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13일 즈음부터 촉발되기 시작된 촛불 시위가 벌써 달 포 째 접어들고 있다. 필자의 솔직한 심정은 장맛비가 내려서 며칠이라도 휴식기를 가지는 동안,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약간이나마 스스로 자성의 시간을 가져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충분히 의견을 피력해서 이젠 뉴욕 타임즈 등 세계적인 신문에도 나고, 미국 영국 등 서구 유럽에 까지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또 이에 힘입어 한미간에 소고기 재협상까지 하게 되는 단초를 열게 한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 촛불시위 자체에 대한 다소간의 냉각기를 가진 후에 다음 행동을 해도 손해 보거나, 더구나 먼 후일에 후회할 일이 없으리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순진한 어린 학생들까지 참여하고 있는 판국이니 더욱 그렇다. 자칫 잘못하면 중국 역사를 수 십 년이나 후퇴시켰던 1960년대 중반의 역사적 참화였던 문화혁명기의 재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작 열병처럼 회오리에 빨려 들어갔던 그 당시 십대의 청소년들이 두고 두고 후회하고 참회를 하고 있는 문화혁명 때의 홍위병(紅衛兵) 사건처럼 그들의 인생에 큰 오점을 남길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빵을 훔친 소년
불과 몇 개월 전,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사는 사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허기에 지쳐 견디다 못한 한 어린 소년이 빵을 훔치다 잡혔다. 그 소년은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절도죄 명목으로 재판을 받았지만 어린 소년이었기 때문에 구치소로 가지 않고 소년원으로 갔을까? 손해배상 할 돈조차 없으므로 3일 간 그 빵집에서 일을 해주고 배상했다느니, 초범이고 가난한 소년이었기 때문에 정상참작을 받아서 재판관으로부터 사회봉사명령 72시간을 명령받았다느니 하는 종류의 상상이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놀라지 마라. 그 소년은 빵을 훔쳐 먹은 죄로 잡힌 후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목을 강제로 짤라야 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성인 남자들 중, 어느 누구도 그 끔찍한 만행을 말리려 하지 않았다. 그 공동체에서는 지엄하신 율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절도죄를 범한 그 소년의 손목을 짜른 징계는 너무나 당연했다. 아니, 그 소년의 손목이 짤려 나가는 광경을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몇몇 사람들은 심지어 이정도 까지 생각했음직하다. ‘손목을 하나를 짤라 내는 사소한(?) 처벌로 저 소년이 일생동안 남의 물건을 훔치는 지극히 나쁜 행위는 아예 생각조차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 소년을 위해서도 저런 처벌은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사실을 말하면, 그 소년은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어떤 신념이 옳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무지함과 잔인함에 어이없이 희생된 것임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억울한 사람은 손목을 짤린 그 어린 소년이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악한 범죄자들은 빵을 훔친 소년이 아니라, 손목을 짤라 소년을 교도하겠다고 나선 무식한 마을 사람들이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필자가 얼마 전 해외토픽으로 보고 치를 떨었던 이 기사를 되살려 언급하는 이유는 배고파서 그 소년이 빵을 훔쳐 먹을 수 밖에 없는 가난한 처지에 있었음을 마을 사람들이 이해해 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감상적인 주장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가난한가 부자인가 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깊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우리 사회, 아니 우리 인류 모두에게 말하고 싶은 건 우리 인간성의 한계에 대한 본질적 문제로 진정으로 다음이다.
도덕주의(원리주의)의 일그러진 얼굴
“인간의 이성(理性)은, 죄를 저질러서는 안된다는 절대적 진리를 외치는 핏대선 목울대에 곤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설령 아무리 죄를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거기에 준하는 적절한 정도의 처벌에 그쳐야 한다고 조용히 말할 때, 비로소 그 빛을 발한다. 이에 과도한 형벌을 가하는 건,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의 깊고 어두운 내면 속에 또아리 틀고 있는 비열함과 무지함, 그리고 도저히 어쩌지 못할 폭력근성과 잔임함을 드러내기 위한 그럴듯한 핑계꺼리로 타인의 약점을 악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냉정하게 지적해 줄 때, 우리 인류의 참이성은 빛난다는 점이다“
2004년 8월 즈음, 친일파 논란이 한참이었을 때, 필자는 아무리 친일행적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친일의 정도를 형량해서 등급제를 만들어서 거기에 합당한 정도의 사회적 비난과 역사적 심판을 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몇몇 사람은 예외의 경우겠지만, 단지 친일을 했다는 이유로 그 친일한 행적의 정도보다 지나치게 과도한 징계와 비난을 일삼는 건, 사회정의 차원을 벗어난다. 실제로는 단지 도덕적 우위에 서서 과도한 폭력과 잔인함을 맘껏 표출하고 싶은 어두운 본능을 드러내기 위한 좋은 핑계꺼리로 친일행적을 악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친일파 등급제로 우리 인간들의 폭력성을 제어하자는 필자의 이 주장 또한 도둑질을 하면 안된다는 원리주의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쳤다는 이유로 어린 소년의 손목을 짜르는 극악한 잔인함을 아무 꺼림낌도 없이 저지를 수 있는 불완전한 인간성에 관련한 필자의 냉정한 인식에서 나왔다고 밝힐 수 있다. 인간이 섬뜩할 정도로 잔인하고 비열해 질 때가 바로 자신의 비열함과 잔인성을 이런 도덕적이고 원리주의적 방패로 가릴 수 있을 때다. 필자는 이를 제대로 간파했을 뿐이다.
