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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병적 국민 수준으로는 소통이 안 된다

대다수의 소통과 토론이 안 되는 한국인의 폭력에 대한 둔감성

홍위병적 국민 수준으론 소통이 안 된다.
대다수의 소통과 토론이 안 되는 한국인의 폭력에 대한 둔감성

1.홍위병도 민주를 위한 혁명을 한 것이다. 제도는 가지고 왔지만 제도를 통해 이루려는 가치는 불가능한 이유는?

스스로 보다 윤리적, 진보적, 도덕적이고 정의에 가깝다고 느끼는 듯한 한국의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최근 변희재 대표(이하 변대표)를 욕하지 못해 안달이 난 모습을 볼 수 있다. 요상스럽지만 그들의 공공의 적이 된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변대표의 언행 중 그들로부터 특히 비판받는 부분은 바로 “지적수준” 관련 발언이다.
이 표현을 꼬투리 잡아 비아냥 거리며, 그 단어 사용의 적절성을 의론하며 그 표현을 사용한 변대표를 공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국소적 어휘사용에 꼬투리나 잡으며 상대를 파괴하려는 행위가 거대한 조류를 이루고, 이에 변대표의 가장 주요한 논지들의 사회적 필요성, 중요도, 타당성은 어디에도 고려를 받지 못하고, 공통된 목표를 찾으려는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으며, 단지 부적절한 말을 한 부정적 인사로써 그려질 뿐이다. 이러한 수준의 사람이 대부분이라면 그 사회에 소통은 당연히 있기 힘든 것이 된다. 긴말 쉽게 하기 위해, 이는 딱 홍위병 수준이라는 것이다.

홍위병 수준의 정신에서, 곧 야만의, 저열한, 어두운 낡은 정신, 편협한 정신의 협소한 시각, 마귀의 더러운 손톱과 같은 미망된 어두운 정신으로, 그 자신의 손톱이 병균이 득실거리는 더러운 그리고 생채기를 쉽게 내버리는 마귀의 것과 같은 손톱임을 인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과의 소통은 있기 힘든 것이다. 마치 조금만 손을 잡고 친선적 포옹을 하려하면 그만 그 마귀의 손톱에 긁히고 찔려버리게 되기에 조심할 수 밖에 없는 것과 같다.

또 쉬운 예를 들어 지금 변대표를 비난하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의 행위를 비유하자면, 이는 억울한 연하에 처한 사람이 연장자에게 듣기 거북한 말을 했다하여, 그의 억울함이 타당하냐 아니냐, 그의 주장이 맞느냐 틀리냐는 사라지고, ‘저 경우도 모르는 싸가지 없는 놈’ 하며 토론이 그 것으로 끝나버리고 오직 예의 도덕으로 약자에 대한 공격이나 하는, 이 한국사회에 흔한 덜떨어진 저열한 폭력적 습태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바로 이러한 야만적 반민주적 반문명적 습태는 문제인식조차 제대로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러한 예의도덕과 이를 등에 업은 소수 권력자들의 대다수 국민들에 대한 조종의 기제를 그대로 체화하여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같은 유교문명에 수치스럽게도 속한 중국의 홍위병으로 나타났던 것이었으며, 홍위병들도 바로 그러한 도덕과 가치명분으로, 수많은 좋은 자산을 가진 소부르주아, 부르주아적 인물들을 그의 유형재산 뿐만 아니라 무형자산과 인격을 인민재판하고, 그리고 육체적 사회적 생명까지도 그냥 다 때려 부수어 없엔 것이다.

