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 본 칼럼은 2011-07-21 오후 11:10:13 <임재범의 나치논란은 서구문화 사대주의가 뿌리>의 제목으로 기사화되었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사유로 인해 삭제되었다가 김휘영 평론가님께 부탁 드려 복원되었으니 독자 여러분은 이 점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 주
[김휘영의 문화칼럼] 징기스칸과 히틀러
징♪ 징♪ 징기스칸 / 어쩌구 저쩌구 / 뭐라꼬 씨불쌌노 ♬
징♪ 징♪ 징기스칸 / 내일 갈까 오늘 갈까 / 내가 언제 묻고 갔나 ♪
훗다라학개액개핵개 훗바람빰빰 ♬ 웃라자잿재 읏재음헤으해 ♬
로마 제국까지 진격해 … ♪
청포도처럼 싱그러운 아가씨 윤은혜를 브라운관의 신데렐라로 만들면서 공전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 <포도밭 그 사나이>에서 바로 그 사나이 오만석(장택기 역)이 흥얼거리던 노래다. 이 노래의 원곡은 유로 혼성 댄스 그룹 징기스칸(Dschinghis khan)이 세계적인 빅 히트를 거둔 징기스칸이다. "한국에도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어 무려 16명의 국내 가수가 각각 다른 가사로 앞다투어 레코드로 취입하였다. 현재 시중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는 曺慶洙(조경수),金相姬(김상희)의「징기스칸」은 자신들의 독특한 창법으로 소화, 동양적인 맛을 더욱 살리고 있다 (경향신문 1979년 9월 28일-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제공)" 여기서 인기 가수 조경수는 현재 뮤지컬 스타이자 유명 배우인 조승우의 친아버지다.
경쾌하면서도 힘이 넘치고 중독성이 매우 강한 이 팝송의 독일어 가사를 보자.
Dsching, Dsching, Dschingis Khan, 칭 칭 칭기스칸!
he Reiter,ho Reiter, he Reiter immer weiter. 헤이 기사여, 호 기사여,계속
Dsching, Dsching, Dschingis Khan, 칭,칭, 칭기스칸.
auf Brüder,sauft Brüder, rauft Brüder immer wieder 형제여 싸워라, 형제여 마셔라. 형제여 (계속)
이 노래를 들으면서 여름의 무더위를 날려 보자.
독일 혼성 댄스 그룹 징기스칸의 경쾌하고 멋진 징기스칸 즐기기
접속이 너무 많아 혹시 이 동영상을 볼 수 없는 분들은 다음의 블로거 주소를 이용해 주시길 바란다. <여고 시절 추억의 노래 2 - 징기스칸> : http://blog.daum.net/swan-jyp/16512532 이 뮤비를 보면 아예 몽골족의 장군 의상까지 입고 흥겹게 춤을 추면서 징기스칸을 경배한다. 형식상으로는 경배지만 실상은 역사상의 원수였던 징기스칸을 즐기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가사도 "형제여 싸워라, 형제여 마셔라"라는 매우 호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런 의상과 호전적 가사를 담고 있음에도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있다. 독일이 역사적으로 자기 민족의 원수에 해당하는 징기스칸을 흥겨운 노래로 즐길 수 있는 근본적 원인은 몽골족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기 문화에 대한 강한 자신감과 자부심에서 비롯된다는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한국은 히틀러나 나치와는 역사적 트라우마 자체가 없다.
문화의식과 트라우마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1)히틀러 2)뭇솔리니 3)스탈린 4) 폴 포트 5)징기스칸 6)씨저 7)내 부모 형제를 죽인 놈 이 중에서 누가 가장 나쁜 놈일까? 를 선택하라고 해 보자.
누구든지 7) 번을 고를 것이다. 왜냐하면 나머지는 모두가 수백만 명이 넘는 대규모 학살을 감행한 인물들임에 틀림없지만 정작 나, 우리 또는 우리 선조와 별 볼일 없는 먼 나라의 그저 역사상의 인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7) 은 우리 의식에 생생히 살아 있는 대상으로 우리는 이들을 특별히 '원쑤'라 부른다. 문화 또한 마찬가지다. 문화는 어쭙잖은 역사의식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 속에 숨 쉬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우리 현실과 가까울수록 그 상처와 아픔은 강하고 시간과 공간이 멀수록 특별한 느낌이나 감정이 없는 것이다. 사실관계를 확인하면 나치가 무수한 유태인을 학살했지만 단 한 명의 한국인도 죽이지 않았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유럽인들에게 "나치= 찢어죽일 원수"로 등치되지만 그들과 역사적으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한국인에게는 그저 역사책이나 영화로만 보는 남의 일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도 벌써 반세기가 넘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나치=우리와 별 관계없는 놈들, 그거 한 개 얼마짜리?" 이런 관념이 대부분일 것이다.
