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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재 대표의 예의바른 전여옥 평가를 보며

인성에 불꺼진 반휴메니티적 사회, 진정한 예의와 진보

1. 본지의 변대표가 전여옥 의원에 대해 사실은 예의 바른 사람이라는 평가에 대해 야후와 다음 등의 게시판에서 수많은 네티즌들의 욕하며 비웃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변대표는 필자보다 5살 많지만 필자에게 존칭과 선생이란 호칭을 붙힌다. 전여옥 의원의 경우도 연하자에 대하는 태도는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자신과 다른 입장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해도 이렇게 자신이 흔상(欣賞)할 수 있는 좋은 가치가 있음을 재깍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진정 발전된 정신이다. 곧 고상한 가치를 알게 되고 그것으로 쌓아올려지고 발전된 감각에 의해, 고상한 것, 문명적인 아름다운 것을 더 잘 센스(감각)하게 되고, 그 긍정적인 것과 자신과 관계가 일어나게 되며, 그리하여 이를 주체적으로 흔상(欣賞)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인, 거친, 원시적, 그보다도 더 못해진 야만적 내면에 의해 소용당하는 정신은, 거친 자연적 정서에 의해 정복되고 사역되어진다. 자신과 다르다는 것으로 인한 마찰에 의해 부정적 느낌이 촉발되어 그것에 의해 종속, 사역당하여 주위에 결국은 투쟁하고 장래 타도해야할 수많은 적들이 생기게 하는 것이 암흑의 전근대 야만시기 내면의 질서이다. 마치 도야되지 못한 여성들의 일반적 정서상태와 같이, 다름을 거칠게 감각하고 자연적으로 촉발되는 부정적 감정에 의해 행위가 사역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드라마들은 유독 그러한 도야되지 못한 정신에 의한 자연적, 야만적 정서를 부리는 것을, 마치 자연스러운 것 같이 그림으로써 퇴폐적 정신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한 어린아이와 같은 정신수준에 머무르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인 듯 그려, 퇴폐와 멸망으로 가는 성향을 북돋우며, 이 길에 머무르는 것에 무한한 관용과 동정을 베푸는 태도는 우리 민간사회의 정신문명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토양이 더욱 여성들의 무책임한(곧 아이와 같은) 태도를 문제로 인식치 못하고 자연스러운 듯 여기는 태도를 가지게 하며, 동시에 이를 오히려 자신의 이익, 권력을 위해 이용해버리는 현상이 보편적으로 보인다.)

그렇게 여성적 정신의 여성적 문명에 머무르면, 역사는 서로 다른 것들이 서로를 없에고 대체하는 순환만 있을 따름이며, 발전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저당 잡힌 발전은 결국 다른 문명에 비해 뒤처지게 되고, 이어 예정된 환난을 면면히 당하는 한의 역사를 살아 왔었다. 이를 스스로 자구(自救)할 수 없으니, 힘 있는 권력자에 예속됨을 통해, 예종(隸從)의 길부터 걷는 것을 통해 사는 길을 찾아보려는 처지로 떨어지는 것은 고래로 매한양이었음은 성서에서부터 반복하여 기록되어 보이고 있는 바다.

2. 사실 존댓말이라는 문화가 굳이 있다면 이것의 가치를 일단 인정하고 가고자 한다면,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누구나 서로에게 사용하는 것이 현대 민주주의 사상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하다. 지금같이 위계적이고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버리는 식의 언어 습관은 결국 우리 사회 보편적 가치와 마찰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필자는 교수한테 사용하는 경어체를 필자의 학생에게도 그대로 사용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과 존중을 바탕으로 한 평등의 정신을 언어상에서도 일관된 가치로써 관철시키는 사람이 마이너가 되어버린 것이 전근대적 한국문화의 고질병으로써 나타나고 있고, 진정 사회의 발전과 진보를 이끌어 내는데 장애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한다.

물론 필자가 한국문화를 경험한 바로는 물론 지방 문화 중에는 존대말을 잘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상대에 대한 존중이 반드시 결여되어 있지 않은 문화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예를 들어 연하자에게 별 동의를 거치지 않고 말을 놓지만, 그 존대말이란 것이 존중이라는 것과 별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정서도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거의 존대말을 쓰지 않고 케쥬얼하게 말하는 것에 하등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에 그러한 사람들은 달리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러한 사람들 중 나이와 상관없이 남의 말을 경청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도량을 가진 사람들도 있기에 단순히 어떤 형식의 경어체를 쓰느냐만 두고 예의있고 없고를 결정지으려는 획일적 사고 또한 배격한다.

예의를 논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관건은 상대에 대해 인간으로써 기본적 존중을 가지고, 또 자신을 낮추고, 눈높이를 맞추고, 누구의 말이라도 경청할 줄 아는 태도가 있는가이다.

