼어놓고 그것만 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지 묻고 싶다. 혹시 그 떼어다가 보인 부분이 어디가 어떻게 이해가 안가는지, 제대로 전후 문단은 보았는지 밝히고, 그래도 이해가 안 간다면, 필자가 개인적으로 알려줄 수 있다. 그리고 최소한 양심이 있으려면 공식의 일부만, 혹 글의 일부만 떼어와 제3자가 제대로 이해하는지 묻는 행위는 하지 말길 바란다. 혹시 김박사후는 학자면서도 글을 컨텍스트적 맥락에서 파악하는 글 읽기의 기본도 습관화 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렇게 하나하나 떼어놓고 파악하는 태도를 가졌나?

이렇게 학자라면서 전혀 학자답지 않은 인식을 하고, 그래서 피할 수 있는 소모적 비판이 나와 사회적 낭비를 낳는 것이, 바로 한국사회의 낡은 지식인들의 텃밭을 갈아엎어야 된다는 주장이 자연스레 나오게 되는 이유 중 하나인 것이다.

김박사후도 이 대상이 되지 않도록 태도 자체를 반성하고 혁신하여, 학문의 길에 좋은 성과가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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