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 매일경제신문에서 30대들의 사회의식을 조사한 기사가 실렸다. 386세대처럼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20대처럼 관심의 대상도 아닌 잊혀진 세대를 주목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들이 한동안 한국사회에서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가 새롭게 주목받는 것은 특이한 정치적 성향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막연히 386세대를 진보라고 평가하는 인식과는 달리 30대들은 선거 때면 가장 진보적인 투표행태를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매일경제신문의 조사에서도 드러났듯이 이들이 20대 때는 결코 진보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되는 것과는 달리 한국의 30대들은 세월을 거슬러 가는 특이한 집단이다.
물론 보수화되거나 진보화된다는 것이 나쁜 의미는 아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사상의 자유가 있고 생물학적 연령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의사를 드러낼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의 정치적 선택이 과연 자신들에게 이로운 것이었나 하는 점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자해에 가까운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30대들은 현재의 20대들이 보여주는 탈정치화, 개인주의 등의 신세대문화를 만든 주인공들이다. 그런데 현재의 정치성향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20대들은 진보정권 10년이 보수진영에 남겨준 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소위 이해찬 세대로 불리며 일찌감치 진보정권의 실정을 겪었다. 당연히 이들에게 진보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러나 30대들은 20대 시절 진보를 막연한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었다가 외환위기라는 현실적 불만이 생기자 조금씩 왼쪽으로 진로를 수정한 경우다. 즉 20대와 30대는 자신들의 불행의 원인을 다른데서 찾고 있는 것이다.
30대들은 40대와도 뚜렷이 구별된다. 최근 386세대가 보수화되었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이 세대가 물적 토대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보수화는 무엇인가 지킬 것이 있는 자들이 누리는 특권이다. 386세대는 한국사회의 가장 호경기에 연착륙한 자들이다. 이들이 보수화되는 것은 필연적 결과였다. 또 하나는 이들이 학창시절 학습한 이념과 사회현실 사이에 괴리를 느꼈다는 것이다. 이런 이들에 대해서는 막연히 변절했다거나 타락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지만 치열한 삶을 산 자들의 솔직한 자기고백에 대해서 사회는 관대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권 386처럼 끊임없이 과거의 경력을 팔아먹는 자들이다.
그러나 30대들은 이 두 가지 면에서 모두 조건이 다르다. 한국사회의 비정규직 문제는 사실상 세대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생들은 자신의 바로 앞에서 기회의 문이 닫히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기준으로 그 이전에 사회에 진출한 세대는 귀족노조에 편입되고, 이후에 진출한 세대는 비정규직으로 전락했다. 이들은 생물학적 연령의 증가와 상관없이 물적 토대가 빈곤하기만 하다.
또 하나 이들에게는 386세대와 같은 이념의 학습기간이 없었다. 1990년대의 출판시장은 이들이 어떤 사상적 기반을 갖고 있는지 뚜렷이 기록하고 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 공산권의 붕괴와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한국사회의 좌파들의 지향점이 붕괴된다. 이것은 출판시장에서 사회과학 서적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하루키와 공지영, 신경숙의 소설이었다. 그렇다고 신문구독률이 높은 것도 아니다. 386세대에게는 한겨레의 창간과 관련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소액주주건 단순한 독자건 그들은 언론의 자유를 위해 몸소 참여한 이력이 있다. 그러나 이 세대에 이르면 신문시장과도 결별하게 된다. 1990년대 초반에는 현재의 인터넷 문화의 원형이라 할만한 PC통신의 시대가 열리는데, 이들은 활자문화와 결별하고 온라인 세계로 진입한 최초의 세대였다. 그래서 보수언론을 성토하면서도 정작 진보신문을 구독하는 일은 없다. 이것이 진보신문들이 위기에 봉착한 진정한 원인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념을 학습한 공간은 어디일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인터넷 공간이다.
