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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진보들을 울려버린 조정래

사형제도 폐지만이 진보인가

“공화당의 밥 돌 상원의원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일찍, 그리고 되풀이하여 동성애자 군복무 허용문제를 거론함으로써 이와 관련된 논쟁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도록 했으며, 결국은 내가 다른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경제를 고치라고 나를 뽑아준 많은 국민은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신들이 잘못 뽑은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클린턴이 자서전에 써넣은 푸념의 일부를 옮겨봤다. 대책은 유일했다. 민심을 좇아 군내 동성애의 전면적 합법화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정책을 밀어붙인 당사자인 클린턴은 이를 두고 군부의 보수주의자들과 상생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다고 둘러댄다. 실패를 합리화하는 교묘한 말장난은 정치활동의 불가결한 구성요소다. 후퇴를 ‘전선의 재조정’이라고 능글맞게 표현하는 행위와 닮은 경우라 하겠다. 동성애 쟁점에서 ‘상생’의 노선을 선택한 덕분에 클린턴은 선거유세에서 공약했던 재정적자 축소와 복지정책 확충에 집중할 수 있었다. 평범한 미국 노동자들한테 동성애 공방은 아프리카 밀림에서 벌어지는 토착부족들 사이의 내전만큼 생소하고 관심 없는 분야였다.

서민대중 일반의 실생활과 괴리된 쟁점들만 골라 이슈파이팅을 실천하는 재주는 한국의 소녀진보들도 미국의 문화좌파 못지 않다. 소설가 조정래씨가 한겨레신문에 사형제도 존속에 동의하는 뉘앙스의 칼럼을 기고했다. 소녀진보들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되는 바이다. 칼럼이 지상에 발표된 다음날쯤이면 조씨는 히틀러와 스탈린에 필적하는 인권유린의 수괴로 난도질을 당할 게다.

먼저 내 입장부터 밝혀두는 게 좋을 듯싶다. 나는 사형제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 제도는 살려두면서도 사실상 사문화시키자는 견해다. 법원에서 선고는 하지만 실제 집행은 무기한 유예하자는 뜻이다. 국민의정부에서 채택한 기조다. 참여정부에서도 계속 유지되고 있는 원칙이다. 사형제 존폐에 대해서만큼은 노무현 대통령이 지혜롭게 대응해왔다고 평가하고 싶다.

사형철폐 찬반논의는 대한민국의 서민들과 진보진영이 서로 별세계에 살도록 이끄는 대표적 현안의 하나다. 여론조사를 실시해보면 서민층에서 사형제 존치의견이 월등히 높게 표시된다.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조차 우리나라 서민대중들과 다르게 사형제도를 압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는다. 사형에 관해서는 수구야당의 이념과 진보지식인들의 가치관이 유사한 방향으로 수렴된다. 왜 그럴까?

원인은 평소에 부대끼는 인터페이스 또는 경험치의 차이에 존재한다. 진보와 서민이 뿌리내리고 있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진보세력 구성원들은 사형수라면 으레 정치범이나 사상범 등의 양심수를 조건반사로 떠올린다. 서민들은 연쇄살인범이나 가정파괴범 따위의 흉악범을 자연스럽게 연상한다. 이러한 결과를 전적으로 보수매체의 언론플레이 탓으로만 돌린다면 당신은 진골 웰빙좌파와 명품 소녀진보의 자격요건을 너끈히 갖춘 셈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투쟁과 사상싸움은 중산계급 이상의 전유물이다. 대중은 양심수들의 실재를 오직 간접적으로만 체감할 뿐이다. 반면 강력범죄의 피해자는 주로 하층계급 이하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치안여건은 소득수준과 정비례하기 마련이다. 강도와 강간범이 기승을 부리는 우범지대는 방범시설이 허술하고 공권력의 이목을 끌지 못하는 서민주거지역과 겹치기 십상이다. 상층계급과 하층계급이 생각하는 사형수의 이미지가 판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체제의 상부구조에 가하는 양심수의 위협은 추상적이고, 사회시스템의 기층에 놓인 민중에게 다가오는 흉악범의 공포는 구체적이다.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의 인생역정에는 동정할 만한 여지가 많다. 유영철을 살려주자는 진보지식인들의 주장에는 수긍할 구석이 크다. 이와 대조적으로 서민대중은 엄벌을 바란다. 반문명적 공개처형 아이디어마저 고개를 내민다. 어느 사형수를 둘러싼 진보진영과 서민대중의 이견노출은 살해된 피해자들의 계급적 본질에서 비롯된다. 밑바닥인생이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을 불우한 출장안마사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사형제를 폐지하자고 목청을 돋우는 중산계급출신 지식인들의 딸자식 가운데 생활고에 쫓긴 나머지 위험을 무릅쓰고 낯설고 밀폐된 공간으로 안마서비스를 제공하러 떠나는 아가씨들이 과연 있을까? 무릇 인간의 성정은 나와 멀리 떨어질 곳에서 발생한 사건을 접하면 극단적으로 후해지거나 극단적으로 독해지는 법이다. TV화면에서 생중계되는 이라크 폭격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미국시청자들은 후자의 사례다. 그들 가족과는 하등 관계없는 하류직업 종사자를 무참히 살육한 가해자에게 한량없는 관용을 베풀어달라고 호소하는 대한민국 진보지식인들은 전자에 해당한다.