또 연하자가 연상자에게 동시에 말을 놓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냥 물처럼 사용하는 말의 구조가 그러해서 그것에 따를 뿐이고 사실 존댓말로 무엇을 판단하려는 생각자체가 희박한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자신이 존댓말을 듣지 못해도 별 상관없는 문화 또한 마이너이지만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서울의 주류문화는 존댓말과 지휘에 따른 상황에 적합한 어휘의 선택에 매우 민감한 문화라고 경험한다. 이것 때문에 예의 들먹이며 야만스런 싸움으로 떨어져 버리는 모순된 행위 또한 자연스러운듯 발생하는 지역이고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필자가 여러나라 사람들과 교류를 해보았으나, 유일하게 한국처럼 나이로 일단 존경을 거두어 드리는 거친 태도를 가진 문화를 보지 못했고, 그러니 소통과 발전적 대화가 시작되기 어려운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아온 것이다. 이는 매우 전근대적인, 곧 야만의 습태이다. 아니 그 보다도, 근대를 만든다면서 사회와 제도, 조직, 문화, 관습 등을 엄청 방만한 기계 조직과 같이 만들어 과부하가 걸리게 만드는, 그래서 효율성이 매우 떨어지는 현상을 지금 한국민들의 소통생활에서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구한말의 언어습관도 현대 한국의 지금과 같이 위계질서적이며, 무조건적 극존칭을 사용하는 경우는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과 같이 더 운명적으로 수직적이고 까다로운 언어습관이 보편성을 띄게 된 것은 근대화 시대를 거치면서 상명하복식의 엄격한 위계질서의 군대문화를 거치면서 자리잡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언어습관은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여 서로의 의견을 빠르게 교환해도 모자랄 판에, 말하면서 효용없는 사소한 것에 정신을 동시에 집중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서로간의 대화 중 교통정리와 신호 받을 일이 많이 생기는 것이다. 잘못하다 신호위반에 걸려 계도받는 일이 시작되고, 아예 구치소 신세까지 경험하는 일 또한 다반사이다. 이는 마치 고속도로를 통해 직선으로 신호 받지 않고 빠르게 진행하는 것에 비해, 소달구지로 엄청 많은 물건을 여기저기 수레에 덕지덕지 싣고 일반 차도를 주행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다 물건을 떨어뜨리고, 도로에 까파져 계도받게 되고, 그래서 그 문제 해결에나 시간과 에너지의 대부분을 사용하게 되고, 정작 목표를 향해 달리고, 여러 목표지 모두를 다녀오고 생산을 해내지 못하는 것이 현대 한국인들의 토론과 대화의 장에서 아직도 일어나고 있는 바이다.

이렇게 하이웨이를 타고 새로운 세상으로 마구 질주해보는 경험을 해보지 못하고, 길을 나서는 것은 곧 까다로운 교통법규를 신경써야 하고 또 그러한 환경에 의해 벌을 받게되고, 또 이런저런 쓸데없는 물건을 무겁게 싣고 가야하니 에너지가 그만큼 많이 소모되고, 그래서 멀리가지 못하게 될 것이며, 멀리가다 자칫 전복되어버릴 것이니 그 리스크가 더 커져 그만 많이 가지 않고 도중에 쉬어버릴 것이다.

곧, 이렇게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그것을 드라이빙포스로 삼아 자신의 길을 드라이브해 나아가는 정신이 없고, 로컬지역에만 머무르려 하는 정신이 긍정적 정신이 되어버리니, 자신의 주체적 세계관을 구축하지 못하고, 이에 매우 두려움을 느끼며, 집단 계도받는 정신에 귀의함에 안주하는 것이 가장 이익에 부합한다는 논리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많은 젊은이들이 철밥그릇 안정된 미래나 집단으로 희구하고, 네거티브한 사고를 하고 진정 욕망을 긍정하고 ‘일하는 사람’, 사나이의 길을 가는 사람에 딴지나거는 네거티브 정신을 이익인 줄 알고 부리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논 거대한 실적을 암흑이 빛을 더욱 밝게 만들듯 하는 소극적 재료로나 사용되고 퇴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의 사람들의 견문은 좁아질수 밖에 없고 이는 지금과 같은 평생 공부시대에 시간이 갈수록 짐으로써 작용할 것이다. 끊임없이 청년정신으로 살아야 하는 미션이 더욱 강력하게 주어지는 지금 세상에, 정신이 작은 범주에 고정화되어 버리는 진짜 노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일부 386세대들이 왜 더 늙은 세대로 느껴진다고 비판받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무책임 속에 안주할 수 있어서 나름 만족을 얻고 사는, 마치 노예들이 노예로 머물러 있고자 하는 이익논리의 퇴폐의 정신으로 본다. 지적하지만 젊은이의 정신조차 집단으로 이렇게 퇴폐의 논리를 획책하는 사회는 진보와 발전을 어찌 기대하겠냐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파괴적 악플이나 일삼고, 홍위병 같은 행위라도 해서, 비록 떨어지는 것은 없더라도 심적으로 귀속의 안정감을 구하려는 것이며, 거의 대개 그래왔듯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그들에게 그러한 마땅한 행동의 근거가 되는 가치관을 전수해준 사람에게 소용만 되다가 그냥 일개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쥐어짜내진 생명의 혈액은 그들의 이익을 가꾸고 성장시키는 토양에 뿌려져 살찌우고 사라지는 것이다.

