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진 칼럼] 왜 장동혁이어야 하는가

이인자 콤플렉스와 한국 정치의 살부(殺父)의 역사

 

인싸잇=심규진 | 정치에서 가장 어려운 자리는 1인자가 아니라 2인자다.

 

1인자는 자신의 길을 가면 된다. 그러나 2인자는 늘 질문을 받는다.

 

“나는 계승자인가. 편승자인가. 아니면 대안인가.”

 

그리고 정치의 가장 냉혹한 질문이 뒤따른다.

 

“나는 결국 배신자가 되는 것인가.”

 

권력을 이어받는 정치에서 1인자와 2인자의 갈등은 반복되어 온 역사적 패턴이다. 최근 정치만 보더라도 그 장면은 익숙하다.

 

한동훈은 지금 윤석열과 거리를 두는 수준을 넘어 사실상 정치적으로 등을 돌린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승민 역시 박근혜 체제에서 벗어나려 했고, 결국 탄핵 국면에서 친박과 완전히 갈라섰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역사는 더 노골적이다.

 

노태우는 전두환을 감옥으로 보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결과는 자신 역시 감옥에 가는 정치적 비극으로 이어졌다.

 

정치의 역사에는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살부의 정치. 권력을 이어받은 2인자는 결국 1인자를 부정해야 자신의 정당성을 세우려 하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비극이 반복된다.

 

배신의 역사는 그렇게 수없이 반복되어왔다.

 

필자는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 이후 정치적으로 가장 고립돼 있던 시기, 12월 말쯤 김문수 장관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김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 같은 분이 나를 도와준다면 정치 행보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몇 차례 개인적인 소통을 주고받았는데, 필자가 했던 조언은 단 하나였다.

 

“지금 지지층은 이준석과 한동훈에 대한 비토 심리가 매우 강하다. 따라서 오세훈이나 홍준표와는 함께 갈 수 있어도 이준석이나 한동훈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말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김문수는 이른바 ‘꼿꼿문수’ 현상으로 대권 주자 1위까지 올라 있었다. 그 지지 기반은 분명했다. 윤석열 지지층이었다.

 

계엄 국면에서 김문수는 비교적 윤석열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고, 이 때문에 지지층은 그를 자연스럽게 윤석열의 정치적 후계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선이 시작되자 김문수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꺼냈다.

 

전태일 생가를 방문했고, 윤석열 계엄에 대해서도 “잘못된 것”이라는 식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뿌리가 좌파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이며 약자 연대와 기득권 투쟁이 자신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이때부터 그의 정치 행보는 꼬이기 시작했다.

 

지지층은 윤석열의 계승자를 기대했는데 정작 그는 김문수 자신의 본질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40%라는 높은 지지를 얻었지만 정치적 상승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전당대회에서는 정치 신인이나 다름없는 장동혁에게 패하며 당원들로부터 배신자라는 평가까지 듣게 됐다.

 

표는 윤석열 지지층에게서 받았지만, 정치는 40년 정치인 김문수로 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치인의 정체성과 정치 시장의 요구가 충돌할 때 벌어지는 전형적인 실패다.

 

이른바 ‘꼿꼿문수’라는 정치 브랜드는 한순간 피어났지만,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채 사라진 정치적 환상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비슷한 장면을 다시 보고 있다.

 

윤석열 정권 이후 국민의힘의 당권 정치사는 흥미로운 패턴을 보여준다.

 

이준석
김기현
한동훈
김문수
그리고 지금의 장동혁까지.

 

이들 전임 당권 주자들은 모두 윤석열과의 관계 설정에서 실패했다.

 

누군가는 충돌했고, 누군가는 윤석열을 다루지 못했고, 누군가는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결과는 동일했다. 당권은 잃고 정치적 상처만 남았다.

 

지금 장동혁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장동혁 또한 윤석열 지지층의 지지를 통해 당권을 쥐게 됐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일종의 정치적 셋방살이를 하는 셈이다.

 

내란 수괴 혐의로 몰려 수감 중인 윤석열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 그리고 그 지지층과의 관계 설정은 장동혁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때일수록 그는 이인자 콤플렉스를 벗어나 스스로 정치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공과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 분명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단순히 “과거이니 묻고 가자”는 식의 태도로는 부족하다.

 

윤석열 정권의 어떤 정책을 개선할 것인지, 어떤 부분은 반성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입장이 필요하다.

 

왜 윤석열이라는 정치인이 계엄 이후 이러한 정치적 수난을 겪고 있음에도 여전히 많은 당원들이 그를 무죄라고 생각하는가.

 

“왜 상당수 지지층이 윤석열에게 연민과 동정의 감정을 갖는가. 또 왜 많은 사람들이 윤석열과의 절연을 원하지 않는가.”

 

이 질문을 정면으로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면 장동혁은 비로소 이인자 콤플렉스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정치는 결국 다음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왜 장동혁이어야 하는가.
왜 전한길이 아니라 장동혁이어야 하는가.
왜 한동훈이 아니라 장동혁이어야 하는가.
왜 지금 윤석열이 아니라 장동혁이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제시하지 못한다면 장동혁은 결국 또 하나의 ‘2인자 정치인’으로 역사 속에 묻힐 것이다.

 

지금 장동혁은 원내 권력과 레거시 미디어 사이에서 고립돼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의 정치적 가능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나온다.

 

원내 권력은 언제나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레거시 미디어는 언제나 새로운 정치세력을 극단으로 규정하려 한다. 한국 정치에서 새로운 리더십은 늘 그 두 축과 충돌하며 등장해 왔다.

 

문제는 장동혁 자신이다.

 

그가 윤석열을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윤석열 지지층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윤석열의 정치적 유산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넘어설 것인지 스스로 말해야 한다.

 

정치는 안티테제가 아니라 테제로 승부하는 것이다.

 

윤석열이 아니라는 이유로, 혹은 윤석열의 편이라는 이유로 장동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장동혁이기 때문에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줘야 한다.

 

지금 장동혁에게 필요한 것은 타협이 아니라 정치적 선언이다.

 

원내의 눈치를 보며 절윤을 말하는 정치도 아니고, 지지층의 분노에 기대는 정치도 아니다.

 

자신의 언어로 노선과 비전을 제시하고, 당원민주주의를 분명한 정치 브랜드로 세우는 것이다.

 

그 순간 장동혁은 더 이상 윤석열의 대체재가 아니라 정치적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단을 하지 못한다면 결과는 분명하다.

 

한국 정치의 오래된 공식이 다시 반복될 것이다.

 

또 하나의 2인자가 등장했고
또 하나의 2인자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