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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사(南京事件論争史)’ (2)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36)




 

      4.7.5 히가시나카노 슈도 재판(샤수친 명예훼손 사건)


5 2000년대 

  5.1 100인 참수경쟁 재판 

  5.2 중국 홀로코스트 박물관 

  5.3 일본에서의 논쟁 

  5.4 영어권 연구 및 논설 

  5.5 중국 정부와 일본 대학살파의 거리 

  5.6 일중역사공동연구 실시 


6 2010년대 

  6.1 논설 등 

  6.2 중국 ‘전 민족 항전 폭발 77주년’ 

  6.3 세계기록유산 등록 

  6.4 9.18사변(만주사변) 85 주년 


7 연표 

  7.1 1945-1979           

  7.2 1980-1989 

  7.3 1990-1999 

  7.4 2000-


8 참고문헌 




‘난징사건 논쟁사(南京事件論争史)’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사(南京事件論争史)’ (1)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사(南京事件論争史)’ (2)




4.7.5 히가시나카노 슈도 재판(샤수친 명예훼손 사건)(東中野修道裁判(夏淑琴名誉棄損事件))

아지아(亞細亞)대학 교수인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는 자신의 저서 ‘‘난징학살’의 철저검증(「南京虐殺」の徹底検証)’에서, '신루커우사건(新路口事件, 난징 점령 당시 12월 13일에 발생한 사건으로서 난징 시내의 남부 주민인 샤수친 일가에 대한 강간 살인을 포함한 일가 살해 사건)'의 생존자라고 주장하는 샤수친(夏淑琴)은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관련 존 매기의 기록도 엉터리라고 썼다.

반면 샤수친 씨는 “가짜 피해자이자 사기꾼 취급을 당해 명예가 훼손됐다. 히가시나카노 씨의 설명에 대해 지적하자면, 히가시나카노 씨가 같은 책의 후기에서 bayonet(총검)으로 찔렀다고 번역하고 있다. 중상(中傷)을 하기 위해 일부러 필름 해설문을 오역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에 샤수친 씨는 2006년 5월 15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히가시나카노 슈도를 피고로 하는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도쿄지방재판소 재판 2007년 11월 2일 판결에서 히가시나카노 슈도는 패소했다. 판결은 “통상의 연구자라면 (중략) 그 부자연스러움의 원인을 탐구하기 위해 그때까지의 해석 과정을 재검토하고서 당연히 ‘7, 8세가 되는 여동생’과 ‘8세 소녀’는 동일인물일 가능성에 도달하게 된다. (중략) 이상 언급한 두 가지 점만으로도 피고 히가시나카노의 원 자료 해석은 대체로 타당한 것이라고 말하기가 어렵고, 학문 연구의 성과라고 할 가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재판장은 샤수친에 대한 명예훼손을 인정하고서는 히가시나카노 슈도, 그리고 출판사인 텐카이샤(展転社)에 400만 엔의 위자료 지급을 명령했다. 

이 판결에 대해 히가시나카노 슈도 측은 항소했지만 항소심인 도쿄고등재판소에서도 2008년 5월 21일에 지방재판소와 마찬가지로 위자료 지불을 명했다(단, 고등재판소에서는 지방재판소 판결문의 “이상 언급한 두 가지 점만으로도 피고 히가시나카노의 원 자료 해석은 대체로 타당한 것이라고 말하기가 어렵고, 학문 연구의 성과라고 할 가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비합리적이며, 타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표현으로 변경했다.) 

히가시나카노 슈도 측은 상고했지만, 2009년 2월 5일에 최고재판소는 히가시나카노 슈도와 텐카이샤의 상고를 기각하고 1심 판결대로 양자에 대해 총 400만 엔의 배상을 명령하는 재판이 확정됐다. 2009년 4월 16일에 이 배상금은 지불되었다.


5 2000년대(2000年代)

2000년대 일중(日中) 정부의 동향으로는, 먼저 2001년 4월 28일에 중화인민공화국 국방교육법이 성립했다.

8월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수상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중국이 반발했다. 9월 18일에는 중국의 9.18 박물관이 리뉴얼 오픈했고, 같은해 중국 각지에서는 항일전쟁 행사가 개최됐다.

10월 8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중국의 항일전쟁 기념관을 방문하고선 “다시 한번 전쟁의 비참함을 통감했습니다. 침략으로 희생된 중국인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애도의 마음으로 전시를 봤습니다”라고 말했다.

2005년 일중외상회담에 즈음하여, 고이즈미 정권의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 외무대신이 ‘일중역사공동연구(日中歴史共同研究)’를 제안하고, 2006년의 일중정상회담에서 역사공동연구를 하는 것이 결정되어 공동연구가 실시되었다. 2010년 1월에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5.1 100인 참수경쟁 재판(百人斬り競争裁判)

2003년 4월 28일부터 ‘100인 참수 경쟁’ 재판이 시작되었다. 전범으로 처형된 노다(野田)・무카이(向井)의 유족이 사망자에 대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며 마이니치(毎日)신문, 아사히(朝日)신문, 카시와쇼보(柏書房, 출판사),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를 제소한 것으로, 2006년 12월 22일 최고재판소에서 원고 측의 패소가 확정됐다.

5.2 중국 홀로코스트 박물관(中国ホロコースト博物館)

2000년 3월, 역사학자 Tien-wei Wu에 의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인 홀로코스트 박물관(Chinese Holocaust Museum)’이 개관됐다.  3월 8일부터 4월 2일까지 동 박물관은 사진전 ‘제 2차 대전 중 중국에서 잊혀진 잔학행위(第二次大戦中の中国における忘れられた残虐行為)’를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개최했다. 7월에는 전미(全米) 규모의 박물관으로 ‘중국인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워싱턴 DC에 건설하는 계획이 재미화교회의에서 발표되었고, 중국외무성, 대만경제문화성도 이 캠페인에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사이먼 비젠탈 센터(Simon Wiesenthal Center, 미국과 캐나다의 유대인 사회가 만든 나치 전범 추적을 위한 기구)’의 에이브러햄 쿠퍼(Abraham Cooper)는,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는 구약성서의 것으로 중국인에 대한 학살은 성경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부적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보류하고 대신 ‘인류애(Humanity)’라는 단어를 사용해 일본군에 의한 피해를 입은 중국인 이외의 아시아 국가를 포함한 ‘인류애 박물관(Museum of Humanity)’를 건설하겠다면서 중국, 조선반도, 대만, 동남아시아, 연합군 전쟁 포로, 731 부대에 관해 전시하겠다고 발표했다. 