위와 같은 일이 문명화가 덜 된 먼 나라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하는가? 불과 백 년에서 몇 십 년 만 뒤돌아보면 이 땅의 조선 사회도 그랬다. 시집 온 지 일주일도 안 되어 남편을 잃은 꽃다운 청춘이 재혼도 못하고, 평생을 수절하면서 한(恨)의 세월을 살아야 했던 일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자문해 보라! 자고로 열녀는 일부종사해야 한다는 도덕적(성리학적) 원리주의 때문이었지 않은가?
인류가 점점 문명화될수록, 그 중에서도 이성과 지성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비록 같은 범죄라도 그 처벌은 과도한 도덕적 원리주의에서 발원하는 잔인함 대신 합리적인 교화가 주목적이다. 심지어는 아무리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일지라도, 과거에는 당연시했던 사형만은 가급적 피하고자 하는 추세 또한 인간 이성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반지성과 이대통령의 탄핵
필자도 한미간의 쇠고기 협상의 결과가 마음에 썩 내키진 않는다. 하지만 약소국으로서 그것도 경제위기에 처해있는 나라의 수장으로서, 침체 일로에 있는 한국 경제를 살리기 위한 고육책의 하나였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불과 한 두 달 전만 해도 어린 아이가 아파트에 엘리베이터에서 폭력을 당한 사건을 목도한 후에, 직접 경찰서로 뛰어갔던 대한민국 유사이래 최초의 대통령이 이명박이다. 어린 아이의 안전과 생명권을 지키기 위해 직접 경찰서까지 달려가서 범인을 잡도록 종용한 사람이 갑자기 돌변해서 국민들에게 미친 소고기를 먹도록 방치하고 조장할 정도로 국민의 안전과 생명에 그토록 무감각한 인물로 변질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이대통령은 소고기 협상이 이토록 큰 파문을 일으킬 지 짐작을 못했을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신의 반대진영에게 이렇게 이 문제를 집요하게 이용해 먹을 줄을 상상도 못했을 것이라고 보는 게 더 올바를 것이다.
그런데 무역협상에서의 이 정도의 행정적인 잘못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이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시킨 대통령의 탄핵까지 주장하는 건, 인간의 양심과 이성에 비추어 과연 올바른 행동일까? 빵을 훔쳐 먹었다고 손목을 짜르는 행위처럼 반이성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은가? 멋모르는 중고등학생들은 그렇다고 치자. 뻔히 알만한 사람들까지 이런 비이성적인 행위를 진정시키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앞장 서서 부채질하고 있음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 얼마만큼 후지고 무식하고 비열한 인간들이 포진해 있는가 하는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 사건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자칭 진보진영이라고 불리는 지식인 몇몇의 행동은 특히나 이맛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들의 비열한 작태는 이번 대선에서 국민들에게 진절머리를 치게 했던 일을 일삼던 수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제의 지식채널 동영상
처음 보았던 지식 채널의 동영상은 필자가 보기에도 섬찟했다. 미국의 축산업자는 이익만을 쫒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소에게 육식 사료를 먹인다. 육식 사료를 먹은 소는 광우병에 걸린다. 이때 앉은뱅이 소 영상이 보여진다. 다음 그 소고기를 먹고 인간이 광우병에 걸린다는 아주 도식적인 이미지의 연결이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에피소드를 교묘하게 편집하여 연결한 동영상이 가진 이미지들 사이 사이에 각각 적게 잡아도 수 만분의 일 정도의 확률이 개입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조금만 계산해 보자. 미국의 축산업자는 이익만을 쫒는 사람들이라고 치자. 왜냐? 축산업이 자선사업이 아니고 돈벌려고 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인정. 확률은 1이다. 또 여기에 미국 축산업자는 돈벌기에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육식 사료를 먹인다는 점도 인정하자. 이것도 확률은 1로 치자. 지금까지 확률은 1 곱하기 1로 1이다.(물론 미국 축산업자 중에도 네델란드나 뉴질랜드 등에서 볼 수 있는 가끔씩 있는 자연친화적 축산업자들도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은 제외하자)
