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에게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사실 별로 색다른 내용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능히 짐작해왔던 터였던지라. 최근에 지인이 인터넷공간에서 노무현 대통령 지지논리를 극성스럽게 전파하는 걸로 유명한 어떤 언론계 인사를 만났단다. 문제의 언론계 인사는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시되는 인물 셋을 꼽았단다.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 열린우리당 김혁규 의원,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그들이다.
듣는 순간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양반 처지가 참 다급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일단 아무 동아줄이나 붙잡고 늘어져야 할 형편이니. 한글을 깨우칠 정도의 지적수준만 갖춰도 유시민, 김혁규, 김두관씨가 대한민국 17대 대통령으로 선출될 것이라는 전망을 감히 내놓지는 못한다. 문제의 언론계 인사는 까막눈이 당연히 아니다. 본인의 희망사항을 객관적 분석이랍시고 꺼내는 불안하고 초조한 그의 마음에 한편으로는 연민이 가기도 했다. 자업자득의 성격이 크지만.
물레방아조차 돌릴 힘이 없는 흘러간 언론인을 새삼스레 화두로 제시한 이유는 딴 곳에 있지 않다. 문제의 언론계 인사가 내면화한 사고체계가 소위 ‘영남친노’들의 전형적 마인드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남을 떼어놓으면 친노세력이 이해되지도, 설명되지도 않는 사태가 언제부터인가 일시적 현상을 넘어 구조적 법칙으로 정착되었다. 코끼리와 나머지 포유동물을 구별짓는 본질적 속성이 코의 길이에 있듯이, 경상도 향토색을 거론하지 않고는 친노세력의 존재 자체가 아예 무의미할 지경으로 노무현 친위사단과 영남인맥은 불가분의 관계가 되어버렸다.
문제의 언론계 인사가 개진한 정세예측으로 되돌아가자. 우리가 어떻게 머리를 쥐어짜든 김두관-김혁규-유시민씨 사이에서는 단 한 가지의 유대와 일체성만이 발견될 뿐이다. 다름 아닌 영남태생이라는 점이다. 성장배경, 이념적 성향, 정치이력 모두에 있어 영남코드를 빼놓으면 세 명의 정치인을 무난하게 아우를 공통분모는 어디에도 없다. 같은 영남출신으로 대통령의 핵심측근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이 세 사람을 한 울타리에 엮을 요소가 있다면 좀 가르쳐주시기 바란다.
최장집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민주진영이 노무현 정권과 결별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이건 실로 군더더기 말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정신 제대로 박힌 족속 치고 노무현 대통령과 절연하지 않은 인간은 한 명도 없다. 민주와 개혁의 레테르를 붙여놔도 하등 어색하지 않은 부류는 노무현 대통령 주변에서 이미 사라진 지가 오래다.
그럼에도 여하튼 정권은 굴러가야 한다. 걸핏하면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통치권자의 발언이 순전히 엄살이었음을 이제는 삼척동자도 안다. 참다운 개혁세력과 진짜 민주진영이 노무현 정권에 등을 돌림으로써 발생한 공백은 이내 채워졌다. 한나라당이 정권을 잃은 후에 변방으로 밀려났던 영남엘리트들이 정치권력의 중심지대로 재입성한 것이다.
기존의 영남정권들과는 달리 노무현 정권은 철저한 역할분담을 원칙으로 삼는다. TK(대구경북)는 행정부처를 장악하고, PK(부산경남)는 청와대에 진주하는 구도다. 언론은 경상도 엘리트들의 참여정부 접수를 ‘영남의 대약진’으로 표현하는 모양이다. 이 표현은 오직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영남의 대약진이 아니다. 영남 ‘B급 인재’들의 권력요직 싹쓸이다.
영남의 정권탈환은 아직은 50프로만 성취되었다. 경상도 민의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영남의 ‘A급 인재’들이 운집한 한나라당이 집권에 성공해야 명실상부한 영남정권창출이 이루어진다. 정권수뇌부가 APEC을 제주도에서 강탈해 부산에 퍼주면서까지 엄청나게 영남에 공을 들였음에도 영남민심이 여전히 싸늘한 원인을 유추하기란 그리 어려운 노릇이 아니다. 영남정서는 적장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유독 강하다. 종손인 한나라당의 성공을 진정한 성공으로 받아들인다. 주어온 자식이거나 기껏해야 서자에 불과한 노무현 정권은 아무리 예쁜 짓을 거듭해도 결코 성에 차지 않는다. 왜냐? 서출의 성공은 적출에 대한 모독이기에.
큰어머니(?)에게 미움을 받을지언정 본댁 문간방에 얹혀 사는 게 남의 집 안방에 누워지내는 것보다 몸은 편하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고, 몸이 편해지면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기 쉽다. 노무현 대통령과 친노직계가 영남올인을 감행한 동기는 경상도에서 정통성 있는 적장자로 기필코 인정받고야 말겠다는 치기 어린 오기의 발로다. 이는 어리석은 셈법이 아니다.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약삭빠른 발상이다.
