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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자생물학 Essay] 21. 필자의 변(최종회)

일천한 소양과 지식으로 입자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장을 개척하고자 하는 필자의 변(辨)

[편집자주] 미디어워치는 본 편을 마지막으로 입자생물학자이자 생명과학 철학서 ‘라이프사이언스’(해조음 출판사)의 저자인 이돈화 씨(블로그주소 http://blog.naver.com/gi1982)의 생명과학 철학 에세이들에 대한 특별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눈앞의 현상(現象, phenomenon)에서 관념(觀念, notion)과 개념(槪念, conception)의 의식적 분별을 제거한 것이 유무를 떠난 존재적 실상(實相, the factual reality, truth)이다. 지금의 인문학은 모두가 관념적 서술이며, 자연과학도 관념적 논리의 해석과 개념적 이론을 의지한 실험의 수리적 결과와 현상의 이화학적 결과의 합리성에 의존하고 있다.

진리의 탐구는 개념과 관념적 사고에 의한 현상의 존재론적 이치(the ontological true substance of the phenomenon)를 정립하는데 있지 않다. 만약 개념과 관념적 사고에 의한 이치의 정립을 진리라 규정한다면, 관념으로 피운 진리의 꽃은 관념적 차원(觀念的 次元, notional dimension)을 달리할 때마다, 허공(虛空, void spaces)에 핀 구름꽃이 바람에 흩어지듯 우리들의 수고로움을 헛되게 할 것이며, 수많은 법칙(法則, the law)들은 깨어지고, 수많은 이론(理論, theory)들은 새로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과학의 모든 법칙과 이론 및 수학의 원리들은, 현상우주 생물체인 인간들의 의식체계 발현구조가 현상우주를 하나의 차원으로 묶어 주는 ‘현상우주 공간구성 기본물질구조’를 바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현상우주에너지장 내에서 한정적으로 발현하는 인간들의 의식체계작용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의식적인 개념들과 통상(通常)관념 위에서만 성립하고, 현상우주 내에서만 발생하는 물리적 현상들을 충족시켜주는 법칙과 이론들이다. 생명이 추구하는 궁극의 자리를 진리로 표현한다면, 법칙과 이론은 진리를 찾아가는 길에 의지할 수 있는 이정표(里程標, signpost)일 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 인류의 역사는 그 이정표에 고삐가 묶이고, 이미 지나온 곳의 이정표를 짊어지고 가는 어리석음의 흔적으로 점철되어 있어, 뒷사람들의 여정이 자못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진리를 향유(享有, enjoyment)하는 권리는 지혜로운 모든 생명들이 다함께 누릴 수 있는 고유의 권리이며, 진리에 대한 특허권은 부여하는 것도, 부여받는 것도 아니다. 오직 노력하여 진리와 손잡은 자만이 진리의 향기를 음미(吟味)할 수 있으며, 그 향기를 먼저 음미한 자들은 더불어 사는 모든 생명체가 그 향기를 함께 음미할 수 있도록 애써 인도해야 하는 의무와 선각자(先覺者)로서의 책무(責務)만이 있을 뿐이다. 굳이 의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면, 단지 무지(無智, unwisdom)에서 오는 절망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있는 권리 아닌 자유를 가질 뿐이다.

대문 앞의 모든 길은 장안(長安)으로 통하고, 대문 앞에 선 사람과 용상(龍床)에 앉은 사람이 서로 다르지 않고, 장안 궁궐의 용상은 둘이 아닌 하나이듯이, 궁극의 진리는 모든 이사(理事)의 차원에 얽매이지 않기에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그 하나는 시공을 떠나 있으며, 그 하나마저 떠난 귀착점(歸着点, the ultimate conclusion)인 자리 없는 궁극(공극空極)이 만고불변한 진리(萬古不變의 眞理, an eternal truth)의 본래자리일 것이다. 유사이래로 과학은 우주탄생과 생명의 비밀을 밝힌다는 명제 아래, 철학(哲學, philosophy)이라는 마부(馬夫, horseman)의 손에 이끌려 끊임없이 고달픈 여정을 걸어왔다.