필자의 문명관으로는 이러한 상태로 독특한 것은 독특한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니고 마치 인민재판이나 하고 죄 지은 자를 돌로 쳐 죽이고 신체를 훼손시키는 형벌을 가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자유민주주의의 앞선 문명한 법과 제도를 민간의 소망과 상관없이 가지고 왔기에 그 처지는 운이 좋아 벗어났지만 말이다. 그러나 민간의 수준은 여전히 그러한 같은 특질을 노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형벌을 희구하는 대중이 많은 것, 중동국가를 부러워하는 반응이 많은 것 또한 웹상에서는 자주 볼 수 있다.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linkid=57&fid=284&articleid=20090929110046356h2

이를 보면서 필자가 줄곧 지적한 바이지만, 한국의 네티즌들은 정교일체의 전근대적 야만사회에 좁고 둔탁한 도덕체계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정해지고, 그 정신에 종속되고 지배받으며 사는데 심리상의 안정을 찾는 정서가 널리 퍼져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가치관이 외부의 도전을 받게 되면 더욱 공격적으로 변해 홍위병적 수준이 주류로 나타나기 쉬운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쉽게 타도의 대상과 적이 생기기 쉬운 정신 구조 속에 있고, 쉬운 말로 사람의 행동은 미워하되 사람자체는 미워해선 안 되지만, 한 개인은 몇몇 잘못으로 인해 영원히 나쁜 자요, 적으로 낙인찍혀버리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그동안 특히 만두공장 사장 등을 위시하여, 숱하게 억울한 피해자를 노정하였고, 생명을 잃게 된 경우까지 많았음에도, 문명한 민주국가에서는 누구나 배격하는 인민재판이 일상으로 벌어지는 것을, 자유라고 호도하고 방관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그러한 부류의 인사들은 현 정국과 같이 행정부 뿐 만 아니라, 검찰도 친정부적 성향의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고 우려 받고 있으며 거기에 의회 의석수도 압도적으로 소위 보수세력으로 불리는 세력이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권력의 강대한 힘이 남용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실지로 그러한 두려움에 의한 행동이 나오기도 한다. 그 진보를 자처하는 지식인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러면 그러한 힘이 더 남용되기 쉬워 피해가 생길 것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힘의 남용을 더욱 부를 수 있는 행위를 최소한 고무시켜선 안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반대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자연적인 어수룩한 주관적 사고에만 갇혀 자신이 억울하다고 마구 그 정서를 표출하다가 더욱 상대의 폭력을 부르고 말게 되는 것이(이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현실임을 망각한 것은 아닌지, 아니면 알면서도 민주주의와 진보는 피를 필요로 한다는 낡은 믿음 때문인지, 아니면 깡패들이 일부러 상대의 폭력을 촉발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전략인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진정 책임감 있는 지식인이라면 그들의 그러한 거칠고 미숙하며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무책임한 습태를 옹호하고 자유라는 왜곡된 인식을 선전할 것이 아닌, 이를 고치고 정화하여 진정 사회에 생산적 기여가 있는 성숙한 기풍을 진작하기 위해 애쓸 것으로 본다.

무책임함도 마치 자유인 듯 왜곡하여, 무책임함을 기반한 방종의 파괴적 힘을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는데 이용하는 지식인들이 진보로 분류되는 사회여서 그런지, 진정 한국사회에서 어려운 진보란 것이, 그 진보라고 불리워지는 지식인들에 의해 방해받는 현상도 목도하게 되는 바이다. 이는 어쩌면 개인 한사람 한사람의 문제라기 보다 큰 차원에서 그 근저에 깔린 집단의 문화와 그 가치관, 문명 상의 문제에서 비롯됬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다룬 작업은 <한국문명진단비평>이라는 책을 통해 올해 안에 만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여옥 의원이 공적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사적인 장에서 모습이 매우 다르듯, 변대표도 예외는 아니다. 필자가 아는 한에서 변대표의 보다 더 적극적인 면은, 변대표는 자신이 공개적으로 비판했던 사람도 그의 장점을 사적인 장소에서는 기탄없이 인정하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지금과 같은 미디어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진실로 책임감을 느끼고 정신을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 공공에 보이는 면에만 눈이 멀어 판단에 맹점이 생기는 위험을 피해야 한다는 점임을 강조하고 싶다.

3. 변대표도 그렇고 전여옥의원도 그렇고 어떠한 면에서이든지 진보의 면이 보이면 연대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생산적 결과를 만드는 기술이 필요하다. 더 이상의 적대하고 분열하고 부정하고 낙인찍는 마인드는 역사의 도도한 조류 앞에 스스로 쓸려갈 것이다.

이는 존대말 면에서도 그렇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생전 행적에서도 보여진 바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진정 김대중 대통령의 장점을 배우고 계승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 이상의 정치력을 얻고자 한다면 이러한 면을 무시하고선 불가능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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