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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는 한나라당 편이다

[기고]'보통사람들'이 만든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

*사진설명 :일일드라마 열아홉순정 ⓒ열아홉순정

나는 독후감을 좀체 쓰지 않는다. 책 읽은 것 자랑하는 인상을 줄까 두려워서다. 더욱이 요즘에는 드라마 빨아주는 데만도 시간이 모자란다. 허나 최근에 이룩한 독서실적만큼은 꼭 티를 내서 남들과 공유하고 싶다. 노동부 장관을 역임했던 남재희 전의원이 지은‘아주 사적인 정치 비망록’이라는 회고록이다. 책을 모두 읽고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처세 없는 철학은 공허하고, 철학 없는 처세는 맹목적이다.”

 대부분의 정치인 회고록은 자화자찬 일색이다. 이 책은 그와 달리 저자의 솔직한 반성이 담겨있다. 객기는 있되 용기는 없었다는. 프레시안에 실린 어느 서평에서 지적한 구절이었는데 충분히 공감이 가는 대목이었다. 구술 또는 대필이 아니라 남전의원 본인이 직접 서술했기에 이와 같은 진솔한 고백이 포함되었을 확률이 크다.

 특히 관심을 자아낸 내용은 일화는 ‘위대한 보통사람’의 탄생비화였다.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는 부활한 직선제로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가 내건 캐치프레이즈였다. 워낙 임팩트가 강한 슬로건이었기에 한국정치사에서 가장 뛰어난 선거구호로 평가받고 있다. 이 영악한 문구의 최초 발상자가 남전의원이었다고 필자는 회고한다. 필자의 아이디어를 번듯하고 매끈한 문안으로 다듬어 완성시킨 인물은 현재 동아일보 사장으로 있는 김학준씨이며. 그러면서 필자는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란 표현의 저작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럿이라고 덧붙인다. 잘된 일에는 저마다 자기가 주도했다고 앞다퉈 손을 드는 것이 세상인심이므로 그럴 만도 하겠다.

 하지만 나는 남재희 전의원과 생각이 다르다. 핵심은 원저자가 아니다. 어떤 이의 손으로 대중화되었는가가 관건이다. 보통사람을 광범위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숙이 박아놓은 당사자에게 공적이 돌아가야 옳다. 내가 요새 너무 열심히 일일연속극을 시청한 여파일까?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히트시킨 일등공신은 드라마 ‘보통사람들’의 극작가라 해야 마땅하다.

 ‘보통사람들’은 1982년에 방영된 KBS 일일극이다. 순전히 기억력에 의지해 출연진을 호명해보겠다. 황정순 여사를 위시해 이순재, 김민자, 한진희, 한혜숙, 강석우 등 당대의 톱스타들이 고루 망라된 화려한 캐스팅이었다. 시청률이 높았던 덕택에 아마 연장방송을 했었을 것이다. 고정시청자들 입장에서 고역이라면 드라마가 끝난 직후 곧장 시작되는 9시 뉴스의 도입부와 맞닥뜨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로 운을 떼던 공포의 땡전뉴스. 권력의 방송장악이 절정기를 구가하던 때였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국민이 독재자의 동정에 관심을 갖게 하려면 드라마를 재미없게 허투루 만들 수는 없었으리라.

 제목만 따지면 원전은 따로 있다. 1980년에 개봉된 미국영화 ‘보통사람들’이다. 원제는 Ordinary People. 누가 처음 착상했는지가 대수이겠는가? 실속 있게 써먹는 인간이 임자지. KBS는 할리우드 영화제목을 알차게 이용했고, 민정당은 대중에게 친숙한 드라마이름을 얼렁뚱땅 갖다 붙여 정권재창출에 성공했다.

 호사가들 짐작대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라는 책을 나는 당연히 봤다. 획기적 시각을 제공하는 선거실무서적은 아니다. 설명을 추가하자면 프레임이론의 창시자는 아주 유명하신 분이다. 인류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게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아, 며칠 후면 성탄절이구나. 애들 신났겠군.

 예수는 말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여호와의 것은 여호와에게” 정치공학에 대입하면 이렇게 의미를 풀이할 수 있다. “시저는 생각하지마!” 적의 의중은 부지런히 분석하되 적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어휘로 반격하지는 말라는 뜻이다. 예수는 제자들이 로마문명의 틀에 빠져드는 사태를 원천봉쇄했다. 대신 로마인들을 야훼의 프레임 안에 포획했다. 세계제국 로마에 크리스트교가 전파될 프레임을 튼튼하게 구축한 것이다.