그런데 육식 사료를 먹은 소가 전부 광우병에 걸리는가? 이건 지극히도 희박한 확률적인 문제다. 그것도 무려 수백만만 마리에서 불과 몇 마리가 걸릴 수 있는 확률의 세계다. 그 중 수 십 마리 수 백 마리가 걸린다고 해도 그건 확률상으로 수 만 분의 1의 확률에 불과하다. 이 확률을 높게 잡아서 5만 분의 1로 잡아 보자. 전 세계로 수출되는 미국 소고기 중에서 유독 광우병에 걸린 소가 이게 한국에 수입될 확률은 얼마일까? 또 다음 단계로 인간이 광우병 걸린 소고기를 먹으면 모두 광우병에 걸리는가? 이건 에이즈 환자와 악수하면 에이즈에 걸리는가 하는 경우보다 확률적으로 복잡한 문제다. 물론 에이즈 환자와 단순히 악수하는 것으로는 에이즈에 전염되지 않는다고 밝혀져 있다. 하지만 에이즈 환자와 그와 악수하는 두 사람의 손에 미세한 상처라도 나 있다면 상황이 다르지 않을까? 이런 걸 생각하면 미국 NBA 선수 중에서 에이즈 환자로 밝혀졌던 매직 존손이란 선수와 함께 농구시합을 함께 선수들은 얼마나 강심장인 사람들이었을까? 매직존슨이 HIV 양성반응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도 에도 버젓이 경기를 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농구는 거친 몸싸움을 하는 운동경기가 아닌가? 이들이 한국에서 일고 있는 광우병 관련 소동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이런 저런 확률을 침착하게 따져보면 미국에서 육식사료를 먹고 광우병에 걸린 소(수만 분의 1의 확률)에다 한국으로 수출되어(확률 미정) 곱하기 한국인이 그걸 먹고 광우병에 걸릴 확률(수 만 분의 1의 확률) 해서 적게는 수 십 만 분의 일, 많게는 수백만 분의 1에 불과하다. 이렇게 조금만 생각해보면 지식 e채널에 나온 동영상은 과장을 해도 너무나 터무니 없이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편집이 의도된 것이든지 단순한 실수이든 간에 상관없이 하는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터무니없는 가짜 지식을 전파하는 데 지식채널이 앞장선 어처구니없는 경우다. 이 동영상이 주는 메시지는 한단계씩 건너올수록 분모가 천문학적 숫자로 확대되는 확률적인 문제가 아니라 마치 p 이면 q다. 그리고 q이면 r다. 그러므로 p이면 r로 직행하는 삼단논법같은 전개다. 삼단논법을 확률적으로 논하면 그 가능성은 1 즉 완전하게 100% 그 자체지만 실제 광우병에 관한 과학적 지식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이건 한단계 건너는 과정에서 분모가 무려 수십만이 증가해서 지극히 희박한 확률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채널이라는 이름하의 동영상이 지식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가짜 지식을 온누리에 전파해서 대한민국 사회 전체를 들끓게 만들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이 동영상을 액면 그대로 받아 들이면 마하나의 예외없이 결정론적 데이터의 연속으로 오인하기 십상이다. 이 동영상을 보고 하도 놀란 나머지 필자가 잘 아는 지인이자 서울대 동문 선배 겸 과학자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가 대뜸 하는 말, “ 사람이 광우병 걸려서 죽을 확률은 벼락에 두 번 맞고 살아 날 확률보다 어렵다는 로또 당첨확률 보다 훨씬 낮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한국 내에서도 먹을 음식이 하나도 없다” 라고 확신에 찬 대답이 돌아왔다. “ 한국 사회 너무 웃긴다. 더구나 한국 지식인들이 썩어도 너무 썩었다” 또 한 사람은 특히 “진중권 이라는 그 사람, 정말 서울대 나온 사람 맞어? 아무리 과학적 사고가 일천할 수도 있는 미학과 출신이라지만 명색이 서울대 출신이 그 정도 수준 밖에 안된다는 점을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물론 필자조차도 진중권에 대해서는 그가 같은 대학교 출신 선배라는 사실이 너무나 의아하다. 그가 서울대 동문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챙피하고 부끄럽다고 느낀 적은 이번 촛불시위 관련 뿐만 아니다. 황우석 사태 때도 그랬고 디워논란 때도 그랬다. 물론 이 점 뿐만 아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진중권 스스로 자신의 무식함에 부끄러움조차 아예 못 느끼는 사람 같으니, 그게 더 불가사의다.