5.3 일본에서의 논쟁(日本での論争)

히가시나카노 슈도와 요시다 유타카의 논쟁에 이어서 2001년에 국제법 학자인 사토 카즈오(佐藤和男)가 난징사건에서의 살해 문제와 관련 새롭게 전시국제법상 합법설을 전개했다.

2001년 11월에는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 교수인 기타무라 미노루(北村稔)가 저서 ‘‘난징사건’의 탐구 - 그 실상을 추구하고(「南京事件」の探究―その実像をもとめて)’(분슌신쇼)를 통해, 당시 난징학살 사건을 보도한 해럴드 J·팀펄리(Harold John Timperley)는 중국 국민당 선전부와 깊은 관계가 있었으며 해럴드 팀펄리의 보도는 프로파간다(전시 홍보)였다고 주장했다.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는 ‘30만’이라는 대량학살설은 대부분의 역사학자와 전문적인 역사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경향이라고 지적했다. 2008년에 ‘일본 ‘난징’ 학회(日本「南京」学会)’도 총 12년에 걸쳐서 ‘난징사건’(‘난징학살’)에 관한 1차 자료를 조사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난징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2009년에는 ‘신루커우사건’의 생존자 샤수친에 의해 제기된 명예훼손 재판에서 히가시나카노 슈도 측의 패소가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확정됐다

중간파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2007년 7월에 환상파와 중간파의 영향력이 커지고 대학살파의 영향력은 작아지고 있다고 평했다.

한편, 2007년 12월, 대학살파인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는 ‘학살허구설’, ‘환상설’의 파탄은 결정적인 것으로, ‘학살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라는 수준에서의 논쟁은 학문적으로는 거의 결론이 내려졌다고 주장했다.

5.4 영어권 연구 및 논설(英語圏の研究や論説)

영어권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중국계의 ‘대학살파’의 영향이 크지만, D.아스큐(David Askew), 밥・T・와카바야시(Bob T. Wakabayashi), 조슈아 포겔(Joshua A. Fogel), T. 브룩(Timothy James Brook) 등 정치적 이해관계를 배제한 ‘중간파’의 연구가 증가하고 있다. 

2000년에는 중간파인 야마모토 마사히로(山本昌弘)가 저서 ‘Nanking : Anatomy of an Atrocity’를 발표했다.

2000년 12월, 일본회의 국제홍보위원회의 오하라 야스오(大原康男), 다케모토 타다오(竹本忠雄)가 ‘재심 ‘난징대학살’ - 세계에 호소하는 일본의 원죄(再審「南京大虐殺」―世界に訴える日本の冤罪)‘를 일본어와 영어로 발표했다.

2001년 7월, 영국 ‘가디언(Guardian)’지의 도쿄특파원 조나단 와츠(Jonathan Watts)는 ‘학살(massacre)’이 아니라 ‘난징사건’이라고 표기하는 것, 그리고 30만 학살이라는 희생의 진상은 불명확하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downplay(경시)라고 보도했다.

2004년 11월 9일, 일본군의 전시 중 잔학 행위를 다루는 신작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을 집필 중이던 아이리스 장(Iris Chang)이 자살했다.

저널리스트인 올리버 어거스트(Oliver August)는 ‘타임즈(Times)’지 기사를 통해 아이리스 장은 일본으로부터 받은 중국인으로서의 피해가 플래시백으로서 떠올라서 고민하고 있었다면서 “아이리스 장은 The Rape of Nanking 의 마지막 피해자가 아닐까?”하고 반문했다. 

2005년 4월, 영국의 BBC는 “역사학자에 따르면 난징학살의 피해자는 25만 명에서 30만 명에 달하며 대부분은 여성과 아이였다. 일본 정부와 일본인의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대규모 학살은 없었다고 부인하고 있지만, 기억을 제거할 수는 없고 증언을 부정할 수는 없다. 존 매기(John Gillespie Magee)와 미니 보트린(Wilhelmina Minnie Vautrin)의 기록이 있으며, 또 일본인 중에도 ‘감자꼬치처럼 중국인을 죽였다’고 전 일본군 병사 아즈마 시로(東史郎)는 증언하고 있다.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郎)는 일본군의 만행을 교과서에 싣기 위해 정부를 대상으로 재판에서 다퉜다. 한편, 나가노 시케토(永野茂門) 법상은 학살을 부정하고, 중국 영화 ‘난징 1937’는 반발 때문에 받고 상영될 때까지 몇 년이 걸렸다”고 보도했다.

또한 같은 달에는 유태계 칼럼니스트인 폴 그린버그(Paul Greenburg)가 “일본의 교과서에서는 ‘난징사건’으로 표기하고 있다고 하는데, The Rape of Nanking 은 단지 ‘사건’이 아니라 6주간 계속된 ‘학살’”이라고 지적했다. 폴 그린버그의 이런 지적에 대해 재미일본대사관의 외교관 기타노 미쓰루(北野充)는 일본의 교과서에서는 양쪽 용어가 다 사용되고 있으며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과거와 마주해왔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폴 그린버그는 일본군은 여성을 위안부로 삼았고 포로에 대한 생체 실험과 같은 짓을 하는 등 300만 명에서 400만 명을 노예로 만들어 죽였다는 것은 역사학자들의 정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독일과 같이 역사의 진실을 직시하고 있지 않다고 반박하며 2007년에 시점에서도 ‘난징사건’이라고 하는 용어를 쓰는 것은 독일의 교과서에서 ‘홀로코스트’를 ‘아우슈비츠 사건’이라고 완곡어법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와 관련해 외교관 기타노 미쓰루는 미국의 언론이 일본의 전후 대응이나 정책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는 가운데 논설을 게재하는 경우가 있으며 반일 보도에 대해서는 즉각 반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2005년에는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의 저서와 논문의 영어 버전이 발표 간행되었다. 그리고 2008년에는 시라이시 다카시(白石隆),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D.아스큐(David Askew), 요미우리신문사 전쟁책임검증위원회(読売新聞社戦争責任検証委員会), 키타무라 미노루(北村稔), 앨빈 쿡스(Alvin D. Coox), 조슈아 포겔(Joshua A. Fogel), 후키우라 타다마사(吹浦忠正)에 의한 논문집 영어판 ‘An Overview of the Nanjing Debate’가 간행되었다. 

