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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사(南京事件論争史)’ (1)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36)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난징사건 논쟁사(南京事件論争史)’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21년 5월 11일판, 번역 : 황철수). 

‘난징사건 논쟁사(南京事件論争史)’ 항목은 특히 1970년대 이후 집중적으로 벌어졌던, 난징사건을 둘러싼 일본 정치인들과 논객들 및 중국 측의 논쟁 배경을 다루고 있다. 관련해서는 앞서 번역된 ▲ ‘난징사건(南京事件)’(한국어 번역), ▲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한국어 번역),  ▲ ‘난징사건의 피해자수(南京事件の被害者数)’(한국어 번역)   ‘난징사건의 증언(南京事件の証言)’(한국어 번역)▲ ‘100인 참수 경쟁(百人斬り競争)’(한국어 번역) 항목도 병행 참조해주기 바란다.




‘난징사건 논쟁사(南京事件論争史)’에서는, 난징사건 관련 논쟁의 역사에 대해 해설한다. 또 관련 일중(日中) 정부의 대응 등에 대해서도 해설한다. 


목차 


1 논쟁 전사 


2 1970년대 

  2.1 혼다 가쓰이치・야마모토 시치헤이・스즈키 아키라의 논쟁 


3 1980년대 

  3.1 제1차 교과서 문제와 난징대학살 전람회 

  3.2 아사히신문에 의한 보병 제 23 연대 보도 

  3.3 이에나가 교과서 재판 

  3.4 대학살파·허구설·중간파 

  3.5 가이코샤 ‘난징전사’ 


4 1990년대 

  4.1 미중의 대일 배상 청구 운동 

  4.2 톈안먼 사건 이후 중국의 애국주의 교육 

  4.3 나가노 발언 

  4.4 난징대학살 57주년 세계기념회의 

  4.5 전후 50년 

  4.6 논쟁의 국제화 

  4.7 일본에서의 논쟁

      4.7.1 아즈마 재판(우편낭 살해 사건) 

      4.7.2 ‘만드는 모임’과 역사 교과서 

      4.7.3 요시다·히가시나카노 논쟁(전시국제법) 

      4.7.4 사진 오용 


(계속)



 

‘난징사건 논쟁사(南京事件論争史)’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사(南京事件論争史)’ (1)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사(南京事件論争史)’ (2)




1 논쟁 전사(論争前史)

난징사건(南京事件)은 전후 1945년부터, 1946년의 도쿄재판과 난징재판에서 학살사건으로 거론되면서 일본에 큰 충격을 줬다.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가인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1952년의 저서 ‘쇼와의 동란(昭和の動乱)’에서 “난징에 입성한 나카지마 게사고(中島今朝吾) 사단의 폭거가 주역으로서, 난징에서의 일본군의 난행(乱行, 난징의 강간)으로 세계에 알려진 국제 문제가 그 때 일어났었고 일본의 명예도 더럽혀 졌다”고 썼다.

그러나, 도쿄재판 이후에는 난징사건은 일중전쟁(日中戦争)을 다룬 일부 연구 등에서는 접할 수 있었더라도 세상의 주목을 받는 문제는 아니었다. 

1960년대에는 고토 코사쿠(五島広作, 마이니치(毎日)신문 기자)와 시모노 이카쿠(下野一霍, 전 일본군 군인)가 공저한 ‘난징작전의 진상(南京作戦の真相)’(도쿄오조호샤(東京情報社), 1966년), 그리고 호라 도미오(洞富雄, 역사학자)가 저술한 ‘현대전사의 수수께끼(近代戦史の謎)’(진부쓰오라이샤(人物往来社), 1967년)에서 난징사건은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서 최초로 거론되었다.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郎, 역사학자)의 ‘태평양 전쟁(太平洋戦争)’(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1968년)은, 군인·기자의 회고록이나 호라 도미오의 저서를 인용하면서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했다. 이에나가 사부로는 이 책에서 일본군은 “중국인 수십 만 명을 학살했다”고 썼지만 이 내용이 본격적으로 검토되지는 않았다.


2 1970년대(1970年代) 

2.1 혼다 가쓰이치・야마모토 시치헤이・스즈키 아키라의 논쟁(本多勝一・ 山本七平・鈴木明の論争)

난징사건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일중(日中) 수교 직전인 1971년(쇼와(昭和) 46년) 11월부터 아사히신문 지상(紙上)에 게재된 혼다 가쓰이치(本多勝一) 기자의 ‘중국여행(中国の旅)’이라는 연재 기사였다. 이 기사는 난징을 포함하여 중국 각지에서의 일본군의 잔학 행위가 세밀하게 묘사된 기사로서, 난징사건에 대한 일반적인 일본인의 인식이 이후에 크게 퍼지게 됐고 또 일본인에 의한 난징사건 목격자의 증언이 다양한 잡지나 책에 게재되었다. 

혼다 가쓰이치의 기사에서 ‘100인 참수 경쟁(百人斬り競争)’이 보도되었고, 비평가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와 작가 스즈키 아키라(鈴木明)가 ‘100인 참수는 허구’라는 비판을 시작했다. 스즈키 아키라의 ‘‘난징대학살’의 환상(「南京大虐殺」のまぼろし)’(분게이슌주(文藝春秋), 1973년)은 사건의 사실 자체(당시에 불법살해 등 전쟁범죄가 있었다는 것)는 전면 부정하지 않는 입장에서의 논고였었다. 하지만 이 책은 부정설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 책의 제목에 영향을 받아서 난징사건과 관련해 ‘부정설’, ‘부정파’를 이후 ‘환상설’, ‘환상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니혼(日本)대학 교수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교수는 이 논쟁을 난징사건 관련 제1차 논쟁(第一次論争)이라고 했다. 1975년경의 논쟁은 “긍정파”와 “부정파”, 그리고 “있었다고 해도 대학살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는 파”(중간파) 사이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 편집자주 : 난징사건과 관련한 논쟁에서 ‘학살규모’가 특히 중요한 쟁점이 됐던 것은, 이 쟁점의 결론이 당시에 벌어졌던 전쟁범죄를 동반한 여러 인명피해 사건들(아우슈비츠, 스탈린그라드, 히로시마 등)과 비교하여 난징사건이 역사적으로 특별히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건인지, 아니면 그럴만한 가치는 없는 사건인지를 호소하는 일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국공내전 등 전후 집권 과정에서만 수백 만 명 규모의 학살을 자행한 중국 공산당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적 공론화도 이뤄진 바도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에 80여 년 전의 일본군에 의한 난징사건에 대해서만 중국 공산당이 포커스를 맞추는 것에 정치적 동기가 있다는 비판도 많다. ‘난징사건’이 실제로 수십 만 명 규모의 희생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대학살’로 칭하면서, 그보다 더 큰 규모의 수백 만 명 규모의 희생자가 있었던 역사적 사건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운동’과 ‘혁명’으로 칭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  중국 공산당은 난징사건 논쟁에 있어서 기존 학살부정파는 말할 것도 없고, 대규모 학살은 인정하지 않는 중간파(즉, 난징에서도 다만 여느 전쟁, 전투에서 벌어지는 통상적 수준의 군, 민 전쟁범죄 피해가 발생했었을 뿐이라는 입장)까지도 모두 사실상의 학살부정파로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 공산당에게 있어 난징사건이 어떤 측면에서의 가치가 있는지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자세한 논의는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한국어 번역) 항목도 참고하라.)
 



