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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 발언 사건 관련 평론과 한국사회"

손석희, 김호기, 전상진 교수의 말과 한국사회


필자는 지난 글에서 루저 사건을 어떻게 봐야하는지 언급했다. 당시 이 사태에 대한 반응들에 대해 필자는 핵심을 집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건 발생 후 일주일이 지난 후 각 언론사에서 루저발언이 나온 것에 대한 칼럼들을 각계 지식인들로부터 받아 게제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글도 핵심을 집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글에서 보이는 세계관에 있어서 상당한 왜곡과 위험성을 노출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너무 보편적이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사태가 이 정도이면 이제 우리사회도 그만 스스로의 정신수준에 대해 겸허한 인정이 가장 필요하지 않나 한다. 이 사실 인식을 자꾸 외면하고 엉뚱한 세계 몇위의 경제대국이니 가장 급속한 경제성장을 보였다는 식의 근거로 사실인식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정신의 기제를 이제 논리적 연결이 부족한 것임을 인정하고 사실을 직시하고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 루저발언사건이 재발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1. 먼저 김호기 교수(이하 김교수)의 글을 보자.
http://news.joins.com/article/aid/2009/11/17/3542402.html?cloc=olink|article|default

김교수는 사회학 전공으로써 사회학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본다고 한다. 그러나 글에서는 놀랍게도 루저발언 사건의 기본 성격조차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마찬가지 원인을 외모지상주의로 돌리고 있는 점이다. 이는 필자의 전 글에서 지적한 계절 탓이나 하는 태도적 오류와 닮았다. 곧 가장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기본원인은 모르고, 마치 감기에 걸린 것을 겨울이 와서 그렇다는 식으로 원인을 돌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곧 감기 바이러스에 의해 감기가 생긴 것이지 겨울이 와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계절 탓만 하다간 감기를 절대 고치지 못하고 감기를 고치고 또 예방하기 위해선 감기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곧, 루저 발언이 나온 것은 외모지상주의가 있기 때문이 아닌, 발언자의 정신에 스스로와 타인에 파괴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고, 외모지상주의라는 김교수의 실체도 불분명한 개념 탓했다간 절대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차피 실체도 불분명한 그리고 그 비스무레한 것이 완전히 없어질 기대가 난망한 것이기 때문에 김교수의 문제의식을 따르면 영원히 싸워야 할 적이 생성되는 것을 본다. 이 위에 김교수 같은 주장을 펴는 권력자들이 있다.

김교수는 사회학연구자라는 학자라는 신분이라고 스스로 밝히면서, 학자와 어울리지 않는 , 특히 언어의 의미범위에 있어서 더 민감해야 할 사회학과 어울리지 않는 언어를 쓰고 있다. 곧 키가 180이 안되는 사람은 루저라는 발언은 부적절한 것으로 ‘보인다’는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김교수의 인식 속에는 그 행동이 ‘부적절’한이라는 단어의 범주에 어울리고, 또 그 점에 대해서도 결정은 못하겠고 단지 그렇게 ‘보인다’ 고 한다. 여기서 ‘보인다’는 말은 영어로 표현하면 it looks~, 혹 seems 정도의 표현이다. 곧, looks의 경우 그렇게 생각되어진다. 대개 그렇게 보이고 있다이고, 아직 확신할 정도는 아니고, 근거가 부족하거나, 있더라도 얼마나 결정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확정적 근거인지는 확신이 없다, 더 많은 투철한 연구가 마땅히 뒤따라야 하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더 심한 경우 it seems~ 의 경우도 해당될 수 있는데, seems의 경우는 아예 그 비확신성은 더욱 커져 사실은 그렇게 보지 않거나, 사실 그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반전을 준비하고 있거나, 혹은 일차적으로 그렇게 보지만 바로 입장을 바꿀 수 있음에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 그래서 어떠한 책임도, 인문주의적 아량으로 용서하고 책임을 묻지 말아주길 바라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책임있는 지식인이고, 학자이면서, 분명히 가장 기초적인 잘못을 저지른 병태적 현상에 대해서도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학자적인 신중한 이미지를 거짓꾸며 선포하는 전략으로 여겨진다.