유럽인들이 그들을 원수로 여긴다고 우리 한국인들까지 그들을 원수로 여겨야 할 까닭이나 의무가 없다. 왜냐하면 히틀러는 한국인에게 이토오 히로부미가 아니고 나치복장은 욱일승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까지 유럽인들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일종의 허위의식일 뿐이지 한 공동체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태도가 아니다. 또한 이건 서구문화에 대한 지나친 사대의식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 이미 망해 버린 명나라를 흠모하고 신흥강국 청나라는 오랑캐라 하면서 배척하는 해괴한 짓을 하다가 결국 병자호란을 불러 일으켜 전 국토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던 고리타분하고 황당한 사대주의자들을 연상시킨다. 그 당시 청군에 의해 유린당한 불쌍한 여인네들은 한강에 몸을 씻는 것으로 그 죄(?)를 묻지 말라는 인조의 특명까지 있었을 정도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이 당시 현실에 맞지도 않았던 사대주의에 매몰되어 전 민중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갔던 계층들이 바로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지식인들의 올바르지 못한 역사인식은 이렇게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변수로 작용하게 됨은 역사가 증언한다. 김형석-진중권 논쟁의 판결에 대한 필자의 앞 칼럼에서 자세히 논했듯이, 히틀러의 나치군에 의해서 철저히 파괴되었던 영국 런던의 패션 쇼에서도 나치즘을 가장 극명하게 상징하는 나치 문장(紋章)이 이용되었다(1992 년 02월 25일 동아일보 기획특집 기사). 이처럼 나치의 직접 피해 당사자였던 런던 컬렉션에서도 전세계인들이 볼 수 있도록 공공연히 행해졌는데, 역사적으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한국에서 웬 난리인가? 그것도 히틀러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퍼포먼스까지 했는데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이 해괴한 꼬락서니를 보면 서양인들이 얼마나 조롱했을 지 충분히 짐작된다.
1910년 이른바 한일 합방으로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왕의 이름이 뭔지를 아는 한국인을 별로 없다. 왜 그럴까? 이것이 한국인들의 역사의식이 빈곤하기 때문일까? 우리는 왜 한일합방의 주역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나 2차 대전의 한 축을 담당하며 동아시아를 고통에 빠뜨린 히로히토 일왕보다 독일의 히틀러를 더 기억할까? 여기엔 바람직하지 못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배워 온 세계 역사가 지나치게 유럽사 중심이었고 모든 문화가 유럽과 미국 위주로 흘러왔기 때문이다. 흔히 하는 말로 실제의 체험보다는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이다. 이의 부작용으로 한국 지식인 사회에 과도하게 뿌리박힌 게 서구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다. 또 중요한 하나는 우리 한국인들이 잘 모르고 있고 또 한국인으로서는 인정하기에 불편한 사실인데, 독일의 유럽 침략과 구한말 일본의 조선침략의 양상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유럽과 나치 파시스트들 간에는 유럽대륙 안방에서 그야말로 피 흘리는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일본은 러일전쟁, 청일 전쟁을 일으켰지만 정작 조일(朝日)전쟁이라는 명칭조차 없듯이 일본과 조선은 한반도 전체를 피로 물들이며 대규모로 서로 총을 맞대고 싸운 적이 없다. 그래서 나라가 합방되었다 해도 그 과정에서 정작 내 부모 형제 친구들이 일본인들에게 죽는 광경을 목격한 경험을 가진 조선인들은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나라를 빼앗긴 일이 조선의 소수 지배 엘리트들에게는 녹봉이라는 밥그릇과 외부 세력에 의해 양반지배층이라는 계급이 박탈당할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로 다가왔을지는 모르지만, 일반 기층 민중들에게 유럽의 나치같이 소위 말하는 '원쑤' 같은 감정을 갖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영화<놈.놈.놈>에서 송강호(윤태구 역)가 말한 대사는 이를 잘 드러낸다.
"하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양반 밑에 사나, 일본 놈 밑에 사나 그게 그거지 뭐"--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윤태구(송강호 분)의 명대사
이 대사에서 보듯 그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조선과 일본 서로 간에 총칼을 맞대고 대규모 전쟁을 하며 참혹하게 피를 흘린 일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친일 매국노나 스탈린이나 히틀러의 대학살을 증오하기보다, 만약에 조국이 무고하게 자신의 부모 형제를 죽인다면 남은 가족에게 조국이야말로 바로 원쑤다. 피는 물보다만 진한 게 아니라 민족이나 이념보다도 훨씬 진하다.
이런 인간의 속성을 이해하면 유럽인들을 대규모로 학살한 나치가 유럽인들에게는 치를 떨게 하는 원수겠지만 일본은 조선 민중들에게는 부모형제를 죽인 원수 같은 감정은 분명 아니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를 알면 왜 중국인들이 한국인들보다 반일감정이 더 심한가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만주사변에서 보듯이 일본은 실제로 중국과 피흘린 무력전쟁을 치뤘다. 전쟁이 아니라 조약의 형식으로 조선을 빼앗아간 과정과는 판이한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드골의 반민족행위자 처벌과 역사 거꾸로 보기
프랑스의 드골은 대독 반역자들을 무려 3만 명 이상 처형 또는 처벌했지만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친일파 척결을 방해하고 무산시켰음을 비난하고 있다.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 다만 그 당시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우리는 거꾸로 이승만이 친일파 척결을 무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민중의 저항을 받지 않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 초점을 맞추어 볼 필요가 있다.