2007년, 오사카(大阪)교육대학의 중국계 학자인 마효화(馬暁華)는, 중국계 미국인에게 있어 일본의 전쟁 범죄는 ‘중국인 대학살’이며 유대인의 홀로코스트보다도 공포스럽고 파괴적인 타격이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학교에서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는 수업에서 다루어지지만 정작 중국인에 대한 홀로코스트는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샌프란시스코 공립학교 역사수업에서 제2차 대전에서의 중국의 피해에 대해서도 다루도록 하자는 캠페인을 실시하자고 제안, 이를 도입하는데 성공했다.

2001년 캘리포니아의 여론 조사에서 답변자의 절반 이상이 일본은 제2차대전의 범죄와 관련해 미국에 사과해야 한다고 회답했으며, 59% 는 미국이 일본에 원폭 투하한 것에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회답했다. 또한 일본 방송사 TBS는 중국 외교부의 주룽지(朱鎔基)가 “일본은 자신들의 전쟁 범죄에 대해 중국 인민에게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앞으로 사과를 요구하겠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2010년 4월, 영국 언론 ‘데일리메일(Daily Mail)’의 J.리스(Jasper Rees)는 일본이 술 취한 이가 하는 실언처럼 ‘학살’을 ‘사건’으로 바꾸고 있다고 비판했다.

2012년, 만치웨이(Chi-Wei Man)는 아이리스 장과 히가시나카노 슈도의 ‘소설(novel)’을 비교한 논문에서, 중국은 몇 십만 명이 피해를 입었지만 배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The Rape of Nanking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반면에 일본은 중국의 지어낸 이야기로 인해 중상(中傷)을 당해서 일본의 명예와 품위가 손상됐기 때문에 ‘난징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만치웨이(Chi-Wei Man)는 스탠포드 감옥 실험(Stanford prison experiment)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 감옥 실험에서 일반 학생들을 간수역과 죄수역으로 나눠서 감옥 생활을 시켰는데 죄수역에 대한 간수역의 학대가 확대됐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Philip George Zimbardo)는 보통 사람도 특수한 상황에서는 악마가 되는 이러한 효과를 루시퍼 효과(Lucifer Effect)라고 불렀는데, 만치웨이는 아이리스 장이 저서에서 묘사한 난징전투에서의 일본군의 가학적인 잔학행위, ‘100인 참수 경쟁’이나, 집단 강간, 포로 살해, 비정상적인 살해 방법 등을 이해하려면 이 루시퍼 효과가 적절할 것이라고 지적했다(스탠퍼드 감옥 실험에 대해서는 Chi-Wei Man, 2012, p10-11. 필립 짐바르도, 오니자와 시노부(鬼澤忍) 역(譯) ‘루시퍼 이펙트 보통 사람이 악마로 변할 때(ルシファー・エフェクト ふつうの人が悪魔に変わるとき)’, 우미토가츠샤(海と月社) (2015))

만치웨이는 “아이리스 장은 아즈마 시로(東史郎)의 증언에 의거하여 ‘포로는 모두 처형하라’고 일본군 여단 사령관이 명령했다고 한 바 있는데,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스탠포드 감옥 실험에서 간수역이 제정신을 잃은 것처럼 일본 군인도 마찬가지였다”고 평했다.

5.5 중국 정부와 일본 대학살파의 거리(中国政府と日本の大虐殺派の距離)

중국 정부는 일본의 대학살파(‘난징사건조사위원회(南京事件調査会)’ 등)가 과거 한때는 “20만 명 이상”이라며 은근히 “30만 명설”을 포용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피해자 숫자를 “20만 명 이하”라고 평가절하를 하게 되자 그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 (중국 측 입장에 가까운 대학살설을 주장하는) 마쓰오카 다마키(松岡環) 등에 대해 지원을 하고 나섰고 2004년에는 ‘난징대학살기념관(南京大虐殺紀念館)’이 마쓰오카 다마키를 표창하기도 했다.

저널리스트인 토키자와 카즈오(時沢和男)는 “중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비판을 100% 받아들이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새로운 친중 그룹의 목적이라고 했다.

니혼(日本)대학 교수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난징사건과 관련한 논란이 지금까지의 학술 논쟁에서 이제는 역사인식을 둘러싼 법정 투쟁을 동반하는 정치적 분쟁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다고 말했다. 

한편, 중국 정부도 일본의 대학살파에 대해서 불신을 느끼고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양자(중국 정부와 부정파) 사이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는 ‘난징대학살보다 중대하고 심각한’ ‘삼광작전(三光作戦, 편집자주 : 구 일본군에 의한 중국 항일 근거지 소탕작전으로, 소멸시키고(焼光) 죽이고(殺光) 빼앗는다(搶光)는 의미라고 한다. 삼광작전에서도 역시 학살이 있었다고 지적되지만 존재 유무에 대한 논란이 있다)’에 대해서 심판해야 한다는 식으로 방향 전환을 시사했다“고 하타 이쿠히코는 평했다.

5.6 일중역사공동연구 실시(日中歴史共同研究の実施)

2005년 일중외상회담에 즈음하여, 고이즈미 정권의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 외무대신이 ‘일중역사공동연구(日中歴史共同研究)’를 제안하고, 2006년의 일중정상회담에서 역사공동연구를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2006년 12월 베이징에서 제 1회 전체회의, 2007년 3월에 도쿄에서 제 2회 전체회의, 2008년 1월에 베이징에서 제 3차 전체회의, 2009년 12월에 도쿄에서 제 4차 회의가 열리고 공동연구는 종료했다. 

2010년 1월에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일본·중국 쌍방이 전시국제법을 위반하는 학살이 있었다고는 했지만 일본 측은 규모는 불명확하다고 기술했고 중국 측은 대규모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기술했다.


6 2010년대(2010年代)

6.1 논설 등(論説など)

2011년, BBC는 장이머우(張芸謀) 감독의 영화 ‘진링의 13소녀(金陵十三釵, The Flowers Of War)’에 대해서 이 영화는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영화라면서 배우를 소개하는 기사를 통해 난징학살의 국제적인 목격자는 피해자가 14만 명이라고 하고 있으며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이보다 더 많다고 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2012년 6월 24일, 광저우(広州)시 바이윈(白雲)구 정치협상회의(政治協商会議) 위원으로서 민간교육기관인 ‘신용교육집단(信孚教育集団)’을 설립한 신리지엔(信力建)이 난징전투에서의 일본군과 만주군에 대해서 “영웅적이고 용감한 군대가 우군(友軍)과 함께 난징을 해방시켰다”고 Weibo를 통해 밝혔다. 이에 대해 난징대학살기념관의 주청산(朱成山) 관장이 공개 사과를 요구했고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비판·비난 의견을 표명했다.

