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편한 직업은 뭘까? 나는 주저 없이 한나라당 출입기자를 꼽으련다. 전혀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으므로. 기자의 본분은 시시각각 변하는 새로운 소식을 보도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요동치는 정치권의 동향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정치부 기자라면 더욱 골치 아픈 직종이 아닐 수 없다. 허나 출입처가 한나라당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새로울 것도 변할 것도 없으니까. 한나라당 당직자들이 쏟아내는 발언과 성명 및 논평내용이야 뻔하지 않은가? 아침에도 탓탓탓, 점심에도, 탓탓탓, 저녁에도 탓탓탓. 따라서 한나라당의 동정을 취재하는 언론사 기자들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팔자 늘어진 직장을 가졌다고 할밖에.
나 역시 노무현 대통령 탓을 많이 하는 편이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해도 너무 한다. 만약 나를 떠받드는 국회의원이 130명에 가깝고, 나를 지지하는 유권자들 비율이 전체 유권자의 4분의 3에 달한다면 치사하게 남 탓하며 반사이익 챙기는 따위로 만족하지는 않겠다. 정부여당의 연속된 실투에 기대어 밀어내기로만 득점할 작정이라면 한나라당은 당당하게 문패를 바꿔 달아야 마땅하다. ‘탓나라당’으로. ‘딴나라당’이니 ‘성나라당’이니 ‘당나라당’이니 하는 조롱 섞인 표현들보다는 훨씬 우아하고 품격 있는 당명이리라.
스물 세 명의 여당소속 국회의원들이 열린우리당을 단체로 탈당했다. 개별 탈당한 인사들까지 합치면 임종인 의원을 시발로 하여 집권당을 떠난 현역의원 숫자는 현재 30명에 이르렀다. DJ, YS, JP한테 30명의 국회의원이면 정국을 주도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152석의 원내 과반수를 얻고도 항상 한나라당에 눌려지냈다. 얼토당토않은 당정분리실험이 빚은 희대의 참극이었다.
23인의 집단탈당은 다양한 형태의 후폭풍을 야기했다. 한나라당이 원내 1당 지위를 되찾은 사건을 제일 큰 여진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우세하다. 시들어 가는 개헌정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집단탈당을 주도한 김한길 의원이 헌법개정에 부정적 의견을 피력함으로써 청와대가 회심의 승부수로 꺼내들었던 개헌카드는 예상대로 일회성 해프닝으로 끝날 전망이다.
나는 예의와 당위의 잣대로 더는 사태를 시시비비하지 말자고 누차에 걸쳐 제안해온 터다. 도덕과 윤리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대한민국 진보개혁진영은 수구보수세력과 견주어 경쟁력이 달리는 까닭에서다. 이제는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만사를 판단하자. 실효성의 유무가 옳고 그름을 나누는 기준선이 되었음을 인정하자.
23인 집단탈당의 주동자는 강봉균 의원과 김한길 의원이다. 양자를 교활한 기회주의자로, 혹은 파렴치한 이기주의자로 단정해 규탄하는 게 여론과 민심의 대세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집권여당의 중추적 위치에 있었던 인물들이다. 김의원은 원내대표였고. 강의원은 정책위의장이었다. 노무현 정권에서 단물 빨아먹은 양으로 치자면 열 손가락 안에 포함될 양반들이다. 기억력이 메멘토가 아닌 바에야 둘 다 남들 탓할 처지는 아닌 셈이다.
그럼에도 강봉균과 김한길을 외려 칭찬해주고픈 마음이 굴뚝같다. 왜냐? 솔직히 따져보자. 노무현 정권이 출범한 이래 한나라당 안면에 이들만큼 확실한 유효타를 날린 사람이 과연 존재하는지? 다들 말만 반한나라당이지 결국에는 한나라당 도움되는 행동들만 벌이지 않았던가? 노무현-이해찬-유시민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노해민 트리오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노해민이 한나라당을 공격하면 공격할수록 도리어 한나라당의 인기는 치솟기만 했다.
강봉균과 김한길은 달랐다. 속내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에 막대한 물적 손실을 끼쳤다. 무려 48억 원이다. 한나라당에게 48억의 경제적 손해를 주었다면 명실상부한 의사이고 열사다. 김한길 열사와 강봉균 의사에게 영광 있으라!
