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논문을 읽어보면 대한민국이 황우석 박사 논문 조작 사건을 비롯 여러 연구부정행위 사건들로 떠들썩 하듯이, 호주와 같은 선진국도 역시 여러 형태의 연구부정행위 사건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연구부정행위 문제에 있어서 대한민국이 호주와 같은 선진국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부분도 있다. 그것은 공적기관인 학교 연구진실성위원회야말로 더욱 큰 연구부정행위 문제와 갖가지 비리의 온상이라는 진실이, 호주와 같은 선진국과 달리 대한민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연구진실성검증센터는 앞으로 학교 연구진실성위원회의 부조리를 파헤치는 브라이언 마틴 교수의 논문들을 지속 번역 공개할 계획이다.
아래 논문은 ‘사상과 실천(Thought and Action)’이라는 학술지에 발표됐다(Thought and Action (The NEA Higher Education Journal), Vol. 5, No. 2, Fall 1989, pp. 95-102). 브라이언 마틴 교수에 따르면 ‘사상과 실천’에 발표된 이 논문의 편집본은 광범위한 손질이 이뤄졌다. 여기에 번역 공개하는 버전은 브라이언 마틴 교수가 학술지에 기고한 원본이다.
아래에서 사진과 캡션은 모두 연구진실성검증센터가 덧붙인 것이다.
학적 사기 문제와 호주 학계
(Fraud and Australian academics)
지난 몇 년 동안, 언론에 공론화된 학적 사기 의혹 사건들은 호주의 학계를 크게 들쑤셔놓았다. 이 사건들은 호주의 학계와 과학연구기관의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마이클 하비 브릭스 사례 Michael Harvey Briggs
호주 빅토리아 주에 소재한 디킨 대학교(Deakin University)의 인체생명과학과 교수였던 마이클 하비 브릭스(Michael Harvey Briggs)는 개발도상국에서 경구피임약의 효능과 관련한 광범위한 연구를 했었다. 브릭스의 연구는 제약회사들로부터 100만 달러 가량의 예산을 지원받게 될 정도로 크게 주목받았었다.
1980년대 초반, 디킨 대학교의 윤리위원장이었던 짐 로시터(Jim Rossiter) 박사는 브릭스가 수행하는 연구의 문제점에 대한 풍문을 듣게 되었다. 이에 1983년 로시터는 브릭스에게 서신을 보냈다. 브릭스가 그의 아내 맥신(Maxine)과 1979년과 1980년에 함께 발표한 연구논문에서 여성 피험자의 모집과정과 샘플분석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문의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브릭스는 만족스러운 답변을 보내지 않았고 이에 로시터는 디킨 대학의 부총장(Vice-Chancellor, 호주 대학에서의 이 직위는 미국 대학교에서는 총장과 동급이다)이었던 프레드 제본스(Fred Jevons) 교수를 통해 브릭스 교수를 공식적으로 고발했다.
제본스 부총장은 고발 내용에 대해 조사를 해야할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예비조사위원회를 꾸렸다. 그러나 브릭스는 이에 반발하고 빅토리아 주 법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몇 가지 일련의 상황을 거친 후에 대학의 ‘비지터(Visitor)’에 의해서 브릭스에 대한 조사 진행이 중단됐다(‘비지터’는 오래 전부터 영연방(British Commonwealth) 대학들에서 존재해온 전통적인 직위다. ‘비지터’는 대학내 문제와 관련하여 최종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권한이 행사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디킨 대학의 비지터는 빅토리아 주의 주지사였던 브라이언 머레이 경(Sir Brian Murray)이었는데, 디킨 대학의 비지터로서 그의 직위는 잉글랜드의 여왕처럼 주로 명예직에 가까운 직위였다. 머레이 경은 제본스의 고발 내용이 학교의 조사를 진행시키기 위한 ‘증거가 잘 갖춰진 사건(prima facie case)’으로서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결정했다(제본스는 이러한 점을 부인했지만, 그렇다고 비지터의 결정을 뒤집을 방법도 없었다).
