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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⑭] “위안부 문제, 출구를 잃어버렸다”

“한일 양국 정부, 정대협과 위안부 단체들에게 끌려 다니며 제대로 된 해결책 못 찾아”



주익종 이승만학당 교사(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실장)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14회차 동영상 강의 ‘정대협, 위안부 문제 이렇게 키웠다’(2019년 6월 5일)를 통해 해방 이후 위안부 문제의 전개 과정과 현황을 설명했다. 

반대를 위한 반대’ 집단, 정대협의 탄생

주 교사는 “1970년대 기생관광을 고발해 온 한국교회여성연합회(한교여연)과, 위안부 문제를 연구해 온 윤정옥 이화여자대학교 교수가 주축이 되어 1990년 11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결성됐다”고 말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주 교사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조사와 한겨레신문 연재 기사, 위안부 증언 채록, ‘인간사냥 강제연행’이라는 거짓 프레임의 등장까지가 모두 1990년도를 전후한 짧은 기간, 속전속결로 이뤄졌었다고 설명했다. 

주 교사는 “한교여연과 윤 교수는 기생관광의 원조가 위안부라 생각해 1988년에서 1989년까지 세 번에 걸쳐 일본과 태국, 파푸아뉴기니 같은 지역들을 현지 조사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1990년 1월 한겨레신문에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를 연재했다. 주 교사는 “이들은 위안부를 정신대라 오인해서 부를 만큼 관련 역사적 사실관계를 잘 모르면서도 일본의 위안부 학살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한교여연과 윤 교수의 작업을 승계한 정대협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 강제연행을 부인하자 여론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위안부 피해자 증언을 기획했다. 김학순 씨가 1991년 8월 14일 첫 위안부 증언을 했으며, 이런 흐름 속에서 같은해 12월에 문옥주 씨와 김복선 씨도 위안부 증언을 했다. 주 교사는 “이때쯤 제주도에서의 위안부 사냥 운운하는 거짓말이 만든 불씨가 있었는데 이런 위안부 증언들은 거기에 기름이 부은 격이 됐다”고 강조했다. 

1992년에 이르러 연일 신문 지면에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제주도의 위안부 사냥’ 두 이야기가 올라올 정도로 위안부 문제는 국내에서 큰 이슈가 됐다. 주 교사는 “그런 상황에서 일본 정부에 대한 항의 의사 표시로 1992년 1월 8일부터 일본 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가 시작됐다”며 “이 집회는 2019년 현재 세계 최장기 집회기록을 매주 경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1992년 1월 중순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일본 주오(中央) 대학 교수는 일본군 문서를 토대로 일본 정부가 위안부 모집과 위안소 운영에 관여했다고 발표한다. 이 연구결과는 당시까지의 일본 정부 공식 입장을 부정하는 연구결과였다.

요시미 교수는 일본 육군성과 중국에 있는 일본 육군 부대가 주고받은 문서 6점을 발표했다. 이 문서들 중에는 일본 육군성이 1938년 3월 4일자로 중국 전선의 일본군 부대에게 사회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인물로 위안부 모집 업자를 선정하라는 지시를 내린 문서, 또 중국 전선의 일본군 부대가 위안소를 개소했다고 일본 육군성에 보고하는 문서도 있었다.  

주 교사는 “이 문서들로 인해 일본군이 위안부 모집과 위안소 운영에 깊게 관여했다는 것이 처음으로 드러나서 일본 정부는 큰 타격을 입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침 1992년 1월말 방한한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수상은 한국 국회에서 위안부 문제를 사과하게 된다.



‘일단 사과’를 선택한 일본 정부의 초기 대응

1992년 7월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 관련 1차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조사 보고서는 군 위안부 모집에는 일본 정부가 관여했음을 시인하되 강제연행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2차 조사보고서인 ‘고노 담화(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 河野談話)’가1993년 8월에 발표됐다. 고노 담화를 통해 일본 정부는 군부가 위안소의 설치, 경영,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직간접적으로 폭넓게 관여했음을 인정했다. 고노 담화에는 “사죄조치에 대한 내용은 추후에 안을 내놓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고노 담화에도 불구하고 정대협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애매하게 인정했을 뿐이라고 반발하면서 위안부는 공권력에 의해 폭력으로 강요된 성노예란 입장을 고수했다.