오늘날 현대과학은 유무의 존재론적 관념(存在論的 觀念, ontological notion)에 얽매인 유물론적 사관(唯物論的 史觀, the materialistic view of history)에 입각하고, 형이하학적 사고(形而下學的 思考, hylic thought)에서 출발한 서양철학의 토대 위에서, 관념적 논리를 자양분으로 삼아 발달하여 왔으며, 현상을 직관(直觀, intuition)하여 실상(實相, the factual reality)을 드러내는데 기반을 둔, 동양철학의 가치는 근래에 이르기까지 과학자들은 물론이고, 서양의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주목을 받지 못하고, 관심을 가지는 일부에서조차도 그 진면(眞面)이 잘못 이해된 채, 그저 미개한 동양인들의 흥미롭고도 위험한 궤변 정도로 치부되어 왔다.

철학은 관념적 생각(觀念的 生角, notional think: 관념의 바탕 위에 펼쳐지는 개념적 그림)이고, 궁극의 진리는 항상 생각을 떠난 자리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인간은 진리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기에, 관념으로 이루어진 철학과 사상으로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 metaphysical philosophy)과 형이하학(形而下學, physical science)을 논쟁하고, 종교를 이야기하고, 과학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철학과 사상은 궁극의 진리를 이해하는 도구일 뿐, 진리 자체는 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인간들은 그 도구를 갈고 닦고 자랑하는데 열중하는 어리석음을 범해 왔다. 그러므로 종교는 진리의 문을 열지 못한 채, 그 참모습을 보지도 못한 진리의 이름을 먼저 지어놓고서 여호와(Jehovah)라 이름하고, 여래(如來, Tathagata)라 이름하며 시비하고, 2,000년 전 예수(Jesus)가 이 땅에 다녀갔음만을 주장하고, 2,600년 전 석가(釋迦, Buddha)가 이 땅에 다녀갔음만을 주장하며, 다만 석가와 예수가 이 땅에 다녀간 역사가 각자의 눈앞에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각자의 안목대로 현상하여 펼쳐 있음은 보지 못하며, 과학은 유무의 존재론적 바탕 위에서 관념적 차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분자(分子, molecular)에 얽매이고, 원자(原子, atom)에 열중하고, 미립자(微粒子, minute-particle)에 빠져, 상처투성이가 된 상대성원리(相對性原理, theory of relativity)를 머리에 이고,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된 양자역학(量子力學, quantum mechanics)을 짊어진 채, 진리에 눈을 감은 맹인(盲人, the blind)이 되어, 통일장이론(統一場理論, unified theory of field)이라는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초라한 방랑자가 되었다.

유와 무는 대칭(對稱, symmetry)이고, 유한(有限, finitude)과 무한(無限, infinitude)도 또한 유무법의 필연적 대칭이다. 그러므로 유무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존재론적 관념에서의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진리는 본래 움직인 바 없고 변한 바가 없는데,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은 대문을 여는 사람을 손님(古典力學: classical mechanics)으로 보았고, 해밀턴(William Rowan Hamilton, 1805~1865)은 주인(해밀턴역학: Hamilton mechanics)으로 보았을 뿐이다.

