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은 32세의 나이에 주지사로 당선된다. 미국 역사에서 최연소 주지사였다. 영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치욕으로 모습을 바꾼다. 재선이 무산된 결과로 최연소 전직 주지사라는 쑥스러운 기록마저 덩달아 세우고 만다. 클린턴이 34세 되던 해의 에피소드다. 백수가 된 클린턴은 자신의 패인을 곰곰이 반추한다. 그가 내린 결론의 핵심은 이렇다. “사람(아칸소 유권자)들은 내 태도에 항의하는 의미의 표를 던졌다.” 이는 정치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정책에서도 성공할 수 없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클린턴이 100퍼센트 성공한 정치가였다고 평가하기는 물론 곤란하다. 단적인 예로 민주당은 정권재창출에 실패했다. 고어의 패배와 부시의 집권에 클린턴 역시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하는 처지다. 공화당에게 백악관을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클린턴 자서전을 필경 제값을 주고 서점에서 정식으로 구입했을 것이다.
이른바 매니페스토 운동이 다시금 기승을 부릴 전망이다. 정책본위와 공약중심의 선거를 치르자는 주장이다. 물갈이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기로는 우리나라 시민단체 또한 만만치 않다. 10년 전에도 콘텐츠가 우선이라고 이야기하는 집단이 있었다. 당시에 하나마나한 영양가 없는 소리만 늘어놓던 일군의 지식인들이 현재는 매니페스토 운동을 이끌고 있다. 중립적 심판자로 가장한 그들은 방송이나 토론회에 떼지어 몰려다니며 짭짤한 재미를 거둔다.
정책이 중요하다고 떠드는 인물들은 거의 전부 사기꾼이라고 봐도 괜찮다. 한국정당들의 정강과 노선은 본질에 있어 대부분 비슷비슷하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한민국 서민들의 삶은 너무나 고단하고 까칠하다. 정당이 표방하는 세부적 정책의 변별력을 주제로 고민할 여력도 여유도 없다. 정책경쟁을 압도하는 국민정서의 위력이 결코 쇠퇴하지 않는 배경이다.
정치인의 사상이 아닌 생활에 집중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생활이란 표현이 다소 밋밋한 어감을 풍긴다면 그냥 일상사 또는 신변잡기라고 불러도 좋다. 외부로 발설되는 가치관에 기대어 한국사회의 평민과 귀족을 구분하기는 어렵다. 막상 대화를 나눠보면 귀족들도 죄다 멀쩡한 인간들이다. 나라 걱정하는 깊이와 열정에서 일반서민과 크나큰 차이를 나타내지 않는다. 귀족들의 본색은 결정적 고비에서 드러나기 일쑤다. 인생의 중대한 국면에서 폭로된 귀족들의 생활태도 내지 결심내용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정치적 임팩트를 생산하는 능력이야말로 기민하고 날선 정치기동의 고갱이다.
한국과 미국의 자유무역협정에 관한 명확한 의견이 내게는 없다. FTA가 한국의 미래에 암운을 드리울지,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할지 명쾌한 판정이 서지 않는다. 정책적 기준에서는 판단유보다. 허나 정서적 잣대로 논거를 좁힐 경우 나는 한미FTA를 무조건 반대한다. 자유무역협정을 강행하는 대통령의 태도가 바탕부터 글러먹은 연유에서다.
청와대가 한미FTA를 국정과제로 거론하던 무렵 대통령의 신상에는 어쩌면 하찮은, 어쩌면 의미심장한 개인적 사건이 발생했다. 아들이 하필이면 미국으로, 그것도 MBA 자격증을 취득하러 떠난 것이다. 지금이야 많이 대중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미국산 경영학 석사과정은 보습학원비조차 부담스러운 서민가계에는 여전히 그림의 떡이다. 노량진에 무수히 밀집한 월 30만 원 짜리 허름한 고시원 입주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참으로 의문이다. 정권수뇌부가 한미자유무역협정 밀어붙일 심산임을 뻔히 알면서도 비싼 달라 처발라 아메리카로 유학간 아들이나, 한국에서 미제 MBA 라이선스가 무슨 사회경제적 함의를 띠는지 명확히 인식하고 있을 터임에도 선뜻 도미를 승낙한 아버지나 도대체 어떠한 정신세계를 지니고 있는지 매우 궁금하다. 영남친노들은 이를 발전된 대통령문화의 지표라 일컬으며 찬양하기에 바쁘다. 그런 셈법이라면 며느리 미국으로 원정출산 떠나보낸 이회창씨는 새로운 야당문화를 창조했다는 치하를 들어야 마땅하다. 현역의원 신분임에도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겸업해 막대한 판공비를 챙겼던 박근혜씨는 선진화된 육영문화의 표상으로 우러러지고.