3 1980년대(1980年代)

3.1 제 1차 교과서 문제와 난징대학살 전람회(第一次教科書問題と南京大虐殺展覧会)
 
난징사건이 세 번째로 크게 주목받게 된 때는 1982년(쇼와 57년) 일본 문부성이 교과서 검정에서 ‘침략’을 ‘진출’로 수정시켰다고 하여서 중국이나 한국에서 항의를 받게 된 ‘제 1차 교과서 문제(第一次教科書問題)’ 때였다.

중국에서는 전후에 난징사건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지만 제 1차 교과서 문제가 일어나자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런민르바오(人民日報)가 전후 처음으로 난징사건에 대해 해설했다. 1970년대 말에 태어난 중국의 작가 주시웨이(Zhu Shiwei, 朱世巍, ‘Eastern Front’의 저자)에 따르면 당시까지도 중국의 교과서에서는 학살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대신에 주시웨이의 교사가 소학생(초등학생)인 그에게 직접 대학살에 대해 가르쳤다고 한다. 실제로 1960년부터 1982년까지 런민르바오에는 난징대학살 문제를 다룬 기사는 단 한 개도 없었다. 또 후차오무(胡喬木)에 의한 당사(党史)인 ‘중국 공산당 30년(中国共産党の三十年)’도 난징사건에 대해서는 묘사하지 않았다.

미쓰오카 켄지로(三岡徤次郎, 전 대본영 선박과 참모, 자위대 제9 사단장, 중국정경간담회 회장)가 1977년 10월 7일에 덩샤오핑 당시 중국 부총리와 만났을 때 덩샤오핑은 “일본의 군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했다. 따라서 장제스는 후퇴했고 그로 인하여 팔로군(八路軍)은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으며 마지막에는 장제스를 타파할 수 있었다”고 했을 뿐, 난징사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쓰노 유키야스(松野幸泰) 일본 국토청 장관이 젊은이들이 자국의 역사를 존경할 수 없게 되므로 교과서에서 ‘침략’이란 용어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발언한 사실을 런민르바오(人民日報)가 보도하면서 중국 측은 오가와 헤이지(小川平二) 일본 문부장관의 방중을 거부했다. 마쓰노 유키야스 장관이 1982년 8월 9일에 “난징전에서 일본군 8,000명, 중국 병사 12,000명이 희생되었지만, 이것은 (전투에서의 희생인 것이며) ‘학살’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발언하자 중국에서는 “일본 고위관리가 난징대학살을 부정했다”고 하면서 충격을 받았음을 밝히며 전쟁 당시 중국에서의 고난의 기억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런민르바오는 마쓰노 유키야스 장관의 발언을 “역사에 대한 가장 터무니없는 견해”라고 하면서,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부활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또한 베이징이나 상하이의 대학에서 항일전쟁(일중전쟁) 승리 37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열렸고, 같은해 8월 12일에는 일본의 전쟁범죄에 관한 첫 전시로서 ‘일본의 침략에 의한 난징대학살 전람회’가 난징박물관에서 개최되었다.

1982년 8월 26일,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정권은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관방장관의 담화를 발표하고서 일본이 “한국·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의 국민들에게 다대한 고통과 손해를 주었다”고 인정하였으며, 근현대사에 관한 일본의 교과서 기술 내용은 이웃을 배려해야 한다는 내용의 ‘근린제국조항(近隣諸国条項)’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 정부의 대응은 국내에서는 반발을 불러 부정파가 지지여론을 확대해나갔다. 이런 가운데, 일본 근현대사 비평가인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가 책 ‘난징대학살의 허구(南京虐殺の虚構)’를 발표하면서 부정파(본인도 학살부정파를 자칭)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에 중국이나 한국 등 일본의 이웃 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는 역사인식 문제가 가장 민감한 사항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항일전쟁 승리 37주년 기념으로 루거우차오사건(盧溝橋事件), 난징대학살, 만주사변(満州事変, 9.18 사변) 관련 행사가 연이어 개최되었다. 중국은 1985년에는 난징대학살기념관을 건설하고 ‘침화 일군 난징대학살 자료 전집(侵華日軍南京大屠殺資料専輯)’을 출판하면서 난징사건에 대한 연구와 이를 널리 알리는 일을 진행했다.

1986년 9월, 난징대학살 기념관에 안내된 미쓰오카 켄지로 중국정경간담회 회장이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인 위추리(余秋里, Yu Qiuli)에게 “20만 명 밖에 없었던 난징에서 30만 명 학살이 있었다고 중국은 주장하고 있는데, 이상하지 않나”하고 묻자, 위추리는 “난징의 하관(下関)에서 2만 명을 죽였다고 일본이 말해왔다”고 답했다.




3.2 아사히신문에 의한 보병 제 23 연대 보도(朝日新聞による歩兵第23連隊報道)

1984년 8월 4일 아사히신문 석간은, 전 보병 제 23연대의 일기를 입수했다면서 그 내용을 소개하고, 난징대학살을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이나 아우슈비츠와 같은 무차별 대량 살인”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보병 제 23 연대회는 이 일기에 대한 내용에 의문점이 많다면서 항의를 하였고 아사히신문은 “보병 제 23연대는 난징사건과는 무관했다”고 후에 정정하게 되었다.

또, 당초 보도에서 사용된 사진은 전쟁 당시에 판매됐던 사진으로 만주의 링위안(凌源)에서 중국군이 마적을 베었던 무용을 자랑하는 것이었음이 판명됐다. 이에 이 사진에 관해서도 아사히신문은 오용을 인정하면서 사과하고 취소했다. 

