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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진보사회, 박정희가 세를 얻는 이유

개혁진보 진영과 진중권 등의 모순

필자가 누차에 걸쳐 진교수의 정신에 안정을 찾아주기 위한 진단과 처방을 보여주었으나, 오히려 이를 더 무시하고 그 반대로 나오는 행동을 오마이뉴스 26일자 “MB는 유통기한 30년 지난 ‘우파의 답례품’ 제목의 기사 글에서 볼 수 있었다. 필자가 지적했지만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 인식에 가치를 부여하여 그 가치에 종속, 지배당하는 습태를 오히려 발전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그러한 인식에 부합하는, 자신이 원하는 자료만 수집해 와서, 그것을 신봉하여 왜곡된 정서적 인식이 지배하는 세상을,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더욱 발전시키는 것은 도퇴와 퇴폐로 인도되는 길을 택하고 또 대중에 선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재언하지만, 진교수가 가지고 온 자료들이 얼마나 순수하게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 또 그와 반대되는 또 다른 자료들은 없는지 경각심을 가지고 고찰해 봐야 한다. 특히나 어떤 자료가 사람의 진술이라면, 그 의견은 얼마나 객관적인 정신의 소산물인지 또한 경각심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된다. 집단지성은 사람 숫자로만 되는거 결코 아니다. 정치적 입장이 아무리 다르다 해도 꼭 같이 정서적 논리와 욕심에 빠져, 어떤 특수한 목적에 의해 사실을 왜곡하여 바라보고 말하는(혹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는) 사람들의 의견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면 집단지성에 도달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차라리 예를 들어 아예 이익관계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제3지대의 인물, 영역 밖의 인물의 시각이 집단지성으로 가는데 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으며, 그 것이 바로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 같은 회의가 목표하고자 하는 형식이다. 이렇게 집단지성의 가치와, 집단지성으로 가기 위한 각종의 방법론 모두 비즈니스 영역에서 활발하게 논의, 연구되고 실험되는 부분인데, 이러한 경제·경영에 대한 지식의 부족이 집단지성에 대한 오해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집단지성은 틀에 밖힌 인식을 가진 사람들의 숫자를 확보하는 것이 아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른 입장에서, 보다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에 있는 다양한 부류의 말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 곧 예를 들어 소위 500백만 노 대통령 조문객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집단지성이 아닌, 그 애도 물결이 이성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서구적 정신도 수용하려 하는 것이 집단지성과 관계있는 것이고 13억 중국인 중의 대다수가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을 안타까와한다고 해서 이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집단지성과 관련 없고, 3억 미국인 대다수가 그 무책임에 대한 나쁜 인식을 귀와 가슴을 처 열고 받아들이는 것이 집단지성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수준 낮아서 비교하는 것 자체를 부끄러움으로 알아야 할 자유민주사회의 한국국민이 딴지일보 등에서 중국에서 어떻게 노 대통령의 자살을 바라본다는 것을 기사로 확인함으로써 마치 무슨 객관성을 구하려는 듯한 태도는 조폭집단의 저열한 윤리 의식만 찾으면서 무슨 집단지성으로 가려하는 우중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자유민주법치 사회에서 도대체 왜 그것 중 하나도 제대로 안되는 자들의 기준을 참고하려하는가? 4대강 사업도 외국에는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이 있고 또 공사 현지에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러한 시각을 마음을 열고 듣고 이해하는 것이 집단지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집단지성을 안다면, 아니 집단지성까지도 아니라 학자라면, 진실은 일반적으로 그 어느 쪽에도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극과 극, 그리고 중도, 온갖 다른 다양한 모든 것의 합에서 , 진실과 가까운 것이 비로소 노련한 기술을 통해 도출되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알 것이다.

진교수의 일부러 보고 싶은 부분만 보려는 한정된 시각과 부족한 경제에 대한 이해는, 쓸데없는 이 대통령에 대한 자질부족론을 낳은 바 있다고 이 전 글에서 지적했다. 그러나 지식의 부족함이 왜곡된 부정적 인지를 더욱 키우는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음이 26일의 글에서 선명히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진교수는 미디어법이 통과됨으로 인해 일자리가 2만 6천개 늘어날 것을 믿는 일은 아이큐가 유인촌 장관정도가 아니면 있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 근거로 어차피 광고시장이란 것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고정된 크기의 파이에서 보다 많은 진입자들이 생겨서 나눠먹는 것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에게 이러한 시각은 어디 박물관에서 한번 보고 스쳐 지나갔을 법한 낡은 경제관을 어디서 사가지고 왔는지 놀라움을 느끼게 한다.

