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활용론과 투항론, 둘 다 아니다
필자는 한겨레신문의 성한용 선임기자의 <친노들의 길>을 비판한 이후, 자연스럽게, 조선일보 문제도 함께 다룰 수밖에 없을 거라 예상한 바 있다. 물론 필자는 이미 조선일보의 창간기념 대담에 나갔을 때, 프리존뉴스를 통해 그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설명한 바 있다. 이 글은 그 당시의 논지를 다시 확인하는 선이 될 듯하다.
언론개혁시민연대의 양문석 사무총장은 지난 7월 한 토론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조선일보에 수구적 논조의 글만 실리게 하는 것보다는 진보개혁진영이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해봐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당시 토론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에 부정적 의견을 밝혔다.
정동익 동아투위 위원장은 “조중동 활용론은 과거 일제시대때 지식인의 투항을 상기시킨다”라며 “조중동이 아무리 강대하다고 해서 투항해선 안되며, 활용론은 조중동을 포장하는 역할”이라고 비판했다.
정 위원장은 이어 “진보적인 사람의 글을 담았다는 것은 조중동에게는 선전용이며, 내 글에 입맛에 맞지 않으면 글을 다 고치거나 수정하게 될 것이며, 결국 그동안 쌓아놓았던 언론운동의 성과와 신뢰마저 잃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전북대 김승수 교수는 “진보적인 글을 싣는 것은 가치가 있겠지만 그것에 대한 부작용도 많을 것 같다”며 “그러나 지금은 문을 걸고 너와 말조차 안한다는 것보다, 그들이 나의 생각을 듣기 바란다면 상대를 존중하고 아끼는 자세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KBS 이강택 PD는 “조중동 활용론은 별로 가능성이 없다고 보며, 조중동에 싸움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닌, 반수구가 상징화되서 모든 과제가 중점화될때 자유주의 세력과 수구세력이 공통으로 추진하는 과제에 대한 문제를 놓치게 되며, 지금까지 놓쳐왔다”고 지적했다.
지난 7월, 필자가 이 토론회 관련 글을 읽고서도, 별다른 글을 쓰지 않은 이유는, 이미 필자는 언론개혁진영으로부터 완전히 배척당했기 때문에, 굳이 들어주지도 않을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판단 역시 지금 유효하다. 단지 필자의 한겨레 비판과 맞물리는 사안이기 때문에 뒤늦게 의견을 밝히겠다는 것 뿐이다.
필자는 양문석 박사의 조중동 활용론은 물론, 정동익 위원장의 조중동 투항론에도 반대한다. 필자는 조선일보를 활용하기 위하여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한 것이 아니다. 조선일보의 편집방향과 필자의 칼럼의 논조가 정확히 맞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최소한 필자 개인의 조선일보 기고행위는 활용론도 투항론에도 맞지 않다.
조선일보는 포털 비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유일한 제도 언론사
필자가 조선일보에 기고를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는 포털 권력 비판 때문이었다. 2005년 1월부터 시작된 필자의 포털 비판은 같은 해 7월 포털피해자 모임을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투쟁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법적 소송과 입법안을 제시하는 등, 일반적은 담론비판과는 달리, 사회운동적 성격을 담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필자는 거의 대부분의 언론매체와 언론단체를 찾아다녔다. 물론 아마 가장 많이 찾아간 곳은 한겨레신문사였을 것이다. 미디어담당 기자부터, 홍세화 편집위원 등,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만났고, 메일을 보낼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보냈다.
그러나, 한겨레신문사는 필자가 제시한 포털 비판 기획은 물론, 회사 자체의 포털 관련 정책, 더구나 필자의 칼럼기고까지, 단 한 번도 의견을 수용해 준 바 없다. 물론 사석에서 만나면, 다들 필자의 포털 비판의 의미를 인정했지만, 이를 지면이나 정책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겨레21은 당시 맹목적으로 네이버를 띄우는 기사를 기획한다. 그 이후부터 필자는 한겨레 측에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한겨레 뿐 아니라, 그 어떤 매체도 감히 네이버를 비롯한 포털을 비판할 엄두도 내지 않았다. 이미 포털의 언론지배 상황은 시대적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제도권 매체에서 필자의 포털 비판 칼럼을 받아주겠다는 의사를 보인 곳은 오직 조선일보 하나였다.