흡연과 쇠고기에 관한 심리
담배를 오랫동안 피우다가 폐암에 걸려 죽을 확률과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려 죽을 확률 중 어느 쪽이 더 높을까? 흡연으로 폐암에 걸려 죽을 확률은 광우병에 걸려 죽을 확률보다 가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한데 이런 담배의 폐해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그렇게 민감한가? 담배 피우지 말자고 촛불집회를 여는 사람이 왜 없는가? 담배는 간접흡연으로 그 주위 사람에게조차 큰 피해를 끼친다는 점에서 광우병과 그 위험성과 폐해 자체로만 비교해 보면 절대로 비길 바가 못된다. 한데 흡연과는 달리 광우병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민감한가? 그건 우리 인간의 이기심이 크게 작용한다. 담배는 그 폐해가 광우병보다 훨씬 더 심각하지만, 내가 원해서 피우고 또 나는 영화의 주인공과 같아서 담배를 피워도 다른 사람들처럼 폐병에 걸려 죽는 일이 나한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쉽게 믿고 심리적 방어막을 풀어 버린다. 일종의 소영웅적 심리와도 관계있는 현상이다. 한데 미국 소고기 수입은 내가 결정하는 사항이 아니다. 난 타인의 결정이 나의 운명에 깃털만큼의 영향력을 가질 가능성조차도 싫다. 왜냐? 나는 소중한 존재니까. 그게 설사 수백만 분의 일의 확률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불쾌하고 화난다. 바로 이런 심리다.
진보진영에게 필요한 건 페어 플레이 정신
자칭 진보진영 인물들 중 대중들에게 “돌머리들의 애국질“ 같은 막말을 서슴치 않았던 진중권은 오히려 네티즌들로부터 “서울대 나온 돌대가리“ ”아이큐가 두 자리수가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의혹을 공공연히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진중권 같은 사람이 특별히 비약적인 발전을 해서 갑자기 일정한 수준에 이르기에는 뚜렷한 한계가 보인다. 진중권을 저대로 방치해두면 한국사회에 큰 피해를 끼칠 것이라는 필자의 불길한 예감이 서서히 현실화 되고 있음을 확인하여 한동안 씁쓰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그 정도 수준의 사람은 대중들이 이제는 걸러낼 정도의 자정능력도 길러가고 있음을 동시에 확인하게 되어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었다. 또한 그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이 몰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에이기에 애처롭게 보이기까지 한다.
미디어 다음과 MBC
다만 그를 제외하고서라도 많은 진보 진영 인사들이 진중권과 같이 몰락의 길을 걷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운동을 하기에 앞서서 일단 페어 플레이 정신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 그게 오래가고 또 목적한 바를 달성하는 길이기도 하다. 어느 진영이든지 간에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음을 목도할 때, 대다수 침묵하는 대중들은 그들에게 끔찍하게 질려가고 있을 뿐이다. 대중 운동은 바른 양심과 진정성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잠시 동안 상당히 많은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미디어 평론가로서 우리 한국에서 제 소임을 다하고 있는 변희재가 지적한 미디어 다음 등 여러 포털들도 이젠 책임있는 포털로 거듭나기 바란다. 포털이 엄청난 권력을 쥐고 있는 게 명백한 사실인 만큼, 이젠 그만큼의 책임도 함께 감당하길 기대한다. 특히 미디어 다음처럼 아고라 광장을 열어만 두고 그 모든 책임을 네티즌에게 돌리는 건, 책임 있는 신흥미디어 재벌로서의 기업가 정신에도 명백하게 어긋난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자 한다. 공영방송이라는 MBC나 KBS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대통령이 알아야 할 사실은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도 비열한 수단을 쓰는 사람들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엄연한 인간사다. 모든 사람들이 인간탄환이라는 칼 루이스 같이 100M 달리기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딸 수는 없지만 누구라도 그의 발을 걸어 넘어 뜨려서 금메달을 획득할 수 없도록 할 수는 있음이다. 이명박 대통령이이 명심해야 할 일은 정적이나 반대진영이 반드시 페어플레이만 하지는 않고 오히려 더티 플레이를 일삼는다는 점이다. 같은 당에 있는 박근혜 같은 정치인은 정말 양질의 정치인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대운하를 추진하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현실적인 판단이다. 대운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페어 플레이를 할 것 같은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피조물 중에서 유독 인간만은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거짓된 명분 쯤이야 수 백 개 도 꾸며낼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언론에 대한 파시스트적 폭력질