철학(哲學, philosophy)은 철학의 입장에서 절제를 벗어난 이유 없는 자유분방함을 내세운 관념적 독단(觀念的 獨斷, notional dogmatism)으로 진리를 주장하고, 종교(宗敎, religion)는 종교의 입장에서 근거 없는 우월적 지위를 내세워, 인간의 무지(無知, ignorance)에서 오는 의심과 무지(無智, unwisdom)에서 오는 근원적 두려움을 자극하여 초월적 진리(超越的 眞理, transcendental truth)만을 앞세우며, 과학은 과학의 입장에서 증명조차 할 수 없는 존재론적 관념에 얽매여, 현상하는 물질에 의존한 자연현상의 실재적 반영(實在的 反映, real reflection)만을 진리라 주장한다. 형이상학적 진리와 형이하학적 진리가 다르고, 과학이 탐구하는 진리와 종교가 밝히려는 진리가 다르다면, 철학과 사상은 단지 철학자와 사상가들을 위한 것이 되고, 과학은 과학자들을 위한 것이 되고, 종교는 종교가들을 위한 것이 될 것이다.

기독교(基督敎, Christianity) 성경(聖經, Bible)에 “두드리라! 마침내 열리리라!”하니, 불교(佛敎, Buddhism)의 수많은 선원(禪院, Seon Meditation Hall)에서는 깨어진 기와조각(화두공안話頭公案에서 발로發露한 의정疑情) 하나를 들고 진리의 문을 지극히 두드리고, 또한 기독교 성경에 “칠흑(漆黑) 같은 어둠 속(이것은 의식의 구름이 본성을 가려 어둡고 캄캄하며 지혜智慧가 전무한 지해知解의 경계가 아니라, 해뜨기 전에 유난히 어둠이 짙은 새벽과 같이 지혜의 문을 열기 전의 깊고, 고요하고, 그윽한 경계를 의미한다.)에 마침내 도둑이 찾아오리라!”하니, 고요(孤寥)한 야반삼경(夜半三更, midnight: 한고비 넘어가는 깊은 수행의 경지를 의미한다.)에 도둑이 들것을 염려하여, 불교의 어느 고승은 열반(涅槃, nirvana)에 드는 자리에서 후학들에게 “야반삼경에 문빗장(외경外境의 자극이 드나드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6가지의 문)을 만져 보거라!”하고 당부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고요한 야반삼경과 칠흑 같은 어둠은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한번은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거쳐야 할 관문일 것이다.

한편에서 말하기를, “한 생각 어리석은 마음이 흙이 되어 막히고, 한 생각 좋아하는 마음이 물이 되어 빠지고,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이 불이 되어 타고, 한 생각 기뻐하는 마음이 바람이 되어 나부낀다.”하며, 근본무명(根本無明, The fundamental ignorance of our innate Buddha nature)과 탐심(貪心, Raga)과 진심(嗔心, Pratigha)과 치심(癡心, Moha)이 극에 달한 인(因, Cause)으로 하여 인간이 받아야 할 고통과 재앙을 겁수(劫水)와 겁화(劫火)와 겁풍(劫風)으로 말하니,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를 두고, ‘원죄(原罪, The sin of Adam)로 인하여 받아야 할 심판과 물의 심판과 불의 심판과 바람의 심판’으로 말한다. 여기에서 과학이 모색해야 할 길은 무엇이며, 명쾌하게 내놓아야 할 대안은 과연 무엇인가?

궁극의 진리는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하나는 절대의 하나이기에 하나마저도 아닌 불이(不二)이며, 그 진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진리인 사실이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만고불변한 진리를 형형색색(形形色色, various shapes or forms and colorful matters) 천차만별(千差萬別, infinity variety)한 관념에 따라, 천태만상(千態萬象, A great diversity in form and figures)으로 바라보는 시각차를 극복하여 우주(자연 또는 존재의 진실한 모습)의 실상을 이해하고, 삶의 진정한 의미와 생명의 가치를 올바르게 정립하여, 모든 생명의 공생에 기여하는 것이, 오늘날 진리를 탐구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일 것이다.