3.3 이에나가 교과서 재판(家永教科書裁判)

또, 일본의 역사학자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郎)가 교과서 검정(検定) 제도는 위헌이라고 제소한 ‘이에나가 교과서 재판’은 난징대학살의 기술 문제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1980년도 검정의 이에나가 측의 교과서는 “난징 점령 직후, 일본군은 다수의 중국 군·민을 살해했다. 난징대학살이라고 불린다”고 기술했다. 문부성 검정위원은 “점령 직후, 군의 명령에 의해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중국 민간인이나 군인을 살해한 것처럼 읽힐 수 있는데, 난징사건에 관한 연구 상황에서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고 검정 의견을 내고, 이에 교과서 조사관이 그 수정 방법으로 “혼란 속에서(混乱の中で)”라는 내용의 가필을 요구했고, 결국 “격앙 상황에서(激昂裏に, 우발적으로)”가 추가되었다.

1983년도 검정의 이에나가 측 교과서는 “일본군은 난징 점령 시, 다수의 중국 군민을 살해했고, 일본군 장병 중에는 중국 여성을 모욕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난징대학살이라고 불린다”고 기술했다. 관련해 문부성 검정위원은 여성에 대한 능욕은 인류 역사상 어느 전쟁터에서도 일어났던 일로, 일본군의 경우만 다루는 것은 문제라면서 삭제를 요구했다.

1993년 10월, 도쿄고등재판소는 1980년도 검정과 관련해 “대학살에는 다양한 설이 있고 학살이 군 상부기관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군 상부기관의 지휘로 실시되었다고 오해를 초래할 위험성에 대해서는 수정을 요구하는 것에 이유가 있다”고 하면서 검정은 합법이라고 했다. 그러나, 수정 문제와 관련해서는 “격앙 상황에서”가 추가된 부분에 대해서는, 학살 행위 전부를 이렇게 설명할 수가 없으며 일면적인 견해를 배려가 없이 거론하거나 미확정사건에 대해서는 독단적 기술을 제외한다는 검정 기준에 위반하는 오류를 검정위원이 스스로 초래했다고 판결했다.

또, 1983년도 검정과 관련해서는 “학계의 상황에 따라 판단하자면, 난징 점령시의 중국인 여성에 대한 정조(貞操) 침해 행위는 행위의 성질상 그 실제 숫자의 파악이 곤란하더라도 특히 비난할 만큼 다수이면서 잔학 행위라고 지적되고 있으며, 이는 중국 군민에 대한 대량 학살 행위와 함께 난징대학살이라고 불리고 있고, 난징 점령 시에 발생한 특징적인 현상으로 되어있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라고 했다. 그러면서, 수정 의견은 학설에 대한 상황 인식을 잘못했거나, 검정 기준의 해석 적용을 잘못했다고 하면서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1997년 8월, 최고재판소가 상고 기각으로 확정했다. 



3.4 대학살파·허구설·중간파(大虐殺派・虚構説 ・中間派)

1982년, 역사학자 호라 도미오(洞富雄)가 ‘결정판 난징대학살(決定版 南京大虐殺)’을 간행하면서, 호라 도미오는 혼다 가쓰이치와 함께 ‘대학살파’로 받아들여졌다. 호라 도미오 · 혼다 가쓰이치 등은 1984년 3월에 ‘난징사건조사연구회(南京事件調査研究会)’를 발족하고, ‘사실파’라고 자칭했다. 1984년 7월, 중국 난징시 ‘문사자료연구회(文史資料研究会)’가 편집한 피해 증언집이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증언 · 난징대학살(証言・南京大虐殺)’ 카가미 미쓰유키(加々美光行), 히메다 미쓰요시(姫田光義) 공동 번역, 아오키 쇼텐(青木書店)).

1983년 9월,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가 잡지 ‘쇼쿤!(諸君!)’에서 ‘‘난징학살’・마츠이 이와네의 진중일지(미발표 자료)("南京虐殺"・松井石根の陣中日誌(未発表資料))’를 발표했다. 1984년 6월, 다나카 마사아키는 저서 ‘‘난징학살’의 허구 : 마츠이 대장의 일기를 둘러싸고("南京虐殺"の虚構 : 松井大将の日記をめぐって)’(니혼교분샤(日本教文社))를 출간했다. 같은해 10월, 다나카 마사아키는 ‘분게이슌주(文芸春秋)’에 ‘아사히신문에서 거부된 5통의 반론(朝日新聞に拒否された五通の反論)’을 게재하는 등 허구설을 정력적으로 발표하고 부정파의 대표로 떠오르면서 또한 논쟁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다나카 마사아키가 1985년 5월에 단행본으로 간행한 ‘마츠이 이와네 대장의 진중일지(松井石根大将の陣中日誌)’(후요쇼보(芙蓉書房))에 대해서, 난징사건 연구자인 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는 진중일지 원본과 비교한 결과, 600개 이상의 변경 내지 변조가 있었고 난징사건 허구설 쪽 방향에로의 주석이 부기됐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타쿠라 요시아키도 대학살에는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다나카 마사아키에 의한) 변조는 분명히 의도적인 것이며 변명의 여지가 없다”면서 다나카 마사아키를 비난했다. 혼다 가쓰이치도 아사히신문에서 이를 보도했다.

1985년, 일본 군사사(軍事史) 전문가인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가 저서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이와나미부클릿(岩波ブックレット))을 출간했다. 이어 후지와라 아키라의 제자인 히토츠바시(一橋)대학 교수인 요시다 유타카(吉田裕)도 ‘천황의 군대와 난징사건(天皇の軍隊と南京事件)’(아오키쇼텐(青木書店))을 출간했다. 요시다 유타카는 학살의 정의와 관련, 난징사건에서 편의병(게릴라병) 처리에 대해서는 전쟁 당시의 국제법 학자인 다치 사쿠타로(立作太郎)조차 ‘게릴라나 변장한 군인은 전시 중죄인이지만 군사재판소에서 심문을 해야 한다’면서 이를 어긴다면 전시국제법 위반이고 ‘불법살해’는 곧 '학살'로 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논했다. 이타쿠라 요시아키는 전쟁에서는 어느 군대도 나쁜 짓을 했고 일본군도 나쁜 짓을 했지만, “일본인의 군대만이 세계에서 보기 드문 잔인한 군대였다고 일본인이 선전하고 돌아다닐 필요는 없다”고 요시다 유타카의 책에 대해서 평했다. 요시다 유타카는 이타쿠라 요시아키의 지적에 대해 역사에 대한 통각(痛覚)이 없는 오만한 논의이며, 고도성장을 거친 일본의 ‘대국주의 내셔널리즘(大国主義ナショナリズム)’이라고 반박했다.