노무현 정권 후반기의 실세그룹은 영남의 B급 인재들이다. 정상적 기능을 발휘하는 인력충원 장치와 인사검증 메커니즘 아래서는 자질과 경쟁력이 절대적으로 떨어지는 집단이다. 노무현 정권 이너서클의 영남색채가 나날이 짙어지면서 이 무리가 권력의 심장부로 진출하기가 훨씬 용이해졌다. 우선은 영남을 뺀 지역의 A급 인재들이 원천적으로 경쟁에서 탈락했으니 경쟁자 숫자가 대폭 감소했다. 능력을 본위로 높낮이가 조절되는 정권진입의 문턱이 낮아지면, 영남권 B급 인재들이 권부에 발을 들여놓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청와대든 행정부든 각종 위원회든 경상도 B급 인재들한테 문호가 활짝 개방된 탓이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법이다. 영남 인재들에게는 성기게 작용하는 그물망이 일반시민이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하려할 경우는 갑자기 촘촘해지기 일쑤다. 물론, 영남의 B급 인재들에 빌붙어 국물이라도 얻어먹으려는 여타 지방 B급 인재들, 즉 등급외 노빠들의 해악과 행패마저 부인할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쓸개빠진 종자들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비영남 C급 친노들은 정치적으로 더는 특별한 중요성을 띠지 못한다. 그냥 무시하기로 하자.
영남친노들의 철면피한 정권옹호와 막가파식 대통령 빨아주기는 치밀한 계산에 기초한 행동이다. 선택과 집중의 원리에 충실한 셈이므로. 전장을 영남으로 좁힘으로써 그들의 경쟁상대는 한나라당으로 줄어들었다. 한나라당은 영남친노들과의 싸움에 전력을 기울이기가 부담스런 상황이다. 경상도 A급 인재들의 주적은 타지방 A급 인재들인 까닭에서다. 따라서 영남의 B급 인재들의 민간쿠데타를 진압하는 일에 총력을 쏟을 겨를이 없다. 다른 지역 A급 인재들은 한나라당에 포진한 경상도 A급 인재들을 대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다. 이들에게는 노무현 정권의 주축세력인 영남 B급 인재들의 치사하고 몰상식한 반칙행위를 응징할 여력이 없다.
나는 예전에 영남친노를 화랑의 후예로 규정한 바 있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음해한 방법이 영남친노들이 불로소득을 취하는 수법과 비슷했다. 신라는 A급 강대국 고구려가 역시 A급 강국인 수당과 전쟁을 벌이는 틈을 빌려 동일한 B급 강국인 백제만을 괴롭히며 잇속을 챙겼다. 신라의 야비한 무임승차로 말미암아 광활한 요동벌판을 상실했던 우리민족은 마침내 백두산마저 중공오랑캐들에게 빼앗길 위기다.
영남친노의 기본전략은 어부지리다. 그들의 공략대상은 신라와 같이 제한적이다. 신라의 목표가 한반도 남쪽에 국한됐듯, 영남친노들은 단지 정치권력의 획득만이 지상과제다. 집권 이후의 사명, 가령 한국사회의 개혁과 선진화 따위는 애당초 관심권 밖이다. 이제야 영남친노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아시겠는가? 영남친노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자신들이 부귀영화에 접근할 수 있는 진입장벽을 없애는 데 있다. 국가를 경영할 경륜과 역량은 흐물흐물 쥐꼬리이되 권력의지는 용가리 통뼈다.
노무현 대통령을 정계개편 작업에 동참시키느냐 배제하느냐를 둘러싸고 열린우리당이 시끄럽다. 노무현 대통령을 따돌려야 한다는 주장은 도리에 어긋난다. 한데 노대통령을 합류시켜야 한다는 소리는 더더욱 엽기적이고 해괴망측하다. 내가 여태껏 숱하게 대통령을 물어뜯어 왔지만 영남친노들처럼 대놓고 노대통령을 능멸할 엄두는 전혀 내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배제하면 곤란하다며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이렇게 요약된다. 노대통령이 ‘영남권에 행사하는 지분과 영향력’을 존중하자나. 추석명절이 지나면 새로운 여론조사결과가 공표될 게다. 참여정부가 닻을 올린 이래 사상 최초로 영남지역의 노무현 지지율이 전국평균 국정지지도를 상회하지 않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다. YS가 혹여 노무현 대통령과 살림을 합치려고 거제도 고향집을 확장한 건 아닌지.
이게 바로 노무현 정권의 초라한 말로다. 영남에 행사하는 지분과 영향력을 무기로 자기의 몸값을 흥정한다. 나 또한 왕년에는 서두에 언급한 문제의 언론계 인사를 능가하는 악명 높고 견결한 노무현 지지자였다. 노무현 정권의 비극적 실패와 관련해 다시 한번 많은 분들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과의 말씀과 반성의 뜻을 전한다. 허나, 미우나 고우나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다. 어쩔 수 없다. 안고 가야 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출세와 입신양명을 꾀하고자 대통령의 오판과 착각을 말리기는커녕 도리어 부추겨온 영남의 B급 인재들만큼은 단호히 척결해야 한다. B급 재주로 A급의 호강을 누리겠다는 파렴치한 과대망상이 영남친노 멘털리티의 본색이다. 우리는 보통 이걸 도둑놈심보라고 부른다. 국민은 A급 인재의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
금년은 단군께서 하늘을 열고 나라를 세우신 지 4,339년째 되는 해다. 단기 1만년, 건국 1만년을 성대하게 기념하도록 대한민국은 끊임없이 번영하고 강성해져야 한다. 남은 반만년 역사를 의롭고 겸손한 A급 인재들이 조국의 운명을 개척하고 민족의 미래를 향도하는 시대로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