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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정의연 맞서 주요 한일우호 시민단체들 수요맞불집회 개최

반일동상진실규명공대위,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 주옥순TV 엄마방송 ... ‘수요집회 중단’, ‘정의연 해체’, ‘위안부상 철거’ 외쳐

7일 낮 12시, 한일우호단체인 반일동상진실규명공동대책위원회(대표 이우연, ‘공대위’),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대표 김병헌, ‘국민행동’), 주옥순TV 엄마방송(대표 주옥순, ‘엄마부대’)가 광화문 주한일본대사관 앞 위안부상 옆에서 연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정의기억연대(대표 이나영, ‘정의연’)의 정기수요집회에 대한 맞불 형식으로 치러진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공대위와 국민행동, 엄마부대는 ‘수요집회 중단’, ‘정의연 해체’, ‘위안부상 철거’와 관련해서는 한 목소리를 내면서 위안부 문제와 정의연 문제와 관련해 각각 성명을 발표했다. 이날부로 공대위 정기 집회는 72회차, 국민행동 정기 집회는 25회차째다.

공대위-국민행동-엄마부대는 당분간 위안부상 근처에서 연대 수요맞불집회를 계속 같이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아래는 공대위-국민행동-엄마부대의 연대 기자회견 현장 사진과 성명서(기자회견문) 전문이다. 














1. 반일동상진실규명공동대책위원회 성명


[반일동상진실규명공대위 제72차 성명서]

파렴치범 윤미향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정의연의 해산을 촉구한다

 

어제 3월 7일,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017년에 갈비뼈가 부러진 전 위안부 길원옥에게 독일에서 노래를 시키는 등 혹사하였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 외에도 길씨는 윤미향이 자신을 이용하였다고 직접 말하는 등, 윤미향이 파렴치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윤미향은 “악의적인 허위사실”이라고 반발하였다.

 

양측이 이렇게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데,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 보도를 낸 조선일보 기사에 대해서는 6,338명이 의사를 표현했고, 그중에서 6,228명이 화가 난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른 언론사의 보도에 대한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연합뉴스의 같은 내용의 뉴스에 대해서는 2,192개의 반응이 있었고, 그 중에서 2,165개가 화난다는 것이었다.

 

왜 이러한 상황이 되었는가? 대부분의 국민들은 윤미향을 더이상 신뢰하지 않으며, 나아가 그녀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그녀가 상임대표를 맡았던 정대협은 한국 최대의 여성운동단체이며, 그 영향력은 1948년 대한민국 성립 이래 가장 막강하였다. 바로 이런 단체가 각종 비위를 저질러왔으니만큼, 그에 대한 관심과 분노도 큰 것이 당연하다. 한국 역사에서 시민단체의 부패로도 단연 최고를 차지한다.

 

윤미향은 지난해 9월, 업무상 횡령, 배임, 보조금관리법 위반, 사기 등 8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재판은 지지부진하며, 국민들은 철저한 조사와 법적 처분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에 우리는 윤미향에 대해 우리 국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철저한 조사와 불법행위에 대한 응징을 요구한다. 어제 새로 나온 폭로에 대해서도 성실하게 수사할 것을 촉구한다.

 

정대협(현 정의연)은 이상과 같은 혐의를 받고 있는 윤미향에 대해 자체적으로 조사하고 책임을 추궁한 적이 없다. 만약 윤미향의 탈선이 개인적인 일탈행위였다면, 정의연은 그녀를 배제함으로써 국민들의 신뢰를 다시 얻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대협은 윤미향과 한 배를 탄 모습을 보여왔다. 이것은 정의연 자체가 부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정의연은 지난 30여 년간, 위안부문제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부추기고,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그를 빌미로 한일관계를 심각하게 손상해왔다. 위안부와 정신대가 전혀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신의 단체명에 그것을 계속 사용하면서 국민들을 오도해온 것이 단적인 예가 된다. 이제 국민들은 정대협(정의연)이 위안부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요집회도 마찬가지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위안부동상 철거하라

1 수요집회 중단하라

1 정의연은 해산하라

 

2021년 4월 7일

반일동상진실규명공대위



2.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 성명


[제25차 국민행동 기자회견문] 

소녀상 작가에게 묻는다! 소녀의 머리카락은 누가 잘랐나?