1985년도 후반에 로시터와 다른 두 명의 과학자가 새로운 자료를 바탕으로 브릭스를 재차 공식적으로 디킨 대학교에 제소 조치하였으며 이에 새로운 조사가 진행됐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브릭스 교수는 디킨 대학교의 교수직에서 물러났으며 이로 인해 사건에 대한 조사는 종결되었다.
브릭스의 연구에 대한 대학 측의 의혹이 이어졌지만, 그는 스페인으로 떠나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떨어져 고립된 채로 지냈으며 1986년에는 결국 지병으로 임종을 맞이했다. 브릭스 교수가 사망하기 직전 디킨 대학은 브릭스 교수의 동료들과 디킨 대학의 명예 회복을 위해 사건의 모든 부분에 대해 재조사를 진행했다. 1987년에 조사위원회는 브릭스 교수의 연구 중 자료의 일부분이 날조되었으나 그의 동료들은 무관하다고 최종 발표했다.[1]
로널드 와일드 사례 Ronald Wild
로날드 와일드(Ronald Wild)는 호주 멜버른의 라 트로브 대학교(La Trobe University)의 사회과학대학의 학장이자 사회학과 교수였다. 생산적이고 영향력있는 학자였던 그는 많은 제자들을 거느렸으며 호주-뉴질랜드 사회학회의 회장도 맡았다.
1985년 로날드 와일드는 ‘사회학적 관점 입문(An Introduction to Sociological Perspective)’ 이라는 책을 앨런앤언윈(Allen and Unwin) 출판사를 통해 발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 학자들이 로날드 와일드의 저서에 있는 여러 구절들이 다른 출처 자료에 있는 구절들과 거의 동일하며 인용처리도 아예 없거나, 거의 없는 것을 눈치 챘다. 와일드의 저서는 영국의 한 사회학 입문 서적과 가장 비슷한 곳이 많았지만, 기타 다른 출처에서도 빌려온 부분이 많았다.
표절이 명백해 보인다는 여론의 압박 하에 앨런앤언윈 출판사는 와일드의 저서를 자진 회수했다. 라 트로브 대학의 부총장은 와일드의 표절 의혹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1986년 중순, 와일드가 자진 사퇴함에 따라 조사위원회의 활동은 결론을 내지 않은 채 해산되었다.[2]
와일드는 재빠르게 호주의 서북쪽 지역에서 높은 연봉을 주는 학계의 일자리를 얻었다. ‘헨드랜드전문대학교(Hedland College of Technical and Further Education)’의 총장은 와일드의 표절 전력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며 일단 와일드의 “학계에서의 경력과 리더십”을 높이 사서 교수로 임용한 것이라고 밝혔다.[3]
윌리엄 맥브라이드 사례 William McBride
1987년 12월, 과학적 데이터를 조작하고 날조했다는 의혹이 의학 연구자인 윌리엄 맥브라이드(William McBride) 박사에게 제기됐다.[4]
맥브라이드는 1960년대 초반에 임산부의 탈리오마이드(thalidomide) 이용과 태아의 관절기형과의 연결점을 밝혀낸 것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는 기형아의 원인에 대한 연구를 후원하는 ‘파운데이션 41(Foundation 41)’이라는 호주 시드니(Sydney)를 기반으로 하는 재단을 설립했다.
1980년에 맥브라이드는 ‘파운데이션 41’의 후배 연구자인 필립 바디(Phillip Vardy)와 질 프렌치(Jill French)에게 스코폴라민(Scopolomine)이 토끼 배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스코폴라민은 입덧약의 일종인 ‘벤덱틴(Bendectin)’의 원료와 깊은 연관이 있다.
1982년에 바디와 프렌치는 영문도 모른 채로 ‘호주생명과학저널(Australian Journal of Biological Science)’에 발표된 한 논문에 맥브라이드와 함께 공동저자로 기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사후에야 알게 됐다. 게다가 그 논문에서는 그들의 원 데이터가 조작되어서 실제보다 배아에 더욱 큰 영향을 준 것처럼 보이게 되어 있었다. 논문의 초안들에서 맥브라이드의 친필에 변화가 있었음도 드러났다.
