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보 및 독자의견
후원안내 정기구독 미디어워치샵

기타


배너

필자는 얼마 전 원더걸스와 한국의 비보이들의 처지와 기회를 비교하며, 범죄적이라 할 정도로, 민주적 가치에 반하는 비극이 존재함에도, 인식조차 안되는 민주국가 한국사회의 상황을 그린바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인간의 감성emotion이란 것을 가진 인간으로써, 그들이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강렬한 정서적 힘을 이용해서 그 어떤 외부의 가치를 다 뛰어넘어 자신의 감성emotion을 최고로 두고 현실 속에서 가능한 모든 방도를 통해 자신들의 성정을 잘 발산, 발전, 분출시키기를, 그러한 장을 만들어 내기를 바라는 마음을 적었었다.

1. 여기에 공교롭게 얼마 되지 않아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 음악인 유진박의 황당한 처지가 공중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에 결국, 가장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이 유진박씨는 왜 인간으로써 그러한 열악한 환경을 스스로 털고 나오지 못하였는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던지, 어디든 문명한 세상으로 갔더라면,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존경받으며 자신의 성정을 한껏 만개하며 인정과 존중 속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았을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자신의 잠재능력은 고사하고 기존의 가지고 있는 능력조차도 펼치지도 인정받지도 못하는 환경 속에 갇혀서 불행하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유진박씨가 자라온 한국적 가정교육의 폐해에 의한 것이랄지, 한국 음악시장의 문제가 지적되기도 한다.
.(한국적 가치의 가정교육 관련 글은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0&articleId=589360)
(문화 시장 관련 글은
http://www.ddanzi.com/articles/article_view.asp?installment_id=266&article_id=4609 )

그러면 이러한 한국 문화와 사회의 반인간적 열악한 요소는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요, 매우 흔하디 흔해 물과 같이 여겨질 정도로 무감각한 상황이다.

그러면 이렇게 고질적이고 아주 공고하며, 워낙 문제가 고질적이고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어 고치기 어려운 경우에는 어떠한 방식이 필요할까? 많은 역사학가와 자유주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지적하는 바이지만, 바로 외부로부터의 도전이 필요하다.

2. 만약 한국의 문화 시장이 일본의 문화 시장과 매우 긴밀한 공유의 환경을 가졌더라면 어떠했을까? 아마 유진박은 일본에서 훨씬 커다란 시장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일본의 업체와 계약을 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고도의 기능성을 구매해줄 수 있는 시장이 존재하는 일본에서, 자신의 고도의 기능을 발휘하며, 발전시키며, 세상에 더 큰 기여를 하며 살았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에서 자신의 재능을 인정도 이해도 받지 못하고, 발현시키지도 못하며 썩고 있는 상황은 최소한 탈피 했을 것이다.
동시에 한국의 연예기획사와 어떠한 계약조건으로 계약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훨씬 큰 일본시장이라는 조건 때문에 일본의 연예매니지먼트 업체와 경쟁적으로 계약을 시도함으로써 애초에 더 나은 조건으로 계약을 했을 것이기에, 지금과 같은 열악한 생활은 면했을 것이다.