첫째, 미디어 법이 통과됨으로 일어날 경제 활성화의 측면을 생각해보자. 일단 방송사를 시작한다는 것은 거대한 자본이 필요한 사업이다. 곧 초기부터 거대한 자본을 만들어 투자해야 한다. 이는 당연히 시장에 돈이 돌게 되므로 경제 활성화에 알맞다. 그리고 방송의 여파와 효과를 알기에 자본이 안되는 신문사들은 컨소시움을 구성하여 돈을 모아가지고 진입한다. 못해서 일본정도만 되도 채널이 3배 느는 것이다. 한국에 제조업이 생겨남으로 인해 경제발전하기가 힘든 상황에서 이렇게 거대 자본이 매력을 느끼며 경쟁적으로 진입할 사업 아이템이 드문 현실이다. 동시에 방송 광고료라는 것도, 시청률이 얼마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만약 인기가 많아 너도나도 서로 보려하는, 상품으로써의 질이 높은 인기 방송 컨텐트가 생겨나면 말마따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밖에서 술 마시며 소일하는 대신 텔레비전 보러 가는 것을 택하게 된다면, 쓸데없이 술 마시는 시장 등이 이쪽으로 이전 되는 등등으로, 자체적으로 발전하여 광고료 또한 더 불어나는 것이다. 특히 한국 방송 컨텐트들이 국제경쟁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또 홈런 친 프로그램 이후에 메이져 방송국에서 누구도 장타를 때리지 못하여 확 죽는 효과를 피할 수 있다면 그 만큼 광고시장에 몰리는 자본은 늘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말 그대로 장타 친 방송 프로그램이 여기저기서 마구 나오고 한다면 전체 광고료의 크기는 늘어난다. 거기다 장타 친 컨텐트는 그 컨텐트와 연관지어져 다른 시장의 상품의 부가가치도 높힘으로써 좋은 기능을 한다. 동시에 현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밀어붙힘으로 외국기업들에게 시장을 개방할 터인데, 그러면 당연 기존의 막혀있던 시장이 뚫리게 되는 것이므로 이러한 방면에서의 자본의 러쉬 등 광고시장의 크기는 더 커질 여지는 충분한 것이다. 거기다 MB는 노무현 때 같이 정치적 목적으로 반일 혐일 정서를 부추기지 않겠다고 이미 멍석을 잘 깔아놓았기에, 걸어다니는 기업 배용준이 몇 명 더 나온다면 얼마나 큰 기회이겠는가? 이는 대중문화를 훈도함으로 개인의 자유와 발전을 막으며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박정희식 리더싶과 반대된다.

둘째, 특히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바로 기존의 광고료 등의 자원을 몇몇 메이져 회사들이 대부분을 가지고 간다는 현실이다. 곧 경쟁업체들이 더 진출하여 이를 나누어 가지면 좋은 상황이라는 점이다. 곧 이는 한국인과 한국경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옆에 떡을 놔두고도 못 챙겨먹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기존의 법률과 고루한 가치체계 등등의 문제에 기인하여 진입하기 힘들었던 부분이었다. 진교수 같이 분배 같은 거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말 그대로 기존의 한번 스타가 된 사람은 이미 중소기업을 시작해 볼 수 있을 정도의 종자돈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방송사가 늘어나고 컨텐트의 질이 높아짐으로써 이러한 사람의 숫자가 늘어난다면, 행여나 부정적으로 미래를 예측하여 같은 크기의 파이가 여러 업체에 의해 나누어진다해도 기존의 스타 연예인이 한 달에 수십, 수백억을 벌어가는 것을 열사람이 백사람이 나누어 가져간다고 생각했을 때, 이것이 더 좋은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도국인 경우 과거에 제조업이 마구 신산업에 진출함으로써 생겨났던 좋은 효과지만 이미 한국같은 경제에선 이런 방식은 힘들고 이러한 효과는 제조업이 아닌 문화 컨텐트같이 무형의 미개척 상품 시장에서 이러한 효과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특히 기존의 연예계는 과거 스타가 계속 우려먹으며 벌고 있는 상황임을, 셰계적으로도 이렇게 신구의 대체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는 드문 경우임을 생각해보자. 방송 컨텐트 업계는 비단 연예인 만이 이러한 상황이 아님을 직시하자. 