그 전략적 태도로 인해 발생하는 부작용은, 그 루저 발언 사건에 의한 피해자들은, 마땅히 표현해야 분노에 대해서도, 그 분노를 표현하는 모든 행위, 그 수많은 사람들은 결국 집단으로 부적절한, 과도한 행위라는 색깔이 덧칠해 지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 악렬한 문제를 보다 제대로 파악하는데 일조하고 또 서로 보다듬어 주는,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선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부정적 색깔로 덧칠해져 매도되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전 글에서 비판한 낡은 좌파적 인물은 바로 자신의 권력을 위한 행위에 따라주는 사람의 정서만이 고려대상이라는 지적의 일례이다. 그 루저발언을 한 홍대생을 보호하는 듯한 태도는 바로 인간적이라는 도덕가치를 수호하는 이미지를 줌으로써 사회적 영향력, 힘을 도모하려는 효과를 불러오는 행위이고 말이다. 그러나 진정 ‘인간적인’ 바탕은 되지 않기에 수많은 선의의 사람들은 무감각하게 상처받는 것이다. 진정 질적으로 인간적인 사람, 학자적 태도를 질적으로 단련시킨 사람이라면 바로 언행, 이러한 태도에서 조차 모두를 고려해서 정교하게 표현되어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바탕에서인가, 인터넷에서는 그래서 그 행위의 악렬성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집단으로 머저리같은 둔감한 태도로 대다수의 분노한 시민에 대해 상처를 입히고 있다.

집단으로 찌질이로 모는 언사를 하거나, 남자도 그러면서 왜 니들은 난리냐는 등등으로 나온다. 그 피해의 심각성 자체가 불분명하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명백한 매우 저열한 잘못임에도 그 태도가 정확히 악렬한 줄 모르기 때문이다. 곧 그 세균이 감기 바이러스 인줄 모르기 때문에, 왜 자꾸 무균상태로 만들려 하냐는 비판이 나오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사회에 특정주의가 큰 조류를 이룰 수 있다. 외모지상주의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사실 외모지상주의라는 것의 실체조차 김교수 같은 논지 속에서는 스스로 불분명해진다고 보지만) 그래서 한 사회에서 외모지상주의가 클 수 있지만, 그런 무책임하고 반사회적인 책임은 나오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외모지상주의가 지금보다 줄어들었다고 해도 그런 발언은 또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관건은 보통의 사람조차 가장 기본적인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느냐, 상식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또 이러한 사회 기본적인 인식이 있어서 이것에 민감한가, 그래서 이를 예방할 기제가 개인과 사회 속에서 존재하고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전제는 바로 책임감에 대한 제대로된 인식과 그 보편성이며 그에 합당하는 정신의 발전이다.

우리나라는 코미디, 쇼 프로 등도 남의 심령에 상처를 주는 말을 유희로 삼는 저열한 책임감의 사회이고, 책임감은 국민 누구나 기본으로 민감해야 할 덕목이다. 곧 자유민주주의 사회고 암흑과 저주의 근대를 혁파한 노멀한 현대국가를 한국이라는 국가가 가장 기본책임감 수준을 가지고 있어서 자처한다면, 저열한 유교문명적 예의니 이런 것을 주입하고 교육시키민감하게 만들어, 결국 폭력사건이 빈번하고 둔감하게 되는 세상을 만들어져 왔다. 곧 예의 따지다 진정 예의 없는 육체적 언어적 폭력으로 가득 찬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하기에 바로 책임감이라는 개념이 기존의 예의의 단어를 대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책임감에 대한 인식과 가치는 도통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하며 개념자체가 없다. 또 이를 지식권력자, 교수들까지도 조장하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김교수가 촛불 난동을 미화한 것에서 또다시 행동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역시나 광우병 촛불시위를 민주주의를 위한 긍정적 현상으로 주장한 책임의식이 부재한 인물이어서 그랬는지, 도대체 학자로써 제대로 된 정신을 가지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매우 수준 낮은 오류를 범한 것이다.

올해 상반기 필자가 나서서 진중권 교수의 문제있는 발언이 나오는 인식을 교정해 줄 때, 그 비판의 내용이 기본적인 것이나 다루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에서 안타까와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의 지식인들에 조차 아직도 이정도 기본 수준의 비평을 해주어야 하는 수준이 횡행한 것임을 이제 인식하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이것이 이해가 되야 작년 버시바우 미 대사가 한국인은 과학을 먼저 배우고 라는 기본 수준의 비판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자꾸 외면하는 상태이기에 필자의 지적과 영어에 민감도를 갖춘 정치인들이 지적하기 전에, 사건 발생 당시 반나절 동안 문제 삼지도 않던 기자들 수준이 생각난다. 설마 그 정도 수준일 줄은 미처 인식 못하게 되어온 세상에 의한 것이리라.