만약 유진박씨로부터 볼 수 있는 이 비극이 혹시 낡은 한국적 교육과 그 정신에 의한 것이었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유진박씨로 하여금 정서적 끈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그 댓가로 비인간적 삶을 살게 하는 것이랄지(그의 가해자일지 모를 주변사람이나 어머니를 옹호하는 인터뷰에서 의심해 볼 만 하다.) 혹시 한국적 마인드로 마땅히 한국인 업체와 계약하여 한국인의 부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민족주의와 관련 있는, 역시 마약 같은 정신에 취해 속아, 지금과 같은 현실을 초래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러한 낮은 단계의 정신은 사실 안타깝지만 한국사회에서는 마치 자연스러운 것인 냥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미국가서 미국업체와 손잡고 세계와 한국시장에서 성공하는 것 보다 무조건 한국국적의 출신과 손을 잡아야 하고, 또 국내기업의 배를 불려주는 것이 가장 우선시 되는 큰 가치라는 전체주의 민족주의적 사고인지도 모른다. 이는 한국의 세계최고 예술기능인 비보이들의 개인의 안타까운 처우를 문제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보이는 낡은 정신에서도 감지되는 듯하다. 국위를 선양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올림픽 월드컵 입상자는 병역 혜택을 받지만, 이들은 예외인 것만 봐도, 특히 개인이 이렇게 뛰어난 기능과 개인성을 발달시킴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기회를 불공평하게 박탈당하고 있는데, 개인의 성공 따위는 별거 아닌 것으로 여기는 농노적 정신이 현 자유시장경제 민주국가라는 한국사회의 일반적 정신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그저 한국인들한테만 인정받는 것만 해도 국가나 사회라는 집단에 감사해 마지않아야 된다라는, 영주님 덕분에 먹고 산다는, 정신이 족쇄에 묶인 농노의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때를 기다렸다가 한국 출신 기업인과 같이 손을 잡고 세계에서 성공해 보는 것만이 그 어느 것보다도 우선하는 중요한 가치이기에, 이렇게 큰 것도 무시하는 인격은 썪은 종자기에, 애초에 다시금 배려해 줄 필요가 없었다는 수구회귀 논리로 무장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현대 문명사회에 상상키 어려울 정도의 낡은 한심한, 박물관에나 진공 전시시켜놓으면 센세이션을 느끼게 할 것이기에 마땅할 자리일, 그런 수준의 정신을 가진 것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보다 자세한 유진박씨의 상황은 12일 sbs에서 조사한 바를 방영한다고 하니 보고서 더 자세한 썰을 풀 수 있을 듯하다.)

비윤리적이며 폐쇄적인 옭아메고 착취하고 탄압하는 낡은 권력자들의 특징이 자국내에서 자생적으로 다 만들어 할 수 있다는 논리인데 이는 제대로 일어난 적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외부로부터의 진입이 항시 지역적인 것과 퓨전을 일으켜 그 지역의 특색이 담긴 독특한 생산물을 산출해 내고 쑥쑥 발전하고 국경과 문화를 넘어 같이 좋은 영향을 주며 자양을 흡취하며 자라나는 것이다. 물론 국수적 짙은 민족적 정신으로 보자면 그런 부분이 애써 감지되지 않을 순 있겠다. 그러나 이는 예술을 흔상하는 기술의 부족인 것이기에 그들의 그러한 예술 품평의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다.)

3. 이렇게 어떤 사회에 지배하는 관념과 법과 제도 등을 통해서 만든 폐쇄적 사회상황, 폐쇄적 시장 상황을 만들어 개인의 발전과 인간의 성정을 만개하여 한껏 떨치는 발전을 막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주입시킨 관념체계로만 세계를 바라보니 편협한 시야를 가지게 되고 정신은 거기서 주어지지 못하고, 자라나지도 못하며, 그래서 책임감도 기대할 수 없는 아이와 같은 수준으로 만드는 사례는 인류역사를 홍관할 때 너무 흔한 고질병이어 왔다. 그래서 근대, 현대 역사는 바로 이것과 투쟁한 역사라 하겠다. 동시에 천부적으로 주어졌던, 중세 이전에 차라리 가지고 있어서 중세 때보다 더 나은 정신문화와 문명을 가진 바 있던 요소들을, 찾아내고 밝히고 다시 개인에게 돌려주고, 하는 마치, 지구상에 항시 존재하던 신대륙을 결국 발견해내고 또 올바른 질서에 의해 이를 밝히고 아름답게 발전시키는 일이, 인간의 권리면에서도 다시 발견되고, 더 발견되며 더 밝혀지고 발전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바로 이 역사발전을 추동하는 사상이 바로 자유주의 정신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의 ‘자유주의’, ‘자유’ 하면 아직 위험하고, 집단의 이익을 위해 양보해야 하고 하는 인식의 팽배함을 볼 수 있다. 아니면 혹은 ‘빨갱이 잡는 자유주의’ 같이 편협한 방식으로 이해되고 사용되고 있음을 또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마치 기독교가 기독교를 믿지 않고 우상숭배하는 원주민들에게 구약에 나온 것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해 주는 것이(예를 들어 집단 학살은 말할 것도 없이 그릇하나와 벽돌하나도 남기지 말고 부수어버려야 할) 기독신앙이라는 주장과 같이 왜곡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사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유진박씨의 재앙은 그에게만 돌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한국사회에서 그러면 보다 근본적으로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환경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먼저 한국의 문화 컨텐트 시장은 폐쇄적이다. 세계적으로 못 들어가는 곳이 없는 일본의 문화 컨텐트가 한국에서는 제도에 의해 매우 가로막혀있다. 김대중 정부 때야 완전개방을 목표로 하였지만, 노무현 정부 들어 다시금 정치 논리에 막혀 과거로 회귀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바로 이렇게 종래에 한국과 일본의 문화 시장이 접점이 크지 못했기 때문에, 유진박씨는 한국의 반윤리적, 반인간적 연예기획사와 계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고, 역시나 한국의 시장이 원하는 수준의 컨텐트나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오고 말았다. 곧 이렇게 일본의 소비자들과 한국의 소비자들이 공동으로 소유하며 교류하는 문화시장이 형성되지 못하였고 또 양국 간의 관련 산업의 사업가들이 자유롭게 진출하여 사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사실 한국의 수많은 독특한 성정을 개발시키려는 꿈을 쫒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펼칠 시장이 한국에는 참 드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개인들은 사실 일본을 통해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개인성의 중요한 부분을 저당 잡아버리는 일을 피하고 오히려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아주 간단한 사실조차도 조작하여 조종하던 독재정권시절, 사실 일본만화의 적지 않은 부분이, 한국의 만화가들이 일본의 거대한 만화 컨텐트 상품의 수요가 있었기에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재능을 발휘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으며, 이는 언더그라운드 락 뮤지션, 재즈뮤지션 등도 전문기능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시켜 올 수 있었던 요인에 바로 일본 시장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일본에서의 성공은 이들이 척박하고 자라나지 못한 한국의 시장에서, 더 힘을 받으며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자산도 되었다.