스타벅스 좌파의 탄생
결국 386좌파와 X세대 좌파의 차이는 원전을 읽었느냐와 읽지 않았느냐의 차이다. 386세대는 상당수의 책들이 금서로 지정된 상황에서도 이를 필독서로 규정하고 골방에서 치열하게 학습했다. 이것이 그들이 갖는 힘이기도 하다. 그러나 30대들이 인터넷에서 학습한 이론들은 결국 원전을 편집한 2차 저작물이라는 한계를 갖는다. 그 편저자들이 모두 386세대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결과적으로 30대들이 지향하는 진보는 386세대가 쳐놓은 프레임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또 하나 30대들의 진보성향을 견인하는 것은 이 세대의 여성들이다. 1990년대는 이념이 퇴조하는 시기였지만 유독 페미니즘만큼은 득세를 했다. 30대들이 20대들만큼 경제위기의 희생자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이들이 불러일으키는 착시현상 때문이다. 한국의 30대는 남녀가 상반된 운명을 살았다. 남자들이 외환위기 이후 청년실업의 첫 희생자가 된 것과는 달리 1990년대 이후 실시된 각종 성평등정책은 이 세대에서 골드미스를 탄생시키며 ‘지옥으로 간 남자, 천당으로 간 여자’를 만들었다. 이들은 남자들 세계에서 386세대처럼 전대미문의 기회를 누리며 여성들 세계에서 패권그룹을 형성한다.
이들이 주도하는 인터넷 여성사이트들이 좌편향적이면서도 동시에 소비적인 성향을 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은 실상 물질주의적 가치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자들이다. 패션, 성형수술 관련 커뮤니티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진보이념과 조합을 이루는 것은 이를 하나의 패션 코드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영어가 대신하던 상류사회의 언어를 이제는 좌파적 언어가 대신하고 있다. 이들의 진보운동은 이념조차도 가진 자들의 유희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30대들이 선거 때마다 386세대의 정치적 보루 역할을 하는 것은 자해에 가까운 선택이다. 30대들에게 가장 악몽과 같은 시나리오는 386세대의 장기집권이다. 지난 2010년 6월 지방선거에서는 또다시 386세대 정치인들이 젊은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로 득세를 했다. 그들이 ‘젊은 피’라는 명분으로 정계에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인 2000년 4.13총선이었다. 그런데 십년이 지나서 아직까지 젊은 정치인으로 회춘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마치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젊음을 유지하는 서양전설 속의 뱀파이어를 연상케 한다.
이들이 누군가의 희생을 대가로 승승장구하고 있다면 그 희생자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 밑의 30대들이다. 10년 전 30대들이 ‘젊은 피 수혈’을 명분으로 정치권에 등장했다면 지금 정치권의 자정을 위해 수혈되어야 할 자들 역시 현재의 30대들이다. 그러나 지금 민주당의 386정치인 가운데 차기 총선에서 후배를 키워야겠다고 생각하는 자가 누가 있을까? 이미 국민적 심판을 받고 도태된 자들이 여전히 차기 총선에서 재기를 노리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들이 누리는 기간이 길어지면 질수록 30대들은 이슈에서 밀려나고 사회적 소외는 심화된다.
지금처럼 30대들이 386세대의 추종세력으로 남아있다면 그들이 겪어야 할 운명은 1930년대생 정치가들과 같을 것이다. 김대중을 마지막으로 1920년대생 3김 정치가 막을 내렸지만 그 뒤를 이은 것은 1940년대생 대통령이었다. 선배그룹의 추종집단으로 청춘을 보낸 자들에게 남겨진 기회는 없었다.
어느 세대나 앞선 세대를 극복하고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는 것이야말로 역사적 책무다. 30대들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견인했던 주역들이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버린 386운동권문화를 청산하고 대학가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져온 주역들이다. 이제 이 사회가 요구하는 386기득권들의 청산에 앞장서자. 이것이 30대들에게 부여된 역사적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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