바디와 프렌치는 맥브라이드와 직접 만나 저간의 사정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만족스러운 답변을 들을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 둘은 나중에 사임을 택했다. ‘파운데이션 41’에 재직 중이던 다른 과학자 7명도 연구자문위원회에 이 문제와 관련해 서신을 보냈다. 얼마 뒤에 맥브라이드는 재원 부족을 이유로 그 과학자 7명을 해임한다고 통보했다. 바디와 프렌치는 ‘호주생물학저널’에 이 문제와 관련한 서신을 보냈으나 이는 발표되지 않았다.
맥브라이드는 ‘벤덱틴’의 제조사였던 ‘메린 다우(Merrill Dow)’사가 1983년에 생산을 중단하기 전까지, ‘벤덱틴’에 불리한 증언을 미국에서 수차례 했었다.
맥브라이드의 학적 사기에 대한 의혹은 ‘호주 방송(Australian Broadcasting Corporation)’의 과학 담당 기자였던 노먼 스완(Norman Swan) 박사의 기나긴 조사 끝에 겨우 수면 위에 떠오를 수 있었다. 엄청난 국민적 관심으로 인해서 ‘파운데이션 41’은 1988년 7월, 맥브라이드 학적 사기 의혹에 대해 독립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1988년 11월, 조사위원회는 맥브라이드가 1982년 ‘호주생명과학저널’에 발표한 논문에서의 자료를 의도적으로 변조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맥브라이드 박사는 ‘과학적 진실성(scientific integrity)’이 결여돼있다"고 지적했다.[5]
맥브라이드는 즉각 ‘파운데이션 41’의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대중의 기부가 주요 자금원이었던 ‘파운데이션 21’에 치명적이었다.[6]
앨런 윌리엄스와 마이클 스파우츠 사례 Alan Williams, Michael Spautz
브릭스, 와일드, 맥브라이드가 연루되었던 위 사건들은 그래도 대중으로부터 어느 정도 관심을 받았던 사건이지만, 이보다도 더욱 불쾌한 사건은 애초에 일이 벌어진지 10년 후인 지금도 뉴캐슬 대학교에서 계속되고 있는 한 사건이다.
1977년 초, 앨런 윌리엄스(Alan Williams) 박사는 뉴캐슬 대학교(University of Newcastle)의 상학부(Department of Commerce)에 교수로 임용됐다. 그런데 1978년 하반기에 같은 학부의 선임강사(senior lecturer)였던 마이클 스파우츠(Michael Spautz) 박사가 윌리엄스 교수 박사논문의 방법론과 결론에 의문을 제기했다.
호주 학계의 시스템 상, 호주의 ‘교수(professor)’는 미국의 정교수(full professor)와 대체로 동급이나 그보다도 좀 더 독점적인 지위(7개 주요 교수직위 중 하나)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호주의 ‘선임강사(senior lecturer)’는 미국의 ‘부교수(associate professor)’와 비슷하며, 호주의 ‘강사(lecturer)’는 미국의 ‘조교수(assistant professor)’와 비슷하다.
디킨 대학교의 브릭스 교수, 라 트로브 대학교의 와일드 교수, 뉴캐슬 대학교의 윌리엄스 교수는 호주 학계의 엘리트층을 대표했었다.
윌리엄스 교수는 호주의 명문대학교인 서호주 대학교(University of Western Australia)에서 1975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논문 이외에 몇 안 되는 연구성과물들이 다 이 박사논문에 바탕을 뒀었기 때문에 뉴캐슬 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되는 데에는 그의 박사논문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스파우츠 박사가 이 박사논문에 의혹을 제기한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어떤 이들은 윌리엄스 교수가 어떻게 그런 빈약한 연구실적으로 교수 직위에 임용될 수 있는지 의혹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이에 대한 반박 중 하나는 다른 학문 분야에 비해 상학 분야는 원래 다른 분야에 비해서 연구 발표 주기가 길어 논문 발표율이 낮다는 점이다. 그리고 윌리엄스 교수가 임용될 당시 상학부는 교수 채용이 급한 상황이었으며 가능한 지원자들 중에 바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교수를 빨리 채용하지 않았다면 해당 직위와 관련된 예산이 철회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윌리엄스 교수의 "서호주 소상공인들의 특질과 성과(A study of the characteristics and performance of small business owner/managers in Western Australia)"는 750 페이지 가량 되는 상당한 길이의 박사논문이다. 이 박사논문은 소기업의 성공과 실패의 이유에 대한 다양한 통계 수치를 제시한다.