이번에 MBC 방송에서 보도한 뉴스를 보니, 한국의 재즈 음악인들이, 일본에서 상당한 수익을 올림으로써 한국시장에서도 활동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시장의 성공이라는 명성을 엎고 한국시장에서 활동에 좋은 탄력을 받는 것을 볼 수 있다. (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409313_2687.html )

이는 유진박씨의 경우도 미국에서의 인정이 바로 한국의 척박한 시장에서 그가 발을 내딛고 뿌리를 내리며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이 말이다.
이는 마치, 미국사회에서 인정받은 유진박씨의 그 상품성이 한국에서 먹혀들었던 점과, 이제 이 미국과의 유대가 점점 약해지는 시기가 곧 유진박씨의 상품성이 떨어지던 것과 비교해보면 좋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유진박씨 같은 클래식도 아니고 재즈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중적인 팦 음악도 아니고 이 모든 것을 통섭한, 독특한 유진박씨의 그것은, 시장이 다분화 되지 않은 한국의 문화시장에 더 좋은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한국 사회가 진정 솔직하게 자유민주주의적이었다면 일본과의 교류를 통한 개인의 발전이 가능하도록 허용했어야 했다. 곧 교육은 지금의 언더 락 뮤지션들과 재즈 뮤지션 등등 조차도 일본어를 할 수 있음으로 일본이라는 큰 시장을 통해 지역과 국경을 초월한 발전을 할 수 있도록 북돋와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혐일과 민족주의 고취에 의해 인간의 천부적 인권과 그 인간으로써의 가치를 북돋우고 고취시키는 미션은 삭풍에 싹 꼬실라 죽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질병은 진보개혁적이라는 정권에 들어서까지 꼭 같이 이용된 것이다. 원래 크지 못했던 한국의 재즈, 클래식을 퓨전한 시장 뿐만 아니라, 온갖 문화콘텐트를 생산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삭풍과 서리를 맞은 것이다.
거기에는 금권력을 가진 자들을 정책적으로 많이 밀어주어 수많은 독특한 개인들을, 무책임한 승자독식적 경쟁에 의해 빗자루에 의해 쓸려 쫒겨나도 나몰라라 한 노무현 정권의 부족한 자유민주주의적 진보사상이 있는 것이다. 또다시 돈이나 취향에 맞는 지식 등을 가진 자들의 입맛에나 맞는 제도와 정책을 실행해 나감으로 인해 노무현 정권 당시 특히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은 된서리를 맞았었고, 어려운 삶을 살게 되거나 아예 음악을 포기하게 되고 생계형 직업에나 전전하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자유주의가 지역 문화와 개인을 살린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지만 장하준 같은 정신은 정반대로 인식할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정신이 필자의 자유주의 정신의 사자후에 의해 발리는, 신의 목소리를 담은 자유주의가 낡은 찌질한 시각의 야차에 승리하는, 더운 여름 통쾌한 기분을 필자의 <희망을 위한 경제관>에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바로 지금의 어려운 환경 속에 착취당하며 억압받으며 자신의 마땅 재능을 마땅한 곳에서 펼치지 못하고 삶은 한국의 비보이와 같이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오늘의 유진박을 보게 되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 때만해도 음반 발매를 왕성히 한 것만 보아도 지금의 처지가 더 안타깝게 다가오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필수는 책임감이다. 민주주의는 말할 것도 없다. 책임감 있는 태도로 자유스런 경쟁을 해도 할 것인데, 바로 이러한 책임감 있게, 컨텐트 상품에 마땅히 돈을 지불하고 이용하는 책임감을 지탱시키는 제도를, 정책을 현 정권에서 신경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말이다. 