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살생부에 또 한 명의 사냥감이 추가되었다. 한나라당 탈당을 감연히 선언한 손학규 전경기도지사가 고건의 바통을 이어받을 비운의 주인공이다. 손학규의 이탈로 말미암아 한나라당은 몹시 곤혹스런 처지에 놓였다. 집 밖의 도둑고양이가 우리에 갇힌 호랑이보다 더 위험한 법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전서울시장의 방정맞은 입이 화를 부른 셈이다. 입놀림 가벼운 인간들은 정계를 은퇴한 다음 시베리아에서 마늘이나 까는 게 상책이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은 손학규에 대한 걱정을 붙들어 매도 좋다. 노무현 대통령이 알아서 처리해줄 테니까.
KBS 1TV에서 주말마다 방영하는 대하사극 ‘대조영’에는 ‘동명천제단’이란 지하단체가 등장한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수괴들을 차례차례 처단하는 저항운동이다. 드라마를 시청하다가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 핵심참모들 모아놓고 ‘장수천제단’이라는 새로운 이너서클을 결성한 건 아닐까 하는 야릇한 상상이 들어서였다. 동명천제단의 궁극적 목적은 고구려제국의 부활이다. 장수천제단의 최종목표는 영남정권의 영구집권에 맞춰지리라.
아직도 망상에 젖은 정치인과 캠프들이 있다. 대통령이 자신을 밀어주거나 최소한 우호적 중립을 지키기라는 환상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일각에서는 노대통령을 영남패권주의자로 정의하는 모양이다. 지극히 근시안적 견해다. 패권(Hegemony)추구는 나름대로 합리적 사고과정을 전제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닥치고 영남후보”는 합리적 사고의 궤도에서 탈선한 지 이미 오래다. 어떠한 희생과 손실도 감수하겠다는 신성하고 거룩한 소명의식의 징후가 엿보인다.
2004년 총선이 치러진 직후에 나는 영남의 지역주의는 본질적으로 인종주의(Racism)에 가깝다고 진단한 바 있다. 경상도 출신이 아닌 모든 대권주자들을 향해 증오를 벼리고 적개심을 불태우는 노무현의 모습에서는 순전한 형태의 인종주의자의 면모가 목격된다. 히틀러는 아리안족의 영광을 위해서 하등인종들은 죄다 멸절돼야 마땅하다고 외쳤다. 그는 선천적 유전형질의 우월함을 구실로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주장했다. 무슨 특별한 업적이나 역사적 성취가 논거로 제시되지는 않았다.
친노직계가 김혁규 전경남지사를 조직적으로 밀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진다. 나는 김혁규에 관해 특별한 호감도 반감도 갖고 있지 않다. 허나 앞으로는 본격적으로 김혁규를 조질 계획이다. 노무현 정권 수뇌부의 말기증상에 도달한 영남인종주의를 더는 방관할 수가 없다. 게다가 사악한 인종주의자들이 양심적 개혁세력을 사칭하기까지 한다는 사실이 더더욱 용서가 안 된다.
노대통령과 영남친노들은 그동안 무수한 정치인들을 겨냥해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개혁성이 모자란다는 핑계였다. 재판관도, 검사도, 방청객도, 심지어 변호사마저 영남친노 일색으로 꾸려진 개혁심판대에 오른 인사들의 면면은 실로 다양했다. 고건과 정동영은 물론이고, 재야의 대부 김근태와 인권변호사로 명성이 자자했던 천정배조차 수구꼴통으로 단죄되었다. 한데 김혁규는 기소는커녕 노무현의 개혁작업을 계승할 후계자로 추켜올려진다. 노무현이 총애하는 영남후보의 들러리로 차출되어도 무방한 고분고분한 성격의 정치인들만 결과적으로 살아남았다. 이해찬과 한명숙이 대표적 사례다.
영남에서 태어나기만 해도 저절로 개혁성이 담보된다는 노정권의 해괴한 개똥철학이 결국은 개혁세력을 말아먹고 진보진영을 들어먹었다. 반대로, 영남태생이라고 하여 무조건 보수적이며 반개혁적일 것이라는 편견은 분명 옳지 않다. 서민경제를 회생시킬 능력이 있으며, 강남부자들과 두려움 없이 대결하려는 의지로 충만한 인물이라면 고향과 상관없이 대환영이다.
나의 “영남후보지만 괜찮아”와 노무현의 “닥치고 영남후보”는 동기와 지향점에서 하늘과 땅 차이다. 오직 영남후보라는 까닭에 개혁적이고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나치독일의 악명 높은 게르만족 지상주의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타고난 생득적 요소가 우대의 명분이나, 푸대접의 원인으로 작용해서는 곤란하다. 손학규든 정운찬이든 단지 영남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정권으로부터 부당한 핍박과 노골적 비토를 당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을 엄호할 작정이다. 몰염치의 극치에 다다른 노무현 정권의 “닥치고 영남후보” 대선전략을 이제 제대로 발려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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