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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1984', 딴지일보, 20대 개새끼론

약간의 흠집으로 인터넷에서 살해되는 한국인의 운명

최근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의 인기를 끈 탓인지, 인류 정신문명사적 기념비적 작품 조지 오웰의<1984>또한 다시금 조명을 받는 듯하다.

여기에 딴지일보에서는 읽은 척 매뉴얼에서 이 작품을 다루면서 아직도 좌인지 우인지 가르는 이분법적 언사를 두고 이 작품을 해석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딴지일보의 해당 기사를 쓴 기자(이하 딴지로 약칭) 스스로도 글에서 반공 문학 등 문학을 특정 이데올로기적 언어의 범주에 넣음으로써 특수한 목적에 부합하게 하려는 행태의 문제점을 알고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조지 오웰 이라는 작가를 특정 이데올로기에 넣어서 그로 비롯된 모든 행적과 택스트를 그 이데올로기로만 해석하려는 방식은 오류를 낳기 쉽다. 곧, 조지오웰이 좌익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모든 말과 글을 좌라는 사고를 가지고 썼다고 일차적으로 가정하고 해석하는 것 자체가 오독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를 무조건 후대 사람이, 그에게 좌쪽의 사고가 보인다고 해서 모든 말을 좌의 범주에 넣는 것 자체가 바로 <1984>에서 나온 ‘현실을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는 말에서 지적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곧 딴지 기사에서 한국의 우익들이 좌익사상적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조지오웰의 일부요소만 크게 확대하여 왜곡되게 들어나게 만들었음을 비판하면서, 딴지도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알기로는 1990년대 이후로 문예 비평도, 정치적으로 어느 진영에 속하는 사람이 썼느냐로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식은 더 이상 잘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안다. 이것을 벗지 못하였기에 아직도 한국의 작가들은 나는 ‘좌도 우도 아니고 작가’라는 외침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조차도 그 생전, 그리고 사후의 공산주의 운동을 위해 말하여 온 것이 아닌, 훨씬 다양한 사고와 배경과 목적을 가진 복합체로써의 개인으로써 말한 것이다. 그러나 후대 사람이 마르크스가 후대 좌익적 사고를 한 사람들이 많이 인용하고 사상의 원동력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의 모든 글과 말을 일단 좌라는 단정하에 해석하는데, 이는 그 사람에 대한 폭력일 수 있다. (물론 이미 죽었으므로 당하진 않겠지만, 이는 살아있는 사람에겐 진정 몰이해와 폭력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자체가 모든 인간으로써의 진정한 이해, 인간이라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것들의 집합체의 소산인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또 그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가치있는 자산을 빛을 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반면 그렇게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먼저 이해하고, 그 범주에 집어넣고 모든 말과 글을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좁은 시각과 마인드의 소산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곧 진정 발전된 정신의 인간은 자신이 현실세계에서는 특정 세력을 지원하고 있지만 그 자신 자체가 그 특정세력을 가장 잘 비판하는 존재로써, 스스로 나타날 수도 있기에 그렇다. 한 예로 예수가 진실로 현 기독교 교회를 비판하는데 가장 좋은 예시를 보여주는 예시일 수 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비록 같은 정치세력이라고 했지만 현재의 분열세력들에게 가장 큰 비판의 근거로써 나타나지게되는 현실을 보아도 그렇다.

신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도 이슬람 경전을 가지고 와서 이슬람식 공산혁명을 할 수 있는 것임을 상기해 보자.

그렇게 보았을 때, <1984>든 <동물농장>이든 반공을 위한 하나의 재료로써 사용된 것은 자연스런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혹 오직 공산주의만 비판하고 있다고 편협하게 해석하고 자신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오고 있는 면은 애써 막고 탄압하려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그러나 최소한 한국사회의 누구도 그 정도까지의 억지는 부리지 않은 것으로 안다.

필자의 경우는 <1984>를 보고 오히려 한국의 비윤리적 권력자들의 세계, 독재정권 포함해서, 한국 문명 수준이 자연스럽게 낳게되는 낮은 윤리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동시에 일반인 그 자체; 권력 관계가 생기지 않는 곳은 없기에) 너무도 통절히 잘 묘사하여, 높은 정신의 힘을 길러낸 사람은 영혼이 맑아져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까지 보이게 됨이 성서 등등에서 증거하고 있는 점임을 생각했을 때, 그러한 포스를 보이고 있다는 인식을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딴지가 이용하라고 하듯, 그렇게 무슨 특정 정치집단을 비판하는데나 이용하는 것에나 방점을 맞추는 것은, 수퍼컴퓨터를 한낫 인터넷 게임하라는데 쓰라는 식의 말이다.
특정 정치집단을 묘사하는데 그것을 이용하기 전에, <1984>를 읽었다면 자신의 정치집단, 이익집단, 그 밖에 모든 타인에 대한 인식 자체가 외부에 의해 의도되고 조종받은 것은 아닌지 조심해 보고 반성적 사고의 모터를 마구 돌려 객관적이고 높은 이성의 통찰력을 갖기위한 행위에 사용하라는 것이 <1984>를 제대로 사용한 것이 되겠다.