우주의 탄생과 생명의 기원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실존적 생명현상(實存的 生命現象, realistic life phenomenon)의 발현과 우주의 탄생은 동시동소(同時同所)적이며, 의식체계를 의지한 생명현상의 발현 없이는 존재론적으로의 만유(萬有, All the marks and existence in the universe)는 유무현상을 떠나 있다. 모든 학문은 생명존재의 자각과 생명가치의 인식에서 기초한다. 그러므로 모든 과학은 생물학에서 출발하고, 현상우주의 생물학은 생명의 기원을 밝히고, 생명체의 진화(進化, evolution)와 유전(遺傳, heredity) 과정에서 수반되는 자연에 대한 생리생태적 적응(生理生態的 適應, physio-ecological adaptation)과 형태적 적응(形態的 適應, morphogenetic adaptation)의 변천사를 현상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이제는 궁극의 진리에 대한 올바른 접근을 위해서는 모든 영역의 벽을 무너뜨리고, 생명의 물질적인 기원과 정신적 기원의 동반성에 대한 고찰과 더불어, 물질적 유전인 유전과 정신적 유전인 의식적 유전에 대한 고찰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유무법(유무개념)의 실존적 관념을 바탕으로 물질을 기반으로 하는 서양철학의 토대 위에서 출발한 현대생물학을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런 가치적 검증도 없이 그대로 수용해 왔다.

생물학연구의 과정이 현상하는 생명현상을 밝히고, 진화와 유전의 유산으로 표현되는 생명체의 현상적 변천사를 연구하는데 있고, 그 궁극적 목표가 생명의 근원을 밝히는데 있다면,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명의 근원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정신을 배제한 채, 물질로서의 생물학연구만이 과연 학문적 자세에서 바라볼 때, 얼마나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은, 생체에서 분자의 변화를 밝히는 문제보다도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중대사일 것이다.

현상계(現象界, phenomenal world)에서 생물학적인 생명현상은, 생체계의 구성세포와 세포외물질들 상호 간의 역학적 작용으로 현상하는 물리적 집단성질(集團性質, collective property)로 표현되며, 이러한 현상적 생체물질의 역학적 변화인 유기적 생명현상은 현상적 생명의 속성이고, 물질에 의지해서 이 속성을 조절하는 현상이 생명의 또 다른 한 축(軸, axis)인 생명체의 의식작용이며, 의식의 주체는 정신(精神, spirit)이다.[*정신은 철학적 표현이고 기독교에서는 서구적인 개념으로 영혼(靈魂) 또는 영성(靈性, soul)이라 하고, 도교에서 비롯된 동양의 전통사상에서는 인간의 의식체계를 의지하여 나타나는 정신작용을 혼(魂)이라 하고, 형체를 의지하여 머무르고 있는 정신의 주체인 영(靈)을 백(魂)이라 하여 삼혼칠백(三魂七魄, three souls and seven spirits)으로 나누며, 불교에서는 의식체계가 일어나기 전의 본성을 불성(佛性, The Buddha nature) 또는 자성(自性, The self-nature)이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생명체가 살아있을 때는 정신이라 하고, 생명체가 사멸하였을 때는 영혼이라 한다.] 그러므로 대상물질의 현상인 객관(客觀, The objectivity)과 의식주체의 작용인 주관(主觀, The subjectivity)의 상호작용이 현상계의 보편적 생명현상이고, 유무관념을 떠나, 생주이멸(生住異滅; Existence, abiding, changing and extinction)하고 성주괴공(成住壞空; Arising, abiding, dissolution and to emptiness)하며, 눈앞에 현발(現發, Immediate presence)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 All formations or conditioned things are impermanent) 그대로가 제법실상(諸法實相, The real state of all elements)인 생명현상의 실상이 생명의 본질일 것이다.