2. 그리고 서강대 전상진 교수(이하 전교수)의 평론도 기본 토양이 부족한 주장을 보여준다. 전교수는 이미 촛불 난동 사건 관련, 많은 발언을 했었는데, 그 중 특히 그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말 한마디를 가지고 와 본다.
(아래 기사 참조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061806021

위 기사에서 보듯 정부가 주도하는 생각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인식을 주었다는데서 의의가 있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 또한 매우 기본이 부족해보이는 인식으로, 역사를 볼 때 정부 등 거대 권력이 사실을 호도한 케이스는 매우 많아왔고, 그 많은 케이스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말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인식이 있었다 해도 그 후로 어떠한 계기로도 자라나지 못하는 경우 또한 흔해온 현상이다. 이렇게 볼 때 그 흔할, 그리고 한국역사를 통해 볼 때 마찬가지로 흔해 왔던 그 일이 똑같이 발생한 것인데, 그것이 반드시 어떠한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조류를 촉발시킬 계기로 자리메김 될지, 아니면 수많은 반복적 망각 속에 하나가 될지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정부 등에 의해 잘못 호도됬다는 대중의 인식은, 수많은 비슷한 케이스가 많아, 거기에 모두 적용될 수 있는 진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서 거기에 마치 독특한 그것인 냥 ‘계기가 되었다고’라고 밑도 끝도없는 근거로써(근거부재) 선언하듯 단정짓고 있다. (현재 볼 때 아무 계기로도 되어지지 못하고, 다른 마땅할 언사로 자리매김해주어야 할 상황에 진직 이르었다고 본다. 필자는 촛불 난동사건을 해석하는 시각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계기라는 어떤 의미를 지닌 단어로 표현해주는 행위는 도대체 나올 수 없다. 의미는 부여할 수도 없고, 좋고 나쁨을 분석할 가치도 별로 못 느낀다.) 사회학은 역사와 심리, 정신 모두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인데, 기본 지식과 사고수준만 있어도 그런 발언을 못할 것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 이번 매우 논란이 되고 있는 루저 발언 사건에도 그 기본실력이 매우 의심스러운 발언을 보이고 말았다. (아래 링크 기사 참조)
http://www.segye.com/Articles/News/Opinion/Article.asp?aid=20091117004309&cid=

해당 기사를 보면 스스로 루저의 뜻을 패배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 뜻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루저가 의미할 수 있는 부정적 의미의 범위는 훨씬 넓다. 말그대로 ‘인생실패자’ 급의 쓰레기 대접이 일반적인 인간 수준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한국말에서 비슷한 용례로 사용되는 말은 ‘병신’ 정도가 되겠다. 일상언어생활에서 병신이라는 말은 자주 사용되지만 물론 항시 말 그대로 병신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런데 루저는 극복될 수 있는 상황인 경우 또한 흔하다. 그러나 사람의 키는 후천적 요법(treatment)으로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는 고칠 수 없는 선천적 장애를 가진 사람을 두고 병신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과 같은 수준이다.

명색이 사회학자라면서 일반적 용례로써의 루저의 단어를 사용하면서, 현재의 특수한 루저 발언 사건을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전교수가 이러한 인식에 취약함은 위 사례에 이미 밝혔다. 이러한 인식의 거침과 부적합성은 이제 아예 루저를 입에 달고 다니며 글을 쓰는 불쾌한 수준으로, 천박한 수준을 노정하고 있다. 이러한 말하기 태도는 한편으론 대중사회 속에서 습관을 불러일으키질 않을까 우려스럽고, 특히 그 태도의 천박성이 잘 인식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대중의 습관화되는 것처럼 불러일으켜지지 않더라도 이미 상당히 불쾌감을 준다. 다시 말하지만 이번 루저 발언 사건에서의 루저는 고쳐지지 못하는 수준의 더 악렬한 단계의 루저라는 기본인식을 하고 전교수의 글을 봐보자.