정대협은 UN 인권위원회를 통해서 위안부 문제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런 홍보로 인해서 UN 인권위원회는 ‘전쟁 중 조직적 강간, 성노예제 및 유사 노예제’란 위안부 문제를 다룬 연구보고서를 발표한다. 이 보고서에는 일본군 위안소가 강간소였다고 하면서 강간 금지 등 국제법을 위반했다는 식 내용이 들어갔다.

그 무렵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이 일어났다. 이 전쟁을 통해 전쟁 중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강간이 국제 문제화 됐다. 주 교사는 “그렇게 과거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도 같은 부류의 범죄로 간주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대협은 국제노동기구(ILO)에도 일본군 위안부가 전쟁 중 강제노동에 해당한다며 조사 요청을 하기도 했다.

고노담화에도 표류한 위안부문제...김영삼·김대중 오락가락

정대협과 달리 한국 정부는 고노 담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한국 정부는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과거사와 관련된 일체의 청구권이 정리됐기 때문에 새로이 대일 보상을 요구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일본 정부에 새로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한국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1993년 6월,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 지원법’이 제정됐다. 지원법의 내용은 생존 위안부 신고자 121명에게 1993년 8월부터 생활안정금 500만원을 일시금으로 주고, 매달 생활지원금 15만원, 영구임대주택 우선입주권 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 또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법적 배상이 아닌 도덕적 책임 차원에서 위로금 지급 결정을 통해 한국 정부의 조치에 화답했다. 주 교사는 “일본의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煕) 수상이 방한했을 때 한일 양국 간 위로금 지급방안에 대한 양해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후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가 일명 ‘무라야마 담화(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 村山談話)’를 발표했다. 주 교사는 “이 담화는 일본이 과거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사죄한 것”이라 강조했다. 

일본 정부는 이 담화를 토대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을 조성했다. 일본 기업과 국민에게서 모금한 돈으로 위안부 1인당 200만엔(1995년 당시 환율로 한화 약 1500만원)의 위로금을 순차적으로 지급하고 일본 정부에서 의료비를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정대협은 일본 정부가 직접 사죄하고 배상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일본 민간의 기금 지급을 반대했다. 위안부들을 지원한다는 단체인 정대협의 반대로 인해 위안부들이 일본의 기금을 받기 어렵게 된 것이다. 결국 일본의 국민기금은 1998년에 사업 중단, 2002년에 사업 종결이 됐다.

주 교사는 김영삼 정부가 당초의 양해와 달리 정대협 주도의 국내 여론에 떠밀려 일본의 국민기금 지급을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게 됐음도 설명했다. 즉, 1997년 첫 위로금이 지급 될 때부터 김영삼 정부가 “심히 유감”이라면서 외교적으로 강한 반대의사를 표시햇던 것이다. 

같은 해 들어선 김대중 정부는 위안부 신고자 186명에게 일본 국민기금보다 훨씬 많은 3800만원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김대중 정부는 일본 국민기금을 받은 위안부들에겐 한국 정부의 돈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혀 위안부들이 일본 국민기금을 기피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일본 국민기금은 해산할 당시 자체 평가에서 생존위안부인 700명의 절반이 넘는 364명에게 위로금을 지급했다고 자평했다. 관련해 주 교사는 “국내 상당수 위안부 생존자가 이 위로금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국민기금 총 금액 46억 2500만엔 중 민간 모금액은 5억7000만엔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주 교사는 “비용의 90%이상을 일본 정부가 낸, 사실상의 일본 정부출연기금이었다”며 “결국 정대협과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낸 돈을 거부한 셈”이라 설명했다. 



정대협, 위안부 국제이슈화 성공...소녀상 설치 전개

정대협은 위안부 문제의 국제이슈화를 계속 밀어붙였고 결국 성공을 거둔다. 정대협은 해외 인권단체들과 함께 2000년 도쿄 모의법정에서 위안부 국제전범재판을 열기도 했다.  

