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장난삼아 나를 국무총리로 추천했다. 사실 좋기야 대통령이 좋지만 그게 어디 본인의 의지만으로 올라갈 벼슬자리인가. 하늘이 돕고, 땅이 거들어야지. 대통령 이외의 괜찮은 공직을 물색해본 결과, 드디어 결론이 나왔다. 한국방송 KBS 사장을 해먹기로 결심했다.
내가 한국방송 사장에 취임하면 평상시에는 복지부동하며 정치권의 눈치를 살필 작정이다. 그렇게 연말까지 바닥에 몸을 붙이고 납작 엎드려 있다가, 세밑에 방송국에서 연예인들을 표창하는 각종 행사에 주최측의 일원으로 부지런히 끼어들 계획이다. 대한민국 방송사들이 주관하는 시상식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시상자는 반드시 남녀가 짝을 이뤄 무대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방송사 사장과 함께 등장하는 여자연예인이 어떤 경위를 거쳐 선정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단지, 사장이 싫어하는 스타일의 여성스타는 시상식장 파트너로 발탁되지 않으리라는 점만큼은 확실하다. 일종의 코드인사인 셈이다.
*사진설명 :KBS 연예대상에 참석한 정연주 사장 ⓒKBS
나야 연말연시에 특별히 불러주는 곳이 없는 인간이기에 텔레비전 감상으로 소일할 수밖에. KBS 연예대상을 시청했다. 쇼와 코미디 부문에 상을 주는 모양이다. 한국방송 정연주 사장이 시상자 자격으로 참여한 건 당연한 노릇. 정연주씨는 미칠이 최정원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일주일쯤 후에 KBS 연기대상을 시청했다. 이번에는 미칠이가 아예 사회자다. 대상이 하지원이란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1TV에서 진행하는 신년맞이 행사에 모습을 내비쳤던 정연주 사장이 연기대상 시상식이 열리는 여의도 KBS 별관으로 어느새 이동해왔다. 그런데 파트너가 또 미칠이다. 별꼴이다 정말!
여성주의에 친화적인 부류들께서는 여기서 읽기를 멈추어주시기를 바란다. 미인은 승리한 권력자를 위해 준비된 전리품이라는 지극히 동양적이고 전통적인 관점에서 논지를 펼치려 하므로. 나 극우보수인 거 여태 모르시나?
정연주씨가 미칠이 최정원을 시상식 짝꿍으로 연이어 데리고 출연한 해프닝에 대해 원래는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며 모른 척 넘어갈 요량이었다. 그러나 문득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석춘씨가 2007년이 밝자마자 오마이뉴스에 게재한 칼럼에서 영향 받은 탓이었을 게다. 칼럼의 표면적 목적이야 노무현 대통령 비판이었다. 한데 나한테는 한 가지 메시지만이 명료하게 머릿속에 와 닿았다. “나 한겨레에서 잘렸어….”
연초부터 손석춘씨의 신세타령을 접하니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간판칼럼니스트에게 주필명의로 비정규직 해지통보를 해야 할 정도면 한겨레신문의 경영환경과 재정상태가 얼마나 열악한지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으리라. 평범한 뉴스게릴라로 새롭게 출발하겠다는 손씨의 포부가 오히려 애처롭게 여겨질 지경이다. 마음 같아서는 위로주라도 사드리고 싶지만 영남친노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까닭에 나 또한 빈털터리로 변방을 떠돌아야 하는 개털 처지다.
누차 지적해온 바대로 한겨레의 위기는 소녀진보 및 웰빙좌파와 단호히 결별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자업자득의 성격이 짙다. 손석춘씨는 한겨레가 웰빙좌파와 소녀진보들에게 장악되도록 부추긴 당사자일 터. 해지통보를 계기로 진지한 자기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럼에도 손씨를 가혹하게 질타하고 싶지는 않다. 그 역시 애꿎은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분배의 정의가 자취를 감춘 진보진영의 피폐한 현실이 손석춘씨를 벼랑으로 내몬 구조적 원인이다.
미칠이 최정원. 2006년 KBS가 낳은 최고의 히트상품이다. ‘열아홉 순정’만 열심히 시청했던지라 최정원이 저토록 예쁜 줄은 미처 몰랐다. 화려한 드레스 차림으로 성유리 옆에 세워두니 구입한 지 십 수년이 경과한 내 방의 Gold Star TV의 브라운관에서 광채가 나더라. 성유리가 누군가? 웬만한 동료 여자연예인들을 일개 ‘민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소문난 미모의 소유자 아닌가? 그 성유리가 최정원과 붙어있으니까 사무실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여느 직장여성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미칠이 WIN!