허공으로 날아간 48억으로 한나라당이 실천에 옮겼을 음험한 수작들을 상상해봐라. 성조기 흔드는 꼴불견 군중집회 수십 차례 개최한다. 조갑제와 지만원이 초청강사로 등장하는 강연회를 전국 도처에서 수백 회는 열 수 있다. 한나라당에 우호적인 궤변을 펼치는 꼴통교수들과 사이비학자들 격려하는 술자리 수천 번은 마련할 수 있다. 2007년은 한나라당의 사활이 걸린 17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해다. 기존에 수립된 사업계획을 자금부족을 구실로 미루기는 곤란하다. 갑작스럽게 구멍난 48억의 실탄을 조달하는 작업은 차떼기의 유혹을 부르기 십상인 것이다.
한나라당이 48억 원의 거액을 눈뜨고 빼앗긴 경위를 살펴보자. 김한길 의원이 한나라당 재정팀장을 상대로 금융사기를 친 건 아니다. 강봉균 의원이 폭탄이 담긴 사과상자를 적재한 냉동탑차를 몰고 한나라당 중앙당사로 돌진한 것도 아니다. 순전히 복잡하게 짜인 우리나라 정치관계법 덕택이다. 23인의 금배지를 단 어제의 열린우리당 기간당원들이 국회에서 별도의 교섭단체를 구성하면 한나라당에 지급되는 금년도 국고보조금이 225억 원에서 177억 원으로 대폭 줄어든단다. 의석수에 상관없이 원내 교섭단체에 균등하게 나눠주는 국고보조금 분배방식 때문이라나.
원래 한나라당이 획득했을 국고보조금만 줄어드는 건 물론 아니다. 열린우리당이 차지할 몫 또한 축소되기는 매한가지다. 국민의 믿음을 상실한 열린우리당 수중에 돌아갈 보조금 액수 쪼그라드는 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더욱이 여당이 확보하는 국고보조금의 대부분은 영남친노들 주머니로 직행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관건은 이유야 어떻든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의 식비 내지 교통비로 사용될 48억 원의 혈세를 회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4·15 총선 이후로 이토록 기쁘고 흐뭇하기는 처음인 듯하다.
옛날에 중공과 소련이 서로 으르렁거릴 당시, 크렘린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단다. 막강 소련군대가 오합지졸 인민해방군에게 패할까봐 염려하는 게 아니었다. 소련공산당 정치국은 중공군이 대거 항복해올까 전전긍긍했다. 생각해보시라. 가뜩이나 식량사정이 빠듯한 소련이었다. 수백만 명의 중공군 전쟁포로까지 먹여 살려야 한다면 국가경제가 배겨날 수 있었겠는가? 적군을 분쇄할 수 없다면 적에게 포로로 잡혀 적진의 군량미라도 축내라는 모택동의 개똥철학이 위력을 발휘한 사례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앞발로 잡건 뒷발로 잡건 한나라당 잡는 고양이가 대접받아야 한다. 반한나라당 진영에게 주문하고 싶다. 삼진 잡을 능력 없걸랑, 범타로 처리할 실력 되지 않걸랑 괜히 어쭙지않게 정면승부 시도하다가 홈런 허용하지 말고 차라리 데드볼(Hit By Pitched Ball)로 출루시켜라. 배열사 배영수가 도교돔에서 입치료 이치로 혼내준 방식 있지 않은가? 타자 엉덩이에 정통으로 강속구를 명중시켜 다음 타석부터는 이치로로 하여금 몸을 사리게 만들었던 불굴의 희생정신. 배영수 본인은 곧바로 마운드에서 당연히 강판됐고.
나 하나 깨끗한 척, 고상한 척하려고 강봉균과 김한길 신나게 두들기며 자위하는 건 참으로 비겁하고 무책임한 짓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반문하겠다. 당신은 한나라당에게 48억은커녕 단돈 4만 8천 원의 금전적 피해라도 입혀본 적이 있던가? 구호로만, 명분으로만 외치는 반한나라당 전선은 폐기돼야 바람직하다. 좀더 유물론적이고 시장친화적으로 한나라당 재집권 저지방법을 고민해야 할 시기다. 서생적 문제의식에만 매몰되지 않은, 상인의 현실감각을 겸비한 반한나라당 연대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얼굴에 철판 깔고 이렇게 해몽하는 나도 사실은 쓰라린 비애감에 휩싸이게 된다. 비열하고 더러운 동기에서 열린당을 탈출한 철새정치인들이 실제로는 서민대중을 위해 정의로운 의적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모양새가 되어버렸으므로. 한국민주주의의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기념비적 쾌거를 얼떨결에 이룩한 두 분의 애국지사께 뜨거운 갈채를 보내는 바이다. 철학자 헤겔이 숭배했다는 ‘이성의 간계’가 때맞춰 힘을 쓴 격이랄까. 자신의 소임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김한길 열사와 강봉균 의사께서는 이제 그만 무대에서 내려오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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