 1987년의 13대 대선에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후보가 노태우 후보의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반박하면 반박할수록 그들은 위대한 보통사람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는 꼴이었다. 노태우 진영은 이를 통해 경쟁자들을 하나도 위대하지 않은 희한한 정치인들의 범주로 싸잡아 묶어 세웠다. 그럼에도 나는 노태우 선거캠프 참모들보다 ‘보통사람들’의 작가와 연출자에게 훨씬 후한 점수를 주겠다. 드라마가 대중의 두뇌에 사전에 진주하지 않았다면 위대한 보통사람은 한낱 재치 있는 말장난 수준에 머물렀을 테니까.

 한국방송 일일연속극 ‘열아홉 순정’을 꼼꼼히 챙겨보면서 드라마의 중독성과 세뇌효과에 놀라고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무서운 흡입력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방송되는 드라마다. 금요일 방송에서 양국화(구혜선)의 신상에 불길한 소동이 발생하면 주말 내내 불안하고 초조하다. 사건이 월요일에 해피엔딩으로 무사히 마무리될 지를 뻔히 알면서도. 동시에 부잣집 출신들이 되레 뒤끝이 없다는 인식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언뜻언뜻 하곤 한다. 드라마에서 한국사회 부유층은 짓궂고 푼수끼는 다분하되, 음험하거나 교활하게는 그려지지 않는다. 반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한 주인공은 구질구질하고 의존적인 성격을 수시로 노출한다. 기획의도로 천명된 씩씩하고 당당한 캐릭터는 속된 말로 순 구라다.

 시청자들의 전폭적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는 역할인 박윤정(이윤지)은 이명박 전서울시장을 빈번히 연상시킨다. 고민 따위는 대충 생략하고 만사를 무조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기 일쑤인데 아무튼 결말은 다 좋다. ‘보통사람들’의 작가와 연출자가 나중에 선거에서 요긴하게 활용될 것을 예상하고 드라마를 만들었겠는가? 마찬가지다. 구현숙 작가와 정성효·황인혁 PD가 특정한 정치적 목표를 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한데 결과적으로 드라마는 대한민국 기득권계층도 알고 보면 밝고 순수하다는 관념을 지속적으로 확산시킨다.

 프레임은 인위적 기획으로 갑작스럽게 형성되지 않는다. 서서히 옷깃을 적시는 가랑비와 같은 형태를 띤다. 프레임으로 무르익으려면 메시지의 지속적인 되풀이가 필수적이다. 즉 인내심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반복에 수반되기 마련인 대중의 지루함을 막아줄 적절한 흥행장치와 흥미요소가 포함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열아홉 순정’의 후속작 ‘하늘만큼 땅만큼’은 삼각관계가 소재인 드라마라는데 왠지 감이 좋지 않다. 한효주를 박근혜에 빗대고, 이명박을 홍수아에 투영하며, 연하남 박해진을 손학규 내지 원희룡의 복사판으로 묘사할까 하는 노파심을 억누르기 어렵다. 한나라당이 일일드라마로 착실히 프레임을 다지게 된다면 오픈 프라이머리이건, 통합신당이건, 영남 후보론이건 이쪽에서는 죄다 헛물만 켜는 셈이다.

 KBS 노조가 방송의 공영성 강화에 치중하기보다는 사원들의 복리후생 증진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진보적 경영자와 보수적 노동조합이 대립하는 기묘한 구도다. 코드인사 시비에 휘말린 정연주 한국방송 사장은 노조의 조직이기주의에 제동을 걸 힘도 의지도 부족한 느낌이다.

 KBS가 구질서의 복원과 수구세력의 정권탈환에 이바지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보도국이 관할하는 뉴스는 이슈를 다루고, 드라마국에서 책임지는 연속극은 프레임에 관여한다. ‘서울 1945’ 이런 거 파괴력 없다. 시청자들의 경계심만 자극하기 십상이다. 겉보기에 무해하고 가치중립적으로 비치는 홈드라마와 멜로드라마야말로 민중의 잠재의식을 천천히 또박또박 악랄하게 점령하는 법이다. ‘보통사람들’이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의 길을 닦았듯. 나의 우려가 하릴없는 과민반응이었으면 다행이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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