이렇게 보았을 때 진정 박정희식 경제관을 가진 사람은 이명박이나 한나라당 정부가 아니라 이를 반대하고 기존의 소수의 메이져 플레이어들이 독식해먹는 상황, 그리고 한 시장에 자유롭게 진입함을 막는 박정희식 경제관은 진교수 등이 오히려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이 방면에서의 진교수의 MB가 낡은 박정희식 경제관을 가졌다는 비판은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미디어법을 반대하는 정치적 반대자들이 오히려 낡은 박정희식 경제관을 가진 것 아닌가? 필자는 미디어 법 통과로 인한 일자리가 얼마나 창출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경제에 좋은 효과가 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오히려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영역 외에서 긍정적 블랙스완이 나타날 여지까지 필자는 보고 있는 바이다. (이러한 한국의 방송컨텐트 산업의 성장가능성과 한국 경제에 순기능을 할 여지는 많음은 다음에 더 자세히 밝힐 기회가 있을 것이다.) 만약 진교수가 미디어법을 마음에 차하지 않는 이유가 오히려 정치적인 거라면 솔직하게 논설하면 된다. 괜히 경제적인 이유를 끌어들이는게 낡은 정치투쟁 방식, 독재자들이 애용하던 전방위식 흠집내기로 반대파를 제거하는 동시에 자신이 내새운 가치의 숭고하고 위대한 수호자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을 꼭 같이 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2. 진교수의 이와 같은 사실의 밑바탕은 독재자와 투쟁하다 오히려 그들을 닮아버린(니체의 명언 “괴물과 싸울때 조심하라. 암흑에 집중하다보면 암흑이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것과 같이 된다”는 말을 상기해 보자.) 것 아닌가도 싶다. 왜냐하면 진교수도 역시 세상을 독재자의 그 틀로 바라보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기에 그렇다. 먼저 진교수의 이상적 사회의 모습은 ”천수만의 질서 있게 나는 새 때들의 모습“에서 그 미적 근거를 찾는다. 혹시라도 자연의 그러한 질서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현혹되지 말자, 인간은 필연적으로 그 이상이다. 인간 모두 자체가 스스로 기적을 이루어, 모두가 예측 불가한 돌발변수, 블랙스완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이성을 통해서 말이다. 이성은 필연적으로 팩트와 자료를 정교히 다룰 줄 아는 기술에서 생겨난다. 아무거나 아무 말이나 나왔다고 그대로 믿고 숭배하는 것이 아닌 말이다. 헤겔이 말한 자연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창조된 질서에 의한 아름다움보다 못하다는 미학관을 생각해보자. 이 상태가 곧 창발성emergence가 나타나는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진교수가 보는 천수만 새때의 아름다움은 어떤 아름다움을 지적하는지 의뭉스럽다. 혹시라도 새처럼 우두머리 새를 하나로 옹위하여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마저 포함한다면, 그야 말로 공산주의와 박정희, 독재자식 근대적 사고이다. 곧 각 개인이 신이요 기적임에도 말이다. 진교수가 새라는 비유를 들며 의도하는 것이 이러한 것도 슬쩍 포함되나? 그래서 진교수가 든 미적 근거의 예에서 바로 진교수의 인식의 한계에 갇힌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새가 우두머리를 따라 질서있게 나는 것은 아니므로, 새를 자유로운 개인으로 보자면, 과연 한국인들이 그러한 상황에 처해있는지 생각해 보자. 한국인들은 고정관념이 많고 수구적인 특성이 많다고 한국인 스스로 인지하는 부분이다. 그러한 기존의 고정된 마인드로 세상을 바라보고 움직이는 사람들은 자유로운 새에 비유될 수 없다. 오히려 주인을 가진 비둘기 때에 비유할 수 있다. 비둘기들이 주인이 비둘기 우리에 들어가 밥을 주려할 때, 비둘기들이 집으로 돌진하는 혼돈의 상황을 본 적 있는가? 외양적으로야 백색의 평화의 순백의 상징인 듯하지만. 평소에 밖에 놓여있을 대는 나름 자유로히 먹이를 찾으러 다니는 듯하지만(이 또한 의문의 여지가 많다.) 