특히 정대협은 2007년 미 하원과 유럽의회가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하는 결의안을 내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미 하원은 일본군이 위안부에게 성노예를 강제한 사실에 대해서 일본 정부가 사과할 것, 그리고관련 사실을 일본 내외에서 교육할 것을 권고했다. 

정대협은 국내에서도 위안부 여론몰이와 위안부 소녀상 건립을 밀어붙였다. 2011년 11월 수요집회 1000회를 기념해 정대협 주도로 종로구 일본 대사관 앞에 소녀상을 세워졌다. 주 교사는 “이명박 정권은 이를 막아야 했음에도 구청 소관 사안이라며 방관했다”며 “이런 조형물은 한 번 세우면 그 후 사실상 철거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실책”이라고 지적했다.

주 교사는 이어서 빈 협약 22조 2항의 대사관 보호를 위한 규정을 설명했다. 이 규정은 ‘국가는 외국 공관의 안녕 교란이나 품위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위안부 소녀상은 빈 협약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2016년 8월엔 서울시가 남산의 옛 통감관저 터에 위안부 기림터를 만들었다. 2016년 말에는 부산에 일본 총영사관 앞에 소녀상이 세워졌고, 위안부와 아무 관련 없는 서울 홍익대학교 앞에도 소녀상을 세우려고 했다. 주 교사는 이런 전개에 대해 “앞으로는 어딜 가도 위안부 조형물을 보게 될 것”이라며 “가히 광기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위안부들과 정대협은 ‘위안부 피해자가 배상청구권을 갖는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한일청구권 협정에 의해 청구권 소명이 끝났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과 충돌한다. 

2006년 위안부들은 ‘한일 양국 간 의견 불일치에 대해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이 기본권 침해’라는 내용의 헌법 소원을 헌법 재판소에 제출한다. 이에 대해서 2011년 헌법재판소는 한국 정부가 한일간 분쟁을 해결하는데 나서야 한다면서 이 헌법 소원 청구를 인용하는 결정을 내렸다. 관련해 주 교사는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에 나서야 될 상황이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노력마저 물거품...문재인 정부가 대못질

계속해서 주 교사는 박근혜 정부의 한일 간 분쟁 해결 노력에 대해서 설명했다. 당시 정부는 일본 측과 물밑 협상을 거쳐 2015년 말 정상회담 후 위안부 문제 합의안을 내놓았다. 이 합의에서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군의 관여 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 책임을 통감하고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과 상처에 대해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했다. 주 교사는 “이는 일본이 다시 한 번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사죄를 표한 것”이라 설명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안에 따라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10억엔의 기금을 받아 재단을 설립하고 개별 피해자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는 2016년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해 약 30명의 위안부들과 그 유족들에게 1인당 1억의 위로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탄핵 이후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2018년에 화해치유재단을 해산시켜버리고 만다. 이 조치와 관련해 주 교사는 “문재인 정부는 동시에 2015년의 합의를 사실상 폐기한 후 재협상을 요구하지도 않은 채 문제만 다시 부활 시켰다”고 설명했다.

한편, 2016년 12월, 일부 위안부들과 그 유족들 20인이 서울중앙지방법원을 통해 일본 정부에 대해서 총 30억원의 손해배상 요구 소송을 제기하고 나서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 정부에 대한 손해배상 요구를 일본 법원이 아닌 한국 법원에 제출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국제법상 주권면제 원칙인 ‘국가는 타국 법원에서 동의 없이 소송의 피고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소송을 거부했다. 

일본 측의 소송 거부에도 불구하고 2019년 5월 초, 한국 법원은 해당 건에 대해 공시송달(재판절차나 행정절차에서 송달할 주소를 알 수 없는 경우 송달할 서류를 게시해 놓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송달이 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 요건을 갖췄다며 심리를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관련해서 주 교사는 “이렇게 문재인 정부의 재단 해산 조치, 그리고 사법부의 손해배상 소송 개시 조치로 인해 위안부 문제는 이제 출구를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평가했다. 

그는 “돌이켜 보면 위안부 문제는 결국 정대협, 위안부 운동가 단체가 집요하게 키워온 것”이라면서 “이들에게 한국, 일본 양 정부가 끌려 다니며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못 찾고 있는게 지금의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주 교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평가와 전망에 대한 다음 강의를 예고하며 영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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