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의 여로조사 지지율이 50퍼센트 이하로 떨어질 조짐이 좀체 보이지 않고 있다. 혹자들은 BBK 의혹의 열쇠를 쥔 김경준만 입국하면 이명박을 거꾸러뜨릴 수 있다고 자신하는 모양이다. 국민원로는 김경준이 미국 어느 감옥에 계속 갇혀있기를 바란다. 희망이 절망으로 급변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김경준의 전격 귀국에도 불구하고 판세는 미동조차 하지 않을 형국이고, 그의 한국송환에 최후의 승부수를 걸었던 사람들의 울분과 좌절감만 자살하기 일보 직전까지 줄달음칠 테니까.
폭탄은 불발탄으로 남아있을 때가 가장 위협적인 법이다. 김경준의 거취는 이명박이 정권을 잡고 있는 내내 한국에 오는 것도 아니고 안 오는 것도 아닌 같기도 자세를 띠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다. 마찬가지 원리다. 정동영은 노무현의 염장을 북북 긁어야 옳다. 노무현 입에서 정동영과 호남을 향한 노골적인 막말과 저주가 거침없이 폭발해야만 이명박과의 격차를 줄일 최소한의 가능성이나마 열린다. 노무현은 고장난 시한폭탄이다. 뇌관을 제거할 수 없다면 아군 진영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터지도록 유도하라.
얄팍한 정치공학을 잠시 소개해봤다. 전략의 기조는 물론 네거티브다. 그러나 과도한 기대는 하지 마시라. 네거티브에만 의지해 이기는 선거는 없다. 17대 대통령 선거는 특히 더하다. 왜냐? 하강할 낌새가 없는 이명박의 높은 지지도 자체가 대중의 거대한 네거티브 심리에 편승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명박을 겨냥한 네거티브는 알아도 자기들을 노린 네거티브는 모르는 현실, 이른바 민주화세력이 직면한 치명적 딜레마이자 시대적 비극이다.
이제껏 우리는 범여권이 이명박을 상대로 네거티브 공세를 펼치는 걸로 착각해왔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최근에 들어와서야 사태의 진면목을 비로소 깨달을 수가 있었다. 스스로가 진보적이라고, 지식분자랍시고 찧고 까부는 인간들은 절대 알아채지 못할 진실 말이다.
사회는 단일하고 동질적인 공동체가 아니다. 무수한 이유로 말미암아 때로는 우연히, 때로는 필연적으로 엮이게 된 이익집단들의 연합체다. 집단들이 가진 힘의 유무와 강약에 따라 단층과 경계가 형성되게 마련이다. 사회가 두 개의 커다란 집단으로 나누어지는 현상은 보통 양극화로 일컬어진다. 강남부자들의 물질적 욕망을 대변하는 이명박마저 이의 해소와 극복을 공약할 정도로 양극화는 한국사회의 대표적 현안으로 부각된 상태다.
우리사회는 정말로 양극화된 것일까? 실상은 딴판이다. 한국사회는 2 대 8, 또는 5 대 95의 양극화 사회가 아니다. 솥이 세 개의 발로 정립하는 것처럼 우리나라 또한 세 개의 계급으로 갈라진 3극 사회다. 백분율로 표현하면 1 대 19 대 80의 분포로 나뉜다. 1은 강남과 재벌로 대표되는 전형적 부유층이다. 80은 민중이다. 노동자, 농어민, 자영업자, 실직자 등이다.
문제는 19다. 요 19프로가 김영삼 정권이 출범한 이래 한국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1할 9푼의 주도권은 노무현 정권 치하에서 절정기를 구가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추진은 19프로의 이해관계가 국가정책에서 완벽히 관철되고 구현된 사례다.
그럼 이들 19는 과연 누구인가? 사회학에서 ‘Yuppie(여피)’로 부르는 무리들이다. Yuppie는 Young, Urban, Professional의 약자에서 비롯된 단어다. 미국사회서 여피족이란 대도시 근교에 거주하면서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는 전후의 베이비붐 세대를 지칭한다. 한국에선 수도권에 살면서 안정된 일자리를 확보한 386세대가 여기에 안성맞춤으로 해당되리다.
지역적 관점에서 노무현 정권의 근거지는 부산경남이다. 노정권을 부산정권으로 불러달라는 문재인의 호소는 단순한 선거용 수사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정권이든 지역적 기반만으로는 생존을 도모하기 어렵다. 계급적 맥락에서의 핵심(Core)이 필요하다. 위에서 언급한, 수도권에 살면서 안정된 직장을 가진 386세대가 노무현 정권의 계급적 중핵이다.
좌파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노무현 정권의 계급적 성격이 낳은 모순된 산물이다. 상위 1프로 기준으로 노정권은 분명 좌파정권이다. 하위 80%가 볼 적에 노무현 정권은 철두철미한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이다. 유럽에서 바라보면 서쪽에 위치한 미국이 한국에서는 동쪽에 자리한 이치와 똑같다. 모든 정치적 좌표는 늘 비교적이며 상대적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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