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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당은 노무현의 일용할 양식

민노당은 토론의 제왕을 꿈꾸고 있는가

누가 그랬더라? 세상은 재즈를 사랑하는 자와 사랑하지 않는 자로 나눠진다고. 나도 한번 나눠보자. 세상은 역사를 공부한 인간과 공부하지 않은 인간으로 나뉜다. 물론 역사 이외에도 공부할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어학, 컴퓨터, 경영학, 회계학, 행정법, 공무원시험 기출문제집. 대한민국은 어차피 계급사회다.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가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면 과거에 유용하게 쓰였던 특정계급을 차라리 부활하자. 바로 중인계급을. 서리, 역관, 의원, 아전, 형리, 지관 등이 소속된.

중인제도를 되살린 다음 의사가 되고픈, 대기업에 들어가기 원하는, 공무원을 꿈꾸는, 영어권국가로 어학연수를 떠나려는 젊은이들을 몽땅 여기에 편입시키는 거다. 안정된 생계는 보장해주되 중요한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지위로는 절대 올려주지 않는 것이다. 극소수 재벌가문을 제외하면 지금의 한국사회는 양반사회도, 평민사회도 아니다. 서리와 역관이 판치고, 의원과 아전이 설치며, 형리와 지관이 으스대는 중인계급의 독재체제다. 중인이 지배하는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 귀족들의 고결한 희생정신도, 평민들의 불같은 열정도 실종된 까닭에서다.

중인계급과 가장 효과적으로 야합한 역사상의 인물은 단연 스탈린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중인계급과 결탁해 좌우의 협공을 힘겹게 막아내는 중이다. 노무현의 공무원정치는 스탈린의 관료독재를 서투르게 흉내낸 아류작인 셈이다. 스탈린은 노멘클라투라라는 관료적 중인계급을 통치의 발판이자 동맹군으로 만들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만큼이나 평범한 민중과의 만남을 꺼렸다. 히틀러의 나치독일과 격전을 치르느라 군인과 민간인을 망라해 수천만 명의 인민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 동안, 스탈린은 후방의 안전한 집무실에서 승전비책을 강구하기에 바빴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탁상공론이 전과를 기록할 리 만무했다. 스탈린이 직접 수립한 작전계획의 무모함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생명들이 총알받이로 허무하게 사라졌다. 그럼에도 주변 간신배들은 “스탈린 대원수께는 뭔가 깊은 뜻이 있다!”는 아첨을 연신 알랑거렸다. 그들은 크렘린의 부당한 명령에 볼멘소리로 항의하는 야전지휘관들을 향해서는 위협적 언사로 “스탈린 대원수께서 무엇을 잘못했냐?”고 되레 역정을 내기 일쑤였다. 노무현의 국민이 청와대 비서실이 작성한 장밋빛 로드맵 속의 액세서리로만 존재하듯이, 스탈린의 인민 또한 전시든 평시든 정치국에서 기안된 보고서들을 장식하는 차가운 통계수치로서의 의미만을 띨 뿐이었다.

이쯤 되면 다들 의아해하리라. 인민을 발가락의 무좀만도 못하게 멸시한 작자가 위대한 사회주의 혁명을 제창하는 신생 프롤레타리아 공화국의 실권을 쥘 수 있었던 이유가? 스탈린의 죄악상을 폭로하는 걸로 만족하는 행동은 반공노빠와 소녀진보 수준에나 어울리는 짓거리다. 당하는 건 나쁜 노릇이다. 허나 몰라서 당하면 더더욱 나쁜 노릇이다. 일단 알고 당해야 나중에 복수의 기회가 찾아온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특히 진보진영 구성원을 자임하는 사람들은 무명 기간당원에 불과했던 스탈린이 혁명의 기린아로 유명세를 떨쳤던 트로츠키를 속된 말로 관광 보내는 방식을 면밀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왕 시작한 역사이야기 종횡무진으로 지평을 넓혀보겠다.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제압하는 메커니즘은 이미 레닌에 의해 시연된 바 있다. 스탈린과 동일한 수법으로 레닌이 멘셰비키를 분쇄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닮은꼴의 항쟁구조가 목격된다. 레닌과 스탈린의 제자가 노무현 대통령과 영남친노집단이라면 멘셰비키와 트로츠키의 후예는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좌파세력이다. 주의하시라 철학적 코드에 따라 분류한 것이 아니다. 권력투쟁의 숙련도에 준거해 편을 갈랐다. 단지 이데올로기만이 잣대였다면 노무현은 박정희의 후계자일 터이므로. “그때그때 달라요….”하는.

멘셰비키와 트로츠키의 혁명사상은 이념혁명으로 요약된다. 왜냐? 멘셰비키의 온건한 사민주의 노선과 트로츠키의 과격한 영구혁명 주장은 대중들한테 쉽사리 접수되지 않는 조야한 관념덩어리에 머물러 있었다. 반면 레닌과 스탈린은 실사구시의 민생혁명을 선전선동 구호로 외쳤다. 국민 대부분이 문맹상태에 놓인 러시아의 특색과 풍토에 조응하는 의제와 쟁점을 개발해, 이를 대중이 쉽게 이해 가능한 화법과 수사로 포장한 결과물이다.