물론 당위적으로는 진보지식인들이 옳다. 핵심은 진보지식인들의 고결하고 인자한 풍모를 부각시키고자 사형제도 존폐논란에 과도한 에너지가 투여된다는 점이다. 한국사회 주류기득권집단 눈높이에서 이는 절대 손해나는 장사가 아니다. 사형제도가 사라진다고 대한민국의 기성질서와 기존체제에 심각한 변동이 초래되지는 않을 터이므로. 단지 성과가 있다면 사형철폐를 주도한 진보지식인들의 명성이 한층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 대가로 서민대중이 절박하게 겪고 있는 사활적 안건들은 조용히 뒤쪽으로 밀려난다. 문화좌파의 관념적 입지를 넓히기 위하여 민생진보의 물질적 토대가 희생되는 구도다.

민중과 진보진영을 따로따로 분리시키는 이슈들은 이외에도 허다하다. 동성애, 양심적 병역거부, 전투적 여성주의, 최근 대두된 트랜스젠더의 성적 자기결정권까지 무궁무진하다. 모두가 다수 민중의 먹고사니즘과는 밀접하게 결부되지 않는 이른바 소수자 의제들이다. 진보지식인들이 요런 주제들에 천착하면 천착할수록 민중은 한국의 진보진영을 팔자 늘어진 유한계층 선남선녀들이 모여 앉아 공리공론만 일삼는 살롱진보로 더더욱 인식할밖에 없다.

여유만만 진보진영이 질펀하게 연출하는 부르주아 취향의 토크쇼 소재로 노무현 정권의 주요 어젠다들도 편입된 지 오래다. 국가보안법 개폐와 과거사 청산작업, 그리고 유시민 일파가 선창했던 기간당원제 정착 역시 민생과 무관한 그들만의 잔칫상 메뉴에 올라갔다. 서민들과 진보진영이 각자 밥상을 차린 격이랄까. 이명박 부류가 산업화시대에 빈둥거렸던 작자들이 자신을 음해한다는 망언을 거침없이 토해내고, 대다수 서민계급이 여기에 동조하는 기상천외한 현상의 배경이다.

진보지식인들이 민중의 소외감을 유발하는 지엽적 이슈를 붙잡고 늘어지는 데는 강남좌파를 부양하는 직종의 성격이 적잖이 기여하고 있다. 진보지식인의 상당수가 대학교수다. 속칭 철밥통이다. 대학들의 생존경쟁이 치열해졌을망정, 보통 서민은 머리를 쥐어짜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만 늘어놓는 조희연 교수 같은 양반들이 학교에서 월급 밀렸다는 소식을 나는 아직 들은 기억이 없다. 부유한 진보먹물들의 대오각성을 위해서 대학당국의 결단을 촉구하겠다. 임금 석 달만 체불되면 국보법타도에 주력하자는 둥, 부모성 함께 쓰자는 둥의 배부른 인정투쟁은 깨끗하게 자취를 감추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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