현대의 자연과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생물학이 생물권(生物圈, biosphere)을 연구대상으로 하고, 생물권은 지구에 한정되어있기 때문에 물리학에 비해서 대상범위가 극히 일부분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우주의 현상은 생명현상의 일부분이고, 생명의 주체는 생물이며, 광대무변(廣大無邊, boundless, illimitability)한 우주에 생물체의 존재가 지구에만 한정되었다는 것은, 무지(無智, unwisdom)한 이들의 무지(無知, ignorance)의 소치(所致)일 뿐이다.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二元論, dualism)을 주창한 플라톤(Plato, BC427~BC347)의 철학에 의지하고, 시공간의 존재론적 상대론(存在論的 相對論, ontological relativism)과 결정론(決定論, reductionism)을 전제로 자연계의 상태함수(狀態函數, state functions)와 확률(確率, probability)을 역설하며 양자역학을 거론하는 물리학에서, 역학(力學, mechanics)을 사고하고 상대론을 사고하는 주체가 물리학자들 스스로의 정신작용인 줄 알면서도, 물질과 정신의 필연적 대칭(必然的 對稱, necessary or essential symmetry: 상의상대相依相待, Mutual dependence)을 부정하면서 물리적 현상론(現象論, phenomenalism)을 이야기하는 것은, 물리학자들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고, 생명체가 가지는 물질적 정신적 조화(精神的 物質的 調和, material and spiritual harmony, life phenomenal harmony)를 부정하는 것일 뿐이다.

정신과 물질은 생명에서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존재이며, 정신과 물질은 광학이성체(光學異性體, optical isomer)와 같은 존재이며,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며, 정신은 마음으로 표출(表出, expression)되며, 마음(心, mind)을 바탕으로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은 의식체계를 의지하여 작용하며, 마음은 몸(身, body)을 의지하고 몸은 마음 가운데 자리한다. 그리고 그 생각을 에너지원(energy source)으로 하여 하루에도 수백만 번씩 빅뱅(Big bang)을 일으키고, 블랙홀(Black hole)과 화이트홀(White hole) 그리고 웜홀(Worm hole)을 형성하며, 의식체계에 의하여 인지(認知, recognition)하고 인식(認識, awareness)하며, 그 인식으로 의식(意識, conscious)하고, 의식으로 분별(分別, distinguish)하며, 의식의 분별로 자아(自我, Self or ego)를 형성하고, 무의식(無意識, unconsciousness)으로 갈무리한다. 그리고는 갈무리한 이것을 큰 보물인 양 착각(錯覺, illusion, delusion)한다. 당금당처(當今當處)에 눈앞을 현출(顯出)하는 이것을 떠나서는 무엇을 “있다. 없다.” 하겠는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물질을 기반으로 한 서양철학의 토대 위에서 출발한 현대생물학의 한계는 이미, 그 치부(恥部, one's weakness)를 드러낸 지 오래이다. 현대에 와서 서양에서는 이미 물질과학(物質科學, material science)의 한계성(限界性, limitation)을 절감하고, 생명에서 정신과 물질의 동시성(同時性, simultaneity)을 토대로 한 동양철학으로 접근을 시도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그들이 지나간 자취를 답습(踏襲, imitate)하고, 그들의 어두운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식물을 비롯한 이종(異種)의 생명체를 인간의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왔으며,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도 없이, 물질을 대상으로 한 실험의 결과만을 중시하고, 이해가 미치지 않는 분야는 단지 초자연적 현상(超自然的 現象, super natural phenomenon)이라고 치부(置簿)해 버리고, 의식적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불가사의(不可思議, A mystery)한 일이라고 규정해 버리는 오류(誤謬, mistake)를 범(犯)해 왔으며, 단순히 감각기관의 발달과 의식의 유무와 그 정교함 정도를 가지고, 고등생물과 하등생물을 가름하는 척도(尺度, criterion, touchstone)로 삼아왔다. 그러나 문제는, 이론의 부재(不在)와 실험실에서 직면하는 수많은 수리적 방법론적 난제(難題, dilemma)들과, 때때로 보편적인 상식이라 여기는 우리들의 경험적 합리성을 벗어나서, 우연(偶然)을 가장(假裝)하여 자연에서 새로이 대두되는 여러 가지 의제(疑題)들과, 의식적 개념과 관념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실험의 결과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할 수많은 문제 앞에서는, 항상 갈 길을 잃어버린다는 점이다.

