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백과사전을 들고 다니는 기분이다. 철지난 재고서적을 취급하는 전철역 임시판매대에서 빌 클린턴의 자서전 ‘My Life’를 구입했다. 나는 3만 3천 원의 정가를 모두 지불하고 그의 회고록을 살만큼 인간 클린턴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반면 반값을 밑도는 1만 5천 원을 주고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찰 정도로 아메리카의 역사와 정치에 무신경하지는 않다.
내용도 만족스럽고 번역도 괜찮다. 흠이라면 너무 무겁다는 거다. 1,400페이지 가까운 분량도 모자라 거기다 양장본으로 만들었다. 멀쩡한 책을 반으로 쪼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하철 전동차에서 선 채로 10분만 읽어도 팔이 뻐근해진다. 힐러리와의 첫 만남 이전까지 진도가 나갔다. 이 부분만으로도 클린턴이란 사내의 학습능력이 보통이 아님을 짐작할 수가 있다.
책장을 덮고 20세기 중반의 미국을 벗어나 21세기 초반의 한국의 정치현실로 돌아오니 속된 말로 짜증 이빠이다. 한나라당의 정권탈환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졌기 때문이다. 망할 놈의 한나라 녀석들은 오직 MBC 드라마 ‘주몽’ 속에서만 연전연패할 따름이다. 우습게도 ‘주몽’의 시청률과 한나라당 지지율은 정비례한다. 콘텐츠 부실하고 메시지 허술하기도 피차일반이고.
툭 까놓고 물어보자.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긴급조치 위반사건 재판에 관여한 판검사들 실명 공개했다고 한국사회의 기존지배질서에 특별히 달라질 게 있다고 믿는가?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에 연루된 혐의로 억울하게 사형당한 양심수들에게 뒤늦게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고 하여 대한민국 보수기득권층이 깜짝 놀랄 것 같나? 부자신문들이 인혁당 유가족한테 동정적 논조의 보도태도를 취하고, 유신체제 법률기술자들 명단발표에 상대적으로 미약한 반발을 보이는 데에는 그럴만한 속셈이 있다. 전혀 아프지 않걸랑.
이해하기 쉽도록 비유하겠다. 현재 강남에 빌딩 짓고 사는 정치판사의 후예가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박정희에게 부역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해서 갑자기 소유건물의 값어치가 폭락하는 피해를 입겠냐는 뜻이다. 물론 스타일이야 좀 구겨지겠지만 언제 한국의 수구기득권계급이 체면이나 명예 따위에 얽매여 살았던가? 대한민국 진보개혁세력이 모든 방면에서 무능하다는 지적은 허튼소리다. 상대방 맷집 키워주는 수완만큼은 가히 기네스북감이다. 부적절한 펀치는 가격이 아니라 애무가 된다. 지금 우리나라 진보개혁진영은 기득권집단을 열심히 애무하는 중이다.
아버지의 죄과를 사과하라는 요구에 한나라당 박근혜 전대표가 콧방귀만 뀌는 것은 자신감이 있는 까닭에서다. 과거사를 캐내는 게 박근혜를 흔드는 유효타가 되지 못함은 개혁세력을 자임하는 사람들 또한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어떤 동기에서 연신 오픈 블로우만를 휘두르는 걸까? 과거사를 제외하면 한나라당과 차별화할 소재가 없어서다. 박근혜를 정말로 궁지에 빠뜨릴 요량이었다면 그녀가 독재자의 혈육임을 부각시키는 걸로는 소용이 없다. 박근혜가 강남구 삼성동 금싸라기 땅의 커다란 자택에 거주하는 부유한 독신녀임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쪽이 훨씬 효과적이다.
이런 쓸모 있는 공격방법을 여권은 어떠한 사연으로 말미암아 채택하지 않는 것일까? 안 하는 게 아니다. 못하는 거다. 박근혜가 특권계층의 거주지 강남에 사는 것을 비판하는 순간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전사자가 줄줄이 발생할 전망이기 때문이다. 독재자의 자식이고 아니고를 뺀다면 이백만 전청와대 홍보수석과 박근혜 한나라당 전대표의 차이가 뭔가? 이른바 버블 세븐 거주자 숫자를 확인하면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은 간만에 대등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영악한 박근혜다. 이와 같은 정부여당의 치명적 아킬레스건을 훤히 꿰뚫고 있기에 과거사를 앞세운 파상공세를 특유의 썩은 미소를 날리며 일축할 수 있는 것이다.
노빠클라투라 청산이 먼저다
사람들의 문제의식은 다들 비슷비슷한 모양이다. 내가 ‘영남친노 멘털리티’를 썼더니만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망딸리떼의 충돌’이란 제목의 칼럼을 한국일보에 기고했다.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는 노무현 정권이 정국주도권을 잃어버린 배경을 또다시 조중동 탓으로 그렸다. 아침에도 탓탓탓, 점심에도 탓탓탓, 저녁에도 탓탓탓 하는 ‘서민정의 시대’를 표상하는 전형적 인물이라 하겠다. 급기야 기상청마저 잇따른 기상오보를 소방방재청 탓으로 돌렸단다. 서민정 시대를 빨리 끝장내야 하는데.
