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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진보는 노무현 없어도 망했다

[칼럼] 소수를 지향하는 진보는 진보가 아니다

노무현과 클린턴

재미는 있지만 영양가는 없는 연예비평으로의 외도를 끝내고 정권컨설팅의 본업으로 복귀하겠다. 준비운동 차원에서 클린턴의 회고록 ‘My Life'를 다시 펼쳤다. 참고할 만한 내용과 교훈이 많은 책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 수뇌부도 클린턴 행정부를 부지런히 벤치마킹한 듯싶다. 클린턴이 백악관을 운영했던 방식과 지금의 청와대가 돌아가는 구조는 매우 비슷하다. 클린턴과 노무현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는 건 당연한 노릇이다.

노무현이나 클린턴이나 본인을 엄청 착하고 선량한 인간으로 착각하는 지독한 왕자병 환자다. 이게 공통분모라면 양자를 가름하는 분명한 차별성 역시 존재한다. 단순하면서도 아주 중요한 구별요소다. 클린턴은 유능하고 노무현은 무능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클린턴과의 격차를 획기적으로 좁힐 비결은 있다. 야당에 정권을 넘겨줬던 클린턴과는 달리 정권재창출에 성공하면 된다. 허나 한나라당이 정권을 탈환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사건이이라고 벌써부터 발뺌하는 수작을 감안하면 이미 정권재창출을 포기한 인상이 짙다. 각각 한국과 미국을 다스렸던 1946년생 개띠 동갑내기 통치자들의 우열관계는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져도 결코 변하지 않을 터.

그럼에도 노무현이 클린턴보다 잘하는 게 있다. 바로 낚시다. 사람을 낚는 솜씨와 기술만큼은 노무현 대통령이 클린턴의 추종을 불허한다. 텔레비전 오락프로그램에서 유행하는 아이템 중의 하나가 전생 알아맞히기 게임이다. 노대통령이 출연하면 어떻게 나타날까? 아마도 그의 전생은 한때 갈릴리 호수의 어부였던 초대교황 베드로로 밝혀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보는 바이다.

진보학자들끼리의 고담준론에 노무현 대통령이 뜬금없이 불쑥 뛰어든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노무현에게는 항상 뭔가 깊은 뜻이 있다며 아부를 일삼는 영남친노들이 이번에도 빠질 수 없다며 소매를 걷어붙이고 끼어들었음은 물론이다. 참 하릴없고 눈치 없는 종자들이다. 타이밍만 살피면 대통령의 동기와 본심은 단박에 드러난다. 노무현 대통령이 최장집-손호철-조희연 논쟁에 개입한 시점은 설날연휴를 코앞에 둔 때였다. 국민들의 명절 밥상머리 이바구에 자신이 혹시 등장하지 못할까 노심초사한 결과물인 셈이다.

클린턴과 노무현은 왕자병 환자다. 왕자병에 더해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적 노출증 환자이기도 하다. 언론의 입방아에 단 하루일지언정 자기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하는 성격이다. YS의 수제자다운 면모를 유감 없이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 2월 25일 어제는 2기 부산정권이 출범한 지 꼭 4주년 되는 날이었다. 수천 명의 노무현 지지자들이 집결한 봉하마을에 왁자지껄하게 울려 퍼졌을 진한 경상도 사투리의 향연이 노정권의 지역주의 극복주장과 어우러져 무척이나 기괴한 화음을 빚어냈으리라.

고향사람들을 대거 요직에 기용하기는 클린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백악관 실세가 기자들 면전에서 ‘아칸소정권’ 운운하는 망발은 저지르지 않았다. 표는 뉴욕에서 얻었으면서도 인사와 예산은 모조리 캘리포니아에 퍼주는 따위의 파렴치한 동가식서가숙의 정치를 시도한 적도 없다.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노무현과 클린턴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클린턴을 향한 터무니없는 인신모독이자 명예훼손이다.