한국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주어진 정보만 가지고 진보개혁은 마치 친노세력, 386세력과 손잡아야 한다고 믿으며 발악발악 애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한국사회의 진정한 진보개혁은 어느 세력이 정권을 잡느냐에 근본적으로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근본을 의식치 않고 모든 사태를 정치적 경쟁과 싸움의 시각으로 본다면, 근본문제는 치유되지도 못하고, 시간과 에너지만 소모되며, 또다시 현실논리로 타협하며실망시키고 욕먹는 일이 벌어지고 이를 노리는 반대세력만 나오고 결국 계속 소모적일 뿐이고 항시 문제의 주변만 멤돌 뿐이다. 왜 30대들이, 20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제는, 정치에 그리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들이 열정이 꺼져버리고, 정신적으로 타락한 퇴폐한 것으로 단정지으면 세상을 너무 단순히 보는 것이다. 그러니 10대 소녀나 숭배하고 싶은 정신이나 나타나는 것이 결국 또 다시 386 세력들이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을 지지하는 자들의 마음을 노무현 같이 모르며, 또 다시 좁은 시각의 틀로 세상만사를 재단하니 10대 소녀가 진화를 이끌 대상으로 여겨지는 오히려 그들이 퇴폐, 퇴보, 멸망, 멸종으로 이끌 정신 양상을 노정하고 있는 것이다.

( 어찌보면 유진박씨와 같이 이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컨텐트를 사회에 온전히 내놓지 못하고, 세상의 권력을 가진 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가공하여 만들어낸 많은 지식인들이, 해외 유학파 지식인들이 있어왔던 것이 한국 사회라고 예외는 아닌, 고질적 상황이었던 것으로 본다.)

5. 결국 이 모든 것은 한국 사회가 외부의 진입에 대해 폐쇄적이며, 그 상황에서 보호받은 공간에 지역의 비윤리적 권력이 그 파이를 가져가고, 그 결과 이는 만인만색의 개인이 자연스런 성장이 북돋와 지고, 또 성장의 계절풍을 맞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만개하게 되는 텃밭을 박탈당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개개인의 독특한 성정은 발휘되지 못하고 또 자라나지도 발전하지도 못하고 오직 하나의 코드에 맞추느냐 마느냐의 것이 생존권까지 결정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재미있게도 오늘날은 저주를 들으며 10대 소녀 애널써킹이나 하라는 식의 말을 듣고 있지 않은가?)
이로 인해 개인들은 스스로의 자유스런 성장과 발전을 하지 못하고 수그리고 억살당하고 옭아메지고 고개 수그리며 인간영혼을 밝히는 소중한 전구 하나를 꺼뜨린 채로 인간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채로 살아오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사실 유진박씨 개인만이 해당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물처럼 공기처럼 느끼고 사는 문화와 정신에 의해 우리자신 또한 그러한 환경 속에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한국의 범 대중은 바로 그 지역적 논리, 민족주의, 집단주의, 권위주의를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또 그것이 문제인줄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이 보이는 최근의 재미있는 사례로, 최근에 이슈가 된 프로야구 LG팀의 심수창 선수와 조인성 선수간의 마찰 사건이다. 이에 대하는 거의 대부분의 한국인의 가치판단은, 나이에 의한 위계질서가 가장 절대적인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욕을 한 조인성 선수 보다, 거기에 말대답을 하는 심수창 선수가 더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욕은 명백한 폭력이지만, 동의할 수 없는 주장에 말대답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말이다. (이에 관련한 글은 금새 다시 올리겠다. 음 요샌 글거리가 막 생기는군..)