대한민국 소녀진보와 웰빙좌파들이 워낙 게으르고 무능한 탓에 대통령의 석연치 않은 개인사가 아닌, 머리 아픈 통계숫자만이 한미FTA의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노무현 정권으로서는 천만다행이랄 수밖에. 내가 민주노동당 지도부였다면 썰렁한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 진행할 인력과 자원을 대통령의 위선적 생활태도를 까발리는 홍보작업에 투입했으리라. FTA추진을 계기로 대통령이 일착으로 착수한 일이 아들 미국에 자격증 따러 보낸 거였다고. 상당수의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조중동 간부 자제들이 MBA를 노리고 미국으로 출국했을 테고, 따라서 아이들 양키물 먹이는 가정사와 관련해서는 참여정부-한나라당-족벌신문 사이에 완벽하고 확고한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된 셈이다.
대통령이 박근혜와 충돌할 적마다 능구렁이 만난 청개구리처럼 오금을 펴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어째서 박근혜의 한마디에 노무현은 번번이 나가떨어지는 걸까? 게임의 법칙을 규명하기는 그리 힘들지 않다. 노무현이 이회창에 승리한 비결은 정치지형이 서민 대 귀족으로 짜인 데 말미암았다. 작금에 이르러 서민 대 귀족 구도는 완전히 무너진 상태다. 신흥귀족 대 전통귀족의 적나라한 밥그릇싸움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같은 귀족끼리의 다툼이라면 국민들 입장에서 거칠고 천박한 신귀족보다는 상대적으로 점잖고 세련된 구귀족의 편을 드는 게 당연한 노릇이다. 졸부보다 재벌이 그나마 매너는 낫다.
분석대상을 대통령으로부터 최근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천정배 의원에게로 옮겨보겠다. 나는 천의원의 딸이 나와도 면식이 있는 어느 정치인-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알리라-의 친척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미혼남녀의 교제에 이념이 어디 있고, 정파가 어디 있겠는가. 한데 신랑직업이 시사하는 바가 컸다. 사랑에 이데올로기는 없어도 클래스(Class)는 있었으니. 천정배 의원 딸의 혼사가 국민의 반감을 샀던 건 저쪽동네와 혼맥을 터서가 아니었다. 왜 항상 유사한 계급끼리만 어울리느냐는 반감의 표시였다.
서민의 벗을 자처하던 노무현 대통령도 아들딸을 넉넉한 부유층 자제들과 차례로 혼인시켰다. 천정배 의원이 부르짖는 민생개혁은 분명 서민대중이 잘사는 국가를 만들자는 취지일 게다. 이러한 천의원의 피붙이가 정분이 나도 꼭 안정된 수입이 보장된 예비법조인과 나야 하나? 입사원서 옆구리에 끼고서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니는 평범한 취업준비생이나 월급 3개월 밀린 벤처기업 회사원과는 눈 좀 맞으면 안 되는가? 천의원과 가족들의 평소생활이 서민들과는 아예 무관한 저 높은 곳에서 영위되어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신이 거주하는 주소지에 더하여 당신의 사돈들 생활수준이 당신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한 끼 120만원의 호화판 식사를 해도 강재섭과 김종필은 민심의 공분을 사지 않는다. 원인은 간단하다. 환경미화원 손수레 밀어주는 줄거리의 정치광고 찍어서 서민들 몰표 구절하지는 않았으니까. 동일한 귀족스포츠를 즐겨도 정주영 집사로 승승장구한 이명박보다 서울대입구에서 사회과학서점 운영했던 이해찬이 훨씬 더 욕을 먹는 현상과 마찬가지 이치다. 개발귀족, 개혁귀족, 강남귀족, 사법귀족, 경영귀족, 노동귀족, 토지귀족, 학벌귀족, 언론귀족, 연예귀족, 별놈의 귀족이 다 있지만 서민들 등골 파먹는 기생충이라는 점에서 결국은 모두 다 똑같은 존재들이다.
서민과 친한 척해 출세한 다음, 자식들은 귀족으로 살게 하는 사이비 위장서민들에게 국민들은 학을 뗀 지 오래다. 이제는 말로만 서민이 아니라 실제로도 서민인 인사들이, 그리고 설령 진짜 서민은 아니더라도 서민적 태도와 라이프스타일을 닮으려 노력하는 정치인들이 보수세력이든 진보진영이든 자기그룹의 주도권을 쥐어야 옳다. 노무현 대통령이야 어차피 귀족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양반이다. 천정배 의원은 남은 여식만큼은 반드시 동급의 적이 아니라 급이 다른 동지한테 시집가라고 가르치기 바란다. 집밖에서 민생개혁을 제창하는 아버지들의 기본적 책무이자, 잘난 사람을 아비로 둔 자녀들이 실천해야 할 최소한의 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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