한국 또한 자칭 타칭 공인된 유교문명이고 또 스스로도 자진해 속하려는 정신이 많은 사회로써 한국이라고 이러한 홍위병적 오류가 없이 살아왔을리 만무하다. 그리고 필자는 줄곧 말해오던 것이었지만, 한국의 현대사도 사실 홍위병적 파괴의 특성이 한국이라는 독특한 환경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점철되오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게다가 문제의 악렬성은 문제를 가지고도 스스로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남만 못났다고 욕하는 상황이어 왔기에 더욱 그 문제는 고쳐지지 않고 지속된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 저서 <한국 문명 진단 비평>에서 다루어지기도 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작태를 벌이는 사람들이 특히나 현 정부가 소통이 안된다고 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정신을 가진 필자의 귀로 들을 때, 솔직히 이명박 대통령의 국민들에 하는 발언을 들을 때면, 상당한 현실 경험을 통한,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내공을 가졌다는 느낌을 솔직히 받는다. 그리하여 말 한마디 한마디 이면에 쌓인 경험과 그를 바탕으로 한 사고, 세계관 등은 그 높고 굳건한 비범함으로 인해 사람으로 하여금 엄숙하게 되고 심복하게 되어 신뢰를 가지게 만드는 포스 또한 가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역시나 단어 꼬투리, 문장하나 정도나 떼어와 도덕적 비판이나, 자신의 협애한 세계관에 입각하여 의심의 눈초리로 비판하는 모습, 그리고 넘겨짚음으로 사람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욕하는 태도를 보인다. 비단 어제, 오늘 그리고 어느 정권이었는지 차원의 문제가 아닌 항시 있어왔던 것이었다. 이러한 마인드가 습관처럼 되버린 사람들은 더욱 자신의 문제를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며, 동시에 다른 세계관을 가진 이의 내면은 더욱 이해하지 못하고, 그러니 자신과는 다른 내면에서 나온 태도는 모두 자신의 협량한 가치판단의 잣대에 의해 비판받아야 되고 그래서 벌 받게 되어야 하며, 그게 안되니 이제 적대시 되어 쓰러져야 하는 그것으로 여겨질 뿐인 것이다. 진정 소통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수준을 고치는 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과제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직도 어떤 부류의 사람과 그 부류에 속하는 지식인은 소통이 안된다며 이는 대통령 문제로 치환하려 하는 것을 순수히 바라볼 수 없는 이유이다. 진정 소통을 원한다면 필자와 같이 근본 문제를 지적하고 이를 고치려는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낡은 홍위병적 정신 상태와 도량을 버리고, 대인의 성인의 넓고 다름에 대해, 도덕적 가치 판단을 넘어서 포용할 수 있는 그릇을 가지고, 또 최대한 생산적 관계를 광범위하게 만들기 위한 기술이 길러져 와야 하고 또 이것에 가장 많은 정신의 힘이 집중되어 쏟아부어져야 한다. 이러한 한국의 현실 토양에서 누구에게 존재하고 있는 문제 때문에 소통이 안된다는 식의 논쟁을 순수히 봐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지껏 보아온 한국의 지식인들은 누구 탓이나 하고 누구에 더 책임이 있느냐 식의 낡은 수준의 낮은 스펙트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름의 가치기준을 가져와 도구적으로 사용하며 비판하고 탓하고 위세하는 정도에서 대다수가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2. 지적 수준 등등에 관련한 언행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

