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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는 보수와 진보 가운데에 있지 않다

시인 김지하의 중도 이야기...이 시대 왜 중도 인가?

‘보수파도 중도, 진보파도 중도, 중간파도 중도를 주장한다. 중도는 이제 마치 하나의 시대정신, 하나의 스타일로까지 번져갈 추세다. 중도란 무엇인가? 그리고 중도주의가 무엇인가?’ 이상은 3월 24일자로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게재한 칼럼의 도입부다.

김지하 시인이 지적했듯 지금 정계에선 중도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 손학규 전 경기지사부터 진보로 대표되던 노무현 대통령조차 스스로를 좌파신자유주의자라며 한미 FTA를 적극 지지했듯 사안에 따라 보수와 진보란 넓은 스펙트럼 사이에서 유연한 결정을 내리는 이른바 중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동안 중도정치는 재기를 위해서 은신처가 필요한 정치인들이 잠시 머무는 쉼터였고, 중도정치가들은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 일쑤였다. 때문에 대선을 앞 둔 시점에서 불거져 나오는 중도의 외침은 잠깐의 연극으로 끝날 신파로만 보기엔 한계가 있다. 중도는 이미 하나의 돌파구이자 대안이자 정책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 왜 중도일까? 무엇보다 중도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리가 선행될 필요성이 있다. 중도란 무엇인가? 다시 김지하 시인에게 묻는다.

* 다음은 김지하 선생의 4월 8일 강연을 요약 발췌한 것입니다.





바야흐로 중도의 시대이다.


중도를 말하기 전에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처한 현재를 돌아보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남북, 좌우, 영호남, 경총과 노조, 청년과 노인들, 유산층과 무산서민들, 그리고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들이 일종의 적대적 관계에 빠져있는 혼란기이자 과도기이다.

이처럼 과도기에 나타나는 서로 상응하는 두 가지 가치를 동시에 수용하고 융합하여 제 3의 새로운 방향을 열어가는 논리와 철학에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중도(中道)이다.

새길, 변혁적인 노선, 새로운 사상은 과도기에 출현하기 나름이며, 창조적인 것이 나올 때 역시 혼돈기이고, 전환기인데, 중도는 바로 이런 시대 전환기에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다.

바야흐로 중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중도는 보수와 진보 그 가운데에 서 있지 않다.

흔히, 중도(中道)를 보수와 진보의 중간, 보수도 진보도 아닌 것으로 말하나, 실상 진보와 보수를 빗대어 중도를 논한다는 것 자체에 어패가 있다. 중도란 보수와 진보란 개념이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다만 격동기 역사적인 단절을 거치며, 근대사에서 이도 저도 아닌 기회주의자라는 의미로 변질 됐을 뿐이다.

중도의 깊은 뿌리는 바로 아시아에 찾을 수 있다.
먼저 서경 요 임금이 순 임금에게 정권이양을 하면서 윤궐집중(允厥執中) “진실로 중을 잡아라 그러면 백성을 이롭게 하고 천명을 따르는 이상적인 왕도정치가 구현되는 태평세월이 된다.” 라는 대목이 있다. 태평성대로 대표되는 유교정치의 이상 실현의 한 구절에 바로 중이 등장하고 탕왕, 무왕, 문왕이 등장하는 시기에 정치의 핵심에 이미 중(中)이 있었다.

또한 공자는 중용을 왕도 정치의 이상으로 삼았는데 여기에 어느 쪽에도 기울이지 않고 과하거나 부족이 없는 것을 중이라 하였고, 그 실천 방법을 용이라 하였다. 중용은 다시 말해 중(中)을 실천하는 것이다. 맹자는 중용을 자기 수양의 원리가 아니라 지극히 적극적인 개념으로서 양극단의 포용하는 태도라 하였다.