소녀상 작가 김운성‧김서경은 작가노트에서 “할머니들은 1991년부터 ‘나는 강제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스스로 밝히며, 일본 침략전쟁의 잔혹함과 어린 소녀들을 성노예로 전락시킨 일제의 뻔뻔함을 만천하에 고발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그래서 일본이 강제성을 띠고 국가 조직을 동원해 조선의 어린 소녀들을 전쟁터로 내몬 뒤 성폭행과 폭력을 서슴없이 자행한 전쟁범죄의 역사를 일깨우고, 이를 한국 땅 일본대사관 앞에 둠으로써 치욕의 역사를 똑바로 바라보게 하려 했습니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위안부 소녀상의 머리카락에 대해 “소녀들이 속아서 도착한 곳은 공장이 아니라 이역만리 낯선 곳 일본군부대 안 위안소였습니다. 곱디곱던 댕기머리 긴 머리칼은 필요 없다며 댕강 잘리고, 그렇게 소녀들의 그리운 가족들과 고향 땅과의 인연도 머리카락과 함께 무참히 끊겨 나갔습니다. 엄니와 아부지는 꿈에서만 볼 수 있는데 자꾸만 피하게 되고, 동무들은 소녀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소녀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인연의 끈이 끊기게 된 것을 거칠게 잘리워진 머리카락으로 표현하였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같이 김씨 부부가 말한 위안부의 실상은 거짓이고 날조이며, 잘려진 머리카락으로 표현된 소녀와 부모와의 인연을 끊은 것도 일본군이 아니다. 


김씨 부부는 위안부 소녀상을 통해 ‘일본 침략전쟁의 잔혹함과 어린 소녀들을 성노예로 전락시킨 일제의 뻔뻔함’을 고발했다고 하나, 조선 소녀가 ‘일본 침략전쟁의 잔혹함’과 무슨 상관이 있으며, 또한 어린 소녀를 일본군의 성노예라고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나이어린 소녀는 일본군 위안부가 될 수 없었는데 어째서 일본군 성노예라 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설령, 소녀가 아닌 성인 위안부라 하더라도 그들은 위안소 규정에 정해진 비용을 받고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매춘부였으며, 일본군은 소정의 비용을 지불하고 정해진 시간동안 위안부와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고객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위안부가 ‘일본군의 성노예’라 하는지 김씨 부부는 설명해야 한다. 


이들 부부가 말하는 위안부의 실상이 거짓임은 정작 정대협에서 발간한 증언집에 실린 위안부들의 증언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최초로 자신이 위안부임을 밝혀 ‘위안부피해자 기림의 날’ 제정의 동기를 제공한 김학순은 양아버지에게 40원에 팔려가서 2년 간의 평양기생학교 교육을 마친 다음 양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돈을 벌기 위해 갔다. 김씨가 떠나는 날, 어머니는 노란 스웨터를 사서 평양역까지 배웅을 했다고 증언했다. 수없이 증언을 번복하여 ‘조변석개’라는 별명을 얻은 이용수는 애초에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에 홀려 자신도 모르게 선뜻 따라나섰다고 했고, 자신들을 대구에서 대만의 위안소까지 데려간 사람이 위안소의 주인이라고 했으며, 그들은 그를 ‘오야지’라고 불렀다고 증언했다. ‘오야지’라고 불리던 위안소 주인이 포주가 아니고 무엇인가? 