그리고 어떤 나라에서 한국의 병신이라는 말이 유행하듯 곳곳에서 발설되고 있다면 듣는 우리는 어떻게 느낄 것인가?도 고려해보자. 그 나라사람들 스스로 너도 병신 나도 병신, 이렇게 부족하니 병신, 저렇게 부족하니 병신, 이러고 있으면 필자는 듣기에 상당히 거북할 것이다. 아무리 그들이 이 한국말을 얼마나 이해할지 모르지만, 혹시라도 의미되고 있을 수준이, 사실은 쓰면 안되는 병신이라는 의미까지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번 루저 사건의 루저의 용법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이렇게 루저라는 단어를 일부러 막 쓰고 있는 것은 그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혹 교수가 나서서 이렇고 있는 것은 무언의 태도로써 그 루저라는 발언에 상처받는 것은 이상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곧, 그들이 사실을 사실적 근거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근거를 가지고 와 사실을 파악해 버리는 정교한 정신과 반대되는 둔탁한 정신을 획책하고, 그를 따라야 하는 근거는 도덕적 가치를 가지고 나와 서포트 하고 있는 것이다. 곧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을 막으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일부러 덜 한 것으로 바라보게 하려는 것이며, 기존의 강렬한 아픔을 통해 생성되었던 강렬한 감정의 힘은 갑자기 생뚱맞은 것이 되어버리고, 전교수 자신이 글에서 밝히는 방향으로 가야함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주장자체가 그들의 인식보다도 못한, 그래서 호도하면서 잘못된 방향으로 에너지를 쓰고 나가라고 선동하고 있는 것이 된다. 견고한 정신이 아닌 일발적 감정 폭발에 의한 수준 정도의 촛불 난동도 마치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는 듯, 견고한 정신을 바탕으로 했기에 발전될 원동력이 큰 가치가 있는 사건인 듯 부풀리는 것은 낡은 좌익들이 역사 속에서 많이 써먹던 방식이다. 이러한 낡은 저급의 유전자를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채택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자유, 민주, 진보, 인류보편적 가치는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아는 수준이 아닌, 그것을 일종의 의지로까지 발전시킨 정신 수준을 말한다. 그러하기에 진정 인류보편적 가치를 아는 것은 단순히 지식, 데이터를 아는 것이 아닌, 그 프로그램이 원리처럼 작동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하기에 지난 글에서 자유와 민주를 설 아는 자의 진보는 감성이 없다고 한 것이다.

3. 한국사회에서 대중적 지명도와 인기, 좋은 이미지로 포장된 사람 중 손석희 교수가 있다. 필자는 중고교시절부터 이미 손석희 앵커의 언행과 태도에 있어 문제점을 많이 인식해왔고 당시 앵커에 대한 대중적 좋은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 많은 문제를 인식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토론 프로를 통해서도 부적절한 언행과 태도, 동시에 그의 지속되는 행동을 볼 때, 문제를 일으키던 수준은 일부러인지 무의식적인지 벗지 않고 내려온 것을 줄곧 인식하고 있어, 현재의 대중적 인정을 정상적이라 보지 않
아왔다.

그가 루저발언 사건 관련 발언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 수준을 보면 역시 매우 대중인기영합적인 속된 수준임을 볼 수 있다. 역시 도덕군자연한 태도로 민감한 사태에 대해 단순화 하여 도덕적 설교를 늘어놓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둔탁하고 좁은 인식에 의한 도덕에의해 계도받는 것을 편안해 하는 수준의 국민정서에는 이 전략이 딱 들어맞을 것이다. 그는 너무 한 개인에게 비판이 집중되면 안된다고 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달성 불가능한 사안이다. 왜냐하면 도대체 한두사람에 의해 발생되는 행위도 아니고, 또 그 수많은 사람들이 사태를 전체적으로 파악해서 일사분란하게 시계 속 부품처럼 행동할 수 있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때까지 이 도덕을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계속 권력이 주어질 것이다. 그 밖에 또 나도 루저다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나(이러한 언사의 문제점은 위에 지적했다.) 방송국 탓이나 하는 것으로 국한시키는 것이나 모두 현재 수준의 직위나 인기도 명성에 걸맞지 않는 수준이다. 말마따나 필자 기준으로 고등학생도 그정도 발언은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방송국 제도로도 안되던 것, 그 배경에 바로 책임감 인식 부재, 정신 부재, 도구에 합당한 정신 부재가 함께 동시에 맞물려 독초를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본 토양의 수준이며 문명의 문제이고, 이 토양에 책임감이라는 영양분이 부재하고 살아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토양의 생명과도 같은 책임감을 기반으로 사건을 측정해내지 못하며, 영원히 책임감이라는 양분 속에서만 자랄 문명과 진보는 육성되어 자라지 못한다. 곧 같은 류의 병태적 독소는 계속 산자에 상처를 남길 것이다.

# 이처럼 한국사회에서 날고 긴다는 지식 권력자들의 수준은 문제가 많음을 스스로가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황우석 박사 사건을 보고도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수준을 밝히는 작업은 올해 나온 <희망을 위한 경제관>을 통해 대표적으로 장하준과 우석훈의 경우를 분석함을 통해서도 이루어진 바 있다. 그 책 작업을 통해 그들 정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널리 파생되는 많은 문제를 고치는 백신을 마련했다고 자부한다.