비교할 대상으로는 바로 위에서 든 프랑스의 경우다. 프랑스의 드골이 대독 반역자들을 처단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가 아무리 민족 지도자로서의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고 전권을 장악했다 하더라도 프랑스 민중들의 저항을 받아 곧바로 정권을 내놓고 망명가야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프랑스 등 유럽인들에게는 나치는 절대로 용인할 수 없는 바로 원수 관념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세상 어느 나라의 국민들이라도 자기 자신의 원수들이자 악마 같은 존재들과 그에 부역해서 그들을 괴롭힌 자들을 처단해 주지 않는 정부를 지지해 줄 리는 없다. 그런데 조선인들에게 일본인들은 부모 형제를 죽이고 민족 문화유산을 파괴해 간 악마나 원수 같은 의미로 비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파리의 수많은 궁궐처럼 전쟁으로 파괴되지도 않았다. 조선의 경복궁 등의 궁궐과 4 대문도 파괴되지 않고 건재했고 오히려 일제에 의해 초현대식으로 세워진 중앙청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오랫동안 중앙 박물관으로 사용하다가 김영삼 정부 시절에 가서야 들어 허물어뜨렸을 정도다. 살아오면서 초가집이나 기와집만 보아 왔던 조선의 민중들의 눈에는 오히려 서울역이나 중앙청 같은 신식 건물이 들어서고 나룻배를 이용하던 강가에 다리가 건설되고 서당 대신 현대식 학교가 지어져 보통 교육의 시대로 바뀌는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필자가 욕을 먹을 각오를 하고 이를 논하는 건 사실을 논하자는 것이지 결코 일본의 침략행위를 두둔하고자 하는 게 아니니 오해하기 말기 바란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팽배한 자학사관에 새로운 종소리를 울리려는 의도이다. 문화대국으로서의 한민족의 발전과 번창을 누구보다도 바라는 필자의 염원이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의 깊이에서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을 만큼의 확신이 있다. 그렇다고 한국이 민족주의 일변도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왜냐 하면 지나친 민족주의는 바로 일본식의 침략을 정당화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민족주의는 김구가 주장했던 사해동포주의와 문화대국으로 번성해 가는 걸 사상(思想)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군은 유럽 이웃나라들을 침략한 후, 일본이 초창기 조선에 했던 식의 건설은커녕 파괴와 학살을 일삼았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물론 일본의 그것이 나중에 제대로 수탈하기 위함 임은 안다.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조선 민중들이 체험한 것이 무엇이었을까를 객관적으로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 선조들의 그 당시의 행동 양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파리와 런던 등 유럽의 대도시들은 2차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공장이나 건물 등 그간 이룩한 문명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린 유럽 대륙은 물자의 공급을 신대륙 국가인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게 바로 미국이 경쟁자도 없이 자유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해가 지지 않는 영국'의 패권을 상징하는 팍스 브리타니카에서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의 재편이라는 팍스 아메리카의 시작은 미국이 잘 나서라기보다는 바로 유럽 제국들이 2 차 대전으로 붕괴되어 버렸던 사실에서 출발함은 누구나 알 것이다.
유럽인들에게 파시스트는 불구대천의 원수개념
이런 파괴와 학살의 역사적 체험 때문에 유럽에서 상대방을 보고 파시스트라 칭하는 건 한국에서 친일반역자로 부르는 것보다 몇 배가 아닌 몇 만 배 즈음이나 더 심한 모독이 되는 것이다. 왜? 그들에게 나치 파시스트란 바로 원수나 악마에 준하는 사람을 의미하니까. 한국에서 진중권이 하루가 멀다 하고 파시스트라고 억지를 부려도 무사하고 심지어 그 짓으로 돈 까지 벌어먹고 있는 건 우리가 나치와 특별한 트라우마가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뉴스에 연쇄 살인범 유영철에게 두 형제를 잃은 분의 생활상이 기사에 뜬 적이 있다. 그 분은 현장검증 때 칼을 들고 유영철에게 직접 복수하려다 경찰의 제지로 실패하고 매일 술로 날을 지새운다. 하루에도 몇 번 씩 화가 치밀 때면 밥 그릇 등을 집어 던져 방바닥엔 온통 깨어진 사기나 유리 등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이것이 우리가 직접 체험하지 못한 관계로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이해조차 불가능한 바로 원수관념이다.
나라를 빼앗아 간 일본에 대한 감정보다 오히려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총칼을 맞대며 피의 잔혹상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아직도 빨갱이라면 치를 뜨는 건, 바로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다. 그 분들이 일본인보다 같은 민족인 북한 공산주의 일당을 더 증오하는 일을 두고 민족의식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치부하는 건 너무나 위선적이고 잔인한 시각에서 비롯된다. 적국의 인간보다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힌 동족에게 훨씬 더 증오감을 갖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에 불과하다. 제 3자가 이를 함부로 재단하는 건 차가운 허위의식일 뿐이다. 이를 알면 토벌당해 죽은 빨치산의 가족들이 한국 정부에 대한 감정이 일반 사람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를 것이라는 점도 충분히 짐작된다. 이를 모르면 80년대 광주 비극에 희생된 사람들의 가족ㆍ친지들이 가지고 있을 심정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민족화합을 위해서 이들이 가진 상처들도 우리 한국 사회에서 잘 보듬어 안아야 할 필요가 있다.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의식은 이렇게 피부로 체험한 것이 교과서에 기록된 몇 몇 글자들의 조합보다 훨씬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동족끼리 피를 흘린 6.25의 상흔이 조약의 형식으로 무혈 입성한 일본보다 훨씬 강한 트라우마를 남긴 건 당연한 일이다. 친일파에 분노하는 사람들보다 소위 빨갱이에 치를 떠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이유는 이를 모르고는 이해하기 힘들다. 물론 이 트라우마도 시간이 흐를수록 희석되리라는 건 확실하다.