2012년 10월, 작가 다치바나 아키라(橘玲)는 학살부정파가 아이리스 장 저서의 번역 출판을 저지하면서 일본 국내의 논적들을 타도하고 학살을 인정하는 일본어 문서를 일본에서 추방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동안에 정작 영어권에서 난징대학살은 ‘사실’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3년 3월, BBC 특파원 오오이 마리코(大井真理子)는 일중한(日中韓) 교과서 문제를 다룬 기사에서, 일본의 교육에서 현대사를 가르치지 않는 상황과 후지오카 노부카츠(藤岡信勝)와 마쓰오카 다마키(松岡環)의 난징사건에 대한 견해를 소개했다. 

2014년 9월에 잡지 ‘슈칸신초(週刊新潮)’가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의 저서 ‘중국의 일본군(中国の日本軍)’에 대해서 상기 가사하라 도쿠시와 같은 사진의 오용(사실과 다른 사진 캡션이 달린 가사하라 도쿠시의 저서 ‘난징사건(南京事件)’ III 장 표지 관련)을 지적하자 혼다 가쓰이치는 “사료는 모두 중국 측의 것에 기초한 것으로, 단지 중국 측 사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슈칸긴요비(週刊金曜日)’ 99년 11월 5일호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라고 하면서 오용을 인정했다.

2015년 4월, BBC의 스티븐 에반스(Stephen Evans) 서울 특파원은 기사를 통해 템플대학(Temple University)의 로버트 두자릭(Robert Dujarric)이 “일본에는 과거의 사과를 파괴하는 리더들이 있다”며, “야야마 타로(屋山太郎), 사쿠라이 요시코(櫻井よしこ) 등이 2007년에 낸 ‘워싱턴포스트’ 의견광고 ‘THE FACTS’가 그 예”라고 말했음을 전했다. 스티브 에반스 서울 특파원은 또한 난징학살의 피해자는 2만 명에서 30만 명 사이로 일본과 중국의 어느 쪽 견해를 취할지에 따라 변화한다고 보도했다.

6.2 중국 ‘전 민족 항전 폭발 77주년’(中国「全民族抗戦爆発77周年」)

중국은 2014년을 ‘전 민족 항전 폭발 77주년(全民族抗戦爆発77周年)’이라고 하면서 일본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움직임을 활성화시켰다.

1월 8일 중국 ‘인민망(人民網)’은 새롭게 발견된 문서를 거론하며 난징대학살 전후 2개월반 동안 난징의 인구가 113만 명에서 34만 5000명으로 78만 5000명이 감소했다고 보도했다.

시진핑 당 총서기는 3월 28일 독일에서 “30만 명 이상의 무고한 중국인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었다”고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7월 7일은 7.7사변(‘루거우차오 사건(盧溝橋事件)’)이 일어난 날로, 이날 루거우차오에서 ‘전 민족 항전 폭발 77주년 기념식’이 개최되었다. 행사에서 ‘중국인민항일전쟁전면 폭발기념지(中国人民抗日戦争全面爆発記念地)’라고 새겨진 길이 4m, 폭 3.2m의 ‘독립자유동상(独立自由彫像)’이 피로(披露)되었고, 시진핑 총서기는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대한 중국 인민의 항일 전쟁은, 중화민족을 과거에 없었던 수준으로 각성시키고 단결시켰다. (생략) 멸망의 위기에서 민족을 구원하고, 민족독립과 인민해방을 실현하며, 세계평화의 위대한 사업을 이뤄내면서 세계사에 큰 공헌을 했다. (생략) 아직도 소수의 인간들이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전쟁 중 희생된 수천 만 명의 무고한 생명을 무시하고,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여 침략의 역사를 부정하기는 커녕 미화하고 있다. 국제적 신뢰를 파괴하고 지역의 긴장을 일으키면서 중국 인민 뿐만이 아니라 세계평화를 애호하는 인민들의 강한 질책을 받고 있다. 침략의 역사를 부정하고 왜곡하고 미화하는 어떤 이에 대해서도 중국 인민과 각국 인민은 절대로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 시진핑 공산당 총서기, 전 민족 항전 폭발 77주년 기념식 연설, 2014년 7월 7일


또, 중국에서는 난징학살을 다룬 책 ‘혈화기억(血火記憶)’을 중국의 초중고교 부교재로 지정했고, 공산당 중앙은 여기에 추가로 만화 ‘난징 1937(Nanking)’(저자 : Nicolas Meylaender, 그림 : Zong Kai, 출판사 : Les Editions Fei)을 전 세계에 판매할 것을 지시했다. ‘난징 1937’은 2011년 11월에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간행된 것으로, 난징 전투에서 난징이 함락하기 직전인 1937년 12월 13일 오전 9시경에 가족 11명이 학살됐다고 하는, 욘 라베의 일기에도 기록된 샤수친(夏淑琴) 일가 학살 사건과 같은 만행이 국제안전구역에서 일어났다고 묘사하고 있다.



11월 17일에 중국 강소(江蘇)의 한 라디오 방송은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일본 군인이 난징의 여성을 강간하고 임신시킨 뒤 그 배를 찢어 태아를 죽였다는 생존자의 증언을 방송했다. 

중국 정부는 12월 13일을 ‘난징대학살 공공 공휴일’로 지정한다고 발표했다. 시진핑 총서기는 이듬해 12월 14일 난징대학살 희생자 국가추도식에 참석했다. 시진핑 총서기는 난징사건과 관련해 “일본군에 의한 이 비인간적인 대학살 사건은 제 2차 세계대전의 ‘3대 사건’의 하나로서 놀랄만한 반인륜 범죄 행위이자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어두운 한 페이지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독일의 욘 라베, 덴마크의 베른하르트 신드버그, 미국의 존 맥기가 인도주의 정신으로 이를 기록한 것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고 밝혔다. 

