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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수정안은 원안보다 진보적이다

타협은 더 좋은 방안으로 이어져야 한다

최근 세종시 수정안이 발표되고 일각의 사람들에게 더 나은 대안으로 나오게 되어 다행으로 여기게 함과 동시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하고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보다 극렬한 반대를 하게 만들고 있다.

정부가 발표한 수정안에 따르면 주먹구구식 억지로 떼어다 나누어 줌으로써 맞추려 하던 원안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통한 강한 동기부여와 적극적 감정을 들게 하는 것으로 훨씬 진보적이고 앞선 정책으로써 나타난 것으로 필자는 평가한다.

1. 보다 미래지향적이고 전략적으로 필요한 지역

먼저 수정안을 대략 들었을 때 필자가 생각난 것은 각각의 특징이 서로 유기적인 연계를 이루며 돌아가는 구체적인 구조가 그림으로써 그려진다는 것이다. 곧 기존의 대전의 카이스트와 대덕 단지 등의 산학협력 체제의 장점을 살리는 것으로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산업과 연관 기술로 혁신적 성장동력이 있는 도시이다. 동시에 이 대통령이 줄곧 주장해 온 하향평준화를 낳는 토양, 질서에 머무는 상태에서 국소적 손대는 것이 아닌, 과학고 같이 좋은 학교를 여럿 만드는 것을 통한 기회의 제공이다. 여기에는 이공계의 최고 명문인 카이스트의 장점을 더욱 살리는 쪽으로 나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대학도 적극적으로 산학연구 협연을 이루는 적극적 체제가 되도록 그러한 환경을 조성해 주는 곳에 대학을 설립 겸 유치하는 것이다. 동시에 녹색 경제가 전 세계적 화두로써 새로운 성장동력으로써 현 정부는 삼고 있는데, 이를 뒷받침할 에너지 관련 기술 연구소를 설립 유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정체를 거듭하던 대덕연구단지도 다시 활력의 모멘텀을 얻게 되고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성장의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대덕연구단지가 침체되었던 중요한 이유가 곧 신성장동력이 되는 산업으로 코드를 제대로 전환하지 못하여 화학 등 사양산업이 수그러들 듯 대덕 연구단지도 침체되었던 것이며 새로운 성장 동력에도 제대로 물꼬를 대지 못해(투자 매력도가 다른 지역에 경쟁력이 떨어지다보니) 제대로 자금이 돌지 못한 것이다. 이번에 해외 원전이라는 거대한 이익의 바다에 먼저 닻을 올려 나간 이 추세에 더해, 더욱 경쟁력 있는 주자가 되기 위해 국가적으로 에너지 관련 기술이 발전될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마치 한국의 화학 관련 기술 등이 지금처럼 경쟁력을 가지게 되고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었던 것도 대덕연구단지가 도움이 되었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결정은 시의적절한 뿐만아니라 지역적으로도 적합한 것이며 국민들에도 더한 교육과 발전과 상생발전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동시에 지역의 균등한 발전이라는 점도 원안보다 더욱 잘 이루어지고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맨처음 수정안을 들었을 때 충청지역은 오히려 더 잘되서 좋겠다라는 생각을 솔직히 했었다. 서울대, 카이스트 등의 이공계 학과가 분교 등 설치로 국민들은 더욱 좋은 교육에 대한 기회의 문이 넓어지고, 또 대덕단지와 카이스트와 연계되어 같이, 산학협력의 좋은 모델이 더욱 발전되는 것이니 전국에 이런 곳이 없는 자생적 성장 동력을 가진 굳건한 경제 지역단위가 생겨나는 것이기에 그렇다. 필자는 사실 한국의 미래 성장 동력은 새만금 같은 자유무역 지대를 통해서 성장 동력을 삼아야 된다고 하였으나 사실 이렇다하게 발전의 그림과 구체적 계획안이 만들어져 나오지 못하고 동시에 특히 송도신도시 일대에 비하여 어떤 경쟁력을 가졌는지 안타까와, 제대로 되려면 정부, 국회 등을 아예 옮기는 식의 밀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는데(진정 새만금 자유경제 지대를 신성장동력으로 삼는다면 그런 것 정도의 매력도와 대외적 어필이 아니면 국제, 국내 모두 별다른 경쟁력이 없이 커다란 잉여와 비효율, 어리석음의 모델이 되기 쉽다.) 애초부터 결국 새만금을 쌀농사나 짓는다는 소리나 나올 정도의 환경으로 계속 가지고 간 무책임하고 눈치보며 복지부동 무사안일했던 노무현 정권으로 더욱 난감한 처지에 빠졌던 것이다.

거기다 대학과 연구소, 산학 협연 단지이므로, 행정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상주인구가 훨씬 많이 생기는 것이다. 이공과 대학 학생 각 1만명 정도가 서울대로 카이스트 등등으로 생기므로, 정주하는 학생과 교직원, 교원, 그리고 그 정주하는 소비인구로 해서 생겨나는 자영업자들 등으로 이미 적어도 20만명이 예측되지 싶다. 거기다 기업과 연구소, 그리고 가족들까지 합치면 50만명은, 별 경쟁력도 뚜렷하지 않은 산학협연과 행정부처 이전을 통한 것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기대되는 것이다. 그 밖에 연구소 등이 여럿 생기며, 기업들이 많이 유치되는 것이기 때문에 대전 유성구와 서북쪽으로 산재해 있는 산업단지와 연계되어 하나의 거대한 산학협연 단지로써 맞물려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행정도시 보다 경제권의 형성과 성장이라는 면에선 더욱 확실한 것이다.