역사학자인 호라 도미오(洞富雄)는 1986년 ‘난징대학살의 증명(南京大虐殺の証明)’(아사히신문사(朝日新聞社))에서 다나카 마사아키, 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 우네모토 마사미(畝本正巳), 와타나베 쇼이치(渡部昇一), 야마모토 시치헤이, 하타나카 히데오(畠中秀夫), 아라 켄이치(阿羅健一)의 ‘난징대학살 허구설’에 대해 비판했다. 같은해에는 ‘중간파’를 자칭하는 니혼(日本)대학 교수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반면에, 가사하라 도쿠시는 하타 이쿠히코를 ‘학살소수파’로 칭하고 있다)도, 저서인 ‘난징사건(南京事件)’(츄코신쇼(中公新書))를 간행하면서 “지금까지의 논쟁 방식에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며 “이대로는 역사적 진실규명은 어딘가로 밀려나고 편견이나 입장론만이 곳곳에 나타나고 추잡한 싸움이 되어 버릴 우려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난징사건은 도쿄재판 이후, 일중(日中)관계의 변전(変転)을 배경으로, 역사학의 대상으로서 보다는 정치적 이슈로 취급되는 불행한 운명에 처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보다 2년 전에 이타쿠라 요시아키나 혼다 가쓰이치로부터 마츠이 대장의 일기에 대한 변조가 지적됐던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는 1987년 3월에 간행한 책 ‘난징사건의 총괄 - 학살 부정의 논거(南京事件の総括―虐殺否定の論拠)’(켄코샤(謙光社))의 후기를 통해 부주의로 인한 오류 또는 누락은 있었지만, 마츠이 이와네의 문장이 난해했었고 가나(仮名) 표기법을 변경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다나카 마사아키는 자신은 의도적인 변조나 학살 사건의 은폐는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아사히신문이나 학살파 측이 “있을 수가 없는 20만, 30만 ‘대학살’을 마치 있었던 것처럼 선전하고 저술”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변조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난징시 문사자료연구회 편(編) ‘증언 · 난징대학살’의 수록된 피해자 증언도 엉터리가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다나카 마사아키는 호라 도미오, 후지와라 아키라, 요시다 유타카에 대해서 중국 공산당의 프로파간다 그대로의 주장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하타 이쿠히코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도쿄재판 사관’을 전개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 4명을 반면교사로 하여 그 편견과 왜곡을 철저히 비판하고 반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호라 도미오, 후지와라 아키라, 혼다 가쓰이치는 1987년 8월, 1988년 12월, 1992 년 4월과 난징사건에 대한 연구를 보고했다. 



3.5 가이코샤 ‘난징전사’(偕行社『南京戦史』)

한편,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의 친목 단체인 가이코샤(偕行社, 해행사)는 “일반적으로 정설이 되어가고 있는 20만, 30만이라는 숫자를 파쇄”하기 위해서 난징사건을 거론하기로 결정하고, 기관지 ‘가이코(偕行)’의 1983년 10월호와 11월호에서 관련 정보의 제공 및 협력을 호소했다. 

1984년 4월호부터 1985 년 2월호까지 우네모토 마사미(畝本正巳)에 의한 ‘증언에 의한 난징전사(証言による南京戦史)’가 11회에 걸쳐 연재되는 과정에서, 수미 요시하루(角良晴)의 증언 등 불법 행위를 보여주는 많은 증거들이 모였다.

1985년 3월호의 ‘증언에 의한 난징전사(최종회) 그 총괄적 고찰(証言による南京戦史 (最終回) その総括的考察)’에서, 편집부를 대표하여 카토가와 코타로(加登川幸太郎)가 “1만 3천명은 물론, 최소 3천 명이란, 대단히 큰 숫자이다. 일본군이 결백하지는 않을 것임을 각오하면서도, 이 전사(戦史)의 수사(修史) 작업을 시작한 우리인데, 이 엄청난 숫자를 앞에 두고 암연(暗然)할 수 밖에 없다. 전쟁터의 실상이 아무렇든, 전쟁터의 심리가 아무렇든, 이 대량 처리 앞에서는 변명의 말이 있을 수 없다. 구 일본군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사람으로서, 중국 인민에 깊이 사과할 수 밖에 없다”고 적었다. 

그러나, 이 사과에 대해 가이코샤 내부에서도 반박이 나오고, 1989년에 간행된 ‘난징전사(南京戦史)’에서는 “불법살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희생자는) 포로, 패잔병, 편의병(便衣兵, 게릴라병) 등 중국인 병사 사망자 약 16,000여명, 민간인 사망자 15,760명”으로 추정했다. 이 책의 편집에는 이타쿠라 요시아키도 참석했다. 하타 이쿠히코는 가이코샤의 ‘난징전사’를 (30만 대학살은 인정하지 않지만 포로 등의 살해를 인정했다는 의미에서) ‘중간파’라고 했다.


4 1990년대(1990年代) 

4.1 미중의 대일 배상 청구 운동(米中における対日賠償請求運動)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이나 미국에서 난징학살이나 위안부 문제 등 일본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대일 배상 청구 운동이 본격화했다.

1984년에 ‘재미화교정치동맹(在米華僑政治同盟)’이 결성되고, 워싱턴 시장이나 오레곤 주 의원에도 화교가 취임하고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1987년에는 뉴욕에서 ‘대일삭배중화동포회(対日索賠中華同胞会, Chinese Alliance for Memorial and Justice)’가, 1991년에는 ‘기념난징대학살수난동포연합회(記念南京大虐殺受難同胞連合会, Alliance in Memory of Victims of the Nanking Massacre)’가 결성되었다(이하 ‘난징수난연합’으로 표기. 근현대사 평론가인 에자키 미치오(江崎道朗)는 ‘난징대학살희생자추도연맹(南京大虐殺犠牲者追悼連盟)’으로 번역하였으며 1991년 3월에 결성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난징수난연합은 1989년의 쇼와 천황 장례식에 부시 대통령이나 중국 정부와 대만 정부가 참석해서는 안 된다면서 항의했고, 1990년에는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 의원의 난징사건 발언을 고발하기도 했다.*

[* 편집자주 : 1990년 10월, 당시 이시하라 신타로 중의원 의원은  미국 ‘플레이보이’誌와의 인터뷰에서 “난징에서 대학살이 있었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중국인이 만들어낸 이야기이며 거짓말이다. 당신(미국인)들이야말로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20~30만 명을 죽이지 않았는가”라고 말했다.]