시진핑 총서기는 또한 “일본의 전범들은 도쿄재판과 난징재판에 의해서 영원히 역사의 도마에 올랐다”면서 “난징대학살 사건은 확실한 증거가 엄청나게 많이 있는 만큼 이를 부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난징대학살 사실을 부정하려고 해도 역사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죄 없는 30만 피해자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13억 중국 인민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는 온 인민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BBC는 난징학살은 중국에 있어서 매우 민감한 문제로 중국 정부는 일본이 정식으로 사과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6.3 세계기록유산 등록(ユネスコ記憶遺産登録)

같은 해 10월 유네스코는 ‘Nanjing Massacre(난징학살)’에 관한 문서를 세계기록유산에 등록했다. 등록된 것은 난징군사법정에서의 검찰 제출 자료, 증언, 판결서, 존 매기 필름 등 11 점이다. 일본 정부는 “문서들이 중립공정하지 않다”, “중국이 유네스코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6.4 9.18사변(만주사변) 85주년(九一八事変(満州事変)85周年)

2016년 9월 18일, 9.18 사변(만주 사변) 85주년 행사에서 “러시아, 미국, 프랑스 등 40개국에서 ‘자금초 평화 홍보 대사(紫金草平和宣伝大使)’가 방문하고, 난징대학살 희생자에 대해서 애도의 뜻을 바쳤다”고 인민망은 전했다.


7 연표(年表)

7.1 1945-1979 

 • 1945년-1946년 도쿄재판, 난징재판

 • 1952년,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저서 ‘쇼와의 동란(昭和の動乱)’

 • 1966년, 고토 코사쿠(五島広作), 시모노 이카쿠(下野一霍) 공저 ‘난징작전의 진상(南京作戦の真相)’(도쿄오조호샤(東京情報社))

 • 1967년, 호라 도미오(洞富雄) ‘현대전사의 수수께끼(近代戦史の謎)’(진부쓰오라이샤(人物往来社))

 • 1968년,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郎)는 ‘태평양전쟁(太平洋戦争)’(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에서 일본군이 “중국인 수십 만 명을 학살했다”고 했다.

 • 1971년(쇼와 46년) 11월 아사히신문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 기자의 ‘중국여행(中国の旅)’이라는 연재 시작.

 • 1972년, 일중(日中) 국교 수립

 • 1973년, 스즈키 아키라(鈴木明) ‘‘난징대학살’의 환상(「南京大虐殺」のまぼろし)’(분게이슌주(文藝春秋)). ‘100인 참수 경쟁(百人斬り競争)’ 논쟁, 제1차 논쟁(第一次論争)

7.2 1980-1989 

 • 1982년 
  · 호라 도미오가 ‘결정판 난징대학살(決定版 南京大虐殺)’을 간행.
  · 제 1차 교과서 문제
     - 6월 26일, 교과서 검정에서 ‘침략’이 ‘진출’로 바뀐 것 등이 보도됨
    - 7월, 마쓰노 유키야스(松野幸泰) 국토청 장관이 교과서에서 ‘침략’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발언. 중국 측은 오가와 헤이지(小川平二) 문교부 장관의 방중(訪中)을 거부. 
    - 8월 26일,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정권 하의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관방장관 담화를 통해 전쟁으로 인해 일본은 한국과 중국 등에 크나큰 고통과 손해를 주었다고 발표, ‘근린제국조항(近隣諸国条項)’ 설치.
  · 8월 9일, 마쓰노(松野) 장관 “난징전에서 일본군 8000명, 중국병 12,000 명의 희생은 (전투의 희생이며) ‘학살’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발언. 중국 런민르바오(人民日報)가 마쓰노 장관 발언을 비판. 베이징과 상하이의 대학에서 항일전쟁(일중전쟁) 승리 37주년 기념 심포지엄 개최. 
  · 8월 12일,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첫 전시로 ‘일본 침략에 의한 난징대학살 전시회’가 난징박물관에서 개최.
  · 9월 18일, 항일전쟁 승리 37주년 기념으로 루거우차오 사건, 난징대학살, 만주사변 (9.18 사변) 행사를 개최.

 • 1984년(쇼와 59년) 
  · 1월 이에나가(家永) 교과서 재판 제3차 소송 제소.
  · 1월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가 ‘난징학살의 허구(南京虐殺の虚構)’를 발표. 
  · 3월, 호라 도이오 · 혼다 가쓰이치 등 난징사건조사연구회를 발족. 
  · 4월, 가이코샤(偕行社) 기관지 '카이코(偕行)'에서 우네무토 마사미(畝本正巳) ‘증언에 의한 난징전사’ 연재 (-1985년 2월호).
  · 8월 4일 아사히신문 석간에서, 옛 보병 제 23연대의 일기를 소개. 보병 제 23 연대회가 항의를 했고, 아사히신문이 정정을 했으며 사진의 오용도 인정했다. 
 


 • 1985년 (쇼와 60년) 
  · 중국에서 ‘침화 일군 난징대학살 자료 전집(侵華日軍南京大屠殺資料専輯)’을 출판. 
  · 난징대학살기념관 건설.
  · 3월, ‘카이코(偕行)’에서 카도카와 코타로(加登川幸太郎)가 사과.
  · 겨울, 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가 다나카 마사아키의 저서 ‘마츠이 이와네 대장의 진중 일기’의 개찬을 지적했다. 다나카 마사아키는 가필은 오자나 표기법 변경이었다고 하면서 의도적인 개찬을 부인했다. 

 • 1987년 
  · 뉴욕에서 ‘대일삭배중화동포회(対日索賠中華同胞会, Chinese Alliance for Memorial and Justice)’와 ‘기념 난징대학살수난동포연합회(記念南京大虐殺受難同胞連合会, Alliance in Memory of Victims of the Nanking Massacre)가 결성됐다. 
  · 8월, 호라 도미오(洞富雄),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 편(編) ‘난징사건을 생각한다(南京事件を考える)’
  ·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 ‘난징사건의 총괄 - 학살 부정의 논거(南京事件の総括―虐殺否定の論拠)’ 켄코샤(謙光社)

 • 1988년 12월, 호라 도미오, 후지와라 아키라, 혼다 가쓰이치 편(編) ‘난징대학살의 현장에(南京大虐殺の現場へ)’

 • 1989년 
   · 2월 24일, 쇼와 천황의 장례(타이소노레이(大喪の礼))에 부시 대통령이나 중국과 대만 정부는 참석해서는 안 된다고 난징수난협회(南京受難連合)가 항의
   · 6월 4일, 89년 톈안먼(天安門, 천안문) 사건.
   · ‘난징전사(南京戦史)’ 간행. “불법살해하고 말할 수는 없지만” “포로, 패잔병, 편의병 중 중국인 병사 약 1만 6 천, 민간인 사망자 15,760명으로 추정”


7.3 1990-1999 

 • 1990년 
   ·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 의원의 난징사건 발언을 난징수난협회가 고발.
   · 11월, 화교의 단결을 목적으로 하는 중국해외교류협회(China Overseas Exchanges Association)가 베이징에서 설립. 