확실히 먹이를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그가 집에 있을 때는, 그런 광풍의 야만정글의 질서를 연상케 하는 질주가 없는 것이다. 좁은 입구에서 엄청난 부딪힘과 비명과 방해와 털 날림의 싸움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들 싸우느라 잘 못 들어가는 양상을 연출한다. 혹 이러한 수준의 국민들이, 정치인들이, 아무리 여권이라 하지만 우리 한국사회의 정치인들, 그리고 일반 국민 수준은 아니었는지 반성해 보자. 필자가 보았을 땐 딱 들어맞는다. 그 순진선량해 보이는 일개 국민까지도 사실 비둘기같이, 잘나 보이는 존재의 인식을 믿고, 그 근처에서 눈치 봐서 따라다니며 먹이를 찾으러 다니는 것이다. 한국의 공무원 경쟁률과, 일류대 진학, 대기업 입사에 사활을 건 대중을 생각해보자. 기본적으로 이러한 공통된 수준과 질서의 정신들은 가려듣고, 이 입장을 벗어난 부류의 말을 듣는 것이, 곧 집단지성으로 가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한 자연의 한계에 보다 포커스를 맞추자면 그 새때의 질서는 오히려 맨 앞의 우두머리를 따라 바다로 돌진하는 쥐때들에도 비유할 수 있다. 곧 집단으로 파괴적으로 나가고 있으며, 중우정치, 배가 산으로 가는 정치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피리부는 소년의 환상적 피리소리에 현혹되어 바다로 빠져버린, 환상에 의해 왜곡된 팩트와 인식에 근거하여 집단으로 불법시위를 벌였던 소고기 시위 등의 촛불 시위가 노정했던 일관된 특징이다. 바로 그 쥐때적 군중들이 매일 상대를 쥐라고 욕하고 있지 않은지, 곧 진교수 같이 된 것은 아닌지 반성하기 바란다. 헤겔이 말했듯 모든 자연 그 자체의 현상은 이성을 거친 인간에 의해 창조된 그 질서의 아름다움보다 못한 것이라는 미학관을 진교수도 알 것이고, 이러한 자연 그 자체를 이성 위에 두며 나온 포스트모던적 조류가, 전근대적 바탕의 한국문화에서 오히려 악용됬음을 잘 아는 진교수가 이러한 예를 든 것은 그래서 의뭉스럽다는 느낌이 더 드는 것이다. 그 문제를 알지만 고치기보다 똑같이 편승해보겠다인가?

또다시 말이 길어졌다. 진교수가 쏟아낸 말이 많다보니 또다시 많은 부분을 뒤로 미루고, 이러한 보다 본질적 문제를 선택해 다루게 되었다. 386적 정치인, 지식인들이 오히려 마찬가지로 수구적이라는 비판은, 미안하지만 필자는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듣는다. 집단지성 말이 나왔으니 진교수 등 386적 지식인들은 과연 이 비판을 마음을 열고 이해하고 또 듣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진교수 등의 사회에 나타나는 태도와 인식을 보면 집단지성의 가치를 머리로만 알지 잘 체득하고 있진 못한 거 같다. 진교수 등 386적 지식인들의 인식체계대로 진행해나가면 오히려 그들이 싫어했던 박정희의 세가 더 커지는 것은 결국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 결국 그 질서를 체현하는 손오공 밖에 될 수 없음을 지난 문민정부 때부터 봐와야 했다. 지난15년은 그 가치의 부활과 군림의 약속이 증거되어 오던 세월이었지 않은가? 박정희 흉내내는 정치인들의 줄줄이 출현과 국민의 정부 때 박정희 기념관과, 02년 민주당 경선 때의 박정희 흉내와 인정, 노무현의 박정희 인정, 그리고 탄핵 때 오히려 박근혜의 기적과 같은 권세 그리고 문국현까지.. 결국 자신들의 인식기술의 떨어짐, 높지 못한 이성의 한계로 인해 지금의 박근혜 모심만을 기다리는 현실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낡은 세계관과 경제관의 원리로 움직여 봐야 오히려 그들이 반대하는 세력의 세가 더 커지고 당해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글로벌적 새 시대를 맞아 아예 새로운 통섭적 경제학으로 갈아 끼우고 싶다면 필자의<희망을 위한 경제관>을 일독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기존의 좁고 찌질한 이성과 지혜의 충돌은 이번에 나온 <희망을 위한 경제관>에서 장하준 교수와 한바탕 격전의 현장을 통해 또 볼 수 있다. 동시에 우석훈과 장하준이 뜰수록 박정희가 뜨는 괴이해 보이는 일이 왜 가능한지도, 동시에 이를 극복하는 것까지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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