1992년 천황의 방중과 1994년 천황의 방미에 항의, 일본의 유엔안보이사회 상임이사국 가입에 반대하는 활동을 뉴욕타임스에 의견광고 등을 통해 미국의 여론에 환기 시켜왔다. 

1992년 5월 2일에는 캘리포니아 쿠퍼티노(Cupertino) 거점으로 항일전쟁사실유호회(抗日戦争史実維護会, Alliance for Preserving the Truth of Sino-Japanese War)가, 1994년 12월에는 미국과 캐나다에 거점을 둔 글로벌 조직으로 세계항일전쟁사실유호연합회(世界抗日戦争史実維護連合会)가 결성되었다.(에자키 미치오는 ‘세계항일전쟁사실유호연합회’를 ‘아시아지구 제2차대전사옹호 세계동맹(アジア地区第二次大戦史擁護世界同盟)’으로 번역했다.)

일본계 미국인은 1988년에 태평양전쟁 당시 받았던 대우 문제와 관련해 미국 정부로부터 사과를 얻어 1992년에는 전미일계인(全米日系人) 박물관이 개관됐지만,* 중국계 미국인도 1988년 중국계 미국인 박물관을 로스앤젤레스에 계획했다. 

[* 편집자주 : 미국은 태평양전쟁 당시 행정명령을 발동해 일본계 미국인들을 '적성외국인'으로 간주해 재판 등의 절차 없이 약 12만 명을 수년간 강제수용했다. 당시 피해자들이 중심돼 명예회복 운동이 이어졌고 미국은 레이건 시절 대통령이 잘못을 인정하고 공식 사죄했다.]

4.2 톈안먼 사건 이후 중국의 애국주의 교육(天安門事件以降の中国における愛国主義教育)
 
1989년의 ‘톈안먼 사건(天安門事件, 천안문 사건)’으로 공산당의 정당성이 실추되었고, 이에 덩샤오핑은 그간 학생들에 대한 교육이 잘못됐음을 지적하고 나섰고 이후 애국주의 교육이 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되기 시작했다.

또, 1990년 9월에는 자민당(대표 가네마루 신(代表金丸信)) · 사회당 (대표 타나베 마코토(代表田邊誠)) · 조선노동당의 3당 공동 선언에서 일본통치시대의 조선 36년 및 전후 45년간, 일본이 “조선 인민에 입힌 손실”에 대해서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사과와 보상이 선언되었다(‘일조관계와 관련 일본의 자유민주당, 일본사회당, 조선노동당의 공동선언(日朝関係に関する日本の自由民主党、日本社会党、朝鮮労働党の共同宣言)’ 1990년(헤이세이 2년) 9월 28일 “3당은 일본이 과거 36년간 조선인민에게 큰 불행과 재난을 준 사실과 전후 45년간 조선인민공화국에 입힌 손실에 대해 조선인민공화국에 공식 사죄하고 충분히 보상해야 한다고 인정한다”고 했다).

1990년 10월, 잡지 ‘PLAYBOY’(영어판 10월호, 일본어판 11월호)에서 이시하라 신타로 중의원 의원이 “난징대학살은 중국의 거짓말”이라고 발언했다. 이에 대해 혼다 가쓰이치가 질문장을 송부하자 이시하라 신타로 의원은 통역 때문에 내용이 잘못 전달됐었다며 잘못 전달한 내용에 대해서서는 분게이슌주의 논문을 통해 답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혼다는 이 논문 내용이 “괴상하다”고 비판했다. 

1990년 11월에는 화교를 대상으로 하는 ‘중국해외교류협회(中国海外交流協会, China Overseas Exchanges Association)’가 베이징에서 설립되고, 국무원교무변공실(国務院僑務弁公室)의 랴오후이(寥暉)와 린슈롱(林水龍)이 부회장 등에 취임하고, 세계의 화교 단결을 증진하기로 했다. 일본 근현대사 평론가인 에자키 미치오(江崎道朗)는 톈안먼 사건으로 비난을 받았던 중국이 이 협회를 통해 국제 비난의 화살을 일본에 돌리기 위하여 선전공작을 진행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1991년 8월, 난징수난연합은 난징사건과 관련해 존 매기(John Magee)의 필름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만주사변 60주년인 1991년 9월 18일에는 ‘9.18사변 기념관’이 건설되고, 중국 정부는 중학교에서 역사 교육을 강화하겠다고 선언, 이 날을 ‘국치기념일’로 정하고, ‘몰망국치(勿忘国恥)’(국가의 치욕을 잊지 마라), ‘강아국방(強我国防)’을 슬로건으로 애국주의 교육 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9월, 중국 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덩샤오핑의 측근이라고 불린 류화칭(劉華淸)에게 미쓰오카 켄지로 중국정경간담회 회장이 “왜 사실도 아닌 학살기념관을 세우는가?”라고 질문하자 류화칭은 “중국이 해방되기 전의 시대를 젊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실시하고 있다. 학살기념관은 중국 내부 문제다”라고 답했으며, 30만 숫자와 관련한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1991년 11월에는 중국중앙(CC)TV가 모리무라 세이이치(森村誠一) ‘악마의 포식(悪魔の飽食)’을 원작으로 731부대를 고발하는 드라마인 ‘황원의 731(荒原の砦七三一)’을 방영했다. 같은 해 일본에서도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난하는 것으로서 이웃과의 화해를 목표로 ‘오사카국제평화센터(大阪国際平和センター, 피스오사카(ピースおおさか))’가 개관했다. 1992년 5월 12일에는 장쩌민 총서기가 중국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에 애착을 가질 수 있도록 국방교육을 강화하겠다고 선언했다.



1993년 8월, 중국 정부의 대일(対日) 싱크탱크가 중국 정부에 보고하기를, 일본은 유엔 상임이사국에 들어가려고 하고 정치대국화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는데 적절한 시기라고 했다.

4.3 나가노 발언(永野発言)

1994년 5월 4일, 나가노 시게토(永野茂門) 일본 법무대신이 “난징대학살은 날조라고 생각한다”고 발언하고서 경질되었다.

1994년 6월 10일에, ‘난징대학살은 사실인가? 진상규명 · 사과외교 규탄 국민대회(南京大虐殺は事実か? 真相解明・謝罪外交糾弾国民集会)’가 개최되어, 무라오 지로(村尾次郎), 아라 켄이치(阿羅健一), 와타나베 쇼이치가 강연에 나섰다.