 • 1991년 
   · 8월, 난징수난연합이 존 매기의 필름을 발견.
8月、南京受難連合はジョン・マギーのフィルムを発見。
   ·  9월 18일, 만주사변 60주년. ‘9·18 사변 기념관’을 건설. 중국은 역사교육 강화를 선언하고, 이날을 ‘국치기념일’로 정했다, 또 ‘몰망국치(勿忘国恥)’(국가의 치욕을 잊지 마라), ‘강아국방(強我国防)’을 슬로건으로 했다.
   · 11월, 중국중앙(CC)TV, 드라마 ‘황원의 요새 731(荒原の砦七三一)’을 방송. 모리무라 세이치(森村誠一) ‘악마의 포식(悪魔の飽食)’ 원작. 
   · 일본에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난하는 오사카국제평화센터(大阪国際平和センター, 피스오사카(ピースおおさか))가 개관.

 • 1992년 
   · 천황의 방중(訪中)에 난징수난협회가 항의
   · 4월,  호라 도미오, 후지와라 아키라, 혼다 가쓰이시 편(編) ‘난징대학살 연구(南京大虐殺の研究)’
   · 5월 2일, 캘리포니아 쿠퍼치노에서 항일전쟁사실유호회(抗日戦争史実維護会, Alliance for Preserving the Truth of Sino-Japanese War)와 세계항일전쟁사실 유호연합회(世界抗日戦争史実維護連合会)가 결성
   · 5월 12일, 장쩌민 총서기가 국방교육 강화 선언. 

 • 1993년 
  · 8월, 중국의 싱크탱크가 중국 외교부에, 일본은 상임이사국이 되려고 하는 등 정치 대국화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나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는데 적절한 시기라고 보고했다.
  · 10월 20일, 이에나가 교과서 제3차 소송에서 도쿄고등재판소는 난징대학살의 기술에 관한 검정을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 아즈마 시로(東史郎) 재판 시작.

 • 1994년 
  · 천황의 방미에 난징수난연합이 반대.
  · 6월 10일, ‘난징대학살은 사실인가? 진상규명·사과외교 규탄 국민대회(南京大虐殺は事実か?真相解明・謝罪外交糾弾国民集会)’, 무라오 지로(村尾次郎), 아라 켄이치(阿羅健一), 와타나베 쇼이치(渡部昇一)가 강연. 나가노(永野) 법상(法相)이 “난징대학살은 날조”라고 발언했다는 사유로 하타(羽田) 수상이 그를 해임을 한 것을 규탄하고, 종전 50주년의 ‘부전결의(不戦決議)’ 저지 운동을 시작했다. 
  · 12월 ‘난징대학살 57주년 세계기념회의(Global Memorial Conference of the 57th Anniversary of the"Rape of Nanjing)’ / 전구기념(全球紀念) ‘난징대학살’ 57 주년 기념회). 중국공산당과 대만의 대일 전쟁 배상 포기를 비난했다. 일본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한다고 선언.

 • 1995년 
  · 8월 15일, 무라야마 담화에서 사과. 중국 정부는 사과를 긍정. 자민당의 역사검토위원회(歴史検討委員会)는 ‘대동아전쟁의 총괄(大東亜戦争の総括)’ 간행.
   · 9월 18일, 항일 전쟁 50 주년 기념 대회.
   · ‘불망국치(不忘国恥)’ 캠페인 운동은 절정을 맞아, 9.18 역사박물관이나 항일전쟁박물관의 확대가 선언되었고 ‘애국주의 교육기지’가 되었다. 
   · 방한한 장쩌민 국가 주석은 김영삼 대통령과 일본의 군국주의는 중국과 한국에 있어서 위협이라고 표명. 또 일본 국내 및 해외에서 위안부 문제 캠페인 활동이 활발해졌다. 

 • 1996년 
   · 4월, 일미(日米) 안보 공동 선언. 중국은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비난. 
   · 5월 10일, 미국 하원에서 전 미군 포로와 난징사건이나 한국인 위안부 등 피해자에 대한 기금을 요구하는 법안(로버트 도넌에 의한 법안) 제출.
   · 12월, 스탠포드 대학, 홀로코스트 박물관, 보스턴대학에서 일본군의 잔학행위에 대한 심포지엄.
   · 12월 12일, 난징수난연합과 아이리스 장이 욘 라베의 일기를 공개. 

 • 1997년 
   ·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新しい歴史教科書を作る会)’ 결성
   · ‘일본의 앞날과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의 모임(日本の前途と歴史教育を考える若手議員の会)’ 결성
   · 중국 정부는 미국 의용군 플라잉타이거즈 기념관을 건설하는 계획을 발표, 미국인인 전 대원들을 영웅으로 칭송했다.
   · 8월 29일, 이에나가 교과서재판 제3차 소송에서 최고재판소는 난징대학살의 기술에 관한 검정을 불법으로 판결했다.
   · 10월 26일, 장쩌민 국가주석은 하와이 진주만에서, 미·중은 일본과 싸운 동맹국이라고 말했다.
   · 11월, 친중파인 루퍼트 머독 계열의 베이직북스 사에서, 아이리스 장 ‘The Rape of Nanking’이 발간됐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난징 1937 국제회의’ 
   · 12월, 난징사건조사연구회, 중국귀환자연락회, No more 난징회, 역사교육협의회, 일본의 전쟁책임자료센터가 ‘난징대학살 60년 도쿄 국제 심포지엄’을 열었다. 타이페이국립정치대학에서도 반-리덩후이 세력에 의해 심포지엄이 개최됐다.
   · 윌리엄 빌 리핀스키(William Oliver Lipinski) 민주당 의원이, 난징대학살이나 731 부대, 조선인 위안부,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バターン死の行進) 피해자에 대한 사과 배상 청구 법안을 제출했다. 



