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 [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⑤] “조선시대에도 군 위안부 존재했다”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은 조선총독부의 공창제(公娼制]) 시행이 조선시대 성(性) 문화를 ‘신분적 성 지배’에서 ‘상업적 매춘’ 구조로 전환시켰다고 분석했다.
이 교장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6회차 동영상 강의 '공창제의 시행, 신분적 성지배에서 상업적 매춘으로'(4월 1일)를 통해 조선에서 시행된 공창제의 기원과 의미, 특징 등을 설명하며 근대 우리나라의 성(性) 역사를 조명했다.
등록제, 성병 검진 의무제, 집창제가 근대 공창제의 기본 요건
이영훈 교장은 조선의 공창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공창제의 역사적 의의를 짚었다.
그에 따르면 공창제는 근대 서유럽에서 시작됐다. 공창제가 시행된 직접적 계기는 병사(兵士)들의 성병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병사들의 성병 감염은 군의 전투력과 사기에 큰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이후 여러 나라는 공창제를 통해 매춘업을 국가 관리하에 뒀다. 공창제가 성립되기 위해선 세 가지 요건이 갖춰져야 했다. 1. 성매매 종사자 등록제, 2. 성병 검진 의무제, 3. 영업 구역 집중제(집창제)다. 등록제는 ‘인신매매 및 부당한 금전 계약 감시’, 성병 검진 의무제는 ‘국민 건강 보호’, 집창제는 ‘풍기문란 통제’의 목적이다.
이영훈 교장은 “(국가는) 매춘업에 따른 풍기문란을 통제하기 위해 민간에 분산해 있는 매춘업을 한 곳으로 모아 집창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라며 “(국가의 입장에서) 행정적 통제와 성병 검진이 편리해지는 측면도 있다”고 부연했다.
이 교장은 조선 공창제의 기초가 된 일본 공창제도 살폈다. 17~19세기 일본은 유녀옥(遊女屋) 형태의 상업적 매춘업이 존재했다. 당시 유녀옥 업주들은 가난한 집의 딸을 인신매매의 형태로 구입해 이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개항 이후 외국인으로부터 이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자 일본은 인신매매를 금지하고 유녀‧유녀옥이라는 명칭을 각각 창기(娼妓:매춘여성)‧대좌부(貸座敷:유곽)로 변경했다. 이 교장은 “이러한 대좌부를 일정 구역으로 모은 것이 바로 일본의 근대 공창제였다”며 “일본의 근대 공창제를 그대로 도입한 것이 1916년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공창제”라고 덧붙였다.
공창업 영업 허가, 까다로운 행정 절차 거처야 가능
이어 이영훈 교장은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공포한 공창제에 대해 해설했다. 그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1916년 3월 ’대좌부창기취체규칙(貸座敷娼妓取締規則)’을 공포한다.
이를 살펴보면, 창기 영업을 하기 위해선 까다로운 행정 절차를 거쳐야했다. 창기는 본적이나 주소, 성명, 생년 월일 등을 적은 영업허가신청서를 관할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에 제출해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와 아울러 ‘취업승낙서’, ‘인감증명서’, 대좌부 영업자(포주)와의 ‘전차금 계약서’, ‘건강진단서’, ‘영업사유서’도 첨부해야 했다.
복잡한 절차를 거쳐 영업허가를 받은 창기는 ’허가증’을 자신의 방(영업장소)에 게시해야 했다. 매월 2회 정기적으로 성병 검진도 받아야 했다. 이들에겐 거주지가 제한됐으며 외출도 자유롭지 못했다. 또 창기업을 그만둘때는 허가장을 경찰서장에게 반납하고, 폐업 허가도 받아야 했다.
대좌부 영업자(포주)의 경우 유객의 신상을 기록한 명부를 작성해야 했다. 매월 창기의 영업소득과 전차금 상환의 실적도 관할 경찰서장에게 보고해야 했다.
매춘업 종사자, 20년대가 60년대보다 노동강도 낮아
조선에서 공창제가 시행된 후, 관련 산업 종사자들의 수익과 노동강도는 어떤 수준이었을까.
당시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창기는 1929년을 기준으로 총 3285명(일본인 1900명, 조선인 1385명)이었다. 이들의 월 평균 소득은 31엔으로 추정된다. 당시 소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취업한 여공들의 월 임금이 18엔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그리 낮은 수준은 아니었다는게 이 교장의 해석이다.
이들은 한달에 1인당 약 14명을 접객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대략 이틀에 한 번꼴로 손님을 맞이한 것이다. 앞선 강의에서 이 교장은 1964년 군산 사창가의 매춘녀가 하루 평균 4~5명, 서울 성동구의 매춘녀가 하루 2~3명을 맞이했다고 밝힌 바 있다. 즉 1920년대가 1960년대보다 노동강도의 수준이 낮았던 것. 이 교장은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소득 수준도 29년이 더 높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한다”고 조심스레 추측했다.
창기를 찾았던 유객의 수는 연간 약 56만명이었다. 이 가운데 약 45만명은 일본인이었다. 1인당 유흥비는 일본인의 경우 8엔이었고, 조선인은 4엔이었다. 당시까지는 조선의 공창제가 전반적으로 일본인을 상대로한, 일본풍의 상업적 매춘이었던 것이라는 게 이 교장의 설명이다.
그는 “(조선 공창제) 초창기에는 일본인 유객과 창기가 중심을 이뤘다”며 “그러다가 1930년대 한국인(조선인) 유객과 창기가 증가하면서 점차 한국인이 주체가 된 상업적 매춘사회로 변해갔다”고 전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조선인도 공창제 운영에 적극 개입”
1930년대 중반부터는 조선인이 공창제의 운영과 이용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고 이 교장은 지적했다. 그는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1924년과 1937년 인천 부도(敷島) 부근 유곽의 추이를 비교했다.
