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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산케이, ‘군함도 괴담’에 맞선 하시마섬 도민들의 진실증언 조명

옛 도민들은 그저 고향의 명예회복을 바랄 뿐...“하시마섬은 지옥섬이 아니었다”

군함도를 지옥으로 묘사하는 반미종북 운동가 구연철 씨의 증언이 점차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서, 구 씨의 증언에 의문을 제기한 ‘올바른 역사를 추구하는 하시마 도민회(真実の歴史を追求する端島島民の会)’(하시마회)가 한일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또 하시마회를 지원해온 일반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産業遺産国民会議)’(산유국)에도 이목이 쏠리고 있다. 

일본의 자유보수 계열 신문사인 산케이는 지난달 21일, ‘[외교 안보 취재] 날조 사관에 흔들리는 군함도, 옛 도민의 증언 동영상으로 반증(【外交安保取材】ねつ造史観に揺れる軍艦島 元島民の証言動画で反証)’ 이라는 제목의 ‘하시마회’와 ‘산유국’ 관련 기획기사를 게재했다.
 


하시마회는 나가사키 시 하시마 탄갱(통칭 ‘군함도’)에서 전시기를 보냈던 옛 도민들이 만들었다. 이들은 한반도 출신의 조선인과 함께 했던 생활을 증언한 다수 동영상들 제작해 산유국의 웹사이트인 ‘군함도의 진실-조선인 징용공의 검증(軍艦島の真実-朝鮮人徴用工の検証, https://www.gunkanjima-truth.com/l/ko-KR/index.html )’에서 공개하고 있다.

산케이는 “옛 도민들은 ‘차별과 학대 등은 없었다’고 말하며, 가난하면서도 서로 협력하여 살았던 실태를 떠올렸다고 전했다. 옛 도민들에 따르면 한반도 출신자들은 하시마섬에서의 잔치에서 한반도 지역 민족의 의상인 ‘치마저고리’를 입고, 외치면서 원을 지어 춤을 췄다고 한다. “쾌지나 칭칭 나네”라고 하면 “그래, 좋다, 좋다”하면서 추임새도 넣는 등, 이러한 장면은 그간 군함도와 관련 우리 한국 측이 갖고 있던 이미지와는 분명 거리가 있다. 

산유국이 군함도 관련 왜곡에 대한 정정 작업에 나서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산케이에 따르면, 원래 일본 정부는 군함도를 포함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明治日本の産業革命遺産)’을 유엔교육과학문화기관(UNESCO)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 했다. 이에 대해서 한국 측이 ‘전시에 (군함도에는) 강제징용된 노동자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등록에 반대했다. 당시 한국 측은 유엔 관계자에 대한 로비 활동에서 “일본인에 비해 위험한 현장에서의 작업을 강요당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측이 군함도에 갖고 있는 편견에 대해서 당시 군함도에 살았던 옛 도민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관련 좌담회에서 카지 히데오(加地英夫)(87) 씨는, “강제연행이라고 하는데, 치마 저고리는 어떻게 갖고 왔을까. 조선반도에서 그냥 일하는 중에 있는 조선인을 일본인이 막 끌고 왔다, 또 밭에서 끌고 왔다고 말하는데, 내 기억에 그들은 여기서 신나게 춤추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카지 씨는 조선인 노동자의 집에서 막걸리를 동급생과 마시고 그 집의 아버지로부터 혼난 에피소드에 대해서도 말했다고 산케이는 전했다.

영화 ‘군함도’, 그리고 반일운동가 서경덕 씨에 의해 묘사된 조선인 노동자는 헐벗었으며 갱내에서도 훈도시 차림으로 곡괭이를 휘두르는 모습이다. 하지만, 하시마 탄갱에서 측량 작업에 종사한 이노우에 히데시(井上秀士) 씨(고인)는 “갱내에서 알몸으로 작업할 수는 없다. 위험하니까. 석탄의 탄석이 떨어지면 (몸이) 크게 다친다”고 반박했다.



‘군함도의 진실’ 웹사이트에는, 2016년에 한국에서 출판된 아동그림책인 ‘부끄러운 세계문화유산 군함도’와 그 실태의 차이를 옛 도민들이 검증하는 동영상도 있다. 소년이 쇠창살에 갇힌 그림책의 묘사에 대해, 옛 도민들은 그런 것은 없었다고 전원이 부정하고 있음을 산케이는 전했다.

이 아동그림책 ‘부끄러운 세계문화유산 군함도’에는 일본군이 조선인의 아이를 채찍으로 때리는 장면도 나온다. 옛 도민 중 한 사람인 마쓰모토 사카에(松本栄) 씨(91)는 “그러한 행위를 냉혹하게 지시하거나 실제로 했었던 사람은 하시마에 단 한 명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

‘군함도의 진실’이 유튜브로 공개한 영상을 보면 재일한국인 출신도 군함도의 실상에 대해서 증언한다. 재일 한국인 2세인 스즈키 후미오(鈴木文雄) 씨(고인)도 증언하길 “전시 중에 하시마에서 심한 대우를 받았다는 이야기 등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손가락질을 당하거나, 흉을 보거나 하는 그런 이웃 관계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산케이는 “하시마 탄갱은 1974년 폐광됐고, 무인도가 됐다”면서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옛 도민들의 증언은 산업유산국민회의의 카토 코코(加藤康子) 전무이사가 모았다”고 설명했다.

카토 씨는 하시마 탄갱을 포함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의 세계유산등록 추천서 원안을 집필한 사람이다. 산케이에 따르면, 카토 씨가 이런 일을 하게 된 배경은 세계유산 등록 과정에서 한국 측이 하시마 탄갱을 나치 독일에 의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동일시하는 호소를 한 것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산케이는 “위화감을 느낀 카토 씨가 옛 도민을 소개 받아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히로시마(広島)나 오카야마(岡山), 미야자키(宮崎), 이바라키(茨城), 교토(京都) 등 옛 도민들을 찾아가게 된 것”이라고 소개했다.



옛 도민들의 증언을 수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 산케이는 “전시 하시마 탄갱을 둘러싼 신문기사나 서적은, 조선반도 출신자가 학대당했다는 논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라면서, “(기존의 논조와) 다른 발언을 하면 한국 측과 일본의 시민단체로부터 괴롭힘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본인의 인터뷰를 수록하고도, 가족이 공개를 거절한 적도 있었다”고 전했다.

고향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들이 결국 통했던 것일까. 산케이는 이렇게 물은 후, 분위기가 이내 반전되었다고 설명했다. 산케이는 “옛 도민들은 하시마에 관련한 서적이나 강연록을 자세히 읽고, 자신의 경험과의 차이를 서로 연락하게 되었다고 한다”면서 “옛 도민 측에서는 ‘루머의 확산에 대해서 조직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헤이세이 29년(2017년)  1월에 ‘하시마회’가 설립되었다”고 설명했다.

회의 발족으로부터 이제 3년이 지났다. ‘군함도의 진실’ 영상 증언 기록을 남긴 사람들 중에서는 고령으로 사망한 사람도 있다. 산케이는 객관적 판단을 바라는 카토 씨의 요청을 전하며 기사를 마무리했다.

“옛 도민들은 다음 세대에 진실을 남기려는 의분에 사로잡혀 있다. 전쟁시기 중 하시마는 과연 ‘지옥섬’이었을까. 그들의 증언을 들은 사람이 판단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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