진리를 외면하고 어디에서 진리를 찾겠는가!? 닿는 곳마다 출발점(出發點, starting post)이고, 가는 곳마다 본래자리(之之發處 行行本處)라면, 어찌하여 공연히 점을 찍어 시공을 펼치고, 찍은 점 하나를 거두어들이지 못해 만년을 허비(虛憊)하는가! 땅을 딛고 서니 장소(場所)가 생겨나고, 허공을 의지하니 방소(方所)가 생겨나며, 현상의식(現象意識)을 의지하니 의소(意所)가 생겨나고, 자아적인 존재의식을 의지하니 찰찰처처(刹刹處處)에 자아적인 지각처(自我意識的 知覺處)인 공소(空所)가 생겨나고, 의지한 무의식으로는 염소(念所)가 생겨나고, 염소를 벗어나니 심소(心所)가 자리한다.

땅에서 바라보는 우주도 상하전후좌우(上下前後左右, in every or any direction)가 무한대(無限大, infinity)이고, 하늘에서 바라보는 우주도 상하전후좌우가 무한대이고, 물결 위를 미끄러져가는 연락선의 선창(船窓)에서 바라보는 우주도 역시 상하전후좌우가 무한대이다. 마음이든 현상이든 어디에서 점을 찍어 출발점을 삼아, 거시의 세계로 또는 미시의 세계로 향하든 간에, 이미 한 점을 찍으면 공간은 무한이 벌어지고, 시간은 공간의 그림자처럼 나타나서 영겁(永劫, Infinitely long period time)을 그려내며, 시간과 공간과 의식이 하나가 되어 형이상학적 관념의 전우주(全宇宙, all conceptual or overall cosmos)와 존재론적 관념의 물리적 우주(物理的 宇宙, physical universe)를 놀이터 삼아 끝없이 굴러다닌다.

인간을 비롯하여, 의식체계의 조종(操縱)에 의해서 생긴 생명현상의 오류를 벗어나지 못하고, 의식체계에 의지하여 전변(轉變)하고 현상하면서 의식에 의존하여 분별하고 판단하는 모든 생물은 무지(無知)하면 의심하고, 무지(無智)하면 두려워한다. 그리고 해결하지 못한 의심은 불가사의로 치부하고, 극복하지 못한 두려움은 숭배의 대상(崇拜의 對象, fetish, cult-figure)으로 삼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안존(安存)하려 한다. 불가사의한 초자연적 현상이란 무지(無智)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무지(無知)의 산물일 뿐이다.

눈앞에 펼쳐진 대통일장(大統一場, Grand Unified: 한 點을 거두어들인 實相宇宙)에는 눈을 감고, 종교의 벽(壁, barrier) 앞에서는 한없이 머뭇거리는 과학의 한계(the boundary of science)와, 대통찰력(大通察力)의 바탕 위에서 식물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동물들의 감정(感情, emotion)을 읽을 줄 아는 통찰력(洞察力)이 없는 생물학의 의미와 한계를 가늠해 볼 때, 이제는 물질과 정신을 함께하는 과학의 대전환(大轉換, big shift)을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동서남북과 상하좌우가 우주공간에서는 그 의미가 퇴색되듯이, 유기화합물(有機化合物, organic)의 라세미화(racemization)와 전자기에너지(electromagnetic energy)의 상호적인 방향성도, 태양계 너머 광대무변한 우주에서는 그 동일성을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계(界, system)는 우리들의 묵시적(黙示的)인 개념적 합의로 성립된 관념이고, 법칙은 관념적 계(觀念的 界)의 질서이며, 이론은 법칙의 관념적 논리(觀念的 論理, ideal logic)이다.