위안부로 국민훈장모란장까지 수훈한 김복동은 정신대 명목으로 공무를 사칭한 사기범을 따라갔으며, 그 때 부모가 승낙하는 도장까지 찍었다고 증언하였다. 또, 평양기생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 길원옥은 13세 때, 푸줏간에 20원에 팔려갔다가 만주로 가서 매춘업소에서 2년간 일하다가 성병에 걸려 돌아왔다. 귀국 후 잠시 공장에 다니다가 15세 때 다시 기생학교 친구들과 함께 돈 벌러 압록강을 건너갔다. 길씨가 떠날 때 어머니가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초록색 유똥치마와 주홍색 저고리를 지어줬다고 증언했다. 


이 네 사람뿐만 아니라 여성가족부에 등록된 소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에 어느 누가 일본군에게 끌려갔으며, 어느 누가 일본군에 의해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이 끊어졌는가? 김씨 부부는 어린 자식을 물건처럼 판 사람이 누구이며, 자식의 등을 떠밀고, 기차역까지 데려다 주며, 고운 치마저고리를 마련해 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나 하고 그런 엄청난 거짓말을 하는가? 


김씨 부부는 소녀상 구상 과정에서도 어린 딸아이와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작업을 진행했다고 했다. 결국 김씨 부부는 11살짜리 딸아이에게 성인의 영역인 매춘부에 대해 진실이 아닌 거짓을 주입시켜 왜곡과 증오의 상징물인 위안부 소녀상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에 김씨 부부에게 엄중히 묻는다. 


1. 부모와 소녀 사이의 인연을 끊은 사람이 누구인가? 


2. 당신들의 사악한 위안부 왜곡과 날조 행위가 두렵지 않는가?


3. 어린 딸에게 정녕 부끄럽지도 않는가?


2021. 4. 7. 

慰安婦法廢止國民行動



3. 주옥순TV 엄마방송 성명



위안부 사기극의 상징, 소녀상을 철거하라!


지난 30년간의 위안부 운동은 정대협의 이사장 윤미향의 대국민 사기극이었다. 그는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일명, 정대협)’의 간사에서 출발하여, 사무국장, 사무총장을 거쳐 2008년부터 작년, 국회의원 신분으로 바뀌기 직전까지 정대협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현재 이곳의 소녀상을 2011년에 12월 14일 최초로 설치했으며, 그 동안의 수요시위를 이끌어 온 장본인이다. 결국 그는 그 공로로 국회의원 배지까지 달았다. 


또, 윤미향은 지난 30년간의 수요시위 이야기를 ‘25년간의 수요일’이라는 책으로 엮어 판매하기도 하였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독자들은 어느 새, ‘일제 때 수많은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군에게 모두 강제로 끌려가 끔찍하게 성폭력을 당한 일본군 위안부구나’하고 믿게 된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여기서 위안부란? 소정의 비용을 받고 성적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란? 일본군 관리하의 위안소에서 위안부생활을 한 여성을 뜻한다.


우리는 책속에 등장하는 위안부 김학순, 김복동, 길원옥, 이용수의 초기 증언집속에서 이들이 실제로 증언한 기록을 통해, 윤미향의 이같은 강제동원설이 얼마나 과장되고 허무맹랑한 거짓선동인지 국민여러분들께 낱낱이 고발하려고 한다.


첫 째, 위안부 운동의 시작이었던 최초의 증언자 ‘김학순’에 대해 살펴보자. 


김학순은 1924년 중국에서 태어났다. 부친 사망 후 어머니는 갓난 김학순을 데리고 평양으로 왔으나 극심한 생활고 때문에 구걸하다시피 살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다 김학순이 14세 되던 해에, 어머니는 재혼을 하더니, 15세 때는 직접 김학순을, 양아버지에게 40원을 받고, 평양 기생학교에 팔아 버렸다. 이후 김학순은 2년간의 기생학교 생활을 마쳤으나 나이제한으로 국내 영업이 어렵게 되자, 양아버지는 돈을 벌기위해 17세의 김학순과 또 다른 양녀를 중국으로 데려갔다. 그래도 중국으로 떠나던 날, 김학순의 어머니가 노란 스웨터를 가지고, 평양역까지 배웅 나와 주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후 베이징에 도착하여 군부대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되었다.