최근 대한민국 언론역사에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자신들의 논조에 맞지 않는다 하여 기업가들의 신문광고 행위까지 테러를 가한 것이다. 이는 촛불 시위와는 전혀 무관계한 정상적인 경제 행위까지 침해하고 있으니 이는 명백히 파시스트적인 폭력행위다. 디워 논쟁 때, 김조광수 등의 블로그에 가서 항변을 한 네티즌들을 보고 파시스트짓이라고 말했던 지식인들은 모두 어디로 숨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이들이 왜 이렇게 일관성이 없는지 나는 잘 이해할 수 있다. 왜 이들의 뇌리에는 애초부터 페어플레이 정신이 없었으니까? 분명 황우석 논쟁 때와 디워 논쟁 때와 일관성을 함께 가지려면 이런 파시즘적 폭력행위에 대해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비난의 목소리를 내야 할 사람들이 이들이 분명하지 않은가? 김조광수 등에 대한 네티즌들의 항의 행위보다 이번 행위는 더욱 심각한 폭력행위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이 광고에 대한 테러행위에는 선의의 제 3자까지 걸려 있다. 분명 언론사에 대한 광고에 대한 폭력은 우리 사회가 점점 퇴보하면서 어둠 속의 숨겨진 파괴적 본능에 굴복하고 있는 현상이다. 이젠 우리 사회의 참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다. 대한민국 최고의 문필가인 이문열의 ‘촛불 장난’ 이야기가 훨씬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필자만이 아니다.
정치를 배워야 하는 새대통령 이명박
정치를 잘 모르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이렇게 혹독한 신고식을 치루게 했으면 됐지 않은가? 위에서 필자가 말한 광우병에 관한 확률적 계, 사실 이런 건 다 필요 없다.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으면 된다. 어쩔 수 없다. 이게 바로 정치다. 지난 10년 동안 무능하기 짝이 없었지만, 두 대통령의 능구렁이 같았던 바로 그 정치질에 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를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유권자들이 무려 500만표 이상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선택한 이명박 대통령은 이번 대통령은 그 놈의 징글맞은 정치질 좀 하지 말고 제대로 일 좀 해 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 부임한 이명박 대통령마저도 여전히 그 놈의 정치질도 좀 배워야 한단다. 그게 국민의 뜻이란다. 그럼 정치 그까이껏 배우면 된다. 말 많았던 전기, 수도 등의 민영화를 추진하는 일도 없으리라고 한다. 대운하는 강행한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못하게 될 거라고 필자는 아주 예전부터 예견했었다. 경제나 실리보다는 명분에 죽고 사는 원리주의자들이 훨씬 많이 포진해 있는 대한민국에서 대운하를 지속하다가는 천 여명도 넘은 지율 스님 인간띠가 나타날 것이 뻔한데 무슨 수로 대운하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대운하를 건설하게 되면 수십만에 가까운 일자리 창출 등 긍정적인 에너지가 우리 사회에 들어와서 경제활성화에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는 점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사회에 이익이 되는 일일지라도 많은 반대를 무릎쓰고 추진하다 보면 그 반대비용도 무시할 수 없고, 때로는 그 반대비용이 더 클 수도 있다. 그게 인간 사회다. 국민이 반대하면 대운하 건설을 하지 않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으로 보아 이점을 잘 파악한 듯하다. 이제 촛불시위로 많은 목적을 달성했으니 그동안 이에 대한 담론을 형성해 왔던 사람들도 제발 인간 양심에 비추어 페어 플레이 정신을 회복하기 바란다. 본연의 자세를 잃고 너무 과도하게 진도를 나가면 그동안 촛불시위로 마련한 사회적 공감대 마저 상실할 게 뻔하다. 한국의 대중들이 그저 끌고 가는 대로 끌려 갈 만큼 우매한 사람들도 아니다. / 김휘영(문화평론가)
다음 연재로 ‘한국의 미래를 위해 이명박이 반드시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이어집니다.
ⓒ 미디어워치 & mediawatch.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