진보와 보수를 포함하여, 전체 언론사가 포털 비판에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조선일보에서 해보자는 제안을 받는다면, 그때 포털 비판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회개혁이라 판단한 필자는 어떤 결정을 내렸어야 했는가?
사실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한겨레 등에서 포털 비판을 수용해주었을 때, 그 뒤에 조선일보에서 지면을 주겠다고 제안한다면, 그때부터는 조선일보 활용론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오직 조선일보만이 이를 수용하겠다는데, 무슨 활용론이고, 투항론이고 고민할 게 있었겠는가.
여섯 번을 쓰게 되어있는 조선일보 아침논단 고정논객으로, 필자는 무려 다섯 번을 포털 비판에 할애했다. 마지막 칼럼만을 대중문화 산업의 개혁에 관한 내용으로 채웠을 뿐이다.
조선일보가 필자의 지겨울 정도의 포털 비판을 수용한 이유는, 바로 조선일보의 편집방향과 맞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부분이 양문석 총장이 제기한 조선일보 활용론과 필자의 기고 행위가 다른 것이다.
세대론, 대중문화론, 미디어론, 모두 조선일보 편집방향과 맞았다
필자는 200만명의 조선일보 독자에게 수구적 논리가 아닌 개혁적 논리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갖고 있지 않았다. 포털 개혁문제는 진보냐, 수구냐, 이런 것을 따질 사안이 아니다. 물론 모양새로 보면, 거대자본의 언론장악 문제이므로, 당연히 진보가 먼저 깃발을 들었어야 했다. 그러나 진보가, 단지 포털이 노무현 정권에 유리한 뉴스편집을 해서 그런지, 직무유기를 범했다. 그뒤 최근에 포털이 친 이명박 편집으로 돌아서자, 부라부라 포털 규제 정책을 내놓는다. 엄밀히 말하면, 진보진영이 내놓은 포털 정책은, 필자가 보수언론매체와 함께 이미 입법안으로 발의해놓은, 검색서비스사업자법과 거의 유사하다.
필자는 포털 관련 칼럼 이외에, 세대론과 대중문화개혁론, 그리고 인터넷여론에 대한 칼럼도 기고했다. 이런 칼럼 역시, 조선일보의 편집방향과 어긋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칼럼들을 한겨레에 기고하려 했다면 어땠을까? 최소한 필자의 386세대 비판, 영화 <화려한 휴가>에 대한 비판칼럼은 오히려 한겨레신문에서 거절했을 것이다. 한겨레의 편집방향과 안 맞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포털을 비롯한 뉴미디어, 그리고 대중문화 등에 대해서, 필자는 그간 진보적 관점을 버리고 보수적 관점으로 사상을 전향한 것인가? 오히려 바로 이 부분이 논쟁거리로 적합하다. 논쟁의 여지를 남겨놓은 채, 필자가 단언하자면, 뉴미디어와 대중문화는 필자의 전문분야이고, 지난 10년간 미디어 평론가와 대중문화평론가로 활동해오면서, 수많은 글을 써왔지만, 필자의 생각이 크게 바뀐 바 없다. 필자의 생각은 그대로인데, 그 내용을 진보매체에서는 수용하지 못하고, 보수매체가 수용할 수 있다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현상이란 말인가.