2. 독재를 극복했다는 21세기 초 한국을 예언해버린 놀라운 포스

위에 이야기 했듯, 한국사회에서의 <1984>는 사용될 수 있는 범위가 너무도 넓고 절실하다. 그래서 한국의 독재정권, 특히 금서리스트를 만들어 못보게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러한 책은 금서화 하지 않았는지 엄청난 충격을 먹었었다. 왜냐하면 이 책은 그들 뿐만 아니라 한국인이 물처럼 느끼는 가치체계 속에 살고, 거기서 힘을 취득하는 모든 이를 비판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특히 긴 이야기 짧게 하기 위해 화두로써 삼고자 하는 단어는 바로 이기심의 긍정, 감정에 중시이다. 바로 이것이 자유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센세이셔널하게 발전시켜온 사상적 원동력임을 상기하자. 한국사회는 <1984>가 말하듯 특정 단어를 편협한 시각과 단순화된 감정-증오 아니면 애정 둘 중 하나로 반응하게 만드는 조작질이 당연스럽게 전통으로써, 매우 횡행하던 사회이다. 사실 그러한 단어 조작질은 비단 <1984>에 나온 근대적 사회에서만 있던 것이 아닌 고래로, 특히 전근대적 야만시절에도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오던 사악한 주술과 같은 습태였다. 주일원론적 유교근본주의적으로 극단적으로 흘렀던 조선사회는(이미 유교라는 것 자체로써도 그러한 문제를 프로그램 팻치와 같이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 문제가 더 심화되었을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 부분이 서구사회에서도 특히 공산진영에서 그러했지만, 한국의 경우 근대화의 과정을 물질적인 것에만 의존하고 그 정신의 발전은 싹이 잘려나가고 옭아메어져 자라지 못하게 된 작업이 성공적이었던 사회임을 보았을 때, 그 야만적 주술과 같은 조작질은 조선반도에서 사라졌을리 만무한 것이다.

이러한 악렬함, 단어 조작질은 ‘이기심’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에 대한 이와 관련된 분석은 필자의 저서 <희망을 위한 경제관>과 <인간혁명게릴라 경서 1,2권>을 탐독하기 바란다.)

이는 소설의 구조에서 그대로 드러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미 감정상으로 이상한 느낌이 들고있고 제어되고 잘려나가지고 조작되어지고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이제는 아예 전 3장의 구성 중 한 장, 제2장을 할애하여 사랑이라는 감정의 거대 바다물결과 같은 부분이 어떻게 되어지고 있나를 잘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 장에 결국 한 때 사랑의 감정을 가졌던 줄리아를 배신하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이 모습에서 바로 감정, 이기심을 자라고 발전하게 하지 못하여 사랑하는 사람마저도 이러한 모습을 취할 수 밖에 만드는 사고의 과정을 낳게 함을, 바로 이렇게 감정을 부정하고 옭아메고 자라지 못하게 함으로써 인간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감정, 이기심이라는 것, 이 다양한 그 감정과 이기심이 자라서 좋고 아름답게 발전 승화되는 기회를 한번도 갖지 못하게 되어 바로 맨 마지막에 그러한 선택을 상징적으로 강렬하게 보여주는 것으로써 보여지고 있다. 곧 자신의 그러한 타락은 바로 자신이 사랑했던 그녀가 책임이므로 그녀를 대신 식인쥐의 무리에 던져넣으라는 그 말과 같이 말이다.

이러한 사고는 기실 감정을 부정하고 이기심을 부정하는 한국의 교육을 받고 자라난 많은 사람에게서 남 탓하고 무책임한 모습, 그래서 마구 파괴적인 모습을 노정하는데서 볼 수 있는 것이며, 이는 또 권력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진 자들에게 노련하게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감정자체를 이미 정해진 시각, 가치체계, 잣대에 의해 나쁜 것으로 부정받으므로, 자연 잘못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박탈되고 인민재판이나 받는 것이 마땅한 대접이 되는 것이다. 이를 잘 학습해 인터넷 등 얼마나 사회 곳곳에서 부리고 있는가?

말하지만, 많은 한국사람들이 그 남 탓하고 무책임하고 파괴적 모습을 노정하고 신경질 부리는 모습이 아무 개념 없고 근거가 없이 부리는 것으로 생각해선 안 되고, 나름의 이성적 사고를 거친 결과물에 의한 근거를 가지고 나오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1984>가 그리는 사회 속의 사람들과 같이.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한국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그대로 셋팅받아 그대로 행동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권력자가 되면 똑같이 사용한다. 한국 군대가 바로 얼마나 지옥같은가? 그 이유가 잘 반영되고 있는 좋은 현장 중 하나이다. 물론 이는 더 이전에 학교 등에서 십여년간 학습해 오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교사 등등으로부터.