한국진보, 노무현 없어도 망했다

노무현 정권 초기 100일은 대북송금 특검사태와 민주당 분당소동으로 시끄러웠다. 무익한 정치놀음으로 귀중한 자원과 시간을 낭비하고 말았다. 백악관에 갓 입성한 클린턴은 나름대로 열심히 국정에 전념했다. 한데 의도대로 술술 풀리지는 않았다. 그에게 투표한 유권자들의 위임(Mandate)과 전혀 무관한 곳에 올인한 걸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It's the Economy, Stupid! -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클린턴은 경제, 즉 민생을 내세워 걸프전쟁의 영웅이었던 부시 1세를 물리쳤다. 따라서 그는 취임하자마자 피폐한 나라살림을 회생시키는 작업에 의욕적으로 착수한다. 더불어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정책에도 주력한다. 힐러리까지 동원해 의료제도개혁에 나선 사례가 대표적이다.

미국인들은 클린턴이 국민일반이 중시하지 않는 엉뚱한 의제에 집착하고 있다고 믿었다. 동성연애자의 군대복무를 관철하기 위하여 군부와 쓸데없는 신경전을 되풀이하는 걸로 여겼다. 동성애를 필두로 낙태와 마리아나 등은 1970년대 이래 미국의 정치지형을 결정해온 주요쟁점이다. 심지어 비만조차 화급한 국가현안으로 떠오르기 일쑤다. 나는 과감히 선포하겠다. “미국은 한국진보의 미래다.” 이상하게 들릴 게다. 미국이 한국보수의 미래라면 몰라도 한국진보의 미래라니?

미국이 한국진보의 미래라는 소리는 곧 대한민국 진보진영은 민중, 부드럽게 이야기하면 서민대중과 동떨어진 집단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가 수시로 강조했었지? 노무현은 희대의 낚시꾼이라고. 서민들 살림살이는 거덜났으되 청와대의 수족관은 낚아 올린 별의별 잡어들로 오늘도 풍어를 이뤘다. 대통령 집무실에 비치된 어항 속에서 유영할 최장집 고기, 손호철 고기, 조희연 고기의 모습을 상상하니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물고기떼 가운데 조희연 고기를 집어들고 지느러미의 생김새를 잠깐 관찰하였다.

서민대중의 드넓은 바다가 아니라 지식인들만의 작은 연못에서 헤엄치기 딱 알맞게 진화된 형태다. 오마이뉴스에서 조희연 교수의 인터뷰의 서두를 읽다가 혈압이 한계고도에 도달하는 줄 알았다. 일고의 가치가 없었다. 한국의 진보는 노무현이 있어서 망한 게 아니다. 굳이 노무현이 없었더라도 어차피 쫄딱 망할 팔자고 실력이었다.

또 빌어먹을 놈의 국보법타령이었다. 국가보안법은 한국정치에 있어서 미국정치의 동성애에 비견될 소재다. 수구로 하여금 다수를 차지하게 만들고, 진보를 끊임없이 소수로 전락시키는 빛 좋은 개살구이자 뜨거운 감자다. 우리를 다수로, 상대를 소수로. 현대 민주정치를 운용하는 ABC다. 기실 민주주의란 다수의 지배에 다름 아닌 까닭에서다. 하지만 한국의 진보는 스스로를 소수자의 층위에 놓지 못해 환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소수를 지향하는 진보, 실상 이건 진보가 아니다. 그냥 좌파일 뿐이다. 좌파와 진보는 구분될 필요가 있다. 시대의 변천에 발맞춰 사회의 대다수를 점유하는 다수의 노예, 농노, 노동자, 서민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활동이야말로 진정한 진보의 역사고 전통이다. 현재의 한국진보는 유복한 중산계급에 속하는 극소수 지식분자의 고상한 휴머니즘 취향을 반영할 따름이다. 기껏해야 문화적 진보에 불과하다.

라이벌 민주당을 사회경제적 진보의 중심으로부터 문화진보의 변방으로 몰아냄으로써 미국 공화당은 대통령 선거에서 연전연승을 기록했다. 클린턴의 업적과 영리함은 문화좌파의 갓길로 내몰린 민주당의 위상을 민생진보의 중앙차선으로 되돌려놓았다는 데 있다. 이에 힘입어 그는 루즈벨트 이후로 재선에 성공한 최초의 민주당출신 대통령이라는 영광을 품에 안았다. 클린턴이 임기시작 후 100일 동안 여론의 평가에서 몹시 고전했던 이유는 동성애 합법화 같은 소수자 위주 이슈가 전면에 부각된 탓이었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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