이 교장이 정리한 관련 자료에 따르면 1924년 해당 지역의 일본인 유곽은 조선인 유곽보다 번창했다. 당시 일본인 유곽은 창기가 115명, 유객이 2만2972명에 달했던 것에 비해, 조선인 유곽은 창기가 95명, 유객이 1만84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1937년에 상황이 역전된다. 이때 일본인 유곽은 창기 수가 83명으로 줄고, 유객 수도 2만2913명 정도로 정체됐다. 반면 조선인 유곽의 경우 창기(149명)와 유객(2만4974명) 수가 모두 증가하면서, 일본인 유곽을 넘어섰다.
이처럼 조선인 유곽이 번창한 이유에 대해 이 교장은 “1934년 대규모 공사가 착공되고, 1936년 경인 산업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전국적으로 많은 토목업자, 노무자들이 인천으로 몰려왔다”며 “(이 때문에) 부도 지역에 조선인 유곽이 번창하기 시작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식민지적 개발과 더불어 소득 수준이 높아진 조선인이 점차 일본인 전용의 상업적 매춘에 참가하기 시작했다”며 “그렇게 해서 대중적 매춘사회가 열리기 시작했다”고 역설했다.
군부대와 밀접했던 대좌부… 군인 위안이 설립 목적
이영훈 교장은 조선에서 시행된 공창제의 또다른 특징을 지적했다. 대좌부 영업구역이 군부대와 밀접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의 공창제가 군인들을 위한 시설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교장은 “한 일본인 유곽 업주가 유곽을 지으면서 조선인 묘지를 침범해 소송이 발생했는데, 유곽 주인은 ‘유곽을 옮기라’는 판결을 받고도 ‘이 유곽지는 경성에 주둔한 군졸의 위생에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전할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한성부래거문, 漢城府來去文)”며 “(이같은 사례는) 유곽이 처음부터 군사를 위안할 시설로 설립된 것임을 입증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조선의 공창제가 1916년 조선군 제도와 함께 시행됐다는 점을 짚으며 “조선의 공창제는 처음부터 일본과 밀접한 관련하에 설치됐고, 병사들의 성병통제를 위한다는 공창제의 목적이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난 가운데 시행됐다”고 역설했다.
작년 10월 일본에서 출간된 ‘식민지 유곽 : 일본군의 군대와 조선반도(植民地遊廓: 日本の軍隊と朝鮮半島)’라는 제목의 책도 이 교장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 책의 저자는 회령(현재 북한)에 위치해 있던 유곽(덕천루, 1912년 설립)을 답사했는데, 이 지역은 17세기에도 기생촌이 형성됐던 곳이다.
이영훈 교장은 앞선 5회차 강의에서 박취문의 ‘부북일기(赴北日記)’를 통해 조선시대 군관들이 회령 지역의 기생들과 동침한 사례들을 소개한 바 있다. 즉 17세기에 군인들의 위로를 목적으로 형성된 기생촌이 이때까지 이어진 것이라는 게 그의 해석이다.
이와 관련, 이 교장은 “회령에 설치된 모든 유곽은 군 위안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이라며 “(덕천루의 여인들은) 역사적 계보로 볼 때 조선의 기생을 잇는 여인들이었다”고 덧붙였다.
조선은 매춘업 성립 불가… ‘신분적 성지배’ 수준에 머물러
이영훈 교장은 공창제 시행 전 조선에서는 ▲ 낮은 상업 경제 수준 ▲ 가부장권의 부재 ▲ 엄격한 유교윤리 등의 이유로 매춘업이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 교장은 “성매매를 목적으로 하는 매춘 시장이 성립하려면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상업 경제가 발전해야 하는데 (조선에서는) 그와같은 조건이 성립하지 않았다”며 “평민 아버지가 딸을 팔 수 있는 형태의 가부장권도 성립하지 않았다”고 역설했다.
덧붙여 “유교윤리의 사회인 조선에서 상업적으로 성을 공개적으로 매매하는 것은 국가의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 성매매가) 엄격하게 금지됐다고 할 수 있다”며 “(이에 대해) ‘조선시대의 성문화가 청결했다’고 이야기해선 곤란하고, (조선은) 상업적 매춘이 아니라 신분적 성지배가 발달한 사회(로 보는게 합당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매춘이 아예 전무했던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이 교장은 “19세기 말 한성과 같은 주요 교통 요지에서는 주점이나 주막에서 겸업의 형태로 상업적 매춘이 어느정도 성립했던 것으로는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는 “19세기 말 한성 남대문에서 서대문 사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수놀이를 한 사람이 남긴 장부가 있는데, 이 장부에 의하면 술을 파는 집이 42채가 있었다”며 “이 주점에 종사하는 여인들이 손님을 맞아 성을 매매했다고 생각된다”고 전했다.
또 “여러 소설이나 민담에서 호걸남아가 색주가의 여인에게 빠져 재산을 탕진하는 일들은 심심치 않게 소개돼있다”면서도 “어쨌든 (조선의) 상업적, 전업적 매춘업 발전 수준은 낮았으며, 성에 대한 신분적 폭력적 지배가 심했던 사회였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영훈 교장은 “1916년 조선총독부의 공창제 시행을 ‘신분적 성 지배’에서 ‘상업적 매춘’으로의 이행이라고 규정해도 좋다고 생각한다”며 “(조선은 공창제를 통해) 신분적 성 지배에서 상업적 매춘으로, (공창제) 초창기에는 소수 일본인 만의 특권적인 상업적 매춘에서 조선인도 참가하는 대중적 매춘으로 흘러가는 점진적 과정을 밟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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