필자는 글자를 잘못 표기했다든지 맞춤법을 잘못 썼다든지는 별 상관을 않는다. 사소한 부분을 잘못기억하거나 잘못 표기한 부분은 사람이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진중권씨가 자의적 해석이라는 한자표기를 잘못 쓴 것 가지고 그의 수준을 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자질인 사고의 기술에 문제를 보이면, 혹 그 수준이 매우 범속인과 다를 바 없고 단지 지식만 좀 더 많은 수준이라면 최고 지성의 전당으로 자리매김되는 대학에 교수라는 위치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식이 좀 더 많은 수준은 일반적 기억력만 가지고도 부릴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다른 분야에서 일할 때, 자신은 자신의 전공 분야에 시간만 좀 투자하면 누구나 다다를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그 지식이라는 도구를 많이 가지게 되고 그에 걸맞는 정신을 기르지 못하면 말 그대로 자신의 개발되지 못한 정신의 토양에서 가지고 있는 파괴적 요소들이 그 도구와 어울려 마구 잡초와 같이 번성하여 파괴적 영향이 자신의 권력을 타고 함께 외부에 미치게 된다. 마치 양귀비 밭과 같은 마약재배단지와 같이 말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바로 정신의 발전이고, 그 발전된 정신은 필연적으로 정교한 사고의 기술을 수반해오며, 남들과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분석하여 더 통찰력 있는 인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책임감도 더 나오게 된다. 여기서 의지도 발생하여 나온다.(이것이 바로 지구문명이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각 어휘들의 기본 관계들이다. 이 모든 것들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말이다. 매우 거칠게 표현되었지만.)

바로 이렇게 정신이 발달하지 못한 사회, 그것이 강력한 전파력과 영향력이라는 지상파방송이라는 문명의 도구를 타고 한 홍대생 지성인의 아이와 같은 수준의 정신의 파괴적 인자가 문화적인 ‘좋고 나쁨이라는 지식’과 같이 연결되어 그 파괴적 잡초는 자라나고 이것이 그 도구를 타고(마치 국제 마약 유통망과 같이) 전 국민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파급효과를 나은 것이다.

곧 중요한 것은, 그 원인이 물질주의니, 외모지상주의니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정신수준이 아이와 같은 수준으로 놓여져, 개발되지 못한 상태로 획책되는 문명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고, 그 속에 집단으로 그 토양수준 언저리로 머물러 있는 수많은 개인이라는 점이며, 마치 자유법치민주라는 문명적 도구나, 좋은 영향을 많이 파급하라는 미디어랑 어울리지 않는 정신 수준으로 그 독소를 도구의 효과성과 효율성을 타고 사회전체로 빠르게 파급시켰다는 것, 전 지구적 공통된(가장 기본이 되는) 문제의식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이정도의 인식은 되어야, 바로 병을 계절이나 실체도 모호한 신명 탓하는 것이 아닌, 병은 병균이란 것의 존재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고, 그것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상황인 경우 병이 발생한다는 지구 문명사회 보편적 인식에 이르른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한편으로 우리사회가 얼마나 개념이 기본 상식이 부족하고 그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양식의 발전에, 더 긍정적인 인격의 창조를 꿈도 못 꾸게 하는 암흑의 시대인지, 대통령의 자살과 이를 숭배하는 문명, 책임감과 반대라고 할 자살은 옹호되고, 지위와 권위에 대한 낡은 예의는 발휘되며, 그 와중에 책임감은 질식해 사라진 사회 수준, 그러다 보니 동시에 대다수의 살아있는 감성을 어수룩한 좁은 도덕적 잣대로 굴레를 씌워 부정적으로 색칠하는 사회도 한 뿌리이고, 그리고 그러한 어수룩한 인식을 가지고 계도하고 군림하려는 대다수의 인들도 한 뿌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제에 복속하고 심적 안녕을 희구하는 대다수의 사람들, 이러한 (의식적 혹 무의식적) 둔감함, 외면과 망각에 의해 생겨나는 반복되는 순환... 이 모든 것이 바로 정신 수준이 떨어지는 근본원인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이다. 곧 위생이 떨어지다 보니 온갖 병원균이 득실거리는 것과 같은 상황이고, 이 상황에서 책임감과 강건한 정신의 발전이라는 정신 위생에 대한 인식도 없으니 면역도 약하다. 그래서 마치 보호자 없는 아이들이 해충이 진동하는 더러운 환경에서 개념없이 자연스럽다고 여기며 사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이는 정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깊은 문화, 문명의 문제이다. 이는 필자의 다음 저서<한국문명진단비평>에서 본격적으로 디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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