이 박사논문의 주요 결론은, 창업가들이 기업 운영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심리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사업의 실패를 야기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는 것이다. 즉, “소기업을 경영하면서 생기는 스트레스에 잘 적응하고 대처할 수 있는 기업인이 실적이 좋다”라는 것이다.
스파우츠 박사는 처음에 이 박사논문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서 주로 비판했다. 첫째는 윌리엄스 교수가 제시한 통계수치 중 대부분은 근거가 부족하거나 잘못된 방법론으로 계산되었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윌리엄스 교수가 원인와 결과를 헛갈렸고, 감정적 스트레스는 사업실패의 원인이 아니라 사실은 사업실패의 결과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스파우츠 박사는 그의 비판 논점들을 윌리엄스 교수에게 개인적으로 전달했었다. 또한 윌리엄스 교수의 박사논문에 대해 짧지만 냉철한 반론문을 두개 작성했다.
그러나 ‘리쥐스(Rydge's)’와 ‘리얼에스테이트저널(Real Estate Journal)’은 각각 스파우츠 박사의 반론 내용이 음해성이 짙다는 이유와 또 윌리엄스 교수의 논문이 발표된 지 이미 몇 년이나 지나 독자들이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스파우츠 박사의 반론문 게재를 거부했다. 사실, 이때 스파우츠 박사는 윌리엄스 교수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문헌들을 게재할만한 학계의 다른 소통수단을 계속 찾아봤어야 했다.
대신에 스파우츠 박사는 상학부 내의 다른 동료들과 뉴캐슬 대학교의 당국자들에게 서신과 메모랜덤을 돌리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신랄한 메모랜덤을 통해 그는 점점 더 많은 대학교 당국자들에게 (윌리엄스 교수의 박사논문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관점을 알렸다.
1979년 5월이 되자 스파우츠 박사는 윌리엄스 교수의 박사논문의 또다른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윌리엄스 교수가 표절을 했다고 고발했다. 특히 윌리엄스 교수가 2차 출처를 제대로 표기하지 않고, (재인용을 생략하는) 비정상적인 인용처리를 했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1979년 10월, 뉴캐슬 대학교 평의회(이는 미국 대학교에서의 재단이사회(US board of trustees)와 동급이다)는 3인의 교수들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상학부에서의 분쟁에 대해 조사를 하도록 했다.
위원회는 윌리엄스 교수의 박사논문에 대한 의혹에 대해서 진지하게 조사하는 대신에, 스파우츠 박사가 윌리엄스 교수의 박사논문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관점을 대학교 당국자들에게 소통하려고 사용한 방법상 문제에 대해 주로 조사했다.
위원회의 조사 결론은 보안사항으로 부쳐진 채 뉴캐슬 대학교 평의회에 전달되었고, 뉴캐슬 대학교 평의회는 스파우츠 박사에게 윌리엄스 교수에 대한 비판 캠페인을 중단하도록 지시했다. 스파우츠 박사는 자신에 대한 위원회의 지시를 학문적 문제와 관련한 표현의 자유에 재갈을 물리는 것으로 해석했다.
침묵하는 대신에 스파우츠 박사는 윌리엄스 교수 뿐만 아니라 뉴캐슬 대학교 부총장 돈 조지(Don George) 교수와, 부총장보(Deputy Vice-Chancellor)이자 감찰관(Mr Justice)인 마이클 커비(Michael Kirby)에 대해서까지 공격하는 내용의 메모랜덤을 돌리며, 그의 비판 캠페인을 확대시켰다.
1980년 2월, 뉴캐슬 대학교 평의회는 커비 부총장보-감찰관을 대표로 하는 또다른 4인의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커비 위원회”는 이전의 위원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윌리엄스 교수의 박사논문이 아닌 이를 비판하는) 스파우츠 박사의 행위와 태도에 주목했다.