우리는 관념의 틀에 묶이면 사방이 벽이고, 관념을 깨트리면 사방이 문인 것을 알면서도, 관념에 사로잡히면 사방이 벽이고 관념의 틀을 벗어나면 사방이 문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줄은 쉽게 자각(自覺, Self-awareness)하지 못한다. 이론과 법칙은 진리의 궁극을 향해가는 여정에서, 우리가 지표(指標, indicator)로 삼아야 할 이정표일 뿐이다. 선구자(先驅者, pioneer)가 세워 놓은 이론과 관념적 법칙의 이정표에 묶여 나아가지 못한다면, 진리의 궁극은 참으로 요원(遙遠)할 뿐이다. 우리가 수많은 이론과 수많은 법칙을 가지고 무엇을 고민(苦悶)하든 간에, 거울 속에서는 10년 전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고, 자연에서는 언제나 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열매 맺고, 겨울에는 또 다시 봄을 준비한다.

찰나(刹那, An instant)를 쉬어가니 찰나가 만년이고, 만년이 찰나이며, 한 점을 거두어들이니 만유(萬有)가 한 손아귀일 뿐, 찰나를 이어가니 만년은 길고 길며, 한 점을 쥐고 달리니 우주는 넓고 넓다. 발원지(發源地, source)를 알 수 없는 침묵의 강물은 도도(滔滔)히 흐르는데, 언제까지 강가에 서서 배 띄울 용기는 내지 못하고, 물결 높음만을 한탄(恨歎)하겠는가!

불교의 경전(經典, scriptures)과 유가(儒家, Confucianism)의 경전과 도가(道家, Taoism)의 경전과 기독교의 바이블(Bible)이 그래도 읽을 만하기에, 세상은 다투어 제 나라 글로 번역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 땅의 선배들이 후학(後學)들에게 외국학회지에 글 싣기만을 종용(慫慂)하지 않고, 일면식도 없는 노벨(Alfred Bernard Nobel, 1833~1896)이라는 사람 이름으로 주는 상(賞) 받기를 독려(督勵)하지만 않고, 이 땅의 학도들이 세상이 다 읽기를 원하는 진실 되고 경이(驚異)로운 논문들을 쏟아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무엇 때문에 언어 관념도 바르지 못한 이 땅의 어린 아우들을 영어(英語)의 나라로 내몰겠는가!?

지금 이 땅에 만연하고 있는 의도(意圖)된 시시비비(是是非非, right and wrong)와 같이, 학문의 역사이든, 종교의 역사이든, 또는 정치의 역사이든 간에, 정의롭지 못한 목적을 가진 이들의 이치를 벗어난 교언광설(巧言狂說)에 현혹되어, 교훈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귀중한 역사를, 한낱 시비의 대상으로 삼는 우(愚, foolishness)를 범하는 실수가 더 이상 없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훗날 상아탑(象牙塔, ivory tower)의 맨 윗자리에 올라, 학계를 향해 우렁찬 사자후(獅子吼, The lion's roar, referring to the incomparable)를 토(吐)할, 어느 이름 모를 후배 용사(勇士, doughty hero)들의 영광(榮光, honor, glory)을 위한 초석(礎石, foundation stone)을 마련하고자, 오늘도 이 땅의 어느 척박(瘠薄)한 수수고토(愁愁苦土)에서, 한 가닥 남은 희망의 불씨를 위하여 혼신을 다하며, 아직도 아무것도 드러낼 수 없는 일천(日淺)한 학문적 소양에 대한 민망(憫惘)함과, 분에 넘치는 자애와 정성으로 배려해 주시고 이끌어주신 분들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송구(悚懼)한 마음을 안고, 이렇게 치기(稚氣)어린 초립동이(草笠童伊)같은 부끄러운 글로, 외람(猥濫)되이 입자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장을 열고자, 감히 필부지의(匹夫之意)로 장도(壯途)에 발을 내딛는 만용(蠻勇)의 변(辯)을 대신하고자 한다.

2018년 10월   筆者 李燉和 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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