그것이 바로 무지에 의한, 몽매에 의한, 두려움, 이것의 심볼인 죽음, 이를 이용하여 두려움의 정서를 획책하고, 그를 이용하는 권력자들이 진보임을 자처하는 현대화 과정 속의 사회, 한국, 바로 <1984>에서 표현했듯 한국은 죽음 숭배의 동아시아 문명임을 그대로 통찰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래 링크 참조
(http://www.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30731)

바로 그것이 이기적이지 못해 자살을 통해 의를 지켰다고 논리적으로 연결지어짐을 받는 전직 대통령의 자살사건과, 이를 통한 광풍의 거친 자연적 태풍과 같은 정서를 타고 사실까지 왜곡되어지며 추앙받는 것, 그리고 여기 균형을 잡기 위해 다른 의견을 내면, 집단으로 폭력을 행사하여 피해를 입히는 현실,
이것이 바로 <1984>에서 표현하는 죽음숭배의 동양의 심절한 근본적 문제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마치 태풍과 장마가 지나가듯 사라져 버린 것은 바로 ‘2분 증오’ 후의 정서와 같은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잘려지고 옭아메져 조종당하는 취급이나 받는 감정을, 긍정하고 아끼고 빛을 주고 성장시키고 자라고 발전의 길로 나아오는 자유를 박탈당한 개인들이 바로 그 원인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한국의 집단 귀의적 진보좌파적 정신이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일하는 사람들’의 정치 집단, 현실의 굳건한 토양위에 이기적인 기운을 더 잘 발산하는 세력들에게 캐발리는 이유이다.(물론 그들의 이기심은 제대로 잘 승화 발전하지 못했음도 사실이지만) 그 외의 분석은 아래링크 참조 (http://www.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13969)

요새 한국의 20대들을 두고, 자신의 스펙과 학점 그리고 나름 방면의 수양을 하는 사람을 이기적이라는 단어로, 부정적인 것으로 연결지어버리는 사람들이 바로 한국의 진보사상을 가졌다는 사람들이었다.

이거 요새 많이 듣게 되는 말이다. 바로 ‘이십대 개XX’론, 최근의 김모 교수는 그래서인지 더 정신적으로 어릴 가능성이 높을 수 밖에 없는 10대가 희망이란다. 그들에겐 참으로 그럴 것이다. 이기적이고 자신의 인식에 의한 감정을 소중히 여겨보려는 그들은, 권력을 부리려는 그 메카니즘이 들어갈 틈이 별로 없고, 그래서 한창 그 희생자로써 부려지고 있는 십대들에게서나 또다시 그 목표물을 찾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쥐레이스라는 비판을 들은 바 있다.
<1984>에 보면 그 식인 쥐들은 인간이 연약해진 싸인을 어떻게 귀신같이 잘 캣취해서 그 약점을 파고들어 뜯어먹고 식인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중화제국에서(한국포함) 횡행하는 형벌이라고 한다. 유교는 미친 식인인간을 만드는 사상이라는 비판은 이미 노신의 <광인일기>에서 통절히 묘사되어 드러난바 있다. 딴지는 공포의 쥐를 무엇으로 비유하려했는지 모르겠으나(또 정치적으로 누구에게 사용했을거라는 심증은 가지만) 바로 보통의 한국인과 한국사회를 묘사한 거로 보면 되겠다. 약간의 도덕적 흠집으로 인터넷에서 살해당하는(사회적으로) 한국인들의 운명과 이러한 거대한 죽음의 공포라는 포스가 권력을 위햐여 부려지는 현실 앞에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고 정당하며, 또 진보라는 타이틀까지 걸고 나서는 것에서, 그 문명적 메커니즘의 일면을 단어에 현혹되지 않고 그대로 반영하여 보여주고 있다.

(사족) 여기에 안산 상록을 재보선 선거에 김영환 후보를, 어떤 정당 입당할까 생각만 한거 가지고도 물어뜯어 매장시키려 하는 세력이, 공교롭게도 죽음의 숭배를 이용하는 세력이었기도 하며, 이들이 혹 이들도 바로 그 쥐를 이용하는 세력이라는 비유가 적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결국 항시 하는 이야기지만 한국사회의 진보는 정치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문명, 그 시스템과 메커니즘 자체의 문제이다.

* 필자는 필자가 속한 독서 토론 까페에서 <1984>라는 책을 두고 10월 18일 독서토론을 하려고 하니, 필자가 활동하는 인터넷 까페에 와서 참여해도 좋다. http://cafe.naver.com/discuss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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