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이회창이었다. 포스가 느껴졌다. 이명박을 제외한 나머지 대선주자들은 이회창의 세 번째 대권도전을 계기로 순식간에 듣보잡이 돼버리고 말았다. 듣보잡은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을 뜻하는 인터넷 은어다.
2002년 당시 진보개혁진영은 이회창을 거악(巨惡)이라 일컬었다. 이회창에 견주면 이명박은 일반잡범 수준인 셈이다. 5년 전 거악 이회창을 무너뜨렸던 세력은 현재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쓰러졌던 거악이 기운을 차리고 다시 일어서고 있건만 거악을 분쇄한 주역들은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서로 으르렁대고 있다.
국민원로는 이회창이 한나라당을 탈당해 무소속 후보 자격으로 독자출마를 발표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너무도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기자들의 취재열기는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TV 볼륨을 죽이고 화면 밑을 흐르는 자막을 무시하고서 방송을 시청했다면, 11월 7일에 이루어진 이회창의 정계복귀 선언은 대통령 선거 다음날 아침에 진행되는 차기 대통령 당선자의 기자회견 분위기와 흡사하게 생각되었으리라.
이회창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내가 평소 얘기하던 지론에 정답이 담겨있을 터. “3족이 멸문지화를 당할 각오가 서 있지 않으면 대선판에 끼어들지 말라!”는. 세와 조직이 있었던 정동영과, 논리와 당위성을 갖춘 문국현 모두가 노무현과 단호히 결별하기를 겁냈다. 그들은 현직 대통령과 척을 진다는 사실을 부담스러워했다. 이명박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세론에 안주해 몸조심과 현상유지에만 급급함으로써 이회창의 명분 없는 귀환을 위한 멍석을 깔았다. 이명박은 이회창의 과거다!
참으로 기막히게도 오직 이회창만이 멸문지화를 각오했다. 아니, 두 차례의 대선패배를 겪으면서 이회창은 이미 멸문지화를 당한 상태였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인간은 잃을 것이 없는 자이다. 2007년 대선정국에서 이회창은 정동영과 문국현은 물론이려니와 심지어 권영길과 이인제보다도 잃을 게 적다. 잃을 게 없는 사람, 잃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만이 한국정치 최고의 강장제이자 보양식인 노명박탕을 마실 수가 있다. 그런 이유로 말미암아 국민원로가 노명박탕을 빨리 먹으라고 정동영 진영과 문국현 캠프를 채근했던 것이다.
노명박탕을 과감히 음복한 이회창은 회춘에 성공할 전망이다. 이명박이 싫고 노무현이 미운 유권자들에게 그는 노무현을 심판하고 이명박을 응징할 효과적 대안으로 떠올랐다. 노명박탕을 제조한 나를 원망하지 마시라. 책임은 노명박탕 마시기를 꺼려한 당신들한테 있다.
저주와 축복은 실상 종이 한 장 차이다. 선한 결과를 빚으며 적중된 예언은 축복이고, 악한 방향으로 결실을 맺으면서 실현된 예측은 저주다. 우리나라에는 두 명의 유력한 김대중이 존재한다. 동교동의 김대중은 축복의 화신으로 칭송됐고, 신문로의 김대중은 저주의 대명사로 지탄받았다.
신문로 김대중의 전유물이었던 저주가 동교동 김대중에게 조용히 양도된 듯싶다. 1 대 1 구도가 창출되리라는 DJ의 점괘가 신통하게 들어맞았다. 저주의 형태를 띠고서. 그렇다. 수많은 국민들이 갈망하고 기대하던 이명박과의 대등한 싸움이 드디어 성사된 것이다. 이명박 대 이회창의 혈투로.
지금 30대 초반에서 40대 중반에 이르는 나이대의 사람들은 옛날 TBC와 KBS에서 연달아 방영됐던 ‘이상한 나라의 폴’이란 만화영화를 기억할 게다. 거기서 제일 강렬하고 임팩트 있는 캐릭터는 주인공 폴과 그의 친구들이 아니었다. 악역이었던 대마왕과 대마왕의 똘마니 버섯돌이었다.
이명박과 이회창 양자대결로 압축된 17대 대통령 선거 판도는 대마왕과 버섯돌이의 협력과 경쟁의 애증관계를 연상시킨다. 뿔 하나가 부러져 뒷방으로 밀려난 대마왕은 버섯돌이를 대리인으로 내세운다. 와신상담한 끝에 결국 마력을 되찾은 대마왕은 버섯돌이를 토사구팽하고서 전면에 재등장한다. 만화에서는 개과천선한 버섯돌이와 힘을 합친 폴 일행이 대마왕을 무찌르고 악의 무리를 소탕한다.
선과 정의가 승리하는 만화와 대한민국의 현실은 천양지차다. 폴과 폴의 친구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대마왕과 버섯돌이가 세계의 지배권을 놓고 다툰다. 원기 회복한 대마왕이냐? 대마왕 없는 사이에 부쩍 자란 버섯돌이냐?
한국사회가 부패한 보수 일색의 일본을 지나 계엄령으로 통치하는 버마나 파키스탄 단계로 떨어질 조짐이다. 이회창의 출마선언문이 군사독재정권의 계엄포고문과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출사표를 낭독하는 이회창 어깨 위에 별 두 개만 올려놓으면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영락없이 판박이일 어조와 내용이었다. 역사의 후퇴란 소리마저 어쩌면 사치스럽겠다. 이회창 대 이명박, 이명박 대 이회창의 양강구도가 고착되면서 대한민국은 영락없는 4차원의 세계로 빠져들 테니까. 대마왕이든 버섯돌이든 우리나라를 자유와 평등, 정의와 민주가 깡그리 죽어버린 사(死)차원 세계에 가둬둘 것이 뻔하다.
대마왕 손아귀의 니나를 구해내기는 해야 하는데 김응용 삼성 라이온즈 사장이 해태 타이거스 감독 시절 했을 법한 탄식이 생뚱맞게 입에서 흘러나온다. 마술차도 없고 요술봉도 없고, 삐삐도 없고 찌찌도 없고…. 에라 모르겠다. 백마 탄 초인 기다리는 마음으로 노명박탕이나 계속 달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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