여기서부터 한겨레비판 담론이 형성된다. 필자는 한겨레신문의 성한용 기자의 칼럼이, 언론으로서 원칙을 제시하지 않고, 정치자영업자의 응원가만 불러댄다고 비판했다. 한겨레는 노무현 정권의 민주당 분당 등, 정당민주주의 원칙을 어기는 것에 대해 전혀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분당 당시 열린우리당을 애써 민 것은 물론, 사실 상 민주당 죽이기형 편집도 여러 곳에 눈에 띄었다. 한겨레의 정치적 방향성은 필자와 어긋나버렸는데, 이는 한겨레가 과도한 정권 옹호의 목적 때문에 언론 독립의 원칙을 어겼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필자가 조선일보에 <친노의 손을 떠난 인터넷>이란 칼럼을 기고했을 때, 보수 측 지인들은 필자에게 "완벽하게 사상전향했구나"라며 반기기도 했다. 그 글의 내용은, 100년 갈 정당이라며 총선에서 표를 구걸해놓고, 대선을 앞두고 하루아침에 깨버리고, 현직 대통령은 대선후보와 전쟁을 벌이고, 전직 대통령은 정당민주주의고 뭐고 무조건 합치라고 지령을 내리는, 반민주적 작태들을 비판한 것이다. 이게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인가? 이건 상식 아닌가? 같은 진보니까, 저런 반칙들을 봐주자면, 대체 독재정권과는 그간 왜 싸웠는지 묻고 싶다. 필자의 조선일보 칼럼은 사상전향과 관계없이, 그간의 정당민주주의 원칙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한겨레의 문제는 비단 정치 하나만이 아니다. 아직도 한겨레신문에서는 언론권력을 장악한 네이버의 부사장이, 왜곡된 인터넷담론을 펼쳐대고 있다. 한겨레 편집진이 제 정신이라면, 당연히 네이버 부사장의 기고를 중단시켜야 한다. 물론 한겨레 내에서, 몇몇 뜻있는 기자들이 포털문제의 핵심사안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한 언론사의 논조를 판단할 때는, 기자들의 개별 기사가 아닌, 사설과 외부칼럼니스트의 성향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한겨레는 지난 포털 피해자의 민사재판 승소 때도, 언론사로서는 유일하게 포털규제론을 비판했다. 한겨레는 나름대로, 인터넷참여민주주의를 주장했다 하겠지만, 그게 바로 포털사가 늘 이용해오던 자사 방어논리였다는 걸 모르는가. 이에 대해 필자는 한겨레가 자랑하는 시민참여지면 왜냐면에 독자투고 형식으로 기고했다. 그러나 어떠한 해명도 없이 깨끗하게 거절당했다. 아주 겸손하게 표현하여,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포털 전문가의 독자투고조차 거절당했는데, 대체 필자의 조선일보 기고가 문제될 게 뭐란 말인가.
이외에, 스크린쿼터 철폐 반대 이외에는 한겨레 지면에서 대중문화 산업구조의 개혁론을 찾아볼 수 없다. 필자는 한나라당의 고진화 의원과 함께, 연예산업구조를 개혁할 공인연예인에이전시법을 발의해놓았다. 한겨레가 대중문화 개혁을 이야기하자면, 케케묵은 스크린쿼터 철폐 반대 이외에, 새로운 개혁담론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도 한겨레는 전혀 변화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디워>에 대한 한겨레와 씨네21의 논조는, 낡은 서구사상을 그대로 베껴온 진중권의 것을 그대로 충실히 따랐다. 시대에 뒤떨어져도 최소 20년은 뒤떨어진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담론을 고수하는 한겨레가 과연 진보와 개혁을 상징하는 매체가 될 수 있을까?