친일파와 나치반역자의 차이점
한국인들에게 친일파라는 말은 몇몇 악질분자들을 제외하면 '나쁜 놈이거나 기회주의자' 같은 의미로 다가서겠지만 유럽인들에게 나치 파시스트란 그 정도의 의미를 넘어 그야말로 "치를 뜨는 원수"라는 뜻이다. 프랑스에서는 유겐트라는 조직이 만들어져서 히틀러를 비난하는 부모를 자식이 고발하는 일도 있었을 정도로 민족을 갈가리 찢어 놓은 정신적인 트라우마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래서 필자가 진중권이 만일 유럽에서 파시스트라는 말을 한국처럼 떠들고 다녔다간 얼마 안 있어 센느강, 라인강, 또는 템즈 강변 어딘가에 싸늘한 시체로 떠오를 거라고 한 것이다. 어느 누가 자신을 보고 악마나 원수라고 몰아붙이는 사람을 내버려 두겠는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모윤숙, 서정주 시인 같은 사람들을 두고 '찍어 죽일 원수 놈들' 같은 감정을 가졌던 조선인들이 몇몇이나 되었을까? 우리의 관념적인 상상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만일 한국인들이 친일반역자들에게 가진 감정이 유럽인들이 나치에 협력한 사람들에게 가졌을 증오와 분노의 1/10 만 되었어도 이들의 처벌을 무산시킨 이승만이 한국인들의 분노의 저항을 받아 실각하게 되었을 것은 능히 짐작 가능하다. 3.1 운동 등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강압적인 식민 치하에서도 대규모로 저항했던 한국인들이 같은 한국인이 세운 정부에도 격렬한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건 이들 친일 반역자들에 대한 증오 감정의 골이 그리 깊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국민감정에 있어 이보다 훨씬 덜 심각했던 선거 부정으로도 이승만을 권좌에서 몰아내 망명을 가게 만든 혁명적인 역사를 일구어 낸 자랑스러운 한국인들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3 만 명과 4776 명으로 보는 역사 거꾸로 보기
친일 인명사전을 직접 펼쳐 보니 민족사에 영원히 남겨야 할 이 중요한 책에 기록된 인사들이 4776 명이다. 프랑스의 3년 동안에 친 나치 활동을 해서 처벌을 받은 인사들 3 만 명에 비하면 턱없이 적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정희 같은 사람들도 등재시키기 위해 만주군 소좌 계급까지 확장했음을 생각할 때, 프랑스보다는 훨씬 광범위하고 느슨한 잣대를 기준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프랑스도 한국과 같은 잣대로 친 나치인사들을 규정하였다면 3 만 명이 아니라 30만 명도 넘겼을 것임은 능히 짐작 가능하다. 게다가 한국의 친일 인명사전은 세월이 상당히 흐른 후 학자들을 주축으로 연구하고 기록된 것이므로 당시의 권력관계 등에서도 자유로운 상황에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기록되어야 할 사람은 빠지지 않고 거의 다 기록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친일파로 등재된 사람들의 후손들이 소명작업이 꾸준히 이어질 것을 감안하면 이 숫자에서 줄어들면 줄어들지 더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 보면 프랑스식으로 처벌하고자 했더라도 3만 명이 아니라 그의 1/6인 5천명도 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적에게 빌붙은 반역자들의 숫자만 보면 프랑스보다 한국이 훨씬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에서 보는 팩트다. 즉 프랑스는 불과 3년 동안 3만 명이나 적국에 붙어 조국을 배반한 인사들이 있었지만, 한국은 36년이란 긴 지배를 당하는 동안에도 불과 4776 명밖에 없었다. 즉 이승만 정권 당시 최대한도로 처벌을 하고자 했더라도 프랑스의 3만 명에는 어림도 없는 숫자다.
처벌 숫자에만 초점을 맞춰 단순 비교해서 한국을 비하하는 데 이용해 온 건 올바른 역사인식이 아니다. 최대한으로 색출해 내도 5 천명도 안 되는 데 어떻게 3만 명씩이나 처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사람들의 주장대로라면 200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인도인들은 아예 그 민족의 씨를 말려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도는 단 한 명도 처벌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인도인들의 민족정기가 완전히 망가졌다고 평하는 기록을 본 적은 없다. 한국인들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학사관이 번성하게 된 원인은 주체성이 부족하고 올곧지 못한 한국 지식인들의 그릇된 인식에서 먼저 비롯되고 있다. 컵에 물이 반이 있을 때 '반 밖에 안 남았구나'의 시각과 '반이나 남았구나'의 시각에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다. 어느 쪽이 우리 민족의 번영에 도움이 될 것인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마이클 샌덜 교수가 말한 '정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프랑스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처럼 무자비하게 처형 일변도였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비씨 괴뢰 정권을 세워 프랑스 사람들을 갈가리 찢어 놓았던 우두머리 패텡 원수는 감형 받아 사형을 면하는 방식으로 드골 정부도 현실과 타협했다. 1차 대전 때의 전공을 높이 산 것이다. 그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지언정 6.25 때 육군참모총장으로 전공을 세웠던 백선엽 장군과 비슷한 케이스가 프랑스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사회공동체를 위한 역사적 타협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성 디자이너 샤넬은 독일 장교와 사랑에 빠져 나치를 위한 스파이 활동을 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샤넬 제국을 전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워 냈다. 3 년에 3만명, 36 년에 4776 명의 차이를 보면 오히려 한국인들이 얼마나 대단한 민족인가 하는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후손들에게 이를 제대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조선의 경우, 그만큼 민족을 배반한 사람이 적었고 이 사실은 그 만큼 민족정기가 면면히 이어져 왔다는 반증이 된다. 20 세 이전의 미성년자 시절에는 사실상 친일행위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들에게 일제 치하 36년은 57 살 까지를 의미하니 그 당시 평균 수명을 따지면 성년기의 전체다. 이들의 친일 행위는 프랑스의 친 나치 행위와는 달리, 대부분 같은 민족을 괴롭히기 보다는 직업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생활의 방편에서 되었을 가능성이 많았을 것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친일파 척결에 앞장섰던 열린 우리당의 김희선이나 신기남 의원의 부친 또한 일제헌병 오장으로 친일파였던 점은 이런 점을 잘 반영한다. 즉 그들에게는 충성하고 싶어도 충성할 국가가 한반도 내에는 없었다. 어찌보면 국가에 충성할 기회를 박탈당해 버렸다고 볼 수 있다. 피정복민에게는 반란이 두려워 군대 입대도 거부하는 게 정복 국가의 생리이기에 군인으로 출세하고픈 욕망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일본군에 입대하는 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이렇기에 그때의 군인들은 대부분 한반도가 아닌 만주에 주둔했던 일본군 즉 일본의 입장에서 반란의 위험이 적었던 만주군에 입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바로 박정희, 장준하, 백선엽 등이었다. 추앙받는 장준하조차도 처음부터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만주군에 입대했을까? 정상적인 사고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건 아니었을 거라고 판단하리라 본다.