그래서 나이어린 선수가 더 나쁘다는 단순무도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와 도대체 맞지 않는 가치에 기반한 단순한 정신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권위주의와 집단주의, 군대 문화가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으로 복속됨을 택함으로 스스로 노예같은, 태어난 것 자체로 영원히 아래에 있어야 하는 운명적 처지에 만족하려하는 것이다.
여기에 자유주의는 바로 모세가 유대민족에게 노예의 족쇄를 끊고 가나안 땅으로 나아오라는 목소리와 같은 것이다. 동시에 노예로 있고 싶고 그것이 이익이라며 모세를 원망하는 대부분 유대민족의 목소리에 아랑곳 하지 않고 꿋꿋이 신의 말씀대로 수행해 나간 것이 바로 자유주의 정신이다. 그것이 바로 초기에는 수익을 올리기 힘드나, 몇 년간의 묵묵한 매진으로, 처지의 곤궁함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이 심어준 자신의 개인의 독특한 잠재성, 씨앗을 소중히하고 빛을 주고 양분을 공급하며 싹틔우고 발전시키는 자유주의 기업가 정신이 바로 청년세대의 희망이 있는 것이다. 무조건 조직논리와 집단논리, 권력자의 논리에 열심히 매진함으로 일신의 안녕을 삼는 것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정신으로 공무원과 철밥그릇 직종이나 잡으려는 것이 바로 한국 대부분 젊은이의 정신상태인데 (이러한 심리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다음에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모든 현상이 하나로 일관된 현상이라는 것이다.

(마무리)
이렇게 일반 한국민의 정신 자체가 사실은 민주주의와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반하는 면이 많으며, 이 민주주의의 영혼을 지탱하고 구성하는 자유주의는 더 언급할 수준도 안되는 것이다. 사실 한국적 마인드의 민주와 자유주의와 이와 또 뗄레애 땔 수 없는 개인주의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고려해 본다면, 공산주의가 딱 알맞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니면 유교적 가짜 민주주의, 곧 종교적 민주주의를 하거나. 종교를 떠나면 살 수없는 그런 민주주의. 거기에 바로 정서적으로 집단에 귀의하며 자신 개인의 삶으로는 떨치고 나갈 수없는 유진박의 처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기존의 일반 국민의 성질을 어떻게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고 편승하여 자신과 자신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며, 그것을 또다시 민주주의와 보편적 가치를 증진하는 유일한 길인 듯이 호도하는 자들을 보면, 한국사회가 왜 민주와 보편적 가치가 세계문명의 밝은 지역과 비교하여 뒤떨어지는지 이해가 쉽다.
자신의 그러한 문제를 인정하지 않으며 오직 자신과 다르고 자신의 문제를 지적하는 자들은 색깔론으로 규정하여, 단순히 범주화 하여 집어넣고 비판, 공격하는 지식인들의 습태야 말로 반민주, 반자유, 반보편적 가치의 행위이다.

(사족)
유진박씨의 상황을 보고 너무 거대한 심정상의 태풍이 휘몰아쳐, 글이라는 느리고 작은 용량 만 서서히 실어날라야 하는 수레가 도대체 성에 안차 차마 풀지 못하고, 컴퓨터로 치자면 트래픽과 랙이 걸린 상황에서 시스템 다운 된 상태로 움직이지 못하다가, 열심히 정신의 내면의 힘을 다시 응집하여 한 곳으로 모아 인내라는 근육을 이용하여, 거친 비바람 부는, 돌밭에 굳건히 똑바로 서서, 지금에야 글이라는 작은 용량의 느린 수레를 이용해 하나하나 천천히 밖으로 실어나르는 노역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글이 늦었다.