필자가 변대표의 글을 보았을 때 솔직히 “지적수준” 운운 할 때 한편으로는 나름 상대를 배려하며 말하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지적 수준을 논하며 비판할 정도면 기본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정신 수준은 벗어난 상대에게 나올 비판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린아이 수준의 정신과 윤리수준을 가진 상대라면 기본적인 기초윤리도덕, 유치한 정신 수준에 대한 비판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백하게 사실을 과장되게 잘못 인식하여 왜곡하고 이를 마치 아이들이 빽하고 울듯이 표현하며 상대의 가치있는 무형의 자산을 훼손하는, 그리고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 태도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낮은 정신 수준인 동시에 그토록 무책임한 태도는 바로 어린아이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고매한 경지에 올라 남보다 더 높은 경지를 인식할 수 있어서 더 높은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은 딜레마에 바지게 된다. 곧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에서 더 많은 문제점을 일반인이 인식하는 것 보다 더 많이 인식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실 무책임함을 가장 큰 적으로써 배척하는 정신은 현대 민주문명 국가의 기본 특성이다. 이는 마치 불교에서 생명을 죽이는 것을 가장 금기시 하는 것 같이, 현대 민주국가는 무책임함을 가장 금기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렇게 기초수준의 가치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려 해도 문제가 많이 나오지만, 이 기초 문제도 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또 하나의 거대한 주류이어오고, 진보를 주창하는 사람들도 이 기초개념의 나사를 일부러 풀어놓거나 혹 빼 놓은 작태를 저지르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것이었음을 보았을 때, 사실 생각 외로 적지 않은 사람이, 최소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상처와 분노는 상당히 깊었을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는 또다시 자신의 아픔과 상처, 분노를 보편적인 무책임한 사람처럼 사실을 왜곡하여 사람을 파괴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닌, 이 분노를 발전된 정신의 힘과 이성의 힘으로 생산적인 그것으로 승화하기 위해 나름 상대를 배려하는 완화된 표현을 쓰고 또 그 배려의 태도는 끝까지 일관되는 것을 글에서 볼 수 있다. 곧, 그냥 아예 논의에서 빠져있으라는, 그리고 빨리 미리 사과하라는 그 조언이다. 이러한 언사를 줄곧 본다면 솔직히 필자가 김민선씨가 한 행위에 대해서 하고 있는 인식을 사실은 변대표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상식을 모르고 또 애써 외면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내면에는 이러한 분노 등이 거칠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이 자신의 마음에 거슬린 이 정서만이 인식에 깊히 각인되어 주관적 정서적 행위를 무책임하게 표출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대표 그 나름의 배려하고 생산적이려는 작업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느냐를 논하기 전에, 필자는 이 사람의 아픔과 그 과제의 어려움에, 같은 인간으로써 공감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성공적이었느니 아니니 그래서 잘난 놈이니 못난 놈이니를 따지는 그 모든 가치 평가를 필자는 순수히 보지 않는 것이다. 인류역사의 시대는 이미 자신이 남을 평가한데로 자신도 평가받을 그러한 시대에 와 있는 것이다. (인간혁명 게릴라 경서 참조) 얼마 전 자살한 전 대통령이 어떤 이들에게 가하도록 혹 가해지도록 놔두었던 그 가치 평가에 의해, 그 자신도 퇴임 후 그대로 그 평가를 받게 되어 그만 이기지 못하고 죽음의 도피를 택해버린 것도 우리 사회의 문명의 시계가 지금 이러한 역사적 시기 속에 어느 시기에 처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떤 문명은 이 시기의 낮에 속하며 어떤 문명은 밤에 속하여 고통을 받을 것이다. 이 역사의 신이 던져준 역사적 과제를 문명적으로 앞서 나가는 사회는 그 계명을 잘 듣고 수행하려 노력하며, 그 댓가로 인류역사상 유례 없는 복을 받고 있는 것이며, 어떤 지역의 사람들은 그 신의 과제를 행하지 않거나 혹 반대되는 것을 행하여, 그 룰에 의해 합당한 벌을 받고 복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3. 필자의 입장에 대한 해명
필자를 명빠니 뭐니 욕할지 모르나 필자는 지지율이 5.7%를 달리던 노무현 정권 말기에 조차도 필자는 노무현을 옹호하는 발언으로 무뇌충으로 오인받던 사람임을 밝힌다. 지금 이 대통령을 욕하던 친노 성향의 대부분이 노대통령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욕하던 시기 필자는 그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신뢰를 거두지 않고 그가 나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무책임하게 잊어버리는 것을 피하려 노력했으며,, 그리고 그의 가능성이 최대한 현실 속에서 발휘될 수 있도록 북돋우려는 마음 상태를 가진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노 정권에서 받은 것 하나 없지만 말하는 것을 들으면 유시민씨와 비슷한 점이 많아 친노 영패주의자로까지 오인 받았다. 그리고 지금 이러한 마인드가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것이다. 아니 이명박 대통령에 뿐만이 아닌 인연이 되는 모든 이들과 생산적 관계를 맺기 위한 마음상태를 일관되게 가지려 노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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