 • 1998년 
   · 스탠포드 대학의 데이비드 M. 케네디는 난징학살을 유대인 대학살과 동일시할 수 없다고 비판.
   · 아즈마 시로 재판, 도쿄고등재판소에서 아즈마 측 패소. 중국 언론, 중국 정부는 반발.
   · 4월, 하타 이쿠히코가 가사하라 도쿠시 ‘난징사건(南京事件)’ III 장 표지 사진(1938년의 중국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일왜폭행실록(日寇暴行実録)’에 게재)가 ‘아사히그래프(アサヒグラフ)’ 쇼와 12 년 11월 10일호에 게재된 일본인을 찍은 사진임을 발견.
   · 8월, 히가시나카노 슈도가 ‘‘난징학살’의 철저검증(「南京虐殺」の徹底検証)‘을 발표. 요시다 유타카(吉田裕)와 전시국제법 논쟁.

 • 1999년 
  · 7월 15일, 캘리포니아에서 전시 강제노동 보상청구 시효연장법(헤이든법)을 채택.항일전쟁사실유호회 등의 단체가 미국의 전 포로단체와 제휴한 결과였다.
  · 8월, 난징대학살 · 종군위안부에 대한 일본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마이크 혼다 하원의원이 제안, 캘리포니아 의회는 채택.
  · 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 ‘사실은 이랬다 난징사건(本当はこうだった南京事件)’을 간행.

7.4 2000- 

 • 2000년 
  · 아즈마 시로, 재판 최고재판소에서 아즈마의 패소가 확정. 
 · 3월, 역사학자 Tien-wei Wu에 의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중국인 홀로코스트 박물관(Chinese Holocaust Museum)’이 개관
  · 7월, 재미반일화교단체는 전국 규모의 박물관으로 Museum of Humanity(인류 박물관, 인간성 박물관)을 계획하고, 중국, 조선반도, 대만, 동남아시아, 연합군 전쟁 포로 731 부대에 관해 전시하기로 했다.
  · 12월, 일본회의 국제홍보위원회, 오하라 야스오(大原康男), 다케모토 타다오(竹本忠雄)가 ‘재심 ‘난징대학살’ - 세계에 호소하는 일본의 원죄(再審「南京大虐殺」―世界に訴える日本の冤罪)‘

 • 2001년 
  · 3월, 사토 카즈오(佐藤和男)가 새롭게 전시국제법상의 합법설을 발표. 
  · 4월,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검정 합격. 중국과 한국이 채택 거부 운동.
  · 4월 28일, 중화인민공화국 국방교육법이 성립.
  · 11월, 기타무라 미노루(北村稔) ‘’난징사건’의 탐구 – 그 실상을 찾아(『「南京事件」の探究―その実像をもとめて』)’(분슌신쇼(文春新書))

 • 2003년 
  · 1월 21일, 샌프란시스코 연방고등법원에서 헤이든법에 대해 위헌 판결.
  · 4월 28일, 100인 참수 경쟁 재판. (2006년 원고 패소)

 • 2004년 
  · 8월, 난징대학살기념관이 마쓰오카 다마키(松岡環)에 대해 표창.

 • 2005년 
  · 4월, 일중(日中) 외상(外相) 회담에 즈음하여, 고이즈미 정권의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 외무대신이 ‘일중역사공동연구(日中歴史共同研究)’를 제안. 

 • 2006년 
  · 2월 21일, 미국연방대법원이 헤이든법에 대해 위헌 판결.
  · 10월, 일중정상회담에서 역사공동연구를 할 것이 정해졌다. 
  · 12월, 일중역사공동연구의 제 1차 전체회의(베이징).

 • 2007년 
  · 3월, 일중역사공동연구의 제 2차 전체회의(도쿄). 

 • 2008년 
  · 1월, 일중역사공동연구의 제 3차 전체회의 (베이징).
  · 5월, 히가시나카노 등 일본 ‘난징’ 학회는 12년간의 조사 결과, ‘난징대학살’은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 시라이시 다카시, 하타 이쿠히코, 데이비드 아수큐, 요미우리신문사 전쟁책임검증위원회, 기타무라 미노루, 앨빈 쿡스, 조슈아 포겔, 후키우라 타다마사 등의 논문집 영어판 An Overview of the Nanjing Debate이 간행.

 • 2009년 
  · 2월, 샤수친(夏淑琴) 재판에서, 히가시나카노 슈도 측의 패소가 최고재판소에서 확정.
  · 12월, 일중역사공동연구의 제 4차 전체회의 (도쿄)가 실시, 공동 연구 종료. 

 • 2010년 
  · 1월, 일중역사공동연구(日中歴史共同研究)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 2011년 
  · 11월,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만화 ‘난징(南京, Nanking)’(출판사 Les Editions Fei) 출간.

 • 2012년 
  · 6월 24일, 신리지엔(信力建)(광저우(広州)시 바이윈(白雲)구 협상회의 위원)이 난징전에서 일만군(日満軍)이 “난징을 해방했다”고 Weibo에서 표현했다. 난징대학살기념관이 이를 비난.

 • 2014년 
  · 3월 28일, 시진핑 주석이 독일에서의 연설에서 난징 학살에 대해 말했다.
  · 7월 7일, 전 민족 항전 폭발 77 주년 기념식이 루거우차오에서 개최. 
  · 혼다 가쓰이치가 저서 ‘중국의 일본군(中国の日本軍)’에서의 사진의 오용을 인정했다.
  · 중국 정부, 만화 ‘난징 1937(Nanking)’(출판사 Les Editions Fei)에 대한 프로모션을 지시. 또 ‘혈화기억(血火記憶)’을 중국의 초중고교의 부교재로 지정.
  · 12월 13일을 ‘난징대학살 공휴일’로 지정.
  · 12월 14일, 난징대학살 희생자 국가 추도식.

 • 2015년
  · 8월, 푸순(撫順) 전범관리소에 수감되어 있던 일본인 전범의 진술서를 인터넷에서 매일 한 명씩 공개.
  · 8월 15일, 아베 신조 수상은 전후 70년 아베 담화를 발표. 중국 정부는 담화를 비판했다.
  · 9월 1일, 에단 영(Ethan Young)의 만화 ‘Nanjing : The Burning City’가 미국의 다크호스(Dark Horse)사에서 출판
  · 9월 3일, 중국 인민 항일전쟁 · 세계 반파시즘 전쟁승리 70주년 기념식. 각국 주요 인사들이 참석. 
  · 10월 유네스코는 ‘Nanjing Massacre(난징학살)’에 관한 문서를 세계기록유산에 등록했다. 
  · 이때, 시진핑 주석은 영국을 방문했다. 