멘탈리티는 영어고 망탈리테는 불어다. 한국어로 옮기면 정신자세 내지 정신상태쯤으로 표현이 가능하겠다. 임기 말기에 접어든 노무현 정권은 폭삭 거지꼴을 하고 있다. 문제는 정권은 거지꼴을 하고 있건만 정권의 상층부를 이루는 양반들은 전연 거지꼴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액연봉과 거액의 판공비가 보장된 공기업과 정부산하기관으로 코드인사의 낙하산을 타고 안착한 덕에 그들은 유례 없는 호경기를 만끽하고 있다. 먹고사는 걱정과 밥벌이의 고민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이다. 기업은 망해도 기업인은 망하지 않는다는 한국경제의 일그러진 작동원리가 정치판으로 촉수를 뻗친 양상이다.
노무현 정권 구성원들이 솔선수범 차원에서 끼니를 거르면서, 민생강조와 경제중시는 조중동 프레임에 걸려든 결과라고 주장한다면 국민들은 정부여당의 진정성을 분명 인정했으리라. 허나 국민은 노정권 실세들이 극도의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는 기사를 접하지 못했다.
정권 수뇌부가 초인적 인내심을 발휘해 고통을 안으로 삭이는 것 같지는 않다. 단지 전해지는 이야기라고는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참여정부 고관대작들의 재산이 1년에 몇 억씩 늘었다는 씁쓸한 소식뿐이다. 국민의 시선을 고려해야 하는 대통령이 억대라면 여론의 감시망이 느슨한 나머지 부류는 얼마나 자산을 불렸을지 좀체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나라곳간은 텅텅 비고 서민들 지갑은 가벼워졌는데, 외려 살림살이가 윤택해진 위정자들에게 우리가 선물할 찬사는 이게 전부다. 탐관오리!
언행일치의 부재는 노무현 정권의 고질적 모순이자 맹점이었다. 자기 아이들은 사립학교에 입학시킨 주제에 공교육을 정상화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니 국민의 냉소를 자초할 수밖에. 단순한 정책실패가 총체적 정서이반으로 귀결되는 밑바탕에는 나는 바담 풍해도 너는 바람 풍하라는 집권세력의 오만과 위선이 깔려있었다.
김정란 상지대 교수가 서울신문 기명칼럼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서민이라고 묘사했을 때 나는 심각한 상실감을 느꼈다. 그럼 나 같이 평범한 백성들은 상거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들 미국에 MBA유학 보내고, 딸은 전도유망한 변호사와 결혼시키는 대한민국 최고권력자가 서민이라니. 댓글을 달아주고픈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김교수님, 노무현 대통령이 서민이면 톱스타 김태희가 제 마누라입니다!”라고.
청와대는 생활이 아닌 사상을 서민 여부를 결정하는 판별기준으로 삼아왔다. 한미FTA 체결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요즘 분위기로는 사상 역시 귀족화된 느낌이다. 발전이라면 발전이겠다. 그나마 일관성이라도 갖췄으니. 조금 더 완벽한 일관성을 갖춰주면 안 되겠니? 노무현 정권이 입으로도 귀족이 되었으면 좋겠다. 소득수준도 사고방식도 귀족인 족속들이 입으로만 서민흉내를 내고 있으니 듣는 서민들 입장에서 여간 고역이 아니다.
1월 31일은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독일 제6군이 주코프 원수가 지휘하는 소련군에게 항복한 날이었다. 1943년의 일이다. 세계사에 약간의 지식과 관심만 있더라도 천하무적으로 승승장구하던 나치군대를 격파한 사건이 얼마나 위대한 업적이었는지를 깨닫기 마련이다. 독일에게 승리를 거두고 미국과 더불어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던 소련이 하루아침에 몰락한 원인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인민에게는 사회주의적 희생정신을 강요하는 한편으로 자신들끼리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풍요를 누렸던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야말로 소련을 파멸에 이르게 한 원흉이었다. 히틀러가 몰고 온 수백 만 대군조차 무릎 꿇리지 못했던 소비에트연방은 사상은 우파이고 생활은 좌파인 노멘클라투라로 인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박정희의 철권통치와 전두환의 군사독재는 독일의 침략에 비견될 수 있다. 외부의 침입은 금방 눈에 띈다. 노멘클라투라의 횡포처럼 내부에서 진행되는 부패의 경우에는 상처가 곪아터져야만 비로소 위기가 드러난다. 따라서 항상 안으로부터의 붕괴가 무서운 법이다.
소련의 노멘클라투라가 혁명장사로 출세했다면, 한국의 노빠클라투라는 개혁을 팔아 신흥귀족으로 성장했다. 러시아민중이 서구자본주의를 타도하자는 관제언론의 선전선동에 시큰둥하게 반응했듯이, 한국의 서민대중이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과거사 청산작업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는 데도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존재하는 셈이다. 노무현 정권에 민심이 등을 돌린 상황을 조중동 탓이라고 둘러대는 수작은, 스탈린이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때문에 트로츠키를 숙청했다고 우기는 짓거리와 마찬가지다.
청와대가 개헌정국에 불을 지펴도, 집권여당을 탈당한 정치인들이 새로운 정치주체를 꾸리겠다며 동분서주해도 약발이 통하지 않는 속사정이 마침내 명백해졌다. 국민은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대립을 전통귀족과 신흥귀족 사이의 탐욕스럽고 저열한 밥그릇싸움으로 여긴다. 폭력조직간의 세력권다툼과 동급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부정적 유산을 극복하고 한나라당과의 경쟁을 수구반동과의 전쟁으로 국민에게 인식시키려면 역사 바로 세우기에 우선해 신종 특권계급인 노빠클라투라부터 척결해야 마땅하다. 노빠클라투라 청산 없이는 과거사 청산도, 중도통합신당창당도 지긋지긋한 정략놀음에 지나지 않을 터이므로.
ⓒ 미디어워치 & mediawatch.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