불교에선 원효의 화쟁(和爭) 사상에 담겨있는 중(中)을 찾을 수 있다. 화쟁(和爭)은 서로 싸우는 백가지 주장이 있을 때 그 백가지 주장을 짓밟아버리고 한 가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백 가지 주장을 모두 인정하면서 그 백 가지 주장 사이의 조화를 시도하는 것을 말한다.
그로 인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무애사상(無碍思想)인데 무애사상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극단에 빠지지 않는 중도(中道), 깨달음 등을 의미한다.


그 많던 중도주의자들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 인식에서 중도주의자들이 기회주의자란 편견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남북전쟁 이후 정계에 나타났던 중도, 중도통합 세력들의 역할이 컸다. 그들의 기회주의적인 처신이 중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굳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중도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국운을 이끌었던 시기가 있었다. 바로 구한말부터 해방까지 국운을 걸고 일대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시기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몽양 여운형이다. 그의 행보를 살펴보면 그가 왜 좌익으로 매도당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44년 비밀결사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했고,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실패하고 만다. 다시 그해 12월 인민당을 창당, 29개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전,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했으나 지나친 좌경화에 반대하며 탈퇴한다. 그 후 근로인민당을 조직해 극좌, 극우로부터 소외당하고, 중간 좌파 세력 내지 우파 세력의 일부를 규합하여 좌우합작을 시도하던 중 46년 암살된다.

몽양 여운형은 말 그대로 좌와 우를 왔다 갔다 했다. 하지만 좌와 우 가운데가 아니라 자신만의 균형 감각을 가지고 양 극단의 정도를 지킨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우사 김구 역시 중도주의자다. 그의 이력은 더욱 특이하다. 15살 때 한학을 공부하고, 1893년 동학에 들어가 소년 접주로 동학혁명을 지휘했으며,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육군 중위 쓰끼다를 살해하고, 복역 중 탈옥하여 공주 미곡사 들어가 중이 된다. 그러다 이듬해인 1903년에 환속하여 기독교에 입교하고, 1909년 신민회 사건과 1911년 105인 사건으로 복역과 출옥을 반복한다. 1914년 출옥 후에는 농촌계몽운동을 펼치고, 3·1 운동 후에 상해 남경 정부에 들어가 항일무장투쟁에 몸을 담는다. 통일 후 남북통일정부 수립 문제로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월북하나 김일성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결국 몽양 여운형 선생처럼 암살을 당한다. 김구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향유되던 모든 사상을 빠짐없이 섭력하였고, 혼돈한 세상에서 나름의 질서를 찾기 위한 해법이 중도 밖에 없음을 몸으로 정신으로 터득했을 것이다.

이 외에도 납북되어 북에서 작고한 우시 김규식 선생, 민세 안재홍 선생 등이 있는데, 남북에 독립적인 정부가 들어서고 극좌, 극우로 나뉘면서 참된 중도주의자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혼란한 시기 중도주의는 자연스럽게 사상적이 지침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정강으로 채택되고, 1941년 상해 임시정부 건국의 기본이념이자, 대한민국의 건국방향으로 구상된 이념이 있다. 바로 삼균주의이다.

조소앙이 정리한 삼균주의(三均主義)는 다양한 사상이 공존하던 역동기에 통합이란 물줄기 아래 정립된 것으로 독립운동 내부의 좌우익 사상을 통합하면서 독립운동의 기본방향과 미래 조국건설의 지침으로 세우기 위해 체계화한 민족주의적 정치사상이다.

정치적 균등, 경제적 균등, 교육 문화적 균등이 삼균으로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의 완전 균등, 평등 생활을 중시한다. 삼균주의는 이시기 중도정치사상의 꽃이라 불린다.


