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MBC는 당시 25살에 불과한 입사 초년생 백지연을 9시뉴스 메인앵커로 기용하는 파격적 인사를 단행한다. 이러한 MBC의 기획은 크게 성공해, 90년대 들어 모든 방송이 따라 했다. 이른바 메인뉴스의 진행자를 남성은 40~50대 중년으로, 여성은 20대 미혼으로 구성하는 방식이다.
그 후 20년이 지난 2008년 4월, SBS는 입사 6개월 차인 박선영 아나운서를 주말 8시뉴스 여성 앵커로 전격 발탁했다. 전임자는 윤현진 아나운서였다. 알려진 바로는 그의 하차 이유는 '결혼 준비' 때문이라고 한다.
1988년 민주화 시대 이후, 대한민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서구의 페미니즘 사상이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엘리트 여성을 중심으로 남녀차별의 벽을 하나씩 무너뜨렸다. 그 결과 최근 정계·경제계·언론계·학계에서 한국 여성들의 활약은 눈부시다. 이러한 전향적 분위기 속에서, 대중의 의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공중파 메인뉴스의 남녀 앵커 구도만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성앵커의 성차별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비판이 쏟아졌다. 주로, 왜 외모가 예쁜 여성만 기용하느냐, 왜 뉴스를 읽어주는 앵무새의 역할로 제한하느냐 하는 것들이었다. 이에 방송사는 호감 가는 외모가 뭐가 문제냐, 앵커는 모든 뉴스를 이해하고 있다는 등의 상투적인 답변만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중요한 논점이 빠지게 되었다. 바로 여성에게만 부여되는 '나이 차별'이다.
바로 얼마전 58살의 MBC 엄기영 앵커가 9시 뉴스데스크를 진행할 때 파트너였던 박혜진 아나운서의 나이는 31살이었다. 무려 27살의 나이 차이이다. KBS의 경우 9시 뉴스를 진행하는 남녀 앵커의 나이 차가 17살이다. 그나마 SBS 평일 8시 뉴스에서 김소원 앵커와 신동욱 앵커의 나이 차가 10살 미만으로 최소이다. 외모가 잘났든 못났든, 직종이 기자든 아나운서든 상관없이 모든 방송사가 나이 차 법칙만큼은 철저히 지키고 있다. 어쩌다 실수로라도, 40대 이상의 원숙한 지성미를 갖춘 여성앵커가 등장할 만한데, 최소한 메인뉴스에서는 이런 일은 없다.
방송사들은 늘 "시청자가 원하기 때문"이란 답만 반복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여성의 지위 상승이 보편화된 2000년대 들어, 대중문화에서는 30~40대 여성들의 인기몰이가 지속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47살의 중견 탤런트 양미경 신드롬이다. 양미경은 드라마 MBC 〈대장금〉에서 지적인 리더십을 갖춘 한상궁 역을 맡아, 모든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뿐 아니라, 김혜수 고현정 김희애 황신혜 등등의 활약, 가수 이승기의 노래 〈내 여자라니까〉에 담긴 누나 신드롬, 이제 일상화된 연상연하 커플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시대 흐름에 한참 뒤떨어진 쪽은 시청자가 아니라 오히려 방송사의 간부들이다.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보조형 젊은 여성 앵커를 보며, "아직 우리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는 그들만을 위한 판타지나 즐기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설사 그들 말대로, 시청자들이 원한다 해도, 젊은 여성이 읽어주지 않으면 보지도 않는다는 수준의 뉴스를 왜 비싼 돈 들여 제작해야 하는지, 방송사 스스로 반성해야 할 일이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한국의 여대생들이 닮고 싶은 해외 여성은 마거릿 대처, 올브라이트, 힐러리 등등 세계적 리더들이다. 그러나 닮고 싶은 한국여성은 무려 10년 이상 방송사 메인뉴스 여성 앵커이다. 이런 괴리감에 방송사 간부들의 책임이 없다 자신할 수 있는가?
미국의 여성앵커 자넷 페킨포는 48살의 나이에,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며, 방송사 포스트위크를 상대로 소송하여 이겼다. 한국은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률 제2장 3조에는 "공공기관 및 사용자는 고용분야에 있어서 남녀의 평등한 기회와 대우가 보장되도록 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여성부는 오직 여성앵커에게만 젊은 나이를 강요하며, 결혼을 이유로 하차시키는 방송사들이 매일같이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또한 최소한 젊은 시청자들은 같은 세대 여성들이 너무 이른 나이에 소모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도 기억했으면 한다. / 변희재
* 조선일보 기고글을 수정보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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