위원회는 스파우츠 박사가, 윌리엄스 교수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일을 그만두라는 평의회의 지시를 거역한 것을 발견했다. 1980년 5월 20일, 커비 위원회는 평의회에 조사 결과를 보고했고 평의회는 3일 후 스파우츠 박사를 해임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종신재직권이 있는 교수를 해임하는 일은 이 경우에 특히나 심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스파우츠 박사는 그의 일탈행위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피소당한 적도 없으며 제대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부여 받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학자들이 이 사건의 여러 측면들에 대해서 공개적인 의견을 거의 한마디도 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필자가 뉴캐슬 대학교에 찾아갔을 때 느낀 것은, 일부 학자들은 그들의 경력관리에 영향을 끼칠까봐 공개적으로, 심지어 개인적으로도, 의견을 표하는 것을 꺼린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뉴캐슬 대학교 교원들의 유일한 의견은 ‘뉴캐슬 대학교 교원 협회(University of Newcastle Staff Association, 교원노조)’의 한 간부로부터 나왔다. 그 내용은 평의회의 결정을 비판적으로 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간부 한 사람만 의견을 표명했을 뿐, 교원 협회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스파우츠 박사가 해임당한 이후 그는 뉴캐슬 대학교와 부당해임 여부와 관련한 법적 분쟁에 돌입했다. 법적 분쟁과 관련해서 스파우츠 박사는 교원 협회나 다른 단체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없이 혼자 스스로를 변호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윌리엄스, 조지, 커비를 포함한 뉴캐슬 대학교의 고위 교수들과 당국자들을 범죄적 명예훼손을 저질렀다는 혐의로 소송을 제기했다.
스파우츠 박사의 송사분쟁 자금은 적합한 지원자에게 법적 자금을 제공해주는 정부의 ‘리갈 에이드(Legal Aid)’ 프로그램으로부터 지원받았다.
스파우츠 박사는 이 사건과 관계된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수많은 메모랜덤을 작성하는 일을 지속했다. 또한 자신의 비판 대상 범위를 더 넓혀서 뉴캐슬 대학교의 간부 당국자들과 뉴사우스웨일스(New South Wales) 주정부의 관계자들까지 같이 공모하여 정의의 실현을 방해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스파우츠 박사가 메모랜덤을 통해 여러 사람들에게 명예훼손을 저지르긴 했다(예컨대, 타인들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그들을 정의실현을 방해한 아첨꾼, 음모꾼이라는 식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아무도 스파우츠 박사를 대상으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일단 "내부 소란(internal disturbances)"이 벌어지면 최대한 조용히 납작 엎드려있는 것이 학자들의 표준적인 행동 패턴으로 보인다.
스파우츠 박사는 1980년도부터 송사를 진행해왔지만 법원은 더디게 움직인다. 아마 사건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몇 년이 더 걸릴 듯하다. 1983년의 한 재판에서는 판사가 스파우츠 박사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고 손해배상금 5,000 달러를 선고했다. 그러나 스파우츠 박사는 자기 원칙에 따라 손해배상금을 납부하기를 거부했고 그 결과로 징역 200일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이후 한 판사가 스파우츠가 부당하게 수감되었다고 판결을 내리고서야 그는 56일 뒤에 출소할 수 있었다(스파우츠 박사는 징역 기간 중 일부를 경비가 가장 삼엄한 교도소에서 지냈다).