"내가 하기 힘든 일을 한 사람들을 칭찬하고 존경하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나도 그 입장에 있었다면 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을 두고 과도한 비난을 일삼는 짓은 위선적이거나 자신의 주체할 수없는 잔인한 성격을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김휘영
필자의 관점은 마이클 샌덜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란 책에도 잘 드러난다. 정의를 논하기 위해 든 유명한 예(例)들인 '철로 사고'나 '망망대해에서 조난을 당한 사람들의 식인행위' 등에서 마이클 샌덜은 쉼없이 "당신이 바로 저 입장에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묻고 있지 그 상황과 동 떨어진, 한가한 제 3자의 입장에서 이상적(理想的)이고 절대적인 기준에서 논하라는 부분은 한 군데도 없다. 물론 슈퍼맨처럼 철도에서 일하는 인부도 살리고 기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도 다 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인간에게 그게 가능한 일인가? 나도 불가능한데 타인에게 그렇게 하기를 요구하는 게 어떻게 정의 관념에게 합당한가? 그건 잔인성이나 위선적인 자기 기만일 뿐이다. 필자는 이 책이 특히 한국의 위선적인 좌파 인사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이상적이고 절대적인 가치에 의해서 인간을 평가하는 일은 잔인하고 위선적인 자기 기만일뿐이다. 하다 못해 살인사건을 재판할 때도 정상참작이라는 게 작용하여 그 형량이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에 나온 '조난당한 사람들의 식인행위'가 무죄선고를 받은 것도 그런 판단이야말로 진정으로 정의의 관념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상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 당시의 상황를 기준으로 판단해야만 조금이라도 정의 관념에 더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한 명이라도 많아질수록 한국 사회가 진일보할 것으로 본다.
사실 친일파를 제대로 척결하지 않았기에 민족정기가 죽었다는 시각 일변도는 잘못된 결론에 이르며 한국 사회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어찌 보면 이는 일본이 역사적으로 한민족에게 던져 놓고 간 치명적인 덫에 영원히 옭매이는 일임에 분명하다. 일본이 한국인에게 남긴 식민사관 중에 숙명론적 정체성 이론이 나온다. 친일파 척결을 못한 일은 흘러간 역사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기에 이에 너무 집착하여 한국 근대사 전체를 부인하는 일은 빈대 잡자고 초가 산간 다 태우는 일처럼 자학의 역사관에 불과하다.
일본이 역사 교과서를 왜곡하고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역사를 왜곡까지 하고 있는 이유는 그게 그들에게 이롭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민족도 과거 역사를 자기 민족에게 불리하게 해석하고서는 그걸 또 교육현장에서 가르치려 시도하는 경우는 없다. 자기 민족을 위해서는 없는 역사라도 만들고, 사소한 역사라도 부풀리고 미화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한국도 우리 역사를 좀 더 주체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역사를 왜곡하자는 게 결코 아니다. 어차피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을 가지고 과도하게 한탄하며 자학에 빠져 본 들 그걸 뒤집을 수도 없기에 하는 말이다. 따라서 필자처럼 해석이라도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는 걸 시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친일인명사전처럼 기록은 추호라도 어긋남이 없이 정확하게 해서 후손들에게 남겨야 한다. 이건 역사에서 기본적인 사항에 속한다. 또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비록 외국에 있다고 할지라도 한 분이라도 더 찾아내어 민족의 이름으로 물질적 정신적인 보상을 해 주어야 하고 친일 반역자들은 한 명이라도 더 색출해 내어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해서 역사적인 기록으로 생생하게 남겨야 한다. 필자가 대학시절 종이에 무의식적으로 쓰던 용어가 바로 민족(民族)이라는 두 글자였다. 우리 민족을 생각하면 두 눈에 눈물이 글썽해지던 민족주의자였음은 필자가 서울대 기숙사 사생회장을 할 때, 기숙사 신문 둥誌 창간호에 쓴 시(詩) '백두에 오르리!'를 보면 잘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는 현재 '김휘영의 문화평론' 까페 대문에 올려져 있다)
훈족과 몽골족은 독일 등의 게르만 족에게는 역사적으로 철천지원수 같은 관계다. 게르만족이 유럽으로 쫓겨 간 게 바로 이들의 침략 때문이며 심지어 유럽인들 중에서 유독 독일 여성들이 못생긴 이유를 둥글넓적한 몽골족에게 게르만 족이 유린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종종 듣는다. 게르만 족이나 마자르 족 중에 태어날 때 엉덩이에 푸른 점, 즉 몽골반점이 있는 사람들도 많다.북쪽에서 악마들이 내려온다는 서양 할로윈 축제의 기원도 바로 이들의 악마 같은 살육전에서 비롯되었다는 학설이 대세일 정도다. 즉 독일인들에게 훈족의 아틸다와 몽골족의 징기스칸은 더욱 더 증오의 대상이어야 마땅하다.