 • 2016년
  · 9월 18일, 9.18 사변(만주 사변) 85주년 기념식.


8 참고문헌(参考文献) 

- 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 ‘사실은 이랬다 난징사건(『本当はこうだった南京事件』)’ ‘니혼토쇼간코카이(日本図書刊行会)’、1999년 12월。ISBN 978-4823105043。

-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 ‘난징사건(南京事件)’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이와나미신쇼(岩波新書)’ 1997년 11월 ISBN 978-4004305309.

-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 ‘난징사건논쟁사 – 일본인은 사실을 어떻게 알아 왔는가(南京事件論争史―日本人は史実をどう認識してきたか)’ 헤이본샤(平凡社) ‘헤이본샤신쇼(平凡社新書)’、2007년 12월. ISBN 978-4582854039.

- 기타무라 미노루(北村稔) ‘’난징사건’의 탐구 – 그 실상을 찾아(『「南京事件」の探究―その実像をもとめて』)’, ‘분게이슌주(文藝春秋)’ ’분슌신쇼(文春新書)’、2001년 11월。ISBN 978-4166602070。

-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 ‘’난징사건’의 총괄 – 학살부정의 논거(『南京事件の総括―虐殺否定の論拠』)’ 쇼가쿠칸분코(小学館文庫)、2007년。 초판(初版):켄코샤(謙光社) 1987년。재간(再刊):2001년、덴덴샤(展転社)。

- 첸얀(陳言) ‘중국인이 본 중국의 이상한 애국주의 교육(中国人から見た中国のおかしな愛国主義教育)’ ‘다이아몬드·온라인(ダイヤモンド・オンライン)’ 다이아몬드샤(ダイヤモンド社), 2016년 7월 21일. 

- 일본회의 국제홍보위원회(日本会議国際広報委員会)、오하라 야스오(大原康男)、다케모토 타다오(竹本忠雄) ‘재심 난징대학살 - 세계에 호소하는 일본의 원죄(『再審「南京大虐殺」―世界に訴える日本の冤罪』)’ 메이세이샤(明成社)、2000년 12월。ISBN 978-4944219056。

-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난징사건 – ‘학살’의 구조(南京事件―「虐殺」の構造)’주오코론샤(中央公論社) ‘주코신쇼(中公新書)’,1986년 2월. ISBN 978-4121007957. 

-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난징사건 – ‘학살’의 구조(南京事件―「虐殺」の構造)’주오코론샤(中央公論社) ‘주코신쇼(中公新書)’, 2007년 7월, 증보판, ISBN 978-4121907950。

- 하라 다케시(原剛) ‘이른바 ‘난징사건’(いわゆる「南京事件」)(PDF)’ ‘사회교육학연구(社会教育学研究)’ 제 15권, 오사카(大阪)교육대학, 2009년 1월, 3-16쪽.

-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 ‘’난징학살‘의 철저검증(「南京虐殺」の徹底検証)’ 텐덴샤(展転社), 1998년 8월. ISBN 978-4886561534.

- 난징사건조사연구회(南京事件調査研究会)・편(編) ‘난징대학살부정론의 13가지 거짓말(南京大虐殺否定論13のウソ)’ 카시와쇼보(柏書房)、1999년 10월. ISBN 978-4760117840.

- 호라 도미오(洞富雄)、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 편(編) ‘난징사건을 생각한다(『南京事件を考える』)’ 오츠기쇼텐(大月書店)、1987년 8월。ISBN 978-4272520152。

- 호라 도미오(洞富雄)、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 편(編) ‘난징대학살 현장으로(『南京大虐殺の現場へ』)’ 아사히신분샤(朝日新聞社)、1988년 12월。ISBN 978-4022559623。

- 호라 도미오(洞富雄)、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 편(編) ‘난징대학살에 대한 연구(『南京大虐殺の研究』)’ 반세이샤(晩聲社)、1992년 4월。ISBN 978-4891882235。

- David・M・Kennedy (April ,1998). The Horror. 281(4). The Atlantic Monthly. pp. 110–116. 2016년 9월 26일 열람. 방역(邦訳):데이비드 M. 케네디(デビッド・M・ケネディ)、시오타니 히로(塩谷紘) 역(訳) ‘미국 역사학자 '난징의 강간' 비판, 난징학살은 홀로코스트가 아니다(米歴史学者の『ザ・レイプ・オブ・南京』批判 南京虐殺はホロコーストではない)’‘쇼쿤!(諸君!)’ 제30권 제8호、분게이슌주(文藝春秋)、1998年8月、 170-177쪽

- Ma, Xiaohua (馬暁華) (2007), "Constructing a National Memory of War : War museums in China, Japan, and the United States"in Gallicchio, Marc, The Unpredictability of the Past : Memories of the Asia-Pacific War in US-East Asian Relations, Duke University Press, pp. 156-200. 

- 마효화(馬暁華) ‘관광·민족성·기억의 문화 폴리틱스(観光・エスニシティ・記憶の文化ポリティクス)’ ‘역사연구(歴史研究)’ 47 오사카(大阪)교육대학 역사학연구소, 2009, p. 13-18.

- 시라이시 다카시(白石隆) 편집장,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데이비드 아스큐(David Askew), 요미우리신문사 전쟁책임검증위원회(読売新聞社戦争責任検証委員会), 키타무라 미노루(北村稔), 조슈아 포겔(Joshua A. Fogel), 후키우라 타다마사(吹浦忠正), 앨빈 쿡스(Alvin D. Coox) 공저, An Overview of the Nanjing Debate:Reprints of Articles from Japan Echo, 1998 to 2007 with New Commentaries, Japanecho,2008.

- 유미노 마사히로(弓野正宏) ‘중국 ‘국방교육법’의 제정과 시행(中国「国防教育法」の制定と施行)’(pdf) ‘와세다정치경제학지(早稻田政治經濟學誌)’ 제 369권, 와세다(早稻田)대학, 2007년 10월, 58-77쪽.

- 웡 젠(ワン・ジョン, Zheng Wang) ‘중국의 역사인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中国の歴史認識はどう作られたのか)’ 도요케이자이신포샤(東洋経済新報社)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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