호주에서는 민사적 명예훼손에 대한 손해배상금을 지급하지 않을 시 감옥에 수감될 수 있지만, (형사적 명예훼손에 대해서는 아예 법률 자체가 없기 때문에) 형사적 명예훼손으로는 감옥에 수감될 수 없다. 스파우츠 박사는 현재 억울한 옥살이와 관련한 소를 제기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7] 반면 윌리엄스 교수는 상학부에서 계속 교육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결론 Conclusion
이 사례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든 사례들에서 ‘동료심사(peer review)’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연구결과 발표 이전의 사전심사단계에서 학적 사기의 가능성을 찾아내지 못했다. 호주의 동료심사 시스템은 미국의 시스템과 비슷한데, 마찬가지로 미국의 동료심사 시스템도 학적사기를 탐지하는데 있어서는 불충분해 보인다.[8]
각 사례들을 살펴보면, 공적 기관으로 하여금 저명한 인사를 상대로 어떤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것이 어려웠다. 정식의 절차에 돌입했다고 하더라도 조사 진행이 느렸고 결정사항도 뚜렷하지 못했다. 디킨 대학에서는 비지터가 조사를 중단시켰고, 라 트로브 대학에서는 와일드의 사임이 조사 중단을 정당화했다. 맥브라이드에 대한 조사는 대중매체의 관심이 집중되고 나서야 시작되었으며, 뉴캐슬 대학교에서는 피고발자 윌리엄스 교수에 대해서가 아니라 고발자인 스파우츠 박사에 대해서 조사가 집중되었다.
학적 사기를 규명하는 일의 어려움을 고려해봤을 때, 아직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다른 많은 다른 학적 사기 사례들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필자가 수년간 연구해 온 표절이라는 특수한 분야에서만 해도, 공식적으로 규명되지는 않았지만 그 진상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여러 건의 표절 사건들이 있다.
표절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은 이런 사례들에 대해서 제대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학적 사기를 발견한 이들이 주로 표절자의 동료들인데 실은 그들부터가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소하거나 공론화해서 자신의 장래를 망가뜨리는 일을 꺼려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은 이해할 만하다. 사실 여기서 거론된 사건들은 몇몇 사람들의 집요한 노력이 있었기에 공론화될 수 있었다. 이런 노력에 비해 보상은 적었고 리스크는 컸다.
의혹을 드러내고자 시도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움을 겪었다. 브릭스에게 의혹을 제기한 로시터 박사는 수백 통의 협박전화를 받았다. ‘파운데이션 41’의 바디와 프렌치는 맥브라이드의 학적 사기 문제를 공론화했기에 자신들의 경력관리에 해를 입게 됐고, 이는 그들이 해당 사건에서 발을 빼버리게 된 이유일 수 있다. 스파우츠 박사는 해임되었다. 표절이 적발되기 쉬웠고 관련 자료가 모두에게 공개되었던 와일드 사건에서만 고발자들이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
호주에서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명하는 것을 막는 장치는 바로 극도로 엄격한 명예훼손 법률이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송과 관련 재정적인 리스크가 더욱 큰 언론들이 오히려 학술지들보다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지적을 해오고 있다.
(
편집자주 : 호주는 영국을 포함한 영연방에 속하는 나라로, 영연방에서는 명예훼손 문제를 형사가 아닌 민사로만 다루는 대신에 거증책임(burden of proof)을 피고에게 물린다. 명예훼손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소송을 당한 쪽에서 입증해야 했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률이라는 지적을 누차 받아왔다. 영국은 최근에 거증책임을 피고가 아닌 소송을 제기하는 원고에게 물리는 쪽으로 명예훼손 법률을 개정했다. 관련 내용은 사이먼 싱과 관련된 다음 기사의 꼭지 기사를 참고하라.
사이비의료와 소송전을 벌인 '사이먼 싱(Simon Singh)')
이런 사례들은 학계의 권력자에게 불쾌한 의견을 낼 권리, 또 학계의 권력자에 대한 조사를 지속할 권리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스파우츠 박사의 해임에 대한 학계의 반응을 보면, 학계 자체의 권력적 위계질서에 위협을 가하는 일에 자신이 갖고 있는 “학문적 자유”를 기꺼이 활용할 의지가 있는 학자들은 정말 극소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호주 부총장 위원회(Australian Vice-Chancellors' Committee)는 학적 사기 사건을 줄이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시작했다.[10] 이 가이드라인이 제대로 집행될 수 있을지, 그리고 실제로 효과가 있을지는 아직 더 두고 봐야 한다.
여기서 더욱 주목해야할 것은 연방정부가 고등교육기관들의 합병을 장려하고, 산업계와 정부의 이익을 지향하는 연구 및 교육을 고집하면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대규모의 변화들이다.