이들은 하타 쓰토무(羽田孜) 수상이 나가노 시게토 대신을 경질한 일을 규탄하면서, ‘난징학살’은 거짓말이며 난징사건을 ‘난징학살’이라고 하는 것은 ‘도쿄재판사관’이라고 논하고선 종전 50주년의 ‘부전결의(不戦決議)’에 대한 저지운동도 시작했다. 

4.4 난징대학살 57주년 세계기념회의(南京大虐殺五十七周年世界記念会議)

1994년 12월에는 ‘난징대학살 57주년 세계기념회의’가 개최, 중국 공산당 정부와 대만 정부의 ‘양안 정부’는 과거 일중공동성명 등으로 대일전쟁배상을 포기했다고 비난했다. 일본 정부에 대해서도 군국주의자가 타인에게 죄를 전가하는 비열한 수단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공식 사과와 모든 피해자에 대한 배상의 실시를 요청해가겠다고 선언했다. 이 회의에 아이리스 장(Iris Chang)이 참여했으며 이후 이러한 조직으로부터 집필 및 강연 활동과 관련해 후원을 받았다.

4.5 전후 50년(戦後50年)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수상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제 국가의 사람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고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 사과하자, 중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사과와 자기 비판을 긍정하지만, 일부 일본인들은 전쟁을 미화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 한 달 뒤인 9월 18일, 중국에서는 항일전쟁 50주년 기념대회가 열리고, ‘불망국치(不忘国恥, 나라의 치욕을 잊지말자)’ 캠페인 운동은 절정을 맞아 9.18 역사박물관이나 항일전쟁 박물관의 확대가 선언되었고 이 기관들은 ‘애국주의 교육기지’가 되었다.



이 박물관들에서는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핑딩산 사건(平頂山事件, 편집자주 :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푸순(撫順)을 점령한 일본군이 1935년 9월 15일 중국 항일유격대의 습격을 받자 그 보복이라며 이튿날 핑딩산 주민 3천여명을 모아 학살했다고 알려진 사건)’에서는 중국인이 기관총으로 학살당했고, 모든 마을에서 아이들을 포함한 학살이 이뤄졌으며, 난징대학살에서는 중국인이 생매장이 되었고, 731부대에서는 인체실험재료가 되었다 등의 내용이 전시되었다.

1995년에는 한국을 방문한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과거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 비난하고 일본의 군국주의는 중국과 한국에 있어서 위협이라고 말했다. 이후 일본 국내 및 해외에서 위안부 문제 캠페인 활동도 활발해졌다.  1995년에는 작가 빈스톡(R.C. Binstock)의 ‘천국의 나무(Tree of Heaven)’나 폴 웨스트(Paul West)의 ‘오렌지 미스트의 텐트(The Tent of Orange Mist)’ 등 난징사건과 당시의 난징을 무대로 한 소설이 발표됐다.

1996년 4월의 일미안보공동선언(日米安保共同宣言)에 대해서 중국은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거론하며 비난했다. 관련해 일본의 안보전문가인 에자키 미치오(江崎道朗)는 중국이 미국의 대일 여론을 악화시켜 일미(日米) 분단을 도모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5월 10일에는 미 하원 의회에서 전 미군 포로 문제와 난징사건, 한국인 위안부 등 피해자에 대한 기금을 요구하는 법안(로버트 도넌(Robert Dornan) 하원의원에 의한 법안)이 제출되었다. 또 제임스 인(James Yin)과 영 시(Shi Young)의 공저 ‘The Rape of Nanking An Undeniable History in Photographs’이 간행되었으며, 이 사진집을 아이리스 장이 읽었다고 한다.

12월에 스탠포드대학, 홀로코스트 박물관, 보스턴대학에서 일본군의 잔학 행위에 대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으며, 12월 12일에는 난징수난연합과 아이리스 장이 욘 라베의 일기가 발견됐다고 뉴욕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욘 라베의 유족은 일기 공개를 꺼려했지만 난징수난연합의 회장으로 난징 출신의 샤오핑(邵子平, Shao Tzping)이 설득에 성공했다. 샤오핑은 존 매기 필름의 첫 발견자이기도 하다.

1997년, 중국 정부는 ‘미국 의용군 플라잉 기념관’(편집자주 : 미국 의용군은 ‘플라잉 타이거즈’라고 하여 일중전쟁 당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인 자원자들로 창설돼 대대 규모로 중국(중화민국) 편에서 싸운 항공 용병부대다)을 건설하는 계획을 발표, 미국인인 전 대원들을 영웅으로 찬양했다. 또 10월 26일, 장쩌민 국가주석은 하와이 진주만에서, 미·중은 일본과 싸운 동맹국이라고 말했다.

1997년 11월, 친중파인 루퍼트 머독 계열의 베이직북스 사에서, 아이리스 장의 ‘The Rape of Nanking’이 발간되었다. 아이리스 장의 저작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역사가 스티븐 암브로스(Stephen Edward Ambrose)도 “젊은 세대 역사가로서는 최고다”고 극찬했다. 힐러리 클린턴이 백악관에 초청하기도 하는 등 아이리스 장은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1997년 11월, 프린스턴대학에서 ‘난징 1937 국제회의(南京一九三七国際会議)’가 열렸고, 12월에는 도쿄에서 ‘난징사건조사연구회(南京事件調査研究会)’, ‘중국귀환자연락회(中国帰還者連絡会)’, ‘No more 난징회(ノーモア南京の会)’, ‘역사교육협의회(歴史教育協議会)’, ‘일본의전쟁책임자료센터(日本の戦争責任資料センター)’에 의해 ‘난징대학살 60년 도쿄 국제 심포지엄(南京大虐殺六十年東京国際シンポジウム)’이 열렸다. 대만 타이페이의 국립정치대학(国立政治大学)에서도 반-리덩후이(李登輝) 세력에 의해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1997년에는 윌리엄 빌 리핀스키(William Oliver Lipinski) 민주당 의원이, 난징대학살이나 731 부대, 조선인 위안부,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 バターン死の行進) 피해자에 대한 사과 배상 청구 법안을 제출했다.  로이 브룩스(Roy Brooks)는 저서 ‘미안함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When Sorry Isn’t Enough: The Controversy Over Apologies and Reparations for Human Injustice)’에서 “비인간적인 취급에 의한 고통은 헤아릴 수 없다, 현재는 사과의 시대 인 것이다”라고 했다. 로스 먼로(Ross H. Munro)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미·중·러에 의한 다국간 조약으로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영원히 봉쇄하려고 했다.