독일의 징기스칸과 한국의 징기스칸
그런데 바로 그 독일에서 이 몽골족의 영웅인 징기스칸을 흠모해서 만들었다는 혼성 댄스 그룹이 바로 징기스칸이다. 이건 한국에서 욱일승천기나 유럽에서 네오나치즘 이상으로 증오의 대상이기에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스타 조승우의 친아버지 조경수가 "하늘의 별처럼 모두가 사랑했네...내 마음 속의 영웅이었네!" 라는 한국어 가사로 부른 징기스칸에도 사회적으로 특별한 반감이 없이 대대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몽고반점의 유래가 몽골족의 침략 때문이고 한국인의 지독한 욕설 중에 하나인 화냥년 또한 몽고족 즉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 갔다 돌아온 고려 여인네들을 환향녀라고 불렀던 고려시대의 비참한 역사에서 기인함을 알면 이 노래 징기스칸의 인기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가 독일에서도 한국에서도 또 세계적으로도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일까? 이는 문화(文化)가 시간 및 공간과 밀접한 함수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징기스칸은 현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노래를 역사적인 의미에서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경쾌하고 신나는 댄스 음악으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문화적 대한 감응도에서 시간이 중요할까 공간이 중요할까? 둘 다 중요하지만 굳이 따지라면 공간이 훨씬 중요한 변수다. 바로 몇 년 전에 코소보에서 인종청소라는 대학살이 일어나고 중국에 의한 동티모르 독립운동에 대한 잔혹한 진압이 일어나도 우리가 무감각한 이유는 그것이 시간상으로 아무리 가깝다 한들, 우리 의식을 자극하기에는 공간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설사 이런 일이 현재 자행되고 있더라도 우리에게 트라우마까지 형성하지는 않는다.
자 이제 한국에서 일어난 임재범의 나치 퍼포먼스를 보자. 나치는 동티모르 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있고 또 시간상으로도 무려 반세기나 더 흘렀다. 이를 감안하면 한국에서 아무런 논란도 일어나지 않아야 오히려 정상이다. 그런데 일어났다. 그러므로 임재범의 나치 퍼포먼스보다는 '이에 이상한 논란이 일어난 사실' 자체에 오히려 제대로 된 문화적 해석이 따라야만 한다. 사실 이건 한국의 지식인 사회를 진단하는 데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서구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주의
즉 한국 사회에 맹목적인 종교숭배 만큼이나 서구문화사대주의가 팽배해 있다는 증거다. 독일에서 그들의 원수인 징기스칸을 추앙하는 노래를 불러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한국에서 원수관계도 아닌 나치 복장 그것도 나치를 경멸하는 퍼포먼스를 했는데도 왜 문제가 되어야 하나? 독일인과 유럽인들이 항의를 한다면 그나마 이해라도 해 볼 건더기라도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 왜 난리인가? 이는 지적 능력이 부족한 지식인들의 허위의식과 맹목적인 서구문화 사대주의가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들이 문화의 참 의미를 조금이라도 깊게 생각할 수 있었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는 못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진중권의 경우는 디워 토론 때에 전 국민이 다 보는 TV에서 조차도 "프랑스도 독일도 못하는 걸 한국이 어떻게 하느냐?"라는 발언을 해서 그의 의식세계가 얼마나 서구 사대주의에 매몰 되어 있는 지를 여실히 증명한 바 있다. 그런 비주체적이고 유아적인 상태를 못 벗어난 상태이기에, 아무 문제될 것도 없는 임재범의 나치퍼포먼스에 진중권이 다시 한번 그의 사대주의 근성을 드러냈을 뿐이다. 프랑스와 독일이 못했다고 해서 한국이 못하라는 법이 있나? 또 현실상으로도 아바타와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나라도 IT 강국이자 인터넷 3D 게임 강국인 한국이 프랑스와 독일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는 점에서 진중권은 서구 사대주의 노예가 되어 현실 인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현재 4D 영화관은 한국이 세계 1위의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진중권 같이 형편없는 수준의 사람이 한국 사회에서 버젓이 평론가로 대접받고 있는 사실을 안다면 서구인들은 또 얼마나 한국을 조롱할 것인가를 상상해 보라!
문화 상대주의와 문화 사대주의
필자가 임재범의 나치 퍼포먼스를 두둔하기 위해서 갑자기 이 서구문화사대주의를 거론하는 것이 아님은 필자가 예전에 쓴 칼럼 "'노블레스 오블리제, 노블레스 오블리주 ', 그 오해와 편견(2005. 01.28)"과 "일본 엔카, 한국 트로트와 나폴리 민요 :[무위의 문화산책] 세계시장 공략위해 우리 문화에 대한 자신감 길러야 (2005.10.17. 대자보)"라는 칼럼을 보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노블레스 오블리제, 노블레스 오블리주 ', 그 오해와 편견' 칼럼은 필자의 블로거 대문에 있으니 확인하기 바란다. 한국 문화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서는 일독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 칼럼에서 홍세화가 칭찬했던 프랑스의 똘레랑스조차 서구문화사대주의에서 온 피상적인 인식으로 진단했다. 프랑스 이민자들의 연이은 데모나 최근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이자 이민족들의 이상향이라는 노르웨이의 학살 사태를 보면 필자의 이 인식이 맞았다는 걸 증명한다. 서양인들이라고 해서 한국인들보다 특별히 우월한 게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은 거의 비슷하다는 문화상대주의적인 인식에서 온 필자의 사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기껏 'o' 하나 차이에 불과하지만 문화상대주의와 문화 사대주의는 그 철학에 있어 하늘과 땅 만큼의 간격이 있다. 문화사대주의는 자국인들을 주눅들게 하고 자국의 문화를 위축시키지만 문화상대주의는 서양 문화에 대한 열등감을 벗어 던지고 우리 문화에 당당한 자세를 갖게 하여 이를 활짝 꽃피우게 하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급속히 다문화사회로 이행함으로써 발생할지도 모르는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데도 문화상대주의가 매우 유효하다.