2. 반대하는 측의 논리 신뢰에 관하여

반대하는 측은 특히 신뢰 문제를 들고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는 같은 당 유력 정치인으로부터도 반대를 받는 주요 논거이기도 하다.

혹자는 다수의 전문가가 다년간의 연구 끝에 내놓은 세종시 원안이 안정적으로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에 전문가가 없어서 잘못된 것이 아닌 애초에 서있는 토양, 입장이 잘못되어서 그토록 많은 지식도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평양을 가려면 북쪽으로 가야함, 방향이 맞아야함이 최우선적 전제이지 재부의 양이 얼마냐가 관건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어떤 가치에 대해 낡고 협소한 이성과 논리구조에서 나온 정의만이 옳은 것으로 펴아내리는 것은 여성적 정신이고 미숙한 정신이며 전근대적인 수구성 다름 아니라 하겠다. 곧 전체적 방향은 보지 못하고 좁게 보다 다람쥐 쳇바퀴 같이 큰 원만 그리며 돌지 목적지에는 정작 가지 못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사실 정부에 대한 신뢰란 최대한 잘 할 것이라는 것에 대한 신뢰가 되어야 한다. 과거보다 좋은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모를 당시의 그것을 고수하는 것이 자신에 솔직하지 못하고 국민에도 솔직치 못한 오히려 신뢰하기에 부족한 자질인 것이다,

3. 현대문명의 정신의 발전과 정책의 발전, 이에 맞게 달라진 공동의 가치

적당히 타협하고 덜 좋은 줄 알면서(혹은 객관적으로 비교평가해 보려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포용하고, 그 길을 가게 하는 과도기적인 어머니적 역할과, 틀리다면 과감하고 용감하게 인정하고 더 나은 길을 가는 이성을 가르치는 아버지의 정신과 비교되는 바이다. 사회와 역사의 진보는 말할 것도 없이 진정한 이성에 의해 추동되어져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세종시 사건은 이성이 필요한 케이스이지, 무조건적인 포용과 인정이 아닌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정의 작은 폭군을 만드는 것임을 가정사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은 비상한 책임감이 구체적으로 물어지지 않는 일반적 경우에서 나올 일이지, 국가 책무를 보는 위치에 사람에게는 반드시 요구할 종류가 아니다.

강력한 이성, 진정한 이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강렬한 감정의 힘, 그 크기에 비례해서 나오게 되는 것이라고 현대와 탈현대의 시기는 이를 증거해오며 더욱더 밝혀 온 시기여왔다. 제도와 정책 또한 사람을 고무시키고 북돋우며 창조적으로 만들게 만들어야지, 곧 강한 감정적 동력을 이끌어내는 제도가 더 좋은 제도로써 지금 세상에 나타나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사기를 저하시키고 무사안일하고 기존의 것에 귀착하여 안전하게 가려하는 것을 기반한 제도는 오히려 고비용 저효율을 낳고, 이러한 토양에서 나온 수많은 논리에와 복잡해진 제도에 의해 오히려 비합리성이 나타나고 전근대적이고 야만함, 반인간적, 반민주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큰 덩어리에서 떼어내어 줌으로써 균형을 맞추려는, 필시 관련된 어떤 부류의 사람들(특히 공무원들)에게는 의욕을 떨어뜨리는 방식과, 기존의 것에서 키우고 북돋움으로써 기존의 것은 덜어짐과 의욕 감퇴가 없고 기존의 장점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커지는 방식과 보다 많은 이익을 내고 생산적인, 합목적적인 제도는 말할 것도 없이 수정안이다.

그래서도 원안보다 수정안을 필자는 더 진보적인 것으로 여긴다.

또 여성들끼리 눈치보며 무조건 공평한 나누기 하듯, 수정안을 또 타협하여 수정하자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타협은 더 좋은 방향으로의 타협이 되고, 상대가 공동의 이익에 대한 목표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나온 더 나은 정책일 때 타협이 가능한 것이지, 무조건 타협을 위한 타협도 사실은 위에 말한 여성적, 복지부동, 무사안일적, 책임감이 사실은 부족한 태도라는 땅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진정 역사의 발전은 이러한 공통의 가치에 대한 동의가 있는 상황에서 각자의 강렬한 정서를 기반으로 한데서 서로 높은 상승을 이룬데서 높은 합의가 나올 수 있는 것이지, 눈치보며 자연적, 아이적 정서나 고려하며 나누어 먹기식 합의는 방만하고 지체, 정체되는(이는 곧 퇴보) 비효용을 오히려 낳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역사의 발전은 매우 지체되고 인간 수명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 되어, 오히려 반인간적이 되고, 차라리 전근대 시대에 돌연변이 같은 뛰어난 지도자의 일시적 등장보다 못한 면을 마구 노정하여 그 시대보다 못한 경우를 광범위한 인구가 마구 겪게 되어 민주라는 이름이 무색해지는 것이다. 남성적 사나이의 길인 바다로 나가는 자를, 도덕과 약속 논리, 협소한 세속적 논리를 가지고와 만류하는 여성적 정신에 타협하지 않고 나가게 되어, 역사의 신에 합당한 태도로 인해, 선택받아 진보하여 복 받는 것을 이루어 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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