항일전쟁사실유호회 등의 단체는 미국의 전 포로경험자 단체와 연계하여, 일본계 의원 마이크 혼다(Mike Honda)와 연방 정부에 압력을 가했고 이에 1999년 8월 24일에 캘리포니아에서 대일 배상 결의가 채택되었다. 마이크 혼다 의원은 일본이 사과를 하게 만들자는 운동은 ‘정의의 운동’이며, 일본의 사과는 화해와 성숙을 조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중국을 방문했던 니와 하루키(丹羽春喜), 이나바 야마토(稲葉大和), 카메오카 타카오(亀岡高夫), 미쓰오카 켄지로(三岡徤次郎)가 30만 명 학살은 사실이 아니라고 중국 측에 항의하자, 중국군 고위관리로부터 일본 사회당의 타나베 마코토(田邊誠) 위원장으로부터 그렇게(‘학살은 사실이다’) 전달받았다는 답변을 얻었다.

일본의 근현대사 연구가인 아라 켄이치(阿羅健一)는 1999년 11월 28일과 12월 7일에 타나베 마코토와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타나베 마코토는 “진주만 50주년 때 일본의 반성을 언급한 적은 있지만, 난징사건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에 중국과 관련해 난징사건은 거론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루거우차오(盧溝橋) 항일전쟁기념관의 전시와 관련해 타나베 마코토 의원이 (난징사건에 대해서) 말했었다는 중국 측의 답변에 대해서는 “전시관에 갔을 때 서명은 했지만 그것뿐이며,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발언은 하지 않았다. (생략) 내가 조선이나 중국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중국은 ‘30만 명설’에 대한 의문에 대해 제대로 반박을 하지 않다가 추궁을 당하면 일본 기자와 정치인에 의한 것이라고 답을 하곤 한다. 하지만,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타나베 마코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는 상황으로, “결국 중국 고위 관리들은 난징사건을 사실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까”하고 아라 켄이치(阿羅健一)는 논하고 있다.



4.6 논쟁의 국제화(論争の国際化)

1990년대에는 욘 라베 일기의 일본어 번역판 ‘난징의 진실’ 등을 비롯한 많은 자료집이 편집·발행되었다. 욘 라베 일기를 보관하고 있던 유족을 압박한 것은 중국계 미국인의 반일조직인 ‘기념난징대학살수난동포연합회(紀念南京大屠殺受難同胞聯合会)’이며, 이들은 아이리스 장의 ‘The Rape of Nanking’ 등의 저작물에 대한 논쟁도 벌이면서 일본의 전쟁 범죄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당시 무명의 29세 작가였던 아이리스 장(Iris Chang)에 의한 책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은 일본군에 의해 2만 명~8만 명의 중국인 여성이 강간당했고, 더 많은 일본군 병사들이, “여성의 내장을 끄집어내거나, 가슴을 자르거나, 산 채로 벽에 못으로 박기도 했다. 가족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로 하여금 딸을 강간케 하고, 아들로 하여금 어머니를 강간케 했다. 생매장에, 거세에다가, 장기를 잘게 잘랐다. 그 뿐만 아니라, 철로 된 갈고리를 혀에 꽂아서 매달아 올리기도 했다. 중국인을 허리까지 땅속에 묻은 후에 독일 셰퍼드가 물어뜯도록 하면서 그걸 바라보는 등의 극악무도한 고문을 했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며, 이러한 진실을 일본이 은폐하고 있으며 구미(서양)도 관련해 무지한 상태에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의 학살부정설은 ‘2차 강간(Second rape)’이라고 했다.

‘뉴스위크(Newsweek)’를 비롯하여 미국 각 매체가 이 책을 대대적으로 다루면서 극찬했고 10주 동안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실릴 정도의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초에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를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건은 정치색이 얇은 인도주의 문제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연구자들에 의해서 욘 라베 일기에 “민간인 희생자 10만 명은 너무 많고, 5만 명에서 6만 명”(1938년 6월 8일, 욘 라베가 히틀러 총통 앞으로 보낸 상신서(上申書)에서 나오는 기록)이라고 기록된 사실이 밝혀졌고, 희생자 30만 명설을 지지하는 대학살파와, (반대로 0명 설을 주장하는) 환상파 쌍방을 당혹케 만들었다.

쓰루분카(都留文科)대학 교수인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가 욘 라베의 언급인 “5만 명에서 6만 명”은 난징 교외(郊外)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97년 12월의 심포지엄에서 발표하자, 중국 측의 쑨자이웨이(孫宅巍)가 “30만 명은 난징성 안쪽의 숫자”라고 반박하고, 이 때부터 중국은 일본의 친중파를 배려하지 않게 됐고 ‘30’만이라는 “공정숫자(公定数字)”에 대해서는 일체 타협을 허용치 않게 됐다. 

독일 잡지 ‘슈피겔(Der Spiegel)’은, 중국이 “30만”이라는 숫자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공산당에 의해 저질러진 문화대혁명에서의 대량 학살 문제에 대한 관심을 난징사건 쪽으로 돌리기 위해서라고 평했다.

스탠포드대학의 데이비드 M. 케네디(David M. Kennedy)는, 난징학살을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과 동일시하는 근거를 아이리스 장은 제시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조슈아 포겔(Joshua A. Fogel)은, 아이리스 장의 저작에 대해 현대 일중관계사(日中関係史) 연구자들에게는 “묵과할 수 없는 내용의 거짓말”라고 지적하면서, 앞서 아이리스 장의 저작을 극찬했던 버클리 대학의 오빌 쉘(Orville Schell) 교수를 비판했다. 또한 중국계 미국인의 아이덴티티 폴리틱스(정체성 정치학)가 ‘비교 피해자학’의 접근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학살파인 히토츠바시(一橋)대학 교수인 요시다 유타카(吉田裕)조차도, 아이리스 장의 책은 사실 오인이 너무 많다고 했다.

에자키 미치오(江崎道朗)는, 아이리스 장의 책이 “일본 증오의 감정이 앞선 상태로 기술됐다”면서 학문적 검증은 뒷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제시된 사진의 대부분은 출처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일본 비난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띤 선전본이라는 성격이 농후하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논쟁은 국제적으로 발전했고 한편으로는 난징사건에 대해서 일본의 대학살파와 중국 정부의 공식 견해 사이에서도 대립이 나타나게 되었다. 