우리나라 강남좌파 기준으로는 레닌의 전술은 틀렸다. 핀란드역에 도착한 밀봉열차에서 하차하는 즉시 자신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개진했던 온갖 난해한 학설들을 장황하게 되풀이해야 옳았다. 하지만 레닌은 대중이 목말라하는 세 개의 단어만을 간단히 열거했다. 빵과 평화, 그리고 토지. 혁명적 정세의 고조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민에게 체감되지 않는 지식인들만의 이론대결에 몰두했던 멘셰비키는 레닌의 볼셰비키에게 권력을 헌납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퇴장했다. 레닌이 대한민국 웰빙좌파들처럼 움직였다면 서유럽 어느 도서관에서 평생 마르크스 원전이나 암기하고 있었을 게다.

스탈린은 노무현 정권에서 만개할 댓글정치의 효시였다. 트로츠키가 특유의 화려한 언변으로 장광설을 늘어놓을 적마다 그는 간략한 토를 달아 응수했다. “밥 먹고 합시다!” 배고픈 소비에트인민은 트로츠키의 유식한 본글이 아니라 스탈린의 투박하면서도 원초적인 악플에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트로츠키는 영구혁명에 앞서 민생혁명을 선창하기를 잊었다. 오랜 전란과 기아로 고통받은 소련인들은 뜬구름만 잡는 트로츠키를 외면했다. 당장 밥그릇부터 채워주겠다는 스탈린의 공약을 선택했다. 스탈린이 교활한 음모의 대가였던 덕택에 트로츠키를 숙청할 수 있었다는 진단과 분석은 역사에 무지한 단견이다. 어떠한 궁정정치도 결국은 대중정치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않다. 독재자에게 민생경제의 이슈를 빼앗긴 혁명가는 비무장한 예언자들이 겪었던 비극적 운명을 피할 길이 없었다.

짜르의 전제왕정도, 케렌스키의 임시공화정부도, 멘셰비키와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인민들의 피부에 단번에 와 닿지 않는 복잡한 국제정치와 씨름했다. 대한민국 진보진영이 매번 차수가 바뀌는 북핵 6자회담의 우여곡절을 매개로 민심을 붙잡으려는 노력과 비슷하다. 현재의 한국정치는 레닌이 무료해하는 서민대중을 억지로 자리에 붙잡아둔 채 지루한 유물변증법을 강의하고, 니콜라이 2세와 케렌스키가 민중의 귀에 쏙쏙 박히게끔 빵과 평화와 토지를 요구하는 구도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명계남 같은 양반들만 한나라당 지지율이 40퍼센트를 웃도는 비정상의 근본원인을 인식하지 못한다.

역사의 불행이며 역설이다. 민주노동당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고 있는 참여정부는 동시에 스스로는 한나라당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민노당은 노무현의 밥이고, 노무현은 한나라당의 밥인 슬픈 먹이사슬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생태질서의 진행방향이 반전될 징후는 전연 포착되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뒤늦게라도 이성을 회복하리라는 기대는 그만 접자. 문제의 핵심은 민주노동당이 플랑크톤 신세를 면할 조짐이 좀체 눈에 뜨이지 않는 데 있다.

민노당이 무기력한 식물성 플랑크톤 단계를 벗어나 먹이사슬의 정점에 올라설 비책은 있다. 서비스마인드를 학습하고 파퓰리즘을 수혈하는 것이다. 민노당 진성당원들은 청와대의 잡다한 성명과 브리핑을 반박하는 작업을 중단하라. 대신 고려대 최장집 교수의 저서와 칼럼들부터 짧은 단문으로 정리하는 과제에 착수하라. 당대 최고의 진보논객 문장이 조선시대 상소문도 아니고 마침표가 왜 이리 귀하단 말인가? 최장집 교수는 대중과 소통하는 콘텐츠 생산에 주력해야 마땅하다. 최교수가 무슨 홍상수냐 김기덕이냐? 작가주의 정치학자라니? 대한민국 3천 5백만 유권자 중에서 최장집 교수 글의 요지를 파악할 사람의 숫자는 아마도 김기덕 감독이나 홍상수 감독이 제작한 영화의 관객숫자와 유사할 듯싶다.

민주노동당은 항상 추상적이고 소수자 성향이다. 노무현은 민노당보다 구체적이고 다수자 성향이나 한나라당보다는 추상적이고 소수자 성향이다. 추상적이고 소수자 취향의 어젠다를 고집할수록 폭넓은 대중과 함께 호흡할 확률과 희망은 점점 말라비틀어진다. 노무현 정권은 민주노동당과 비교해 50보 10보 처지다. 그러므로 민노당과의 좌측전선에서 노획한 전리품을 한나라당에 맞선 우측전선에서 부지런히 까먹고 있다.

민노당은 정교한 논리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을 지고지선의 가치로 믿는 고루한 먹물근성을 어서 지양해야 한다. 광범위한 대중의 정서를 끈끈하게 휘감는 일을 천부의 사명으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진중권처럼 논술장사해서 경비행기 이륙시킬 기름값 마련하는 게 진보정당의 궁극적 목표가 아닌 바에야 그까짓 토론의 제왕 따위의 영광에는 미련과 관심을 끊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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