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의 대선 출마와 관련해 뉴라이트 계열의 어느 인터넷매체에서 내놓은 시각이 대단히 흥미롭다. 한나라당의 방해와 부자신문들의 견제를 무릅쓰고 이회창이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면 이명박 못지않게 문국현이 손해를 본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더해 정동영은 물론, 심지어 이인제와 권영길에게마저 불통이 튀긴다는 얘기다. 이회창이 비단 이명박뿐만 아니라 범여권 주자들의 표까지 골고루 갈아먹는다는 소리다. 팔리든 안 팔리든 오마이뉴스의 김칫국 장사는 오늘도 계속된다.
왜 이러한 기현상이 나타나는 걸까? 대한민국 17대 대통령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며 도전장을 던진 후보자들 가운데 하위 80%의 기대와 여망을 흡족하게 충족시킬 인물이 좀체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누차 강조했듯이 이명박은 상위 1프로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 정동영, 문국현, 이인제, 권영길 모두는 1과 80의 중간에 위치한 19퍼센트의 욕망과 바람을 대표한다.
중간에 위치했다는 의미가 꼭 가운데에 놓여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금전적 가치를 기준으로 진단할 경우 19프로의 물질적 지향점과 수입구조는 1과 동일하다. 1과 19는 양적인 측면에서만 다를 따름이다. 1과 19를 뺀 나머지 80은 질적인 맥락에서 1 및 19와 차별성을 띤다. 존재의 기반 자체가 아예 다르다. 이회창의 지지층은 1과 19를 아우른다. 이회창이 정계에 입문할 무렵, 그의 영입을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던 정당에는 노무현이 참여하고 있었던 꼬마 민주당이 끼어있음을 유념하기 바란다.
국회의석을 확보한 진보정당이 없었던 당시, 김대중의 평민당(후일의 국민회의)이 19의 색채가 일절 부분 뒤섞인 80의 정당이었다. 노태우의 민정당은 철저한 1의 정당이었고, 김영삼의 민주당은 19와 80의 틈에서 갈팡질팡했다. 3당 합당을 통해 YS가 완전히 1로 옮겨가고, DJ가 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80의 주축인 호남인들이 대거 빠져나간 상태에서 꼬마 민주당은 불가피하게 19의 정당으로 변신할 수밖에 없었다. 완전무결한 형태의 19프로 정당으로 변모한 이기택의 꼬마 민주당이 삼고초려로 공을 들인 사람이 이회창이었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의 시대상황에서 이회창은 19가 선보일 수 있는 최고의 정치인이었다. 이회창이 1의 정당인 신한국당에 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19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이회창에 대한 애정과 기대감은 아직도 여전한 모양이다. 19들이 유시민의 대안 내지 이해찬의 스페어로 생각하는 문국현의 지지율이 이회창의 출사표 저울질 소식에 갑자기 꺾이는 사태를 고려하면.
잠시 쉬어 가는 차원에서 칼럼 한 편을 추천하겠다. ‘받기만 해서야’라는 제목으로 쓰인 한국일보 박광희 피플팀장의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면 국민원로가 ‘이명박은 왜 강한가’ 시리즈를 뜬금없이 끈덕지게 연재하는 이유가 대충은 설명되리라. 핵심은 이명박이 강한 것이 아니다. 19가 정치적으로 쫄딱 망했다는 데 있다. 혹시나 하면서 장기간 19를 편들어준 80이 순혈 19퍼센트들로만 꾸려진 노무현 정권의 실정과 배신에 치를 떨며 1할 9푼들한테 완벽히 등을 돌린 것이다.
19는 멍청하지 않다. 지혜롭지는 않되 매우 교활하다. 그들은 80의 이반 움직임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껴온 터였다. 80의 지원과 동조 없이는 19가 1과의 밥그릇싸움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전무한 탓이다. 밥그릇싸움에 밑줄 쫙. 밥그릇싸움이 전적으로 나쁘다고 욕하기만은 어렵다. 인류역사의 본질은 밥그릇싸움이었다. 밥그릇싸움의 주체가 민족이라 해석하면 민족주의 사상이고, 계급이 밥그릇투쟁의 주역이라고 믿으면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이 된다. 관건은 밥그릇싸움이 야기한 결과가 누구의 이익이 되느냐는 거다.