원칙을 버리고 정파에 투항한 정치론, 포털 권력을 추종하는 철 지난 미디어론, 낡은 신좌파적 관점을 유지하는 영양가 없는 대중문화론, 이러한 한겨레의 편집방향 속에서, 필자가 활동할 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 조선일보 활용론을 다 떠나서, 필자는 한겨레에 칼럼을 쓸 소재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약 필자의 대중문화와 미디어관이, 진보매체에서 전혀 수용할 수 없는 보수적인 것이라면, 그럼 앞으로 계속 보수로 남으면 그만이다. 보수와 손잡기 위해 내 가치관을 바꾼 바 없듯이, 진보와 손잡기 위해 이를 다시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양문석 박사의 조선일보 활용론과, 정동익 위원장의 조선일보 투항론은 모두, 지금의 진보매체가 아주 정상적이고 제대로 가고 있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러나 필자의 조선일보 기고는 진보매체가, 권력에 타락하고, 시대를 읽지 못하는, 기형적이고 퇴행적인 모습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진보가 깃발을 들고, 보수가 현실적합한 담론을 찾는 구도가 정상
그렇다고 필자가 진보진영 전체에 비관적 전망을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이번 대선미디어연대의 포털 정책을 보며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대 포털 정책을 내놓을 수 있는지, 진보진영의 순발력에 놀랐다. 물론 포털이 친 이명박으로 돌아서는 정략적 상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진보진영은 자기 개혁능력과, 시대를 선도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또한 웬만해선, 야합을 하지 않는 원칙의 힘도 있다.
필자가 주장하는 포털 및 인터넷개혁, 386세대의 패거리 문화 타파, 대중문화산업 개혁, 아시아대중문화 교류 등은 시존의 시장논리를 넘어서겠다는 발상이다. 이것은 보수논리라기 보다는 진보논리에 가깝다. 한국의 진보가 정상적이었다면, 진보에서 이런 파격적인 담론을 생산해내고, 보수가 면밀히 검토하여 현실에 수용하는 윈윈관계가 설정되어야 했다.
필자는 노무현 정권이 끝난 후, 얼마든지 이런 생산적인 진보 및 보수 담론 구도가 형성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때도 물론 조선일보 활용론이나, 투항론이 아니다. 여러 가지 실험적 주장 중, 조선일보의 방향성과 맞으면 같이 기획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조선일보의 방향성과 맞지 않는데, 색다른 진보논리의 전파를 위해 조선일보 지면을 활용하겠다면? 필자 입장에서는 아직까지 그것은 시기상조라 본다. 오히려 진보적 담론 중에 조선일보의 편집방향과 맞는 공유지점을 찾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인 일이다. 그렇게 되면 그건 조선일보 활용론이 아니라, 조선일보와 특정 주제에 대해서 함께 기획하는 것이다.
참고로 조선일보 기고거부에 대해서 강준만 교수는 98년도에 장하성 교수의 사례를 들어 제대로 설명한 바 있다. 강교수가 조선일보에 기고를 하지 말라는 뜻은, 조선일보 편집방향보다 훨씬 더 왼쪽의 논리를 들고 가서, 이를 가지고 상대적인 진보정권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한미FTA로 나라를 팔아먹은 노무현 정권을 규탄한다”라는 내용의 칼럼을 조선일보에 기고하게 되면, 독자들이 대혼란에 빠진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명백히 한미FTA 찬성 논조를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런 좌파 지식인을 바로 기회주의적 지식인이라 비판한 것이다.
장하성 교수는 삼성 비판 칼럼을 조선일보에 기고했다. 보수는 무조건 삼성을 옹호한다는 선입관은 버릴 필요가 있다. 삼성의 탈법적 상속에 대해서, 이를 옹호하는 보수언론은 없다. 삼성의 문제 중에서도, 진보와 보수가 익히 공유할 만한 비판사안은 수두룩하다. 그런 걸 찾아서,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것은 안티조선의 기고거부 원리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주로 빅뉴스에 칼럼을 기고한다. 개중 “이 문제 만큼은 널리 알려야되겠다”는 사안이 있으면, 조선일보에 기획안을 넣는다. 그래서 기획이 맞으면 칼럼을 쓰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활동은 계속할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한겨레신문 비평위원직까지 1년 역임했으면서도, 이상하게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고, 포털과 싸우면서부터, 한겨레와 아무 것도 같이 할 수 없게 된 이 현상이 더 분석해볼 가치가 있다.
한겨레에 다시 한번 기고를 할 수 있게 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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