4.7 일본에서의 논쟁(日本における論争)

4.7.1 아즈마 재판(우편낭 살해 사건)(東裁判(郵便袋殺害事件)) 

1993년에는 가해 증언자인 아즈마 시로(東史郎)에 의해서 중국인을 우편낭에 넣어 가솔린을 부어 불을 붙여죽였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 증언의 가해자로 지목된 보병 제 20연대 오장(伍長)은 아즈마 시로를 명예훼손으로 제소했고 1996년 도쿄지방재판소는 아즈마 시로의 일기를 허구로 파악했다. 1998년 고등재판소에서 항소가 기각됐고 2000년에 최고재판소의 상고 기각으로 아즈마 시로의 패소가 확정됐다. 

‘중국 정부’와 ‘화침일군 난징대학살 우난 동포 기념관(侵華日軍南京大屠殺遇難同胞紀念館)’, 그리고 ‘아즈마 시로 변호인단’은 판결이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4.7.2 '만드는 모임'과 역사 교과서(「つくる会」と歴史教科書)

1995년은 전후 50주년이며, 후지 노부오(富士信夫), 와타나베 쇼이치(渡部昇一), 다나카 마사아키(田中正明)의 저작이 재발간 등을 포함하여 간행되었다. 또한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 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 우에스기 치토시(上杉千年)도 교육잡지에서 논문을 발표하고, 특히 후지오카 노부카쓰가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자민당의 ‘종전 50주년 의원 연맹(終戦50周年議員連盟)’과 ‘역사검토위원회(歴史検討委員会)’는 ‘대동아전쟁의 총괄(大東亜戦争の総括)’을 간행했다.

1997년에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결성되어 교과서를 만들고 2001년 4월에 검정에도 합격했지만, 중국과 한국이 맹렬하게 교과서 채택 거부 운동을 일으키면서 채택 비율은 0.04 %에 그쳤다.

한편, 도쿄대학 교수인 가토 요코(加藤陽子)는 야마카와(山川)출판사의 교과서에서 “(난징사건의) 희생자 수는 수 만〜40만 명에 이른다는 설이 있다”고 쓰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서 니혼(日本)대학 교수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출처 불명의 40만 명이라는 숫자에 놀랐다”고 술회하고 있다.

4.7.3 요시다·히가시나카노 논쟁(전시국제법)(吉田・東中野論争(戦時国際法))

1998년 8월, 아지아(亞細亞)대학 교수인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는 ‘‘난징학살’의 철저검증(「南京虐殺」の徹底検証)’을 발표하고 난징사건 당시에 포로나 투항병 등에 대한 살인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다만 그것은 전시국제법에 비추어 합법적이었으며 편의병(게릴라) 사냥을 두고 학살로 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히가시나카노 슈도의 국제법 이해는 오류라고 지적하는 대학살파인 요시다 유타카(吉田裕)와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 사이에 전시국제법에 대한 논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히가시나카노 슈도는 요시다 유타카에 의해 논파되었고, 이후 히가시나카노 슈도는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게 되었다고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는 평하고 있다.

4.7.4 사진 오용(写真誤用)

1998년, 전년 11월에 발행된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의 저서 ‘난징사건(南京事件)’ III 장 표지에 “일본군에 납치된 장난(江南) 지방의 중국인 여성들”이라는 캡션으로 게재된 사진(1938년 중국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일구폭행실록(日寇暴行実録)’에 게재)이 문제시 됐다.

이 사진은 실제로는 ‘아사히그래프(アサヒグラフ)’ 1937년(쇼와 12년) 11월 10일호에 게재된 ”우리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야량사사(野良仕事, 들일)를 보다가 부락으로 돌아가는 일장기 부락의 여자들(我が兵に援けられて野良仕事より部落へかへる日の丸部落の女子供の群れ)”임이 하타 이쿠히코에 의해 지적되었다.

가사하라 도쿠시는 중국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가 사실과 다른 캡션을 사진에 붙인 사실을 모르고 사용한 것에 대해 독자들에게 사과했다. 이에 따라 출판사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도 사과하고 무라세 모리야스(村瀬守保)의 사진으로 교환했다.

가이쿄샤 ‘난징전사’의 편집위원으로서 중간파인 이타쿠라 요시아키(板倉由明)는 1999년에 저서 ‘사실은 이랬다 난징사건(本当はこうだった南京事件)’을 간행했다. 그러면서 하타 켄스케(秦賢介), 타도코로 코조(田所耕三), 아카호시 요시오(赤星義雄), 타카시로 모리카즈(高城守一), 나카야마 시게오(中山重夫), 소네 가즈오(曽根一夫), 아즈마 시로(東史郎), 후나바시 테루요시(船橋照吉) 등에 의해 이제까지 발표되어왔던 “학살이 있었다”는 증언에 대해 면밀히 고증하고서, 군 공식 기록 등의 자료와 다른 사람들의 증언 등과의 모순되는 점을 열거한 후, 그 속에는 분명히 ‘허위 증언’도 있다고 고찰했다. 

한편, 부정파의 섣부른 ‘앞질러가기(先走)’ 문제로 지적받고 있다. 아지아(亞細亞)대학 교수인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가 쓴 책 ‘난징사건 증거 사진을 검증한다(南京事件証拠写真を検証する)’에 대해서 가사하라 도쿠시는 “처음부터 난징사건의 증거가 아닌 사진을 검증하고선 ‘증거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무라세 모리야스의 사진집 가운데 ‘학살당한 뒤 장작에 얹어지고 기름이 부어진 시신’ 두 장의 사진이 배제되어 있다. 이 사진은 집단학살을 한 일본 병사가 악취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서 연기가 아직 남아있는 시체들 현장에 서있었던 것으로서,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부정을 못할 사진은 ‘검증’에서 배제해놓고서 ‘증거 사진으로 통용되는 사진은 한 장도 없다’고 결론짓는 것이야말로 바로 속임수다”라고 지적했다.



또, 마찬가지로 부정파의 문제점으로서, 가령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가 “난징대학살 증거 사진은 모두 날조다”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의 사진 분석으로써 증거 사진이 모두 날조라는 주장에는 과장이 있다는 비판(히가시나카노 슈도 측의 여러 고증·지적에는 실수가 있는데, 예를 들어 여성의 성기에 이물을 넣는 만행은 중국인 밖에 하지 않기 때문에 가짜 사진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주장이다(실은 일본 병사도 했던 짓이다), 또한 원래 외국인이라도 당시 살인 사건 그 자체에 대해선 촬영이 거의 불가능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등)이 있다.

대학살파 중에서는 ‘난징에로의 길 · 사실을 지키는 모임(南京への道・史実を守る会)’과 같이 인터넷 논쟁을 통해 부정파를 비판하는 연구자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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