글이 거칠다는 맞춤법이 틀렸다는 것에 관련하고 싶은 말은...
사실 이렇게 거대한 감정의 태풍으로 온 심령을 채찍질하는 무게의 일들은 중간에 글을 쓰다 중간에 쉬게되기 일쑤이다. 자꾸 그사건의 부조리를 깊히 의식 속에 다시 반복하여야 하고 이는 마음에 거대한 슬픔과 분노의 감정의 회오리, 격랑을 자아내는 것이기에 그렇다.
이는 영사기와 같이 하나하나 반복되는 것이며 이는 마치 슬픈 영화를 몇편을 짧은 시간에 플레이 해버리는 슬픔의 크기를 속사포로 연타로 맞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문단하나에 소모되는 심령의 비애이다.
이렇게 강력한 펀치 한 대 한 대를 맞아 그만 쉬다가 다시 글에 착수하게 되는 것이고, 만약 이 싸움을 끝까지 끌고 가기를 중도에 포기해버리면, 글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퇴고를 아주 자세히 디비는 작업은, 다시 이 세세한 비극 영화를 의식 속 깊이 영사하고 하나하나 다시 곱씹어보며 어떻게 선명하게 만들까 하고 선명하게 일단 다시 자신의 의식 속에 나열해 천천히 플레이 해보는 것에 비할 수있다. 왜 슬픈 영화도 너무 슬프고 공포스러우면 그냥 눈을 돌리고 보지 않는 것에 비유 할 수 있다.

혹은 취미로 권투를 즐기는 사람이 일주일에 한번씩 한 게임 뛸 때 얻어맞는 펀치의 강도를, 프로선수들은 실전경기에서 한 라운드에 일,이분 안에 다 얻어맞는 것 같다고 비유할 수 있다. 그러다 쓰러지기도 하고 또 시간에 쫒겨 오픈하며 공격해 들어가야만 할 때, 속사로포 마구 얻어마져야 하는 과정도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한달에 영화관 가서 돈주고 보는 영화로부터 얻는 정도의 슬픔과 비애의 크기를, 그냥 십분단위로 마구 속사포 처럼 얻어맞으며 중간에 쓰러졌다가 다시 잊고 잃어나고 다시 강펀치와 연타를 맞고 쓰러지고 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많은 여자들이 남성들의 감성이 메말랐다고 이해를 못한다고 하는 말에 콧방귀도 끼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대체 아프다고 소리지를 그런 사안도 아니고 일상사로 경험하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사나이, 영웅이 가는 길, 일하는 사람이 가는 길은 외롭고 바람이 불며, 그리도 오해를 많이 사고 매정하다는 오해도 많이 사는 것 같다. )
그러니 이리저리 문제가 많이 보이더라도 그런 걸로 평가내려버리고 무시하고 하지 말고 같은 나약한 죄많은 인간으로써 포옹의 마음을 발휘해주길 바란다. 그것이 바로 현대 문명사회의 인본주의적이고 너그러우며 인간적이며, 인간의 가치를 섬세하게 잘 감각하며, 수많은 뛰어난 보살과 같은 개인들이 쏟아져 나오며 하는 것이다.

혹은 달리 비유하자면 슬픔과 분노의 태풍의 깊숙한 곳으로 천천히 그 회오리를 몸소 자세히 감각하며 들어가 있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마음에 마구 채찍질을 맞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면서 중간에 차라리 감각기능을 꺼버리고 기절해버리거나, 십자가형을 받는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르는 것을 포기해버리고 기절해 죽거나 그래서 그 미션을 포기하거나 하는 딜레마에 마구 맞닦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맞춤법 틀렸다며 문법 틀렸다며 글의 가치 자체를 폄하하려는 것을 보면 예수가 십자가 형을 받던 당시, 읍조리던 한마디가 생각난다. “아버지,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그리하여 글을 다 마치고 송고하며 긴 숨을 내쉬며 한마디 내 뱉는다. “다 이루었다..”




배너

배너

배너

미디어워치 일시후원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현대사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