‘Whose Benefit!’ 모든 정치사회적 현상을 천착할 적에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고정불변의 준거이며 법칙이다. 예컨대 노무현 정권이 영남 B급 정권이 되는 까닭은 열린우리당이 영남지역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아서가 아니다. 노무현이 집권한 덕분에 가장 커다란 이득을 거둔 인맥과 집단이 경상도 2진급 인재들이어서다. 노정권이 아니었으면 김병준이니, 노혜경이니, 정윤재니, 유시민이니, 김두관이니, 변양균이니 하는 부류가 무슨 능력과 재주로 청와대에 들어가거나 장관벼슬을 하겠는가?
19는 80이 옆에서 박수부대 노릇을 해줘야만 1의 몫을 빼앗을 수가 있다. 19가 기득권을 쥔 1로부터 빼앗아온 힘과 자원을 80과 고루, 두루 나누어가졌다면 내가 이명박 빨아준다는 오해를 자초하면서까지 지금 같은 글들을 쓰지는 않았을 게다. 19는 19들 자신만을 위해 정치권력을 행사한다. 1이 80에게 간간이 뿌렸던 떡고물조차 19는 돌리지 않는다.
개평도 주지 않는 인정머리 없는 신흥 중산층 중심의 새로운 지배계급을 향한 민중의 원망과 분노야말로 이른바 ‘싸가지론’이 유행하게 된 근본배경이다. 개평도, 떡고물도 챙겨주지 않는 대신 19가 80에게 선사한 것은 서민대중의 살림살이, 즉 민생경제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장황한 잔소리다. 노무현의 시범 아래 조기숙 홍보수석과 국정홍보처 고위관료들이 수시로 늘어놓는 장광설이 이를 입증한다. 이로 말미암아 80은 21세기 대통령의 수준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무지하고 몽매한 조선시대의 신민들이 되어버렸다.
건조한 이론만으론 민심을 승복시키기 불가능하다. 19가 80의 친구이고 동지인 것처럼 교묘하게 위장하는 소품과 무대장치가 필요하다. 이럴 때마다 19가 빼어드는 전가의 보도가 있으니 다름 아닌 80년대의 추억이다. 때로는 70년대의 기억도 동원되고. 작품의 제작동기와는 상관없이 ‘효자동 이발사’와 ‘화려한 휴가’ 유형의 한국영화들은 19와 80이 어깨를 나란히 겯고 1의 독재와 폭압에 저항했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애초의 설치목적이 뭐였든 과거사위 등의 국가기관들은 한국사회의 기본모순이 1과 80 사이의 갈등에서 생성되는 것처럼 현실을 호도하기 일쑤다.
19와 80의 대립과 분열을 은폐하는 지능적인 정치기동, 정확히 말해 고등사기 수법에 있어서만큼은 19의 주류인 현재의 범여권을 쁘띠 부르주아 신자유주의세력이라 비판하는 좌파진영 또한 뒤지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세력의 추억마케팅에 상응하는 진보좌파들의 히트상품이 바로 소수자 문제다. 동성애, 국가주의, 페미니즘, 사형제도, 양심적 병역거부 따위를 둘러싸고 빚어지는 지식인 취향의 시끄럽고 영양가 없는 현학적 논쟁들 말이다.
80의 눈높이에서는 사이비 개혁세력이나 강남좌파들이나 도찐개찐이다. 굳이 차이를 따지자면 386세대 출신이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전자는 공적 장소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면서 집에 돌아와서는 자식들 미국으로 조기유학 보낼 궁리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추종자로 구성된 후자는 스타벅스에서 우아하게 커피를 홀짝거리며 ‘체 게바라 평전’을 읽는다. 그러면서 미국식 세계화의 폐해와 맹점을 핏대를 세우며 개탄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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