문화 비평은 아무나 하나? : 한국 지식인들은 허위의식부터 벗어 던져야
임재범의 나치 퍼포먼스를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TV리포트 연예퍼즐의 윤상길님이나 경희대 이택광 교수는 문화가 무엇인지를 좀 제대로 파악하고 어쭙잖은 인식과 분석능력으로 함부로 나서지 말고 본업에나 충실해 주시기 바란다. 진중권씨야 '무식하고 막돼먹은 궤변론자'로 워낙 소문나 있기에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문화평론은 아무나 시도할 수 있겠지만 누구나 '제대로' 해낼 수 있는 분야는 절대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만 하면 되는 정치나 시사평론보다는 문화평론은 기본적으로 축적된 자료도 상당히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이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자료에 대한 올바른 분석능력 즉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적능력(IQ)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지젝이니 라캉이니 벤야민을 들먹일 수 있다고 해서 문화평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건 절대 아니다. 타고난 분석능력, 즉 지적능력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그런 건 뿌리없고 쓰잘 데 없는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5천년이 넘는 한국인의 문화를 서양의 이론 잣대로 분석하고자 하는 일 자체가 서구문화 사대주의다. 이는 서양의 권위에 기대어 주체적인 사유나 고민도 없이 너무 쉽게 학자로 행세해 보려는 일종의 사기짓이다. 아래의 새무얼 헌팅턴의 경우에서 보듯, 수준높고 제대로 된 문화평론은 세계적으로 최상위권의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분야다. 특히 한윤형, 우석훈과 더불어 진중권과 한 패거리로 세간에 알려져 있는 경희대 이택광 교수의 분석은 더 어이가 없다. 그는 문화를 제대로 해석할 능력도 못되면서 진중권의 황당한 행위를 두둔하는 데 거의 전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임재범이 애국가를 부른 행위까지 말도 안되는 파시즘 혐의를 두어야 한다면 세상 모든 민족이 파시즘에 물들었다고 평해야만 한다. 기껏 패거리를 두둔하기 위해서 잘 모르면서 전문가들이 논해야 하는 일에 끼여드는 일은 지식인으로서의 양심까지 의심케 하는 일이다. 한국 사회에 이런 황당한 지식인이 있을수록 <진중권 현상>을 타파해서 한국 사회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일은 드뎌질 수 밖에 없다.
진중권이 돈벌이용으로 만든 유령인 한국의 파시즘
먼저 한국에 파시스트가 어디 있는가? 진중권이 과연 파시스트가 뭔지나 알고 헛소리를 하고 있는가? 디워 논란 때도 진중권이 말하는 소위 디워 광팬(?)들에 의해서 길가에서 두들겨 맞거나 밤길에 등에 칼을 맞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한민족의 오천년 역사상 단 한번이라도 자살 폭탄테러가 일어 났던가? 최근 노르웨이 광신도처럼 무려 89명이나 학살하는 경우가 있었던가? 한국인은 외국인들에게 너무나 친절하고 오히려 줏대없이 보이는 과잉친절로 화제가 되고 있는 나라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페일린(Sarah Palin) 전 알래스카 주지사의 과녁 지도와 ‘후퇴하지 말고 재장전하라(Don't Retreat, Reload!)‘라는 다소 선동적인 발언이 빌미가 되어 무려 19 명이 총상을 입고 이 중 6 명이 사망했다. 한국에는 "돌 머리들, 방방 뛰는 원숭이" 등 이런 과격한 인신 모독적 발언까지 일삼은 진중권이 돌멩이 하나 맞지 않았다. 서구사회, 즉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라면 진중권이 숨쉬고 다니기도 힘들 일이다. 한국에서 파시스트는 진중권의 과대망상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또 진중권의 파시스트 타령은 그의 돈벌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도 알 사람은 다 안다. 그는 있지도 않은 유령을 만들어 놓고 "유령이 온다"! 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열심히 돈을 벌어 챙기고 있는 중이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 나온 억지와 과장, 그리고 왜곡 날조
며칠 전 도서관에서 진중권의 초창기 서적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보고 깜짝 놀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억지와 과장, 그리고 욕설의 범벅이었다. 그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황당한 것임은 책에 등장하는 객관적 숫자란 거의 전부가 '페이지 숫자' 뿐이라는 데서 확인했고 얼마나 과장이 심했느냐는 온 문장에서 과도하게 넘쳐나는 쌍 따옴표(" ")에서도 명백하게 확인되었다. 타인의 말을 인용하는 인용부호로서의 따옴표가 아니라, 이를테면 인문과학을 "인문과학"으로 사회과학을 "사회과학"으로 쌍 따옴표로 강조하고 있듯, 온갖 보통 명사에 조차도 그의 과장과 억지가 들어 있음으로도 간단히 확인된다. 온통 쓰레기가 썩는 냄새가 풍겨나는 이 책을 다 읽는 데 1 편은 14 분 정도, 2편은 약 7분 정도 걸렸다. 말꼬리 잡기에서 오는 욕설 이외에는 아무 내용이 없으니 이 짧은 시간조차도 아까웠다. 얼마나 억지가 심하냐 하면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두고 “핵전쟁을 하자고 주장하는 소설인데 한국인들 사이에서 초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 한국인들은 미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이런 식이다. 필자도 이 책을 읽었지만 이 책 어디에도 핵전쟁을 하자는 대목은 없었다. 그것도 이휘소 박사에 대한 암살 의혹을 중심으로 한 반미의식이 한껏 드러나는 소설이었다. 어디까지나 방어적 차원에서의 자주국방의 수단으로 핵을 말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게 진중권의 뇌 회로 속을 한 바퀴 돌고 나면 "핵전쟁을 하자!"라는 선동구호로 왜곡된다. 이는 임재범의 나치 퍼포먼스를 보고 네오나치즘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린 것과 동일한 궤도에 있다.