중도의 또 다른 이름들, 중도의 현대적 해석

중도에 관심을 갖는 건 비단 우리뿐이 아니다.
미국 정계 역시 중도 노선이 득세하고 있으며, 1998년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슨은 ‘제 3의 길’이란 저서를 통해 현대 사회의 변화를 더 이상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의 구분으론 설명할 수 없기에, 보수와 진보를 초월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앤서니 기든슨의 이런 주장은 토니 블레어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이론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정계뿐만이 아니다 철학에 있어서도 중도는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카오스모스(kaos-mos),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합성어인 카오스모스는 유럽의 가장 현대적인 모습이다. 카오스, 혼돈과 코스모스, 질서 이렇게 반대인 두 단어가 하나의 개념으로 철학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루이스 멈포드는 태극을 해석하면서 다이나믹 이퀴브라이엄(dynamic equilibrium)이라 표현했다. 태극의 하나는 역동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균형인데, 이 둘을 묶으면 다이나믹 이퀴브라이엄이라는 것이다. 다이나믹은 역동이자 성장이고 이퀴브라이엄은 조화와 균형으로 풀이하고 있다. 즉 분배와 성장을 결합할 때 비로소 역동적 균형이 강화된다는 것으로 바로 이것이 중도이며, 이 중도가 미래의 세계 질서 일 것이라고 피력하고 있다.

요즘 신세대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주장하는 것 역시 중도이다. 퓨전, 크로스 오버, 로컬-글로벌, 로컬과 글로벌을 합친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이란 신세대들이 추구하는 단어들에 중도가 스며있다. 이질적인 것이 동시에 발송되는 크로스 오버, 민족적이면서 세계적인 것을 동시에 수용하는 로컬-글로벌, 현대에 있어서는 이것이 상식이 되고 있는데, 바로 이 상식이 중도이다. 중도는 체감하는 것보다 생활 가까이 다가와 있는 셈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합성한 이어령 교수의 디지로그(digilog), 몽양 여운형 선생의 제자 강원룡 목사의 between & beyond 역시 중도를 나타낸다.

특히 between & beyond는 양자 사이에서 우정과 사랑을 갖는 관계, 봉합하는 관계, 초월하는 관계가 숨은 차원 위로 올라와 새로운 현실을 전개해, 새로운 논리가 혼돈 앞에 제시되는 것을 의미한다.


기우뚱한 중도, 역동적 중도

중도는 가운데 중을 써서 中道, 영어로 middle way 다. 그러나 중도는 가운데를 뜻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변비중(離邊非中)처럼 양극단을 버리되 가운데 길도 아닌 다른 것을 의미한다. 즉 양극단과 가운데, 전체를 들어 올리면서 차원을 바꾸는 것이다. 중도는 바로 차원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매화를 그리며 터득한 ‘옛 몸 새 꽃’ 역시 중도이다. ‘옛몸새꽃’은 입고출신(入古出新), ‘옛 것으로 들어가서 새 것으로 나온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것을 모델로 새 것을 만든다.’란 의미로, 기존 질서 위에서 다른 차원의 질서가 탄생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중도에 대해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비행기에 비유할 수 있다. 비행기는 기류에 따라서 오른쪽 왼쪽으로 기우뚱하며 중심점을 이동한다. 그러나 비행기 자체의 균형은 유지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처럼 중도는 조건에 따라 그 중심이 왼쪽으로도 가고 오른쪽으로 가돼, 자체 균형은 지키는 것이다. 이것을 기우뚱의 균형, 역동적인 중도, 기우뚱한 중도라한다.


혼돈의 시대, 이미 중도는 세계적인 조류가 되고 있다.
자기주장만 옳다는 극단의 논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으며, 단순한 미들, 중간도 역동적인 중도에 의해 비판을 받을 것이다.

과도기...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모든 분야에 독특한 새 길과 창조의 길, 변혁적인 사상들이 나타나 현 세대들이 가진 잠재적 창의력을 발산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버팀목이 될 제대로 된 문화 결정력, 정치 결정력이 마련되어야 한다. 역동적인 중도, 기우뚱한 중도 제대로 된 중도가 제 역할을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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