둘째로, 1993년에 UN에서의 위안부 증언을 시작으로 미국, 유럽 등 주로 해외에서 증언을 하며 위안부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공로로, 2015년에 국민훈장 모란장까지 받은 김복동이다. 그는 1926년생으로 어느 날 아버지가 남의 보증을 잘못서는 바람에 갑자기 화병으로 사망하자 딸만 여섯인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어머니가 똥지게까지 지면서 힘겹게 살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다 김복동이 15세 되던 해에, 동네의 구장과 반장이 계급장이 없는 누런 옷을 입은 일본사람과 함께 집에 와 “군복 공장에서 3년간만 일하라”며 어머니와 무슨 서류에 도장을 찍느냐마느냐로 옥신각신하다가 그렇게 위안소로 가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한마디로 공무사칭 사기범에게 속아서 간 것이다. 


셋 째로, 과거 2017년에 윤미향이 갈비뼈가 부러진 할머니를 데리고 베를린에서 노래까지 시켰다는 논란으로 현재, 큰 화제가 되고 있는 당사자인 바로 길원옥이다. 그는 1928년생으로 13세 때 고물상을 하던 아버지가 장물을 취급하는 바람에 감옥에 가게 되자, 아버지의 벌금 20원을 갚기 위해 돈을 벌려고 친구 소갠지 푸줏간 아주머니에게 팔린 건지 그렇게 만주의 위안소로 1차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2년도 안 되서 성병을 얻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가난에 지쳐, 과거 권번 친구들과 다시 술집에서 노래하고 술 팔며 쉽게 돈 벌자며 중국으로 자진해서 갔다가 위안소로 가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친구들과 2번째로 중국으로 떠날 때에 어머니는 초록치마와 유똥치마, 그리고 저고리를 해주었는데 아마도 노래 부르러 간다니까 치마저고리를 한 벌해준 거 같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현재 문재인 정권에서 국빈 대우를 받으며 과거 트럼프대통령 방한 때에는 포옹까지 했던 이용수이다. 그는 1928년생으로 그 역시, 가난한 9식구의 가정에서 극심한 생활고로 인해, 부모님은 물론, 어린 이용수마저, 9살부터 13살까지 동네 공장에서 일을 해야 할 정도로 집안형편이 어려웠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다, 이용수가 17세 되던 해, 동네에 ‘김분순’이 있었는데, 술장사를 하던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의 딸과 함께 돈 벌러 가라며 이야기하자, 며칠 뒤 새벽에, 친구 분순이가 불러서 나가보니 40세 가량의 일본남자가,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담긴 옷보퉁이를 건네주었고, 그걸 받자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던지, 그만 선뜻 어머니에게도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냥 분순이와 함께 대만까지 갔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용수는 ‘대구에서 대만까지 우리를 데려온 사람은 위안소 주인이었다. 우리는 그를 오야지라고 불렀다.’고 증언하여 자신을 끌고 간 사람은 일본군이 아니라 포주였음을 스스로 고백하였다. 


우리는 김학순, 김복동, 길원옥, 이용수의 증언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이들이 과연 윤미향의 주장대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맞는가? 여기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 함은 위안부 피해자법 제2조 1항에서 정의하기를,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동원되어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의미하는데, 그들이 스스로 밝힌 증언에서도 드러났듯이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들이 위안소로 가게 된 원인은 바로 극심한 가난 때문이었다. 


이들은 모두 너무나 가난했기에 돈 때문에, 돈을 벌기위해 위안소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뻔뻔스럽게도 윤미향은 이러한 진실은 모두 감춘 채, 오늘도 이렇게 순진하고 어린 학생들을 선동하여 ‘일본이 수많은 조선의 어린 처녀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성폭행을 했다.’며 소녀상을 에워싼 수요시위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거짓에 세뇌된 우리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우리는 윤미향과 그 일당의 위안부 사기극을 끝내야만 한다. 거짓 위안부 상징물, 소녀상을 철거하라!


2021년 4월 7일 주옥순TV 엄마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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