세계적으로 친절하고 유순한 민족으로 소문나 있고 오히려 외국인들에 대한 ‘과잉 친절’이 논란이 되고 있을 정도인 한국인들에게 파시스트라니? 도대체 진중권은 한국 사회에서 살아 오지 않았나? 짧은 가죽 상의에 장갑, 그리고 머리에 바리깡으로 고속도로를 뚫어놓은 스킨헤드족처럼 직접 행동에 나서 외국인들에게 폭력을 행사 하는 무리가 스킨헤드족이다. 혹시 독일에서 놀 때, 덩치 큰 독일의 스킨헤드족에게 체격도 왜소한 진중권이 집단린치를 당한 후 아직도 그 트라우마에서 못 벗어 난 것이 아닌지 진중권에게 직접 물어 보고 싶다. 필자는 스킨헤드 스타일을 모터사이클 잡지에서 나온 미국의 오토바이족에게서 단 한번 본 적은 있지만, 한국에서는 현실 세계에서는 물론 잡지 사진으로도 본 적이 없다. 이런데 무슨 파시스트? 사실 임재범이 나치 복을 입고 ‘노 히틀러, 히틀러 이스 데드, 하일 프리덤‘ 이라고 구호를 외친 행동은 네오나치 족의 눈에 띄면 환호성은커녕 오히려 몰매를 맞을 짓임에 분명했다. 나치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한국에서 이런 포퍼먼스에 시끄러운 논란이 일어난 현상은 길을 가다가 남의 초상집에 들어가서 통곡을 하는 일에 진배없다. 그때 노란 피부를 한 사람이 도저히 이해못할 행동을 하는 걸 보고 상주(喪主)가 묻는다.
필자는 왜 우리 한국인이 서양인의 잣대로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일을 평가하고 재단해야 하는 지 묻고 싶다. 독일 사람들이 징기스칸을 하나의 문화코드로 즐기듯이 한국인은 나치 문화코드를 즐기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을까? 한상길의 지적대로 6.25가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있는 한국인이 50% 도 넘는데 굳이 우리가 나치에 대해서 특별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할 의무라도 있냐는 말이다. 왜 우리 한국인들이 서양인들이 가진 역사의식의 논리에 놀아나야 한다는 말인가? 임재범이 욱일승천기로 천황폐화 만세를 외친 것도 아니고 한국 정치 문화에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는 박정희 복장으로 퍼포먼스를 한 것도 아닌데 무슨 이유로 논란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문화의 힘
'문명의 충돌'이라는 책으로 전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던 사무엘 헌팅턴(Samuel P. Hungtington)은 로렌스 해리슨과 함께 발표한 '문화가 중요하다(Culture Matters, 이종인 옮김,김영사)'란 책의 서문에서 국가경쟁력으로서의 문화의 중요성을 언급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90년대 초 나는 가나와 한국의 1960년대 초반 경제자료들을 검토하게 되었는데 당시 이 두 나라의 경제 사정이 아주 비슷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1인당 GNP 수준도 비슷했고 두 나라 다 제대로 만들어 내는 2차 제품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양국 다 상당한 경제 원조를 받고 있었다. 30년 뒤 한국은 세계 14위의 경제규모를 가진 산업 강국으로 발전했고 국민소득은 그리스의 수준에 육박했다. 더욱이 한국은 민주제도를 착실히 실천하며 다져 나가고 있는 중이다. 반면 이런 비약적인 발전이 가나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나의 1인당 GNP는 한국의 15분의 1 수준이다. 이런 엄청난 발전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내가 볼 때는 '문화(文化)'가 결정적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문화가 중요하다. p8 - p9) - 사무엘 헌팅턴
또한 다음의 명언은 문화(文化)의 힘을 제대로 역설해 주는 말이다.
"사회의 성공을 결정짓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문화이다" - 패트릭 모이니헌(Daniel Patrick Moynihan)
필자도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한국같이 정치에 미쳐서 너무나 중요한 문화를 고작 정치의 수단으로 삼거나 하위 범주에 넣으며 질식시키고 있는 사회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이다.
한민족이 수준 높은 문화를 창달할 수 있으려면 일단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어야만 가능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밑도 끝도 없는 서구문화에 대한 사대주의는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데도, 또 발전을 시키는 데도 도움은커녕 방해만 된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 경쟁력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고 있는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국 지식인들의 대대적인 각성이 매우 중요하다 할 것이다 / 김휘영 문화평론가 (wepa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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