더욱 주목해야할 것은 연방정부가 고등교육기관들의 합병을 장려하고, 산업계와 정부의 이익을 지향하는 연구 및 교육을 고집하면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대규모의 변화들이다.
이와 같이 정부가 추진하는 계획에 따르면 연구기관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공동연구에 대한 주안점도 더욱 커지게 되는데, 이는 학계의 위계질서와 출세지상주의를 강화시킬 수 있다. 단순히 양적인 실적을 올릴 욕심에 별 의미가 없는 연구들을 하거나 부정행위가 동반된 연구를 할 인센티브를 키우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또한 소위 “국익”을 위해 일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연구기관들은 자기 기관의 지위와 권위에 영향을 끼칠 만한 일이라면 무조건 회피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적 사기를 폭로하는 일의 어려움이 더욱 커지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이런 부조리들을 억제할 만한 저항의 힘은 앞서 브릭스, 와일드, 맥브라이드 사례들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했었던 매스컴들에게서 나왔다.
1960년대 이래, 미국에 비해서는 훨씬 낮은 비율이긴 하지만, 호주에서도 고등교육(대학교육)을 받는 인구 비율은 극적으로 확대되었다. 고등교육 자체가 거대한 사업이 되고 “국익”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이 더욱 분명해질수록, 학계는 언론을 포함한 외부 단체들에 의해 더욱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될 것이다.
학적 사기 문제가 "좋은 기삿거리"로 남아있는 이상, 언론은 어떻게든 학적 사기 문제에 대해 미온적인 대처를 하는 공적 기관에게 맞설 수단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상아탑이 더 나은 시스템을 고안해내지 않는 한은, 상아탑의 학자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자신의 학계 동료들의 비위사항들을 다른 시민들과 함께 뉴스 보도를 통해 접하게 될 전망이다.
각주 Notes
테리 스톡스(Terry Stokes)는 본 논문에 대해서 매우 유용한 조언을 해주었다.
[1] "When Published Results are Questioned", Search, Vol. 16, No. 3-4, April-May 1985, p. 65; Deborah Smith,"Scandal in Academe", National Times, 25-31 October 1985, pp. 3-4, 26-27; Christopher Dawson, "Briggs: Unanswered Questions", Australian, 1 April 1987, p. 14.
[2] Anthony MacAdam, "The Professor is Accused of Cribbing", Bulletin, 1 October 1985, pp. 32-33.
[3] Jane Howard, "Dr Ronald Wild Takes College Job in Far North-west", Australian, 16 July 1986, p. 13.
[4] Norman Swan, "The Man Who Stopped Thalidomide Accused of Fraud", Sydney Morning Herald, 14 December 1987, pp. 1, 4; Bernard Lagan, Malcolm Brown and Wanda Jamrozik, "Dr McBride's Rise and Falter: From Fame to Controversy", Sydney Morning Herald, 19 December 1987, pp. 8-9.
[5] Harry Gibbs, Robert Porter and Roger Short, Report of Committee of Inquiry concerning Dr. McBride (Sydney: Foundation 41, 1988).
[6] Murray Hogarth, Bernard Lagan and John O'Neill, "The Foundation and Fall," Sydney Morning Herald, 19 November 1988, pp. 81, 88; "The Skeleton in Foundation 41's Cupboard," 21 November 1988, p. 12; "McBride's Projects Failed to Win Govt Funds," 22 November 1988, p. 12.
[7] Brian Martin, "Disruption and Due Process : The Dismissal of Dr Spautz from the University of Newcastle", Vestes, Vol. 26, No. 1, 1983, pp. 3-9; Brian Martin,"Plagiarism and Responsibility", Journal of Tertiary Educational Administration, Vol. 6, No. 2, October 1984, pp. 183-190.
[8] William Broad and Nicholas Wade, Betrayers of the Truth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82). (윌리엄 브로드, 니콜라스 웨이드 저,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미래M&B 출판사) 2007년도 국내출간)
[9] Robert Pullan, Guilty Secrets: Free Speech in Australia (Sydney: Methuen Australia, 1984).
[10] Gavin Moodie, Australian Vice-Chancellors' Committee, GPO Box 1142, Canberra ACT 2601, Austr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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