미칠이 최정원을 KBS 정연주 사장이 2회 연속으로 동반한 방송국 행사를 손석춘씨가 목도했다면 무슨 감회에 젖었을까? 정씨와 손씨는 불과 몇 년 전에 한겨레신문사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사이다. 진보진영이 보수세력과 비교해 우위에 놓인 점이 딱 하나 있었다. 콩 한쪽이라도 나눠먹는 인정과 의리다. 분배의 정의라고 우아하게 표현되는 정겨운 미덕 말이다.
노무현 정권에서 가장 승승장구한 인물은 물론 노무현 대통령이다. 대통령을 제외해보자. 이해찬 전총리? 지금 쪽팔려서 얼굴조차 못 들고 다닌다.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창당주역을 자부했던 소속정당이 공중분해될 위기상황이다. 정동영과 김근태? 이 양반들 대통령 선거 불출마선언하지 않으면 정치생명 끝장이다. 서역국왕과 휘하의 서역상인들? 나중에 감옥만 안 가도 다행이다. 장담하건대 KBS 정연주 사장이야말로 참여정부 들어서 단연 출세한 경우다.
사람의 참다운 됨됨이는 출세하기 전에는 모른다. 출세하고 나서야 비로소 본색이 드러난다. 이로 말미암아 국민들이 손가락을 자르고픈 참담함을 느끼기 일쑤다. 정연주 사장이 분배의 정의에 조금이나마 관심과 애정이 있었다면, 미칠이와 나란히 거푸 시상식에 출현하는 호강은 포기해야 마땅했다. 대신 손석춘더러, 강준만더러, 홍세화더러 짝퉁 미칠이 안공주와 커플을 지어 시상을 하라고 권유했어야 옳았다.
내가 기억하기로 정연주씨가 KBS 사장으로 장기집권하면서 이룩한 최대의 업적은 노현정 아나운서 현대가문으로 시집보낸 일이다. 무능한 개혁의 말기적 현상이 비단 KBS만의 문제이겠는가? 최초의 노조출신 사장으로 기대를 모았던 MBC 문화방송 최문순 사장이 남긴 특기할만한 기록이라곤 김선아와 한혜진을 위로해준다는 핑계로 그들과 같이 저녁을 먹은 사건뿐이다. 솔직히 요게 삼순이와 소서노 위로하는 이벤트이겠나? 최문순 위로하는 모임이지. 그러한 방식의 위로라면 나는 김태희를, 손예진을, 이나영을 항시 위로해줄 용의가 있다.
다들 한국의 진보개혁진영이 쫄딱 망했다고 이야기한다. 재기의 활로를 모색하려는 진보개혁진영의 논의와 몸부림이 여러 군데서 감지된다. 쓸데없는 헛수고다. 재활에 성공할 가능성은 객관적으로 희박하다. 내부모순의 발현으로 붕괴한 이유에서다. 개혁파는 공권력의 혹독한 탄압과 수구세력의 총반격으로 인해 망한 게 아니다. 인간성의 본질에 있어 과거부터 죽어라 욕해왔던 한나라당이나 조선일보 구성원들의 인격과 하등 다르지 않음이 백일하에 폭로돼 몰락한 것이다.
이철씨와 정연주씨를 예로 들어보자. 공기업 대표이사가 된 다음에는 예전에 비난을 퍼부었던 군사독재정권의 바지사장들과 똑같은 행태와 양상을 연출하고 있다. 민주화 투사의 탈을 쓴 민주화 투자자들이 준동하고 있는 한,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단체로 동남아 섹스관광을 다녀와도 차기 정권은 무조건 현재의 야당 차지다. 자신들의 동아리끼리도 분배의 정의를 확립하지 못하고 불평등이 만연한 칠푼이 주제에, 기득권계층을 향해서만 고통분담에 동참하라고 목에 힘을 주고 핏대를 세우니 진보그룹이 국민들로부터 “너나 잘하세요!”란 핀잔을 듣는 것이다.
꼴뚜기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고 김동민씨는 한술 더 뜨는 기색이다. SBS 서울방송 사외이사 하시더니 세상이 온통 자기 것이라 믿는 기색이다. 미칠이 최정원 곁에서 입이 찢어지게 함박웃음을 터트리던 정연주씨와, 1년에 고작 회의 수 차례 참석한 대가로 목돈 만져본 김동민씨를 통해 서민대중에게 전달되는 이념과 가치관은 한결같다. “억울하면 출세해!”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게임의 법칙을 선양하고자 정연주씨와 김동민씨는 목놓아 조중동 조폭언론을 성토했나보다. 부럽고 샘 나면 출세하라는 완전소중 개똥철학을 국민의 방송, 공영방송 KBS를 통해 다시금 확인한 ‘므흣’한 연말이었다. 나도 꼭 출세해서 한번은 양국화 구혜선과, 한번은 노국공주 서지혜와 시상대에 서봐야지. 꼬우면 너희들도 줄 잘 서서 출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