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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의사당 울려퍼진 '위안부 할머니' 통한의 절규

눈물 흘리는 이용수 할머니
(워싱턴=연합뉴스) 서명곤 기자 = 미국 하원 외교위 아시아태평양환경소위가 15일 오후(현지시각) 하원 레이번빌딩에서 2차대전 당시 일본군 종군위안부로 강제동원됐던 할머니들을 출석시킨 가운데 개최한 사상 첫 청문회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증언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seephoto@yna.co.kr/2007-02-16 09:08:27/
"그것은 차라리 지옥이었습니다" "돈으로 찢겨진 내 영혼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 종군위안부로 끌려가 온갖 고초와 수모를 당했던 할머니들은 15일 미국 하원 외교위 아시아태평양환경소위에 증인으로 출석, 엉그러진 한(恨)과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절규하면서 손으로 가슴을 쳤다.

하원 레이번빌딩에서 열린 청문회장에는 한국과 일본, 호주 등 외국 기자들과 참관인들이 대거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고, 미 언론들도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었다.

일본측은 "지난 1996년 이후 하시모토, 오부치, 모리, 고이즈미 총리 등이 직접 나서서 보상금과 함께 서면으로 진실한 사과를 했다"는 요지의 서면 해명서를 위원회에 제출, 위안부 결의안 저지에 주력하는 모습이었다.

여기에다 로흐라 배처 의원이 "일본 총리들이 수차례 공식 사과하고 일본 의회가 사과문을 발표했는데, 2세대 전의 행위에 또다시 벌을 가해야 한다는 말이냐"며 일방적으로 일본을 두둔하고 나서 눈총을 받았다.

한편 방미중인 박근혜(朴槿惠) 전 대표와 김무성(金武星) 의원 등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날 오후 청문회장을 잠시 방문, 참관한 뒤 저녁 별도 만찬자리에서 두 할머니를 만나 노고를 위로, 격려했다.

◇ 이용수 할머니 "구타와 고문, 강간으로 점철된 3년"

= 첫 증인으로 나선 이 할머니는 "나는 역사의 산 증인"이라는 말로 시작했다. 설움이 북받치는 듯 "제가 겪은 일들을 꼭 얘기해야 하는데 너무 부끄럽다"며 이내 눈시울을 적셨다. 그리고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하나하나 고발했다. 성 노예로 지낸 한 많은 세월들도 털어놨다.

1928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 할머니는 유모로 일하는 어머니 대신 동생을 돌보며 면사공장에 다니다가 16세이던 1944년 군 위안부로 대만에 끌려갔다.

2층으로 된 일본풍의 대만 위안소에서 일본군의 강간으로 첫 순결을 잃은 뒤 강제 성추행을 거부하는 자신을 전기 쇼크 등 온갖 폭행과 고문으로 학대한 사실을 증언하면서 치를 떨었다.

당시 위안소는 방이 20개쯤 있었고, 도주하려다 잡혀 온갖 폭행을 당했으며 잡곡과 쌀죽으로 연명하며 생명을 이어왔다고 증언했다. 일본군 중 한명이 자신에게 '도시코'란 이름을 붙여주었고 그 이후 자신은 위안소에서 '도시코'란 이름으로 통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더욱이 자신이 끌려간 장소가 대만의 신주라는 사실도 잠자리를 같이한 일본군이 뇌까리는 말 속에서 알게 됐다고 했다. 이 할머니는 "일본군들은 개돼지 보다도 더 추악했고, 한국말을 하면 폭행당하기 일쑤였다"며 몸서리를 쳤다.

종전 후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니는 죽은 딸이 귀신으로 나타났다"면서 "귀신인지 아닌지 나를 깨물어 몸에 피가 나기도 했으며, 아버지는 그해 중풍으로 돌아가셨다"며 비운의 인생사를 털어놨다.

이 할머니는 "만행을 저지른 일본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며 "세계 성폭력 만행을 뿌리뽑기 위해서라도 일본은 반드시 사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김군자 할머니 "내 가슴속 기억들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

= 열여섯살때 종군위안부로 끌려가 3년간 일본군의 성 노리개가 돼야했던 김 할머니는 "죽기전에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미국땅까지 오게됐다" 당시의 참상을 털어놨다.

김 할머니는 "내 몸에는 너무나 많은 흉터들이 남아있고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았다"면서 "일본 정부는 우리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또 "이제 많은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죽었지만 역사는 살아있을 것"이라며 "돈으로 망가진 내 인생을 보상할 수 없다"고 절규했다.

아울러 고착 첫날 저항하다 맞아 왼쪽 고막이 터졌고 하루에도 수십명을 상대해야 하는 고통을 참지못해 도망치다 붙잡혀 호되게 폭행당했으며 3년동안 여러차례 자살을 시도하는 등 죽지 못해 살아야 했던 과거를 전했다.

해방과 함께 다시 여러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와 사랑했던 남자와 재회했지만 상대 집안의 반대속에 남자가 자살했고 당시 임신해 낳았던 딸은 5개월만에 숨지면서 김 할머니는 이제껏 혼자 살아왔다고 말했다.

◇ 오헤른 할머니 "아직도 저주스런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 이날 증인으로 나선 푸른 눈의 백인 얀 루프 오헤른 할머니는 "한평생 치욕을 안고 살아왔다"며 격한 감정을 토로하고, 때론 손으로 책상을 치기도 하고, 때론 고개를 마구 가로 저으며 몸서리를 쳤다.

올해 85세로 호주에 살고 있는 네덜란드 국적의 오헤른 할머니는 서양인 위안부라는 사실 때문인 듯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평생동안 가슴에 담아온, 씻을 수 없는 아픈 기억들을 이날 의회에서 토해냈다. "우리에겐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저주스런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고 격앙했다.

오헤른은 과거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던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났고 아름답고 큰 집에서 요리와 정원일, 빨래를 해주는 시종과 운전사 등을 두고 살 정도로 넉넉하고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19세 처녀였던 1942년 3월 일본이 인도네시아 자바섬을 침략하면서 꿈많고 아름다웠던 오헤른의 미래와 행복한 인생은 무참하게 짓밟혔다.

`점령군' 일본군은 남자는 물론 여자와 어린 아이까지 일본군 수용소에 억류한 뒤 17세 이상의 젊은 여자들을 종군위안부로 강제로 끌고 갔던 것. 오헤른은 3년 반동안 수용소에서 강간과 폭행, 굶주림 등 말로 헤아릴 수 없는 인간 이하의 끔찍한 생활을 해야 했다.

할머니는 "일본은 지난 1995년 아시아위안부재단을 만들어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에 나섰지만 이것은 위안부 여성에 대한 모욕이었고 그래서 거절했다"면서 "그들은 전쟁 당시 잔학행위를 시인하고 후세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며 일본의 맹성을 촉구했다.

오헤른은 "일본인들은 우리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죽지 않을 것"이라면서 "아시아 종군위안부들이 일본정부로부터 사과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투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 할머니는 청문회 후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촉구하고 미 의회가 혼다 의원의 결의안을 처리해